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09
209
“소저는 살 거요.”
“누가 죽나요?”
“두 사람은 살고 두 사람은 죽을 거요.”
사천제일룡은 확실히 탈백섭심공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까지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노골적으로 속마음을 드러냈으니 창피하다면 창피할 수도 있다. 처음 본 여자에게 ‘널 침실로 데려가고 싶다’고 말한 것과 진배없으니 참으로 난감하다.
한데도 그는 태연했다.
자신이 왜 허튼소리를 했을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해 내지 못한다면 강호에 몸담을 자격이 없다 할 것이다.
절혼마녀가 말을 걸어왔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는데, 그렇다면 절혼마녀가 수작을 부린 것이지 무엇인가. 독에 중독되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여자가 말과 교태만으로 부린 수작이라면 미안공(迷眼功)밖에 더 있나.
사천제일룡은 탈백섭심공까지는 맞추지 못해도 미안공의 일종에 당했다는 사실은 눈치 챘다.
그래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본심을 드러냈건 말건, 절혼마녀가 수작을 부렸건 말건 중독은 더욱 깊어지고 있고, 잠시 후면 자신이 예측한 결과가 나타날 테니 상관없다는 투였다.
금연화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안다.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다. 몸이 말을 해주고 있지 않은가.
마비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입술 감각이 죽어서 남의 입술처럼 느껴진다.
금연화는 조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산 사람은 어떻게 할 거죠?”
“말했다시피 한 여자는 데려다 발을 씻길 것이고.”
“또 한 여자는요?”
금연화는 사천제일룡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사천제일룡은 방금 전의 일도 있고 해서인지, 당당함을 나타내려는 듯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마주쳐 왔다.
이것이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 두 사람은 서로의 눈밖에 보지 못한다. 옆에서 암기를 뽑아 들어도 신경이 미치지 못한다.
절혼마녀는 황금 같은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번개같이 손을 휘둘렀다.
표적은 다담선자의 등이다. 독맥(督脈)을 따라 단숨에 대추(大椎), 도도(陶道), 신주(身柱), 신도(神道), 영대(靈臺), 지양(至陽), 근축(筋縮), 중추(中樞), 척중혈(脊中穴)을 쳐야 한다.
퍽! 퍼퍼퍽……!
창끝만큼이나 날카로운 지력(指力)이 다담선자의 등을 훑었다.
진기가 모이지 않아서 위력이라고는 전혀 깃들지 않은 손장난이었지만 독맥을 자극하는 효과는 있었다.
다담선자 역시 진기를 모을 수 없다.
평소 같으면 모기에게 물린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릴 타격이지만, 지금은 진기가 흩어져 병약한 노인이나 다름없는 몸이니 타격이 고스란히 전달될 게다. 보통 사람이 보통 사람을,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를 때린 것처럼.
“으음!”
다담선자가 가는 신음을 흘렸다.
그 정도면 족하다. 충격은 일시간 잠력(潛力)을 격발시킬 것이고, 추명반을 쏘아낼 기력 정도는 회복할 수 있다.
“휴우! 금 동생, 잠시 뒤로 물러나 줄래?”
다담선자가 한결 편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또 한 여자는…… 글쎄, 구애(求愛)를 해볼까 생각했소만.”
사천제일룡이 다담선자의 뒤로 물러서는 금연화를 보며 말했다.
금연화는 이미 듣고 있지 않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련의 눈속임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지만, 어떤 말을 해도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독백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달라진 것은 그것뿐이다. 그의 모습은 처음 나타났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강적을 앞에 둔 사람처럼 진중했다. 네 여인이 중독되어 무기력해졌는데도.
절혼마녀의 상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누가 봐도 독기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일령이나 금연화도 나설 처지가 아니었다. 사독(死毒)이 아니라 미독(迷毒)에 당했다고는 하지만 마비가 점점 심해지고 있으며, 이지(理智)가 꺼져 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한 사람은 눈을 감으면 끝이다. 눈을 감기 전에 본 세상이 마지막 세상이다.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뜰 수 있다. 이것은 보장된 부분이니 안심하고 눈을 감아도 된다. 하나 눈을 뜬 다음에 보는 세상은 예전처럼 자유롭지는 못하리라.
세 여인이 한계에 다다라 난감해할 때, 다담선자는 양볼 깊숙이 보조개를 피우며 활짝 웃었다.
“사천제일룡, 이제 그만 하는 게 어때요?”
중독에서 벗어났나? 음성이 맑고 깨끗하다.
단순한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아니다. 단호하고 당당한 다담선자의 음성이 허장성세라면, 그녀야말로 천의 얼굴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녀일 것이다.
순간, 사천제일룡은 있을 수 없는 일을 봤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매서운 눈길로 다담선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번에 훑어 내렸다.
사천당문 사람으로서 중독된 자와 중독되지 않은 자를 구분해 내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
“휴!”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녕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다담선자에게 쓴 독은 사독(死毒)이다. 반드시 죽일 자에게 쓰는 독으로 해약도 만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살릴 생각이 있으면 쓰지 말고, 쓰면 반드시 죽이겠다는 뜻으로.
그런데 벗어났다. 독에 관해서는 무불통지라는 사천제일룡의 눈앞에서, 그가 알지 못한 방법으로 감쪽같이 해독해 냈다.
분명히 중독되었는데.
절혼마녀가 등에 일격을 가하기 전까지만 해도 죽을 운명이었는데.
절혼마녀에게 고명한 수법이 있었나?
아니다. 그녀의 일격은 약간의 잠력만 격발시킬 뿐, 해독과는 전혀 무관하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 확실하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해독했느냐 하는 궁금증은 나중에 풀어도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느냐이다.
어쨌든 싸움의 주도권은 다담선자에게 넘어갔다.
독이 통하지 않는다면 더 해볼 게 없다. 암기를 사용할 수도 있고, 무공을 쓸 수도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추명반을 당해낼 수는 없다. 추명반이야말로 사천당문이 인정하는 이 세상 최고, 최강의 병기니까. 삼척동자라도 추명반만 다룰 줄 알면 당장이라도 사천제일룡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으니까.
다담선자는 삼척동자가 아니다.
그녀는 마도 사상 제일 빨랐던 십족신마(十足神魔)의 독문신법을 지녔다.
따라잡을 수 없는 빠름, 눈으로 볼 수 없는 추명반.
독을 벗어나 우격다짐이 된다면 일 초도 버터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사천제일룡은 태연했다.
‘그래 봤자 일 대 일의 승부지. 주도권도 아직 내가 쥐고 있고, 세 여자가 중독되어 있는 이상…… 해약을 원하는 한 추명반을 쏘아낼 수는 없어.’
그는 다시 한 번 독을 쓸 생각이었다. 전보다 훨씬 독한 독으로. 이번에도 벗어나는지 보고 싶어서. 그러자면 이목을 돌려야 하고, 이목을 돌리는 데는 말을 건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세상에 나선 이래로 독이 통하지 않는 인간은 딱 한 명 보았지. 마야. 그자를 대했을 때 할 것이 없어서 답답했는데, 지금 또 그렇군. 당신은 내 독이 통하지 않는 두 번째 인간이야. 후후후! 마도에는 괴물들이 많군. 흥미로워.”
다담선자에게 쓴 독은 홍명(鴻溟)이었다.
생독(生毒)의 일종으로 살아 있는 생물에게서 채취한다.
독사에게서 독을 뽑아내듯이, 독초의 즙을 짜듯이 홍명은 기러기의 정수리를 쪼개서 얻어낸 독이다.
독 기러기도 있나? 없다. 기러기는 독을 양생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여러 매개체 중에서 백독을 투여했을 때 기러기만이 살아남았기에 기러기가 사용되었다. 만약 쉽게 구할 수 있는 오리나 닭을 쓸 수 있었으면 그리했을 게다.
기러기는 백독을 소화시킨다. 물론 백독연(百毒宴)의 순서에 입각해서 독을 투여하여 면역력을 극대화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기러기는 백독의 정수(精髓)를 정수리에 모은다. 이것이 홍명이다.
홍명의 해약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홍명의 성분을 분석하지도 않았다. 중독되면 세상에 알려진 온갖 구명책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극독이기에 절대사독으로 지명하였기 때문이다.
희귀 가치를 높인 것이다.
한데 다담선자는 홍명에서 벗어났다. 그럼 이번에는 어떤 독을 사용해야 할까?
‘토혈루(兎血淚)!’
홍명을 능가할 독은 없다. 하지만 홍명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독은 있다.
기러기 대신 토끼가 사용되었고, 정수리에 모으는 대신 붉은 눈물을 흘렸으며, 백독연이 끝나고도 살아남았다는 것과 혈루를 쏟아낸 순간 한 줌 혈수로 녹아버렸다는 것이 다를 뿐 치명적이라는 점에서는 우열을 논할 수 없다.
사천제일룡이 토혈루를 생각한 것은 홍명은 양(陽)의 성질을 지닌 독이지만 토혈루는 음(陰)의 성질을 지녀 차갑기 때문이다.
다담선자의 몸은 양독을 몰아내느라 음기가 지나치게 극성해 있다. 그런 상태에 음독을 투여하면 몸이 독을 친구로 받아들여 거부반응 없이 동화된다.
즉사다. 추명반을 날릴 틈도 없다. 중독되었다는 느낌도 받지 못한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턱이 없다. 하던 행동을, 하던 말을 계속하다가 풀썩 쓰러지면 끝이다.
겨드랑이에 끼어놓고 다니던 토혈루가 팔을 타고 내려와 손에 쥐어졌다.
그때, 다담선자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추명반을 쏘아내려는 것일까? 왜? ‘이제 그만 하는 게 어때요?’ 이 한마디 묻고서 싸움을 시작해? 독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두 명이나 봤다는 말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싸움을 시작할 때가 아니다. 빨리 해약을 달라는 위협 정도겠지.
다담선자가 말했다.
“생각 밖으로 눈치가 없는 분이거나 상당히 호전적인 분이군요. 또 독을 준비하시다니……. 그만 하자고 한 말이 무색하네요. 방금 전에 독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두 명 봤다고. 그게 마야와 저라고 하신 말씀은 정말인가요? 그렇군요. 독을 준비하기 위해서 눈가림을 한 거군요. 호호호!”
사천제일룡은 깜짝 놀랐다.
‘정말 추명반을 쓰려고 해! 해약, 해약은 언급도 없어. 뭐야? 해독은 자신있다는 말이야!’
그는 추명반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독과 암기의 명가 출신인만큼 추명반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다담선자의 팔을 댕겅 잘라내어 추명반을 손아귀에 넣고 싶다. 방해하는 사람만 없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추명반을 분해해 보고 싶다.
궁금증도 생겼다.
다담선자가 세 여인을 해독할 수 있을까?
절혼마녀에게 쓴 것은 독이 아니다. 균이다. 철녹균(鐵碌菌)이라고, 푸른 철에 자라는 균을 채취하여 하독에 용이하게끔 정제한 것이다.
철녹균을 해독할 수 있을까?
일령에게는 쇄뇌산(碎腦散)을 썼다.
미혼산(迷魂散)의 일종이지만 그냥 정신만 잃는 게 아니다. 독기가 뇌를 건드려 백치로 만든다.
되돌릴 수는 없다. 망가진 뇌를 어떻게 고친단 말인가.
쇄뇌산은 벌써 뇌를 휘젓고 있으리라.
어떨까? 몰아낼 수 있을까?
금연화에게 쓴 것은 정말 알아내지 못할 게다.
탕공수(湯功水).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을 뽑아내듯이 무인의 내력을 고갈시켜 버리는 산공독(散功毒)이다.
시중의 산공독은 잠시 동안만 내력 운용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탕공수는 영구히 단전을 폐쇄시켜 두 번 다시 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든다.
탕공수는 사천제일룡이 직접 개발한 독이며, 아직까지 세간에 흘러나간 적이 없다.
귀신이라 할지라도 탕공수는 알아내지 못한다.
사천제일룡은 급히 손을 휘저었다. 손에 들렸던 토혈루를 급히 되돌려 겨드랑이 사이로 밀어 넣었음은 물론이다.
“아니, 아니. 추명반을 상대로는 싸우지 못하지. 장가도 가보기 전에 죽기는 싫다네.”
휘익!
바람이 일었다.
사천제일룡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
절혼마녀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파랗게 질린 입술이 덜덜 떨려 나왔다.
절혼마녀뿐만이 아니다. 일령은 극심한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있는데, 그 모습이 사뭇 애처로웠다.
금연화도 멀쩡하지 못했다.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다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휘청거리기를 반복했다.
다담선자는 세 여인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들 이렇게 미련해. 아직도 모르겠어?”
“뭐, 뭐를…….”
“어, 언니! 제발 나 좀…….”
세 여인의 사정은 급박하다 못해 절박했다.
다담선자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금연화에게 다가서며 급히 말했다.
“쯧! 마야는 우리 무공을 일취월장(日就月將)하게 도와줬어. 어떻게 도와줬을까?”
다담선자는 속 시원히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천제일룡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귀 기울여 듣고 있다. 그와 같은 사람에게 알고 있는 바를 들려주는 것은 천고의 기연을 안겨주는 것과 진배없다. 사천제일룡이 비밀을 알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적어도 지금보다 서너 배는 강해지리라.
강적 중에 한 명을 더 강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언젠가는 마야와 부딪칠 것이 자명한 자인데.
“일취월장…… 언제……?”
금연화가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
“얼마 전에. 바로 얼마 전에.”
다담선자와 금연화의 거리는 귓속말을 나눌 정도로 가까웠다. 하지만 다른 여인들이 들으라고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