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07
207
‘이곳은 죽음밖에 없어.’
우습게도 죽음의 손이라 불리던 천멸도 살수들이 죽음의 진에 갇혀 몰살당했다.
‘하기는…… 이런 게 아니었으면 상대할 방도가 없었을 터.’
부위량은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불어 쉬었다.
천멸도 살수들과 직접 검을 부딪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또 그런 자들과 싸워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됐다. 들어갈 필요 없어. 독이 자연 소멸되는 칠 주야까지 이곳은 죽음의 땅이다. 이쪽은 됐고…….”
부위량의 음성에는 승리를 누린 자만이 맛볼 수 있는 만족함이 묻어 나왔다.
“이제 남은 건 두 개.”
부위량의 머릿속에 세 사내가 그려졌다.
마도, 수검, 혈유.
놈들은 장강을 넘으면서 남무림 무인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그때 때려잡았어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때를 놓쳤고, 덕분에 놈들에게는 호채마(好彩魔)라는 턱도 없는 별칭까지 붙여놓았지만, 다른 마인들처럼 싹이 보이는 즉시 잘랐어야 한다.
이번에도 직접 잡는 것은 아니다. 야광과 사천제일룡이 만들어놓은 잔치를 구경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관없다. 원래 마인들을 때려잡는 것은 추혼단의 몫이 아니었다. 추혼단은 뒤를 쫓거나 때려잡을 곳으로 유인하는 역할만 맡아왔다. 그러면 철궁대나 형옥대가 다 된 밥을 먹자고 수저만 들고 나타나곤 했다.
일은 추혼단이 다 하고 열매는 다른 인간이 따 먹고.
이번 일은 추혼단의 태생적인 한을 풀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다.
비록 멀리 떨어져서 멀거니 지켜보는 것으로 그칠망정 피 냄새를 마음껏 맡을 수 있고, 마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도할 수 있으니 행복하다 아니할 수 없다.
즐거움을 만끽하러 가자.
하나 조심해야 한다. 놈들은 세 명에 불과하지만 개개인의 무공이 능히 일당백(一當百)을 능가하니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그물망이 찢기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놈들을 잡을 때도 천멸도 살수들을 잡을 때처럼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나는 남동(南東)으로 간다. 어떤 일이 있던지, 개미새끼 한 마리가 기어가도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보고부터 해라. 끝난 싸움터라고 방심하는 놈이 있으면 뼈마디가 추려질 줄 알아!”
부위량의 음성을 듣는 자치고 그가 진한 흥분에 들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추혼단은 남도문 외장(外莊) 삼첨(三尖) 중에서 무공 면으로 봤을 때는 제일 약하다. 하나 그들은 당당하게 삼첨의 한쪽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의 눈은 독수리를 닮았다. 하늘에 높이 떠서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들의 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들의 코는 적과 아군의 냄새를 구분해 낸다.
사실 이런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드넓은 중원에 정보를 취급하는 사람은 모래알처럼 많고, 그들 대부분이 이러한 자부심쯤은 가지고 있을 게다.
추혼단이 추적이나 정보 취급 분야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된 것은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니다.
추혼단은 이 세상 어디든 던져 놓기만 하면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깨닫는 훈련을 쌓아왔다.
지금도 그렇다.
천멸도 살수들의 주검이 널려 있는 곳이고, 이변이 일어날 리도 없지만 그들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은밀한 곳에 몸을 숨기고 사방을 예의 주시했다.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추혼단주가 자리를 뜬 순간부터 그들에게는 죽음 같은 침묵만 존재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매미가 껍질을 벗고 나오듯 유엽혈린이 빼곡히 박힌 백포를 슬금슬금 밀쳐 내며 기어나오는 사내들이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천멸도 살수들은 죽지 않았다!
추혼단주조차 죽음을 확신했는데,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치명적인 독과 암기에 당했는데, 동료 네 명이 목숨까지 잃어가며 지옥 구덩이를 확인했는데 저들은 마치 불사신(不死身)이라도 되는 듯 기어나온다.
그들은 기절할 만큼 놀랐지만 어설픈 행동을 할 만큼 미숙하지는 않았다.
한두 명도 아니고 그들 모두가 일제히 화통(火筒)을 꺼내 들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바로 추혼단주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다.
상황은 그들 편인 것 같다.
살수들은 아직 유엽혈린으로 도배한 백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당장이라도 쳐 나간다면 벨 수 있을 것 같다. 하나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죽음밖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탁!
화통 밑 부분을 자그마한 돌멩이에 힘껏 쳤다.
충격을 받은 화약은 폭발을 일으킬 것이고, 붉은 폭죽이 하늘을 수놓으리라.
그렇게 되어야 정상이다. 한데 폭죽은 어느 곳에서도 솟구치지 않았다.
“끄윽! 너무…… 빨라!”
“미, 믿을 수…… 어둠의 화신이라더니…….”
추혼단은 거의 동시에 자신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공포를 읽었다.
그들…… 무려 스무 명에 이르는 추혼단이 모두 당했다. 똑같은 시간에, 일제히 당했다.
누구에게 어떻게 당했는지는 모른다. 하나 절명할 수밖에 없는 일격이라는 것은 안다.
제일 먼저 화통을 든 손이 잘렸다.
자신의 손이 떨어져 나갈 때, 다른 사람들의 손도 떨어졌다.
천멸도 살수들은 아직도 유엽혈린의 숲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저렇게 벌레처럼 꾸물거리며 기어나오고 있는데…… 기척없이 다가와 숨통을 끊은 자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해답을 얻지 못했다. 망연히 백포를 밀쳐 내고 일어서는 살수들을 쳐다보며 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좋은 병기를 얻었어. 공기에 노출된 독이 자연 소멸되는 데 칠 주야나 걸린다니. 이런 독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어. 모두 거둬라!”
얼음장처럼 차가운 여인의 음성, 천멸도주 유염추의 목소리가 죽은 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졌다.
천멸도 살수들은 일사불란하게 유엽혈린을 거뒀다.
추혼단 사내들의 목숨을 깃털처럼 가볍게 날려 버린 유엽혈린이지만 독에 적응력이 생겨 버린 독인들에게는 일개 쇠붙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천멸도 살수들은 조심했다.
워낙 맹독이다. 살짝 긁힐 때마다 상처 난 부위를 통해 벼락이 몰아치듯 찌릿찌릿 저려온다.
유엽혈린은 순식간에 거둬졌다.
독암기가 사라져서일까? 죽음만 머물 것 같던 대숲에 훈풍이 감돌았다.
천멸도주는 살수들을 둘로 나눴다.
주림에게는 중앙을 관통하라는 지시를 했다. 황전륜에게는 추혼단주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철저하게 베어버리되,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구십구 리까지는 쫓아가되 마지막 일 리는 어떤 먹잇감이 보여도 쫓아가지 마라.”
한마디면 충분했다. 주림과 황전륜은 살수들을 이끌고 대숲 안으로 스며들었다.
“야광 총수와 사천제일룡이 함께 있다면 절대 이길 수 없어. 적당한 선에서 물러서야 돼.”
천멸도주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구환자에게는 천하를 가둘 지혜가 있다. 사천제일룡에게는 독에 면역력이 생긴 천멸도 살수들도 독살될 수밖에 없는 극독이 있다.
마지막 선이 어디인가. 구환자나 사천제일룡을 만나기 전이다.
그들과 부딪친다면 지는 싸움이고, 그전에 물러설 수 있다면 작은 승리나마 취하게 된다.
작은 게 아니다. 오백 마인을 몰살시킨 추혼단이다. 그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일이니 소원한 목적은 이루는 게 된다. 절대로 작은 게 아니다.
마도, 수검, 혈유는 문제가 아니다. 추혼단주가 그들에게 갔고, 황전륜이 추혼단주의 뒤를 노리고 있으니 결국 그들과 황전륜은 만나게 된다.
다른 방향에서 대숲으로 뛰어든 네 여인이 염려된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추혼단주가 말한 것으로 보아서는 오도 가도 못할 상황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으면 먼저 사내들부터 친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그 말뜻은 사내를 친 다음에 죽이러 가도 늦지 않다는 뜻이지 않은가.
진에 갇혀 있거나, 아니면 전진하는 속도가 워낙 느리거나.
주림은 중앙으로 나아가 그녀들을 찾을 것이다.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천멸도주는 주림과 황전륜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아무도 가지 않은 왼쪽 숲을 더듬어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떻게 될지는 하늘만 안다.
누구든, 어느 길로 간 사람이든 사천제일룡과 만나는 일만은 없기를.
2
천멸도주의 바람은 가장 좋지 않은 쪽으로 맞아들었다.
다담선자와 세 여인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대숲 깊숙이 들어섰다.
“아아아아! 야아아아아!”
이빨 빠지고 발톱이 무뎌진 늙은 맹수는 아직 살아 있다고 말을 하고 싶은 듯 끊임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다 온 것 같은데?”
절혼마녀가 귀를 기울여 소리의 근원지를 살폈다.
시마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아는 데는 굳이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그냥 알았다. 뭐랄까, 그의 냄새를 맡았다고 할까? 시마의 고함 소리가 뚜렷하게 들린다고 할까? 명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근처에 있다.
“너무 조용한 게…… 기분 나쁘죠?”
금연화가 살포시 미소를 배어 물며 말했다.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지만,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뒤섞여 있었다.
“한 번에 하나씩만. 시마가 가까이 있으니…….”
다담선자는 ‘시마부터 구해’라는 말로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하나 한 번에 하나씩만 처리하자는 앞의 말로 미루어볼 때, 그녀들은 시마를 구하는 것보다 다른 일을 먼저 해야만 했다.
“호오! 말은 들었지만…… 대단한 미녀들이군.”
그녀들 앞에 철부지 꼬마 아이가 나타났다.
몇 살이나 되었나? 열서넛? 네다섯? 어디를 봐도 서른이 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꼬마 아이 입에서 ‘미녀’라는 말이 나오니 뭔가 비틀린다는 느낌이 든다. ‘대단한 미녀’라는 말보다는 ‘예쁜 누나’ 정도로 말하는 게 훨씬 어울릴 듯싶다.
사뭇 맹랑해 보이는 꼬마 아이, 이 사람이 사천제일룡이다.
“마야의 곁에는 천하제일미녀만 머문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러네. 당신이 금연화군. 자하부의 금지옥엽. 북검문 사내들을 잠 못 이루게 하던 염화(艶花).”
사천제일룡이 거침없이 손가락으로 금연화를 가리켰다.
“하하하! 네가 일령이로구나. 넌 알아보기 가장 쉬워. 가장 어려 보이는…… 음! 그래, 너도 미녀라고 말해주마. 어린 미녀는 일령밖에 없지. 안 그래?”
“꼬마야, 부모님 걱정하신다. 어서 돌아가.”
일령이 툭 쏘았다.
그녀는 하필 사천제일룡처럼 자신만만해서 유들거리는 사내를 제일 싫어했다.
마야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내를 보는 눈이 방심(芳心)에 처음으로 담은 사내와 비슷하면 호감을 느끼고, 다르면 다를수록 무감정에서 싫어하는 감정으로 넘어갔다.
사천제일룡은 마야와 전혀 다르다.
“하하하! 꼬마? 꼬마! 하하하!”
사천제일룡은 낭랑하게 웃었다.
맑고 밝은 웃음이다. 음침함이나 냉혹함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깨끗한 웃음이다. 하나 그의 웃음을 접한 네 여인은 마음이 시원해지기는커녕 더욱 답답해졌다.
사천제일룡은 강자다. 무지무지하게 강한 강자다. 아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패배라는 말을 모르고 살았으리라. 그런 사람이 마야에게 패했다. 손속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철사문의 방조자로 초빙된 사람이 손을 쓰지 못하고 몰락 과정을 지켜봤다는 것은 목에 칼을 맞은 것보다도 치욕스럽다.
그것이 얼마 전이다.
사천제일룡은 그만한 치욕을 당하고도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 태연하다.
벌써 패배를 잊었다. 깨끗이 잊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마야와 부딪치는 일이 생겨도 예전의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게다.
비장(秘藏)의 수(手)가 많다는 소리다.
믿는 것이 하나뿐인 사람은 그 하나가 무너졌을 때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 무너지는 정도에 따라서는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하나 믿는 것이 열인 사람은 하나가 무너졌다고 해서 좌절하지는 않는다. 무너진 즉시 오뚝이처럼 튕겨 일어날 것이고, 새로운 수를 시험할 것이다.
사천제일룡이 그런 자다.
그가 가진 수는 열이 아니라 스물, 서른…… 독공(毒功), 암공(暗功)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백을 훌쩍 넘길 수도 있다.
그에게 패배는 밥 한 숟갈 흘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천제일룡이 더욱 무서운 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수법들이 하나같이 절륜하다는 점에 있다.
어느 사람 같으면 평생을 수련해도 도달할까 말까 한 수들을 몸에 붙이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한 상대이지 않은가.
네 여인은 사천제일룡의 진가를 이야기 몇 마디 나누는 사이에 알아냈다.
한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느닷없이 나타나서 농담 몇 마디 건네던 사천제일룡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불붙은 화약처럼 위태롭게만 보이던 사천제일룡이 빙긋 웃으며 물러서지 않는가. 더군다나 그의 말투도 유들거리는 것이 방금 전에 말한 사람이 맞는가 싶었다.
“이봐, 멍청한 여자들.”
그는 일령에게만 말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네 여인 모두 들으라고 말했다.
“그대들은 세간에 떠도는 소문도 듣지 못했나? 당문도 앞에서는 숨도 크게 쉬지 마라. 당문도와 십 장 거리를 유지하면 이상 없을 것이고, 오 장 거리가 되면 언제든 도주할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삼 장 이내로 들어섰다면? 반항을 포기하고 선처만 바라라. 지금 우리 거리가 얼마나 되지? 하물며 내가 누군가. 사천제일룡이야, 사천제일룡. 한심한 여자들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