Maya RAW novel - Chapter 185
185
사내가 뭐라고 하든 말든 흑조편복은 할 말을 했다.
“나 역시 이 일에 자의로 뛰어든 건 아니라는 것. 위안 삼아 듣고 가. 죽이고자 하는 자에게 구걸하여 목숨 세 개를 얻었지. 그 중 하나는 이미 썼고. 아마도 나 역시 죽음을 면치 못할 터. 우린 싫든 좋든 곧 만날 거야.”
“꺼져.”
“나무아미타불!”
흑조편복은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젊은 날의 들끓는 혈기가 불러온 실수, 실수가 가져온 생명.
한 목숨이나마 길게 이어가기를 바랐건만, 이런 자리로 불러들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자신의 손으로 굉천뢰를 쥐어주게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랴.
‘바보같이…… 지둔공은 왜 배워가지고. 잘 가라, 아이야.’
손에 쥔 염주를 으스러져라 움켜잡았다.
2
“이거 꼭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인걸.”
시마가 코를 벌름거려 공기 내음을 맡으며 말했다.
군웅들이 호시탐탐 기회만 엿본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무인이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
왜 공격하는가?
마인이기 때문이다. 독조림과 상조문을 멸문시켰기 때문이다. 멸신구관의 기연이 마야에게 이어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소한 원한들까지 합친다면 공격할 명분은 수만 가지로 늘어난다.
이유 따위는 헤아릴 필요도 없다.
마인이라는 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편리한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무조건, 기분이 나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가지고도 공격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공격해 오면 받아치고, 물러서면 밀린 잠을 청하는 것이 마인들의 삶이었다.
지금은 물러섰다. 그러니 쉰다.
“잠이나 자두슈. 곧 쉬고 싶어도 쉴 수 없게 될 테니.”
혈유가 몸을 모로 뉘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혈유라고 잠이 올 리 없다. 군웅들이 바보들인가. 안 될 것을 뻔히 알면서 정면 공격을 또 감행하겠는가.
다음 공격은 모르긴 해도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디에 어떤 함정을 설치했을까?
어떤 함정이든 헤쳐 나갈 자신은 있지만 불안한 마음이 소록소록 일어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앉아서, 누워서 잡담도 하고 휴식도 취하며 기다렸다.
“마릉 초원은 사지(死地)입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주림이 정찰 결과를 보고했다.
“기분이 아주 안 좋았어요. 발을 들여놓기도 싫은…… 꼭 귀신이 뒷골을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더군요. 뭔지는 모르지만 피해가 상당할 겁니다.”
황전륜도 주림과 같은 보고를 했다.
두 사람은 사방을 헤집고 다녔지만 딱 한 곳, 마릉 초원만을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한 명은 돌아가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은 발을 들여놓기도 싫단다.
천멸도주는 수하들의 말을 십분 믿었다.
“무슨 농간인지는 파악 못했어?”
“풋!”
주림은 웃음부터 흘리며 말했다.
“사방이 꽉 막힌 분지더군요. 안에는 갈대가 무성하여 풍광 하나는 볼 만했습니다.”
“화공?”
“후후! 그뿐만이 아녜요. 후각을 비트는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서 화약까지 매설해 놓은 듯싶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야? 똑바로 말해봐!”
천멸도주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주림 정도 되는 자가 정찰까지 다녀와 놓고선 추측으로 말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화약을 매설한 건 틀림없는데, 찾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말해야겠군요.”
“찾을…… 수가 없었다?”
“화약에 관한한 최고를 자부하는 놈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황전륜이 주림을 도와주었다.
“너도 짐작뿐이야?”
천멸도주는 주림과 황전륜, 두 사람이 모두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들 정도라면 어디에 어떤 화약이 어느 정도나 매설되어 있는지 파악했어야 한다. 그리고 조롱이라도 하려는 듯 화약 한두 개쯤은 캐내서 가지고 왔어야 한다.
“면목없습니다.”
황전륜이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천멸도주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림과 황전륜이 찾아내지 못할 정도라면 상대는 정말 중원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화약 전문가다.
‘득보다 실이 많아.’
천멸도주는 벌떡 일어섰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뭐라고 하지?”
마야는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석양빛이 마야를 휘감았다. 붉은 노을이 옷섶을 헤집고 들어가 살에 묻혔다.
황홀하다. 부처님에게는 후광(後光)이 어렸다고 하는데, 마야는 전신으로 빛을 발산하는 것 같다.
“이란격석(以卵擊石).”
천멸도주는 정겨움을 담뿍 담아 쳐다보며 대답했다.
“이란격석이 나쁜 건가?”
“나쁘지.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거니까. 가만……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설마 마릉 초원을 가로지르겠다는 소리야?”
“…….”
마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뜻을 밝혔으니 할 말이 없다는 듯.
“지금 방금 말했잖아! 마릉 초원에는…….”
“염추.”
천멸도주는 말을 멈췄다.
마야가 부른다. 확고한 의지를 담고 이름을 부른다. 이제야 알겠다. 어떤 말로도 그의 뜻을 꺾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들은 마릉 초원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땅을 파야 기둥을 심을 수 있잖아. 우린 집을 지어야 해. 그러자면 기둥부터 심어야지. 주춧돌. 천 년 만 년 이어갈 주춧돌부터 박아야 되는 거야.”
마야의 곁에는 여인들밖에 없다.
다담선자와 절혼마녀는 왼팔, 오른팔이 되어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는다. 금연화와 일령은 친자매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마야 곁에 머문다. 그리고 가끔 천멸도주가 다가와 정황을 말해준다.
다른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마야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흩어져서 만일에 대비하고 있다. 천멸도 살수들을 뚫고 들어오는 검이 없다고 어떻게 자신하랴.
다섯 여인은 일순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야의 말뜻이 무엇이란 말인가. 마릉 초원을 통과하는 것과 집 짓는 일이 무슨 상관이며, 초원을 통과하는 게 어떻게 주춧돌을 놓는 것과 같단 말인가.
마야는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고 묵상에 잠겨들었다.
다섯 여인도 마야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녀들도 무인이다. 상당한 무공을 지녔기에 타인의 상황도 더욱 깊이 파악할 수 있다.
마야는 지금 생사고비나 다름없는 위태로움 앞에 서 있다. 실제로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지만 득공(得功)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으니 생사고비나 진배없다.
무인이라면, 상승고수라면 비기를 얻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심마(心魔)와의 싸움이라고나 할까?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 한 묵상 중인 마야를 깨워서는 안 된다.
마야는 묵상을 거듭할수록 강해진다.
딱히 어떤 점이 강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에 비해서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느낌만은 확실하다.
무공도 아니면서 절정고수조차 쉽게 다가서지 못하게 만드는 특이한 능력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묵상을 거듭할수록 점점 발전한다.
다섯 여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야는 마야만의 세상을 원해.”
한참 만에, 생각에 잠긴 지 근 한 시진이 흐른 후 금연화의 입에서 청량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다른 여인들의 눈길이 일제히 금연화에게 향해졌다. 하나 금연화는 그녀들을 쳐다보지 않고 먼 허공에 눈길을 준 채 망연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명인이 문파를 세우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그래서 문파를 널리 알리고자 여러 수단을 강구해. 가장 쉬운 방법은 웬만큼 이름 난 마인이나 산적을 때려잡는 거야. 그럼 최소한 한 지역에서는 입지를 굳힐 수 있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했다.
금연화의 말을 듣는 사람은 네 여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인들도 귀를 쫑긋 세우며 관심있게 들었다.
함정이 확실한, 그것도 대단히 위험하다는 곳을 정면 돌파하려는 이유가 뭔가?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는 것이 좋지 않은가.
금연화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야는 한 지역으로 만족하지 못한 거야. 장강을 중심으로 이북은 북검문이, 이남은 남도문이. 마야는 북검문이나 남도문 같은…… 세상을 절반쯤 차지하는 큰 세상을 원해.”
들을수록 아리송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오직 금연화만이 정통 무가 출신이다.
자하부는 북검문의 위세에 눌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지만 북검문의 일갈에 동요하지 않는 몇 안 되는 강골 문파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금연화처럼 세력과 세력이 충돌하는 데서 일어나는 갈등과 위험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마야가 감수하고자 하는 위험 정도를 가늠했고, 역으로 추산해서 마야가 추구하는 세상을 그려냈다.
“우린…… 마릉 초원에서 군웅들을 혁파해야 돼. 함정이 있어도 뚫고 나가야 돼. 겨우 마흔다섯 명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삼천 군웅을 물리쳤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도록 확실히 부숴야 돼.”
“그래서 주춧돌 운운한 거예요? 그렇구나. 마릉 초원의 싸움이 마야께서 세상에 공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첫 싸움이 될 테니.”
“아니. 싸움은 이미 시작됐어.”
“……?”
“군웅들이 달려들었을 때, 그때 마야는 싸움을 시작한 거야. 마릉 초원 싸움은 여기 모인 군웅들과…… 최종 싸움이 될 거야. 우리가 죽든 군웅들이 죽든 결판이 나겠지. 이겨내지 못하면 몰살, 이겨내면 마야의 세상. 그런 거야. 그런 싸움이 되는 거야.”
금연화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마도의 세상이 아니었다. 당연히 마야의 세상도 아니었다.
혈귀대가 몰살당했고, 그녀의 정인이었던 혈귀대주도 죽었다.
음모란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른다. 마야는 음모가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정인을 죽인 자들을 모두 죽일 수 있다면 누구 손에 죽는다 해도 억울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단문협 싸움에 가담했던 자들 중 상조문과 독조림은 처단했다.
남은 문파는 철사문, 그리고 남은 자는 궁왕 강창도.
마야는 이들을 처단해 줄 것이다.
그것뿐이다. 그것만 이루면 된다. 혈귀대주가 죽는 순간, 그들을 죽이는 것이 살아 있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되어버렸다.
마인의 세상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마야가 가고자 하니 따라가야 한다.
‘풋! 내가 무슨 생각을…….’
금연화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을 아직도 정도문파의 여식쯤으로 생각하는 건가? 천만에! 자하부를 떠나 마야의 손을 잡는 순간, 그녀는 마인이 되어버린 것을. 자하부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는데,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금연화는 쌍검을 꺼내 들었다.
소혼검(消魂劍)과 굉멸검(宏滅劍).
이 검 역시 마야가 마련해 준 것이다.
길이 일 척 정도 되는 짧은 장검이 소혼검이다. 북해산 한철로 주조되어 음한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삼척장검 굉멸검은 두께가 일반 청강장검보다 배는 두껍다.
불길에 천 번 이상 단련했다고 했나?
두 자루의 장검은 자하쌍구검, 백형검법을 펼치기에 아주 이상적인 검이다.
이 검들은 우습게도 그녀가 소지했던 검보다 훨씬 낫다. 자하부에서 자하쌍구검을 위해 특별히 제련한 검들인데, 마야가 내민 검을 보니 장난감을 휘둘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야는 신(神)이다.
그가 하는 말은 언제나 옳았다. 그가 내린 판단은 마치 미래를 보고 예견한 것처럼 정확했다.
그는 세상의 중심인가!
세상은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는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백형검법이 도도하게 풀려 나왔다.
“쟤 왜 저래?”
천멸도주가 금연화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마인이 되려는 거지.”
다담선자가 금연화를 애처로이 바라보았다.
“흥! 지금까지는 아니었고?”
“그러지 마. 우리와 같이 있기는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을 거야. 휴우! 사람인 이상 없을 수가 없지. 한데 이제는 알아버리고 말았잖아. 정말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 영원히…… 마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거.”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가서 안아주기라도 해?”
“가만히만 있어. 그럼 돼. 스스로 이겨낼 거니까.”
“이겨내는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잘하면 마릉 초원에서 여살성이 한 명 탄생하겠어. 저 검기(劍氣) 좀 봐. 활(活)을 철저히 죽이고 오직 살(殺)만 채웠어.”
“휴우!”
다담선자는 한숨만 내쉬었다.
“야! 너도 그러냐?”
천멸도주가 느닷없이 일령에게 화살을 돌렸다.
일령도 자하부 출신이지 않은가. 금연화와 신분은 달랐지만 정도인이라는 자부심은 있었지 않은가.
일령은 활짝 웃으며 즉시 말했다.
“전 아녜요. 아닐 수밖에 없잖아요.”
일령의 눈길이 마야에게로 향했다.
“이게 이젠 완전히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네. 아직 멀었어, 이것아. 가슴이나 더 키워놔.”
“어멋! 어떻게 그런 말을!”
일령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나 천멸도주의 짙은 농담이 싫지는 않다는 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