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0
20
금연화는 소립파를 노려봤다. 분노를 폭발시켜야 하는데 터뜨릴 곳이 없어서 안으로 삭히는 사람처럼 두 눈 가득히 화염을 담고 이를 악물며 노려봤다.
“전에…… 죽음을 아느냐고 물었지?”
울분을 간신히 억누르며 마디마디를 끊어 뱉듯이 새어 나온 말이다.
“…….”
“이까짓 게 죽음을 아는 거야?”
누가 말릴 사이도 없었다. 금연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단검을 뽑아 팔목에 푹 찔러 넣었다.
“아씨!”
일령이 다급히 달려들려고 했지만 절혼마녀에게 가로막혔다.
한 번쯤은 넘어야 할 고비다. 혈귀대주의 복수를 생각했다면, 그리고 상황이 상상 이상으로 힘겹다면 영혼은 염라대왕에게 맡기고 육신만 떠돌아야 한다.
금연화의 팔목에서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까짓 게 죽음이라면…… 그래서 가가의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죽어줄 수 있어!”
금연화는 단숨에 단검을 그어 올렸다.
쫘아악!
살갗이 찢어지며 핏물이 개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후후! 요령이 없군. 잘못하면 뼈 다쳐.”
“뭐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누가 마인이 아니랄까 봐 사람 가슴을 찢어놓고 즐기는 거야!”
“네 가슴을 찢어놓은 적이 없다. 즐긴 적도 없어. 현실을 말해준 것뿐이야.”
“뭐든지 해줄 수 있다고 했지? 단문협에도 데려다 줄 수 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 줄 수 있다고.”
소립파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까와 같은 잿빛 눈동자로 온몸을 칭칭 감아올 뿐이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야.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 같아.’
절혼마녀는 자신을 향한 눈길이 아닌데도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금연화는 그런 눈길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다 해줘. 전부 다. 단문협에도 데려다 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아봐 줘. 한낱 수묘인 따위가 하는 말이라면 믿지 않겠지만 소립파가 한 말이니 믿어. 도와줘. 영혼이라도 줄 테니까.”
소립파는 침묵했다. 깊은 생각에 잠겨서 좀처럼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목석이 되어버려서 두 번 다시 말을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혈귀대주는 죽었다.”
“되짚어주지 않아도 알아.”
“무엇 때문에 복수를 하려는 거지?”
“뭐라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인데, 무엇 때문에 복수를 하려는지 물었다.”
“너 같은 마두는 모를 거야. 사랑이 뭔지. 사랑이란 것 해봤어?”
“좋아. 가자. 그만하면 됐어.”
소립파는 길었던 침묵과는 달리 너무 쉽게 말했다.
그는 비로소 금연화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더 말해.”
“…….”
“너…… 돈 때문이 아냐. 말해.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야! 왜 내게 접근한 거야! 네 목적이 뭐야!”
“…….”
“말햇!”
소립파가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나직이 말했다.
“널 보기 위해서.”
“뭐라고?”
금연화는 뜻밖의 말에 잘못 듣지 않았나 싶어서 되물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절혼마녀도 일령도 놀란 눈으로 소립파를 쳐다봤다.
“널 보기 위해서.”
소립파는 그녀들이 잘못 듣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그게 무슨 말……?”
“한 놈이 있었다. 아주 지겨운 놈이. 놈에게는 야망이 있었어. 북검문은 야망을 불사를 수 있는 최적지였고. 그래서 그놈은 북검문으로 갔다.”
‘혈귀대주!’
‘혀, 혈귀대주에게 놈이라니! 이 사람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다. 소립파는 진지하다.
“그, 그 사람과는…….”
금연화는 음성까지 떨렸다.
“놈이 지독히도 사랑한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보고 싶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인지 알고 싶었어. 놈이 이 세상을 살다 간 보람이 하나라도 있었는지.”
***
꽈르릉…… 꽝!
세상을 뒤흔든 천둥소리에 이어 송곳 같은 벼락이 산 정상에 내리꽂혔다.
“비가 오겠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대같이 굵은 빗줄기가 쏟아 붓기 시작했다.
후드득! 후둑……!
빗방울에 두들겨 맞은 나뭇잎이 휘청거렸다. 바위는 수십만 개의 화살에 난타를 당하는 듯 요란한 소리를 냈다.
“술도 떨어졌고, 비도 오고…… 이젠 가야겠다.”
“그래, 가라.”
“같이 가자.”
“후후!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꼭 백 번째야. 난 됐어. 이렇게 사는 게 좋아.”
“고집불통 하고는…….”
사내는 술독을 들어 입 안에 들이부었다.
술은 예전에 떨어졌다. 하나 사위를 분간할 수 없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가 빈 독을 채워 마실 것은 있었다.
사내는 술독을 멀리 던져 버린 후 검을 들고 일어섰다.
“당분간 못 올 거다.”
“못 오는 거야, 안 오는 거야?”
“둘 다. 못 오는 것이기도 하고, 안 오는 것이기도 하고. 내친걸음이니 바쁘게 살아야지.”
“그래, 넌 잘할 수 있을 거다.”
“후후! 미친놈. 고양이가 쥐 걱정해 주는 격이잖아.”
사내는 툴툴거리며 웃었다.
“분명히 후회할 거야. 지금 같이 안 가면.”
“…….”
“먼 훗날, 그때나 보자. 환갑쯤 되었을 때. 누가 열심히 살았는지, 누가 보람되게 살았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만 가라. 갈 길도 먼데.”
사내는 먹구름으로 가득 덮인 하늘을 쳐다봤다.
대낮인데도 한밤처럼 어둡다. 세상이 우울한 마음을 알아주는 듯 빛을 죽이고 있다.
한마디라도 더? 무슨 말을……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
“못 들었어. 벗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한 번도 듣지 못했어.”
“그놈은 타고난 무골(武骨). 남들이 일 년 동안 수련할 것을 한 달이면 해치웠지. 반면에 난 일초반식(一招半式)도 펼치지 못하는 처지. 가는 길이 달랐어.”
“그래도…… 혈귀대주가 같이 가자고 할 정도면 뛰어난 면이 있었을 텐데…….”
절혼마녀는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없어. 그런 것.”
‘있어. 틀림없이.’
세 여인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네게 접근할 생각은 없었다. 놈이 가는 마지막 길을 지켜주고자 했는데 네가 나타난 거야. 후후! 단문협에는 나도 가야 하는데, 너도 가려고 하더군.”
“어쩐지 수묘인이 삼칠제를 따질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일령이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잠시 고민했어. 나 혼자라면 세상천지 어디를 떠돌아도 잡을 사람이 없지만 너와 같이 가면 일이 벌어지지. 지금과 같은 일. 그래서 하루 이틀 지켜봤지. 후후! 천방지축 아가씨가 겁 모르고 나서는 모습이라니. 죽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놈이 슬퍼할 테니까.”
소립파가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와 주위에 따르는 비조선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데려다 준다. 단문협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아봐 주고. 천하의 무골이 어떻게 죽었는지 나도 궁금하니까. 하나 복수까지는 같이 해주지 못해. 내게는 그럴 힘도 능력도 없어.”
소립파가 일령을 보고 고갯짓을 했다.
일령은 화들짝 정신이 들어 급히 금연화의 상처를 보살폈다.
“무엇보다도 복수를 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해. 하나는 분노. 분노를 넘어선 증오면 더욱 좋고. 분노든 증오든 터뜨릴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아마 찾기가 무척 힘들 거야.”
“찾아야지.”
금연화는 들끓던 분노를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 점이 더 무섭다. 열기가 냉기로 바뀐 게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희망이야. 복수할 희망. 희망이 있나? 혈귀대를 죽일 정도고, 천랑대가 삼대나 동원될 정도라면 평생을 바쳐도 복수 끝자락조차 못 잡을 거야. 희망이 없는 거지. 상황이 이런데도 복수 생각만 하다가는 정신병자 되기 십상이야.”
“됐어. 그건 네 마음대로 해. 네가 무얼 하든 내가 간섭할 필요 없고, 마찬가지로 내가 뭘 하든 간섭하지 마. 네 말대로 단문협까지만 데려다 줘. 그럼 끝나.”
소립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이 벌어지면 몸조심해. 직접 손을 쓸 일은 없겠지만 싸움터라는 곳이 원래 흉험한 곳이니까. 순식간에 뚫고 나간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꼬리가 잡혀.”
“반각 여유밖에 없다는 말이지?”
절혼마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랬어. 천비대는 항상 주위를 맴돌았어. 천비대주가 진정으로 잡고자 했다면 진작 잡혔다는 말이야. 천비대주가 손을 쓰지 않은 것은 나를 잡고자 해서지. 그만한 호기심을 일으켜 놨거든. 지금쯤 놈은 내 존재를 알아차렸을 거야. 여기 합류한 사실도. 후후! 발칵 뒤집어졌겠군. 놈들이 준비하고 쳐 나오는 시간, 그리고 우리가 한 발 앞서 나가는 시간 차, 그 시간이 반각이야. 반각이란 시간 차는 항상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거야.”
‘알겠어. 혈귀대주가 왜 이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했는지. 이 사람은 병가(兵家)의 맥(脈)을 이었어. 무공은 몰라도 지략만은 혈귀대주가 인정할 만큼 뛰어나. 무공을 몰라?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미소로, 눈길로, 소리로 무인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혹여 누구한테 이런 말을 하면 미쳤다고 할 거야. 말을 말아야지.’
절혼마녀는 소립파를 보면서 생긋 웃었다.
2
일견하기에도 오십여 척은 훨씬 넘어 보이는 비조선이 앞을 가로막았다.
넓은 강이 순식간에 샛강이나 된 듯이 좁아 보이는 순간이다.
“진수(振手).”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 비조선에 타고 있던 자들이 노를 놓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수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머리만 내놓고 둥둥 떠서 비조선을 붙잡았다.
“파쇄(破碎).”
촤아아악……!
비조선이 허공을 가르는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저, 저건 옥쇄(玉碎)!”
절혼마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쏘아져 나가는 비조선에는 물속에 뛰어든 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아니, 그들이 유영을 하여 비조선을 밀고 있다. 배를 타고 강을 헤쳐 가는 것이 아니라 배를 떠받들고 가는 모습이다.
쐐에에엑! 쐐에엑……!
하늘 높이 메뚜기 떼가 새카맣게 솟구쳤다. 수백은 족히 될 것은 같은 화살 세례다.
쐐에에엑……! 파악! 파파팍……!
비조선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었다.
하늘로 솟아오른 화살 중 단지 일 할만 격중된 결과가 그렇다. 나머지 화살들은 강으로 떨어졌다. 처음부터 물속에 있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쏘아진 화살이다.
다행히도 물속에 있는 자들은 무사했다. 그들은 화살이 정점에 이르렀다가 떨어질 시기를 정확히 짐작해 냈다. 화살이 아래를 향해 방향을 꺾을 때, 그들은 이미 잠수하여 비조선 밑으로 몸을 숨긴 후였다.
쏴아아아……!
비조선은 화살 세례를 당하면서도 힘차게 나아갔다.
“적탄(赤彈).”
고루쌍마 중 한 명이 재빨리 화통을 꺼내 하늘로 쏘아 올렸다.
파아앗! 파악……!
힘차게 솟아올라 간 화탄은 허공에서 현란한 불꽃을 일궈냈다.
신호를 받았음인가. 비조선들은 사전에 목표를 정해놨던 듯 좌우로 쫘악 갈라지며 한층 속도를 높여 돌진했다.
“아아…….”
일령이 나직한 신음을 토해내며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겨우 열 척으로 오십 척이 넘는 배와 승부를 벌이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것과 같다. 저들은 배 위로 올라서기도 전에 도륙당할 것이 뻔하다.
이상한 것은 소립파다.
저들이 장렬하게 산화하며 길을 열어준다면 그 틈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소립파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착시(錯視).”
소립파가 이해할 수 없는 명을 내렸다.
고루쌍마는 뱃전에 있던 소북을 들어 두들겨 댔다.
둥둥둥둥……!
북소리는 사방으로 퍼져 갔다. 흙 속에도, 물속에도, 하늘에도 묵직하면서도 뚜렷한 북소리가 가득 담겼다.
화와악……!
강안에서 불길이 일어난 것은 그때다. 강안에서 시작된 불길은 허공으로 솟구쳐 하늘까지 덮어버렸다.
“화시(火矢)!”
상대도 계속 화살을 쏘아대기는 했지만 불길을 머금은 불화살에 비하면 어린애 수준에 불과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거야!’
세 여인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북검문 문도인지, 북무림 문인들인지 모를 사람들이 쏘아대는 화살은 한 번에 이백여 개. 반면에 강안에서 쏘아지는 불화살은 천여 개.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물속에서 비조선을 이고 가던 사람들은 결사적으로 움직였다. 죽음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강안에서 불화살이 솟구칠 무렵, 그들은 상대와의 간격을 십여 장으로 좁히고 있었다.
비조선은 충돌이라도 하려는 듯 거세게 돌진했다.
불화살은 적아(敵我)를 구분하지 않았다. 길을 가로막은 무인들에게도 쏘아졌지만 이쪽 사람들도 무차별적으로 겨냥당했다.
꽈앙!
비조선 한 척이 거센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화약까지! 이건 무인의 싸움이 아냐. 전쟁이야!’
꽈앙! 쾅! 꽈앙……!
십여 척의 비조선은 선후를 다투며 폭발했다. 상대와의 간격이 일이 장으로 좁혀졌을 때였다.
“가.”
고루쌍마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노를 저었다.
수면은 거센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듯 처참했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배들, 팔다리가 끊어진 채 둥둥 떠 있는 시신들, 되살아날 가망이 없는 상처를 입고도 살려고 발버둥 치는 무인들.
‘장강을 지키는 무인들이야! 그럼 장강 근처란 소린데…… 엇! 저들은 천비대!’
금연화는 둥둥 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눈에 익은 요대(腰帶)를 발견해 냈다. 검은색 바탕에 흰 호랑이가 그려진 요대를 차고 있다면 틀림없이 천비대원이다.
장강 무인과 천비대원이 뒤섞여 있다.
싸움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수면에 떠오른 사람들은 전투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숫자는 넉넉히 셈해도 오십여 명이 채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나?
물속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속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다. 세상에 위명이 쩌렁 울리는 북무림 무인들과 이름이나 별호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간의 싸움이다.
소립파는 고루쌍마가 내려놓은 소북을 들어 두들겼다.
둥둥둥! 둥둥! 둥둥둥! 둥둥!
북소리에 일정한 음률이 실렸다. 너무 단조로워서 음률이라기보다는 신호라는 편이 옳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