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08
208
사천제일룡은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긴 것처럼 말했다.
그는 네 걸음이나 물러섰다. 다섯 걸음, 여섯 걸음, 일곱 걸음…… 계속 물러섰다.
“뭐야, 이거…….”
절혼마녀가 기분 나쁜 듯이 중얼거렸다. 암암리에 진기를 휘돌려 전신 경맥을 살폈음은 물론이다.
아무 이상이 없다. 사천제일룡의 행동이 너무 단호해서 혹시나 하는 심정에 두 번이나 진기를 휘돌려 보았지만 막히거나 정체되는 부분은 한곳도 없다.
이상한 상황이다.
현기증, 두통, 호흡곤란 등등…… 수십 가지의 중독 현상 중에 어느 한 가지도 느낄 수 없는데, 혹시 중독되지 않았나 하는 불안감이 진하게 밀려온다.
그녀는 더 이상 살피고 있을 수만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재빨리 귀적무를 펼쳤다.
귀적무를 펼친 상태에서는 상시 진기가 운용되고 있기 때문에 중독 여부를 즉시 알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설혹 중독된다 하더라도 사루의 무학, 귀수는 떨쳐 낼 수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동귀어진까지 생각한 것이다.
한데 상황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안개가 피어나듯이 스르르 사라져 자연과 동화가 되어야 할 육신이 진기를 운용하기나 했나는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
대경실색(大驚失色)!
절혼마녀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놀란 사람은 또 있다. 금연화는 절혼마녀와 똑같은 심정에서 자하밀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내 춘광잔설(春光殘雪), 물방울이 맺힌 잔설(殘雪)처럼 깨끗하고 맑은 얼굴이라는 그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진기가 끊겨! 중독!’
그녀는 완벽하게 중독 증상을 느꼈다. 경맥 곳곳이 끊겨서 자하밀공이 이어지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하쌍구검을 떨쳐 낼 수도 없다.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사천제일룡을 잡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손장난이 되리라.
일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선유비조신법을 펼쳤다. 하지만 신법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뒤뚱거리기만 할 뿐, 깃털처럼 가볍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쳇! 당하고 말았네. 꼬마. 사천제일룡이라고 하더니 독 쓰는 재간 하나는 정말 탁월하네. 말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당하고 말았어.”
일령은 신법을 거뒀다.
“후후! 첫인상이 이래서 중요한 거군. 아무래도 네게는 내가 가볍게 보이는 모양이야. 이 지경이 되고도 계속 꼬마라고 놀리는 것을 보니 쉽게 고쳐지지 않겠어.”
사천제일룡은 십 장 거리를 유지하고 나서야 뒷걸음질을 멈췄다.
“추명반이라는 무기가 있다지? 쯧! 진작 추명반을 사용했다면 내가 당할 수도 있었는데. 어때? 이 정도 거리에서도 잡을 수 있나? 안 되겠지? 거리가 맞지 않아. 그렇지?”
그는 다담선자를 쳐다봤다.
다담선자는 머리가 아픈 듯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네 여인은 동시에 중독되었다. 한데 중독 현상이 각기 다르다. 하나의 독이 아니라 네 가지 독이 살포되었다는 뜻이다.
‘당했어. 선공을 펼칠 줄이야.’
다담선자는 극심한 무력감 때문에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내면 추명반을 펼칠 수 있겠지만, 상대가 십 장 거리를 벌리고 있으니 맞힐 자신이 없다.
평소 같으면 거리라고 할 수도 없는데.
사천제일룡은 추명반을 자세히 파악했고, 딱 알맞은 독을 썼다.
‘실수야. 싸움을 생각했는데…….’
싸움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 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독이 몸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시간은 사천제일룡의 편이다. 앞으로 흘러가는 시간은 사천제일룡에게는 승리를, 네 여인에게는 패배를 안겨주리라.
이대로 있으면 당한다. 어떻게든 그를 흔들어야 한다.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고급 수법이든, 치졸한 방법이든…… 누가 시도하든 그를 흔들어놓기만 하면 네 여인 중 누군가는 허점을 찾아낼 게다.
“언니, 머리가 너무 아파.”
다담선자는 절혼마녀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절혼마녀가 알아차렸을까?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알아차린 것 같다. 그녀는 다담선자의 눈길을 받자마자 아랑곳하지 않고 사천제일룡에게 말을 건넸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여자로서…… 왜 연화와 일령에게만 말을 건넸죠? 저는 보이지 않았나요?”
절혼마녀가 시위를 당겼다.
그녀의 음색은 요염했다. 아니, 상큼했다. 아니다. 무엇인지 모르겠다. 몽롱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되니 맑은 음색인 것도 같다.
사천제일룡에게 통용될지 무위로 그칠지는 모르지만 절혼마녀는 암암리에 탈백섭심공(奪魄攝心功)을 시전했다.
순간, 사천제일룡의 눈가에 파랑이 일었다.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뜻밖에도 사천제일룡의 마음속에 연심(戀心)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탈백섭심공은 욕념(欲念)을 자극한다.
사천제일룡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탈백섭심공을 가볍게 받아넘길 수 있을 터인데, 흔들리고 말았다. 네 여인 중 누군가를 탐하고 싶기에 탈백섭심공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정한문 무공의 무서운 점이다.
탈백섭심공은 강력한 미혼약(迷魂藥)과 같은 효능을 나타낸다.
내공이 약한 자는 심지를 제압당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마음속에 욕념이 조금이라고 깃들어 있으면 자극을 받게 된다.
본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천제일룡은 이미 걸려들었다.
“당신같이…… 놀랍도록 빼어난 여인이 눈에 안 들어올 리 있나. 요염의 극(極)! 후후후! 당신이 절혼마녀군. 정말 아까워. 어떻게 당신 같은 여자가 낙화향에 있었는지.”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거든요.”
절혼마녀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달짝지근한 비음이 섞여 있는 듯, 손길만 내밀면 품 안에 안길 수 있다는 듯…… 유혹의 냄새가 짙은 음성이었다.
사천제일룡은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하고 평소의 대화처럼 담담히 받았다.
“아니지, 아니지. 거긴 사람 사는 곳이 아니야.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곳이지. 후후후!”
절혼마녀에게는 모욕 중에 모욕이다. 하나 이것이 사천제일룡의 본심이기도 하다.
일령이나 금연화를 보면서는 눈빛이 호기심에 일렁거렸으나 절혼마녀를 대하면서는 경멸을 담았다.
그는 사람을 보지 않고 환경을 본다.
“제가 구더기란 말인가요?”
“구더기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고…… 구더기들이 훑고 지나간 몸을…… 뭐, 마야 같은 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하하하하!”
절혼마녀는 대답을 삼갔다.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아니다. 증오나 미움이 머릿속을 휘저으면 탈백섭심공이 깨진다. 이 상태를 유지하여 허점을 장악하면서 일격을 준비해야 한다.
그녀는 다담선자에게 눈짓을 했다.
“언니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도 그렇겠네요. 말을 섞을 가치도 없는 여자. 그렇죠?”
다담선자가 물었다.
사천제일룡의 눈길이 다담선자에게 꽂혔다.
“당신이 다담?”
“다담선자라고 불러주세요. 절 다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세상에 오직 한 분뿐이거든요.”
“마야? 후훗! 마야, 마야라……. 좋지. 마야는 염복을 타고 났어. 하지만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거든. 그대들은 마야에게 잘 어울려. 아주 좋은 짝이야.”
‘다담도 아냐.’
절혼마녀는 사천제일룡이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녀는 일령에게 눈짓을 했다.
“꼬마야, 너 정말 돈 안 든다고 아무렇게나 지껄일래? 이 누나에게 볼기짝을 맞아야 정신 차리겠어?”
일령의 말은 사천제일룡 같은 자에게는 상당한 모욕이다. 하지만 그는 재미있다는 듯 맑은 웃음을 띠며 받아쳤다.
“일령. 너는 마인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어때? 지금이라도 나를 따르는 게.”
‘일령이야!’
절혼마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탈백섭심공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내가 누구를 마음에 품고 있는지까지 알아냈다.
일령이 사천제일룡의 눈길을 끌어당겨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어떻게든 다담선자를 회복시켜야 한다. 추명반을 던져 낼 수 있을 정도까지 만이라도. 한데,
“싫든 좋든…… 일령, 넌 내 발을 씻기게 될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별로 어렵지도 않은 말인데 말뜻을 이해하기가 이토록 어려워서야. 기껏 마음에 둔 여인에게 한다는 말이 발을 씻긴다고?
‘일령도 아냐!’
절혼마녀가 금연화를 쳐다볼 때, 비위가 틀어진 일령이 대뜸 쏘아붙였다.
“호호호! 꼬마가 못하는 말이 없네. 네가 보기에는 이 누나가 젖비린내 나는 꼬마 아이 발이나 씻길 것 같아?”
나쁘지 않다. 사천제일룡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찔러보는 역할을 한다.
“하하하! 넌 내 발을 씻기게 될 거라니까. 왜? 안 믿겨? 하하하! 그것도 아주 공손하게 씻겨야겠지. 잠시 본분을 잊고 중원을 활보했지만, 타고난 팔자는 하늘님도 어쩌지 못하는 법이거든.”
“뭐!”
“시비는 시비로 돌아가야지. 안 그래, 일령?”
“이…….”
일령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천제일룡은 그녀가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사람은 타고난 팔자대로 살아야 하는 거야. 마인으로 태어난 마야는 시궁창이나 뒤지며 살아야 했어. 그대들…… 뛰어난 미모지만 난 관심없어.”
그의 눈길이 다담선자와 절혼마녀에게 머물렀다.
“창기가 검은 뭐 하러 들었나, 침상이면 족할 것을. 다담. 아니, 다담선자라고 불러달라고 했지? 다담선자. 말이 좋아 선자지 배에서 술을 파는 기녀지 않은가. 사내의 체취와 술 냄새로 찌든 몸뚱이는 마야에게나 어울려. 마야와 너희 둘, 그래서 잘 어울린다는 거야.”
정말이다. 이것이 사천제일룡의 본심이라면, 그의 마음이라면,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이라면 그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그가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섭다.
그는 존귀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무림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밥상을 어지럽힌 쥐새끼이니 즉시 잡아 없애야 한다.
“그나마 내가 널 곁에 두려는 것은 네가 아직 처녀지신이기 때문이야. 후후!”
확실했다. 그가 일령이나 금연화를 보는 눈과 절혼마녀, 다담선자를 보는 눈이 확연히 달랐다.
한쪽은 탐욕이 이글거렸고, 다른 쪽으로는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살기를 뿜어냈다.
이제 확실해졌다. 사천제일룡은 금연화와 일령에게 욕심이 있다. 정신병자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지만 절혼마녀와 다담선자에게는 털끝만치도 욕념이 없다.
독의 성질도 짐작된다. 금연화와 일령에게 살포한 독은 정신을 잃는 것에 그칠 것이고, 절혼마녀와 다담선자를 중독시킨 독은 생명을 빼앗을 게다.
“호호호! 동생, 동생은 좋겠네. 사천제일룡의 사랑을 받는다면 영광 중에 영광이지 않겠어? 동생이 부러워. 나도 자하부 같은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절혼마녀가 금연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두 여인의 눈과 눈이 마주치며 알 수 없는 빛이 번쩍였다.
제4장 솔미파(甩尾巴) ― 꼬리를 휘두르다
1
금연화는 사내를 유혹하지 못했다. ‘유혹’이라는 말 자체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인연이 있어서 만나고, 정들고, 그러다가 연모의 마음이 생기면 사랑한다는 것이 그녀의 남녀관이다. 마음에 든다고 유혹하여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이해는 하지만 그녀에게는 맞지 않았다.
사천제일룡이 그녀에게 욕심을 품었다? 우습다. 언제 봤다고 욕념이 생긴단 말인가. 처음 본 자리에서 욕념을 품었다는 말이니 사람 탈을 쓴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인가.
더럽다. 미색에 혹해 탈백섭심공에나 걸려드는 사내라니.
본인 입으로 말한 게 있다. 낙화향 같은 곳에 몸을 담은 여인은 구더기나 다름없다고. 그렇다면 명문정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 모두 깨끗한 것인가. 머릿속에는 구더기를 담고 있으면서 깨끗한 의복만 걸치고 있으면 되는 것인가.
탈백섭심공이 세상 사내를 모조리 녹여 버리는 절공이라고 해도 사천제일룡 같은 사내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한술 더 떠서 할 수 있으면 유혹까지도 해야 된다.
‘언니는 어떻게 이런 일을 매일 했을까?’
낙화향에서 절혼마녀를 봤을 때는 그녀가 하는 일이 창기 일이니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참으로 힘든 일이었겠어.’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 느껴보는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금연화는 절혼마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사천제일룡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아무것도. 가만히만 있으면 될 거요.”
금연화가 말을 건 순간 상황은 더 나쁜 쪽으로 진행되었다.
사천제일룡이 탈백섭심공에서 벗어난 것이다.
절혼마녀가 계속 말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탈백섭심공은 유지했을망정 네 여인을 노려보는 긴장의 눈길은 멈추지 못했을 게다.
금연화가 말을 건 지금, 탈백섭심공은 깨졌지만 그의 눈길은 금연화에게 고정되어 있다. 약간의 방해만 있어도 즉각 곤두세워질 방심이지만, 절혼마녀가 원했던 바다.
“좋아요. 인정해요. 우리 모두 중독되었어요. 당신 마음먹기에 따라서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