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04
204
녹혈마공은 시마가 거침없이 한 세상을 살아온 밑바탕이었다.
한데 녹혈마공이 무참히 깨어졌다.
그가 뿌린 시독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고, 대신 하독(下毒) 후에 찾아오는 진기 공백 상태 때문에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클클!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네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네. 하기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법이지. 칼로 일어선 놈, 칼로 망한다고 우리 같은 놈들은 언젠간 반드시 임자를 만나는 법이여.”
시마는 호로를 들어 흔들어보았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미약하다.
얼추 두어 모금밖에 남아 있지 않다.
“제길! 지긋지긋하던 이놈과의 인연도 이게 마지막이군.”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켠 후, 호로를 힘껏 내던졌다.
“넌 좋겠다. 뒈진 자리가 바로 무덤 아냐. 근데 하나 물어보자. 여기 명당 맞냐? 조용해서 좋긴 한데 너무 그늘진 것 아냐? 이거야 원, 평생 가야 햇볕 한 번 보겠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나간 대나무가 바람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시마는 공허해진 눈길로 한 뼘밖에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때는 웅지를 품은 적도 있었다. 세상이 비좁다고 설친 적도 있고, 꼴 보기 싫은 작자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쳐 죽인 적도 있었다.
덕분에 마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래도 웃었다. 세상을 조롱하며 웃었다. 그것이 평생 동안 꼬리표가 되어 달라붙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평생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쫓겨 다녔다. 범인들이 누리는 평범한 일상(日常)조차 누리지 못했다.
아는가! 제 짝을 만나 혼인하고, 자식을 낳고, 미우니 고우니 하며 티격태격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세월은 웅지를 빼앗아갔다. 세상을 뒤엎을 것 같던 포부도 앗아갔다. 건강했던 육신은 주름살이 쭈글쭈글 져서 볼품없어졌다. 그래도…… 그래도 마인이라는 낙인은 여전히 쫓아다닌다.
“쯧! 신바람 나게 쳐 죽이다가 뒈질 줄 알았건만 넋 놓고 하늘만 쳐다보다 죽을 줄이야.”
시마는 고통의 순간을 기다렸다.
칼일까? 검일까? 아니면 녹혈마공을 멋지게 짓밟아 버린 사천제일룡의 독일까.
어떤 고통이든 다가올 것이고, 숨이 끊어지리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발 죽음의 순간만큼은 멋지게 장식되기를. 손뼉을 쳐줄 만큼 멋진 솜씨로 죽여주기를.
그때였다. 묵묵부답이던 언장은마가 바짝 귀를 기울여야만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말해왔다.
“실없는 소리 그만 지껄여. 아직 죽을 운은 아닌갑다.”
시마는 눈이 번쩍 뜨였다.
“뭐?”
“땅 속은 땅 위보다 진동에 민감하다는 걸 몰라? 크크크! 귀에 익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들려. 허허! 음……! 저건 마도와 수검이고…… 그렇군. 천와류! 다담선자군. 허허허! 마야를 만났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더니, 지금이 그렇네. 크큭! 아직 죽을 운은 아니라니까.”
시마는 언장은마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한데도 믿을 수 없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믿어야 한다는 마음이 치밀지만 고개는 자꾸만 가로저어졌다.
사막 한가운데서 바늘을 찾을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감쪽같이 남도문을 벗어났다 싶었는데 옷매무시도 가다듬기 전에 들키고 말았다.
그래도 최소한 두어 시진 정도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남도문 담장을 넘기가 무섭게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야만 했다.
그때부터 연신 쫓기기만 했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틈이 없었다. 무작정 포위망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만도 숨 가빴다.
그것도 곧 한계에 다다랐다.
남무림을 대표하는 추적자들, 추혼단의 표적이 되었으니 몸을 빼낸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혹여 마야라도 있으면 모를까, 시마나 언장은마로서는 능력 부족을 절감해야만 했다.
이제 끝이다. 더 이상 도망갈 길도 없고, 도주할 힘도 없다.
한데 마도와 수검이 오고 있단다. 천와류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명뿐이다. 다담선자, 그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큭큭! 언장은마, 드디어 미쳤구나. 이젠 헛소리를…….”
시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벌어진 입도 다물지 못했다. 졸린 듯 반쯤 감겨 있던 눈은 퉁방울처럼 부릅떠졌다.
그도 느꼈다. 마도의 체취, 수검의 냄새, 천멸도 살수들의 잔혹한 살심과 미소…….
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아니라 바다 깊숙이에 떨어진 밥알을 건져 올린 것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넓디넓은 중원에서, 꼭 목숨이 떨어질 순간에, 세상에서 유일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과 조우하다니 이런 기적이 어디 있는가.
“한데…… 마야가 없네.”
언장은마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상당히 낙담했는지 음성이 탁하게 갈라져 나왔다.
“뭣! 마야가 없어!”
시마도 깜짝 놀랐다.
마야가 없으면 안 된다. 모두들 일가를 세우고도 남을 무공을 지녔지만 당금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야뿐이다. 마야가 없으면 언장은마나 자신처럼 손발 꽁꽁 묶여 처분만 바라는 신세가 될 것이다.
“빌어먹을! 정말 마야가 없어?”
“없어.”
확고한 대답, 믿기 싫지만 믿어야 한다. 언장은마가 한 말이니 틀릴 리 없다.
“이런! 어떻게 이런 일이!”
시마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허허거리며 웃을 수 있었지만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을 보면서는 웃을 수 없었다.
마야가 없으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사천제일룡이 쳐 놓은 거미줄에 걸려들 뿐이다.
시마가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은마, 우리가 좀 빨리 죽어야겠다.”
***
두 사람, 중년인과 소동(小童)은 죽림(竹林) 한가운데 앉아 묵상을 즐겼다.
쏴아아아……!
바람이 대나무 잎을 훑고 지나갔다.
비가 오는 듯, 서리가 긁혀서 떨어지는 듯…… 바람 소리는 마음 한구석을 시원하게 쓸어준다.
“드디어…….”
중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딱 한 마디였다. ‘드디어……’, 그 후에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소동 역시 말이 없었다. 어떤 때는 인상을 찡그리기도 했지만 줄곧 편안한 모습을 유지했다.
“상당히 느리게 접근하는군요. 최종방어선에 도착하기까지 반각은 더 걸릴 겁니다.”
고요함은 의외의 곳에서 깨졌다.
중년인과 소동 외에 또 다른 인물, 제삼의 사내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쉿! 고요히…… 고요히…… 한 번에 끝냅시다.”
이제 나이 겨우 약관을 넘긴 소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른 살을 훌쩍 넘긴 사천제일룡이 말했다.
“부(傅) 단주(團主)는 너무 생각을 안 해서 탈이야.”
제삼의 사내, 추혼단주(追魂團主) 부위량(傅偉良)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군요.”
사천제일룡이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얼굴로 쳐다봤다. 너무 무표정해서 언뜻 보면 밀랍인형처럼 보이기도 했다.
“후후! 가시는…… 긴장해서 하는 말이지.”
야광 총수, 구환자는 혀를 내밀어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정말로 긴장한 듯했다.
“풋!”
사천제일룡은 구환자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듯 가볍게 웃어주었다.
이 싸움…… 사천제일룡에게는 아무 부담이 없는 싸움이다.
이긴다면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이고, 져도 독약과 암기를 잃는 선에서 그친다.
야광 총수는 입장이 다르다. 이겨도 본전이다. 남무림의 골칫거리인 호채마 일당은 결국 남도문이 해결해야 할 사안이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다면? 입장이 상당히 난감해진다. 이 싸움에서 진다는 것은 남도문 외장 삼첨 중에 하나인 추혼단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뜻으로 간주해야 한다.
사천제일룡이 알고 있는 바로는 야광 총수의 귄위가 막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추혼단을 임의로 빼내서 활용할 정도로 무소불위(無所不爲)하지는 않다.
지자(智者)들의 위험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만사무불통지가 머리와 칼을 분리시켜 놓고자 일부로 무력(武力)을 배제해 놓았기 때문이다.
한데 구환자는 추혼단을 끌어냈다.
호채마 일당을 섬멸할 자신이 십분 있기에 취한 행동이겠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라도 발생해서 일이 틀어진다면 구환자는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추혼단이 몰살시킨 당사자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니까.
“사천제일룡, 쥐와 뱀이 만난다면 어느 놈이 먹히겠나?”
구환자가 밑도 끝도 없이 물어왔다.
생각해 볼 것도 없는 물음이다.
뱀과 쥐가 만났다? 당연히 뱀이 이긴다.
한데 너무 당연한 물음도 야광 총수인 구환자가 물어오자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원하는 답이 상식적인 것이라면 물어오지도 않았으리라. 그럼 뭔가? 쥐가 이긴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이 있지만, 천하제일의 바보도 뱀이 쥐를 잡아먹고 산다는 사실은 안다.
간혹, 쥐가 뱀을 물어 죽였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다. 하나 그런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뱀이 변변치 못했거나 쥐가 상식 밖으로 컸거나 하는 희귀한 경우에나 발생할 법한 일이다.
일반적인 물음에 이례적인 사실을 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럼 뭔가? 무슨 답을 원하는 건가?
보통 사람이라면 숙고를 했어야 할 물음이지만 사천제일룡은 별로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불쑥 말했다.
“대부분은 쥐가 먹히겠지만 뱀이 먹히는 경우도 많죠.”
“역시! 당문은 야생(野生)에 정통하구려.”
구환자는 빙긋 웃었다.
그렇다. 자연계에서는 뱀이 쥐에게 먹히는 상식 밖의 경우도 왕왕 일어난다.
뱀은 쥐를 먹고 산다. 하나 뱀에게는 겨울이 되면 동면을 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겨울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체온도 떨어지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무토막처럼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 채 동면에 들게 된다.
절대 강자에서 절대 약자가 되는 순간이다.
쥐는 그 순간을 노린다. 땅 속이나 나무 속을 헤집고 다니며 동면하는 뱀을 찾아서 뜯어먹는다.
뱀이 쥐를 잡아먹는 것은 백주대낮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본 사람이 많지만 쥐가 뱀을 먹는 것은 지극히 은폐된 곳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본 사람이 없다.
야생에서는 절대 강자도 절대 약자도 없다.
구환자가 느닷없이 뱀과 쥐의 천적관계를 물어온 것은 호채마와 추혼단의 관계가 그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평가를 하자면 추혼단은 호채마에게 밀린다.
다른 자들은 다 떼어놓고 천멸도 살수만 들이밀어도 추혼단이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천적관계에서 본다면 쥐다.
삼천 군웅도 격파해 버린 호채마다. 추혼단 하나만으로 맞선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다.
한데 기후가 변했다.
사천제일룡에게서 건네받은 독과 암기, 천 명에 이르는 야광의 두뇌들이 쥐어짜낸 죽향암진(竹香暗陳)이 따뜻하던 날씨를 엄동설한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추혼단 무인들은 절대 약자에서 절대 강자로 변신하여 호채마라는 뱀을 잡아먹고자 한다.
구환자는 독과 암기, 그리고 죽향암진으로 이뤄진 함정이 정말로 호채마를 잡을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게다.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천제일룡은 마음속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구환자처럼 의심을 거듭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말도 소용없다. 그를 안심시킬 수 있는 것은 호채마 마인들을 꽁꽁 묶어서 그의 앞에 데려왔을 때뿐이다.
독을 아는 것과 능수능란하게 쓸 줄 아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
백 가지 독을 아는 사람보다 한 가지 독이라도 정통한 사람이 독에 대한 신뢰가 깊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족처럼 몸에 붙여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만사무불통지와 야광의 차이점이 그런 점이다. 만사무불통지는 문무(文武)를 고루 활용하지만, 야광은 문에만 의존한다.
학문의 세계라면 모를까 무림에서는……
야광은 영원히 만사무불통지의 하수(下手)일 수밖에 없다.
‘야광이 만든 죽향암진…… 뛰어나긴 하겠지만 호채마를 가둘 수는 없을 거야. 결국 이 싸움은 나와 호채마의 싸움으로 귀결나겠군.’
사천제일룡은 구환자와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자연히 침묵은 길어질 수밖에…….
사천제일룡은 몸을 일으켰다.
“마야에게는 절색의 미녀들이 붙어 있답니다. 여기서는 할 일도 없고…… 사담(私談)을 나누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눈요기 쪽으로 마음이 더 기우는군요.”
“그런가? 좋은 기회겠군. 마침 사내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여인들끼리만 들어섰다니 꽤 괜찮은 기회야. 점찍어놓은 여인이라도 있는 겐가?”
“하하! 아무리 맛좋은 음식이라도 남이 먼저 손댄 것은 먹지 않습니다.”
“손대지 않은 것도 있잖은가.”
“그래서 일어서는 거지요. 다른 여자는 관심없지만 금연화만은 신경 써야지요. 자하부에서 부녀간의 인연을 끊는다고 공식 선포했지만 막상 딸자식이 눈앞에서 죽는다면 가만있겠습니까?”
“백형검법(百形劍法)이 탐나는가?”
사천제일룡의 눈가에 이채가 번뜩였다. 하나 곧 차분한 눈길로 돌아와 평온을 유지했다.
“보검도 나무꾼 손에 들리면 작대기로 변하는 법이지요.”
“확실히 백형검법이 보물은 보물이지. 자하부주에게는 아까운 물건이야. 천하의 보물로 요리한다는 게 기껏 자하쌍구검이라니, 하하하! 좋은 먹이를 노리는군. 잘해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