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88
188
마야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왕벌이라는 관문을 뚫어야 한다. 그다음이 천멸도 살수들의 검림(劍林)이며, 세 번째로 호채마들의 연수합격진을 뚫어야 한다.
청옥고검이 판단하기에 그만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무신밖에 없었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삼천 군웅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마야에게 접근할 수 없으며, 좋은 쪽으로 해석하면 누가 먼저 마야를 집어가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마야를 둘러싼 외벽은 마릉 초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무너지리라.
그때 단 한 번 기회가 찾아온다. 그 순간을 놓치면 삼양신검이나 무음살도 같은 자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만다.
조금 위험하지만 왕벌 근처에 머물면서 마야를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시…… 날이 밝는데 꼼짝도 하지 않다니. 오늘은 죽치고 있을 요량인가? 아냐, 움직일 거야. 왕벌이 있고, 천멸도 살수들이 있으니 겁나는 게 없겠지. 반드시 움직일 거야.’
청옥고검의 예상은 맞았다.
마야가 일어선다. 다른 마인들도 일어선다.
‘드디어!’
오늘이 마지막 기회다, 마야를 잡느냐 못 잡느냐 하는. 오늘이 지나면 마야는 죽고 없거나 다른 자에게 붙잡혀 있을 게다.
청옥고검도 이동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그는 꼼짝하지 못했다.
“이런 제길!”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소리다.
웨에엥! 웨엥! 웨에에엥!
언제 날아왔는지 왕벌 몇 마리가 주위를 맴돌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갔었나? 아니다. 왕벌이 어떤 놈인지 아는데 벌 떼 속으로 기어드는 미친놈이 있을까. 왕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는데.
몇 가지 생각이 후딱 스쳐 갔다.
첫 번째는 검을 뽑아 왕벌을 베어내는 것이다. 크기가 손가락 굵기 정도 되니 마음만 먹으면 눈감고도 베어낼 수 있다.
이놈들을 베어냈을 때, 다른 놈들이 달려들지 않을까? 왕벌에게도 의리란 것이 있을까? 복수심이나 증오 같은 게 있을 리 없겠지?
그런 건 없어도 어쩔 수 없이 표출시켜야 하는 검풍(劍風)과 예기(銳氣)가 왕벌 떼를 깨울 것 같았다.
그냥 도주하면 어떨까?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듯 신법을 펼쳐 냅다 뛰어가면.
그것 역시 시도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왕벌의 날갯짓을 당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주위에 있는 놈들은 떼어낸다 해도 다른 놈들을 자극할 게 분명했다.
제길! 아무래도 너무 깊이 들어왔나 보다.
웨에엥! 웨에에엥!
왕벌 몇 마리가 더 날아왔다.
이제는 얼핏 헤아려도 스무 마리는 넘어 보인다.
이미 도주하기는 틀렸다. 그렇다면 눈에 띄지 않게 숨는 방법밖에 없다.
그는 지면에 몸을 밀착시키기 위해 조심스레 몸을 숙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용이하지 못했다.
“꼼짝없이 걸렸군.”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왕벌 때문에 행동의 제약을 받는 동안 천멸도 살수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전후좌우 어디를 둘러보아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벌 떼를 베어내고 뛰는 건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 지금도 그렇다. 또 다른 후회가 밀려들기 전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선택해야 한다.
스릉!
청옥고검은 검을 뽑았다.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검으로 일가(一家)를 이뤘다고 자부하는 몸인데 이렇게 당할 수는…….
일순 청옥고검은 모든 생각을 중지했다.
목표, 마야가 걸어오고 있다. 공격을 가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위치까지 와 있다.
멍청한 건가, 너무 자신만만한 건가, 아니면 청옥고검이란 사람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까?
어쨌든 청옥고검에게는 두 번 다시 취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때, 마야가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많은 피를 보게 될 거야. 혈보(血步)를 내딛는 심정이 좋지만은 않군. 내가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서너 명씩 죽어간다면 나는 걸어야 하나, 걷지 말아야 하나.”
“헉!”
청옥고검은 경악성을 토해냈다.
마야의 말을 듣는 순간, 전신 진기가 썰물 빠지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피로하여 사지육신이 나른할 때처럼 기운이 빠졌다. 두 다리도 휘청거리고, 들고 있는 검도 무겁다.
‘사술!’
마인들의 하늘이라는 마야이니 당연히 사술을 익혔을 게다.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일 줄이야!
마야가 여전히 땅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죽여. 깨끗하게. 한 명에 검을 두 번 쓰는 일은 없도록.”
청옥고검은 다급해졌다.
주위 공기가 얼어붙었다. 포위하고 있던 예기가 살기로 변했다. 본능은 공격이 곧 시작된다고 말해준다. 한데도 자신은 힘이 없다. 삼일 밤낮을 싸운 사람처럼 기력이 쇠진해졌다.
‘무, 물러서야 해!’
살기 위해서는 도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어감을 때,
푸욱!
“컥!”
등을 꿰뚫고 들어온 검이 앞가슴을 헤집고 튀어나왔다.
명색이 청옥고검이 검을 뽑고도 휘둘러보지 못하다니. 살수 나부랭이가 검을 쑤셔 넣는 동안 진기나 수습하려고 발버둥 쳤다니.
청옥고검은 이를 악물며 터지려는 단말마를 참아냈다. 하지만 비명소리는 두 귀를 울렸다. 한두 개가 아니다. 여러 명이 동시에 당하는 소리였다.
“아악!”
“크윽!”
청옥고검은 가슴을 움켜잡으며 무의식적으로 비명이 터진 곳을 쳐다봤다.
삼양신검이 쓰러진다. 무음살도로 보이는 사람은 벌써 땅과 입맞춤했다.
그들도 청옥고검과 같은 생각을 하고 왕벌 주위에서 어슬렁거렸던 것이다.
‘마야를 잘못 봤어. 무공을 모르는 게 아니라 너무 강해. 무신…… 무신밖에 이자를 잡을 사람이…….’
청옥고검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왜애앵! 웨앵!
왕벌은 족집게처럼 숨어 있는 사람을 찾아냈다.
쏘지는 않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위협만 가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처리는 천멸도 살수 몫이다.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사람들을 베어내는, 검을 갓 잡은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을 살수계의 최강인 천멸도 살수들이 시행했다.
싸움이 아니다. 도살이다.
쉬익! 쉬이익! 휘익!
여기저기서 무인들이 튀어나와 메뚜기처럼 도주했다.
‘왕벌…… 벌 떼를 누르지 못하는 한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
흑조편복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마야의 움직임을 모두 보았다.
살수의 입장에서 마야를 살피건대, 땅 위에서 마야를 죽이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죽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살수계의 전설로 불리는 사람이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않은가.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겠어.’
그는 마릉 초원 이후를 생각했다.
마릉 초원에 마련한 함정은 완벽하다. 마야가 아니라 마신(魔神)이라고 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오래된 습관은 목표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가 지금 생각하는 방법은 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생각했다.
‘왕벌을 유혹해서 마야와 분리시켜야 되겠지. 마야가 왕벌을 부린다…… 그럼 왕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우두마리로 인정받았다는 뜻인데…… 우두머리를 배신할 만큼 강력한 유혹거리가 있을 거야. 뭐가 없나?’
찾아보면 방법은 나온다.
왕벌이 만사 제쳐 놓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꿀이 있다면 좋겠지. 우두머리 말을 무시하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천적도 좋을 것이고…… 뭐가 되었든 구하면 구해질 게다.
“저놈들이 문제야.”
아무리 생각을 굴려도 천멸도 살수들은 떼어놓을 수 없다.
부딪쳐서 깨고 들어가는 것은 희생이 너무 크다. 왕벌처럼 유혹해서 떼어놓아야 한다.
‘천멸도주를 연구해야겠군.’
이것 역시 찾다 보면 방법이 나온다.
어떤 인간이든 약점은 있다. 천멸도 살수들처럼 천형을 앓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찾기 쉽다.
천멸도주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 의외로 쉽게 살수들을 떼어낼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마야 곁에서 서성이는 마인들을 제거해야 한다.
문제는 그들의 무공이 상상 이상으로 고강하다는 것인데……
‘목표를 혼동해서는 곤란하겠고…….’
살수들이 흔히 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목표를 혼동하는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밀명은 마야를 제거하라는 것.
이것이 목표다. 마야만 제거하면 된다. 그 외에는 다담선자가 어떻건 마도가 어떻건 신경 쓸 게 없다.
마야 제거와 마인 척살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마인들 역시 떨어뜨려 놓으면 되지 않을까?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여자들이야 한 이불을 덮고 자니 마야 곁에 머무는 것이 당연하지만 마도나 수검 같은 위인들이 먹을거리가 전혀 없는 곳에 붙어 있는 이유가 무어냐는 것이다.
흩어지면 쉽게 척살당하니 작은 힘이라도 뭉쳐야 한다?
아니다. 보통은 뭉치면 강해지지만 마인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흩어지면 주목을 받지 않지만 뭉치면 이목이 집중되게 되어 있고, 죽을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그러고 보니 기본을 잊고 있었어.’
흑조편복은 피식 웃었다.
살법 제일 원칙이 무엇인가? 목표를 파악하는 것이다. 성격, 금전 관계, 애정 문제…… 일상사 모든 것을 파악하다 보면 뚫고 들어갈 구멍이 보인다.
주변 인물도 마찬가지다. 목표에 준해서 조사를 해야 한다. 애인, 벗, 부모 등등의 우호적인 관계부터 적대적인 관계까지 낱낱이 조사해야 한다.
마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다담선자를 비롯하여 마야 주변에 있는 여인들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주의해야 할 자들, 마인들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았다.
왜 그런 실수를 범했을까?
마인들이 상하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다들 친우 같고, 벗 같지만 엄밀히 따져 들어가면 마야가 상전이고 마인들이 수하인 관계가 드러난다.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직 관계다.
이런 점 때문에 마인들을 간과했다. 수하들이라 생각해서 별로 비중 있게 보지 않았던 탓이다.
마도가 누구인가? 본명은 무엇이며, 어디 출신이고, 부모형제는 어떻게 되며, 왜 마도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무엇을 아나? 아는 게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마야에 대해서는 알지만 주변 인물에 대해서는 백지 상태나 마찬가지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의 현재 모습뿐이다. 사용하는 병기와 무공 정도가 고작이다.
‘정말 큰 실수를 했군. 괜찮아. 시간은 많으니까. 이제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지. 다시 시작하면 돼. 다시.’
흑조편복은 몸을 돌렸다.
마야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니 이제 마릉 초원을 지켜볼 수 있는 곳에 먼저 가 있어야 한다. 불벼락을 맞으면 이놈 저놈 구분조차 되지 않고 뒤엉켜 죽겠지만 나중에 마야의 재라도 회수하려면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말아야 한다.
한데 몸을 돌린 흑조편복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딱 굳어버렸다.
백포로 전신을 휘감은 살수.
“마야가 보내서 왔는가?”
흑조편복은 당황하지 않았다.
천멸도 살수가 왜 자신에게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이번 일에 자신이 개입한 증거는 없다.
아주 일이 틀어져서 개입 사실이 드러나도 아직 여벌의 목숨이 두 개 있으니 그중 한 개를 쓰면 된다.
“주림이라 하지.”
“백인수?”
“나까지 겨우 여덟 명밖에 남지 않은 조직인데 백인수라는 호칭은 과하고.”
“여긴 어쩐 일로?”
“마야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어서 왔다. 네 목숨, 이제 하나 남았다. 후후후! 나머지 하나도 빨리 썼으면 좋겠군. 살수계의 전설을 내 손으로 베는 맛도 남다를 거야.”
주림은 항변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가 말한 것이 아니다. 마야가 말한 것이다.
‘그럼!’
흑조편복은 갑자기 조급해졌다.
여벌 목숨이 하나 남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번 일에 자신이 간여했음을 마야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간여한 것까지 알고 있는데, 마릉 초원에 펼쳐진 함정을 모를 리 있는가.
피붙이……. 씨만 뿌렸지 돌본 적이 없으니 자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피붙이가 위험하다. 위험한 것은 상관없다. 개죽음을 맞이할 게 뻔하니 그게 문제다.
“허허허! 감쪽같이 저지른다고 저질렀는데 역시 마야의 눈은 속이지 못하는구먼. 알았네. 다음에는 좀 더 완벽한 함정을 파놓도록 하지.”
흑조편복은 조급한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당장 마릉 초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자식 놈에게 함정이 발각되었으니 몸을 빼내라고 알려줘야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알고 있으나 모르고 있으나 초원에 발을 딛기만 하면 죽게 되어 있지만 마야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무슨 수로든 함정을 파해하고 나아갈 게다.
그가 알고 있다면 함정이 아니며, 함정이 아니고서는 그를 죽일 수 없다.
“자, 더 할 말이 없다면 나는 이만…….”
“더 할 말? 있지.”
“……?”
“마릉 초원에서 화약 냄새가 진동하더군. 우리 능력을 너무 얕잡아 본 것 아냐?”
흑조편복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야 비로소 어디서 실수했는지 알게 되었다.
주림 말대로 천멸도 살수들을 너무 얕잡아보았다. 정말로 그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