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14
214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은 하나밖에 없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땅에 살기 시작한 이후로 악마라고 불린 자들은 꽤 많았지만, 이방인은 그들 모두를 쓸어버리고 남을 진정한 악마였다.
싸움은 무의미했다.
철사문주가, 자식이 일 초도 견뎌내지 못했다.
싸움을 한 게 아니라 도살당한 것이다. 철저하게 무너졌다. 무공 차이가 너무 현격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이자는. 누구길래 다짜고짜 살도를 휘두르는가. 무신에 버금가는 무공을 지닌 자인데 무슨 연유로 철사문을 치는가. 봉문까지 한 문파를.
노문주는 이방인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짙디짙은 살소(殺笑)를 띠우면서.
노문주는 언월도를 들어 휘둘렀다. 자신의 목을 향해.
지금 그에게는 마야와 겨뤘을 때 보여주었던 결기(決氣)나, 깨끗이 패배를 승복하던 호기(豪氣)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문주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공포가 전부였다.
‘지독해! 너무 지독해!’
산주는 인상을 찡그렸다.
콘의 무자비한 손속을 질릴 만큼 보아왔지만 새로운 죽음을 볼 때마다 등에서 소름이 돋았다.
수는 담담했다. 피비린내를 마치 향기로운 향냄새 맡듯이 눈을 감고 음미하기까지 했다.
수도 콘을 닮아간다. 잔인함, 무자비함이 인성(人性)을 갉아먹어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마녀로 만들었다.
“호호호! 호호호!”
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주검을 질끈질끈 밟고 다니기도 했고, 흥미로운 자의 육신은 칼로 조각을 하기도 했다.
이 소녀가 과연 순박했던 여자 아이, 부족의 죽음을 보면서도 저항할 생각조차 못했던 소녀였던가. 검 앞에서 부들부들 떨기만 하던 그녀가 맞는가.
‘이건 저주야, 저주!’
산주는 백 일이 빨리 지나기만을 고대했다.
서군봉이 건네준 백일몽은 콘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콘을 이용하겠다는 생각도, 서군봉이 무슨 목적으로 백일몽을 주었는지도,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오직 콘을 죽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백일몽이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백 일 후에는 육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빨리 돈다는데, 그 정도로 죽일 수 있을까? 백일몽이 사천당문에서 흘러나온 물건이고, 사용이 금지된 금독(禁毒)이라니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야란 놈이 있어. 알아?”
콘이 시녀를 붙잡고 물었다.
“아, 알아요.”
시녀는 새파랗게 질려서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형편없이 당했다면서?”
“그, 그래서…… 보, 봉문을…….”
“수!”
콘이 수를 불렀다.
수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염향(艶香)이 피어난다. 눈길이 엉덩이로 향해진다. 씰룩거리는 엉덩이로. 그리고 숨이 가빠온다.
수는 타고난 요녀다.
“죽여.”
콘의 말을 들은 시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하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죽지 않으려면 도주하는 길밖에 더 있으랴.
그녀는 도주하기 위해 일어섰다. 그 순간,
푸욱!
칼 한 자루가 시녀의 복부를 꿰뚫었다.
“하악! 이 손맛…… 너무 좋아.”
수는 부들부들 떨면서 죽어가는 시녀의 마지막 경련을 즐겼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겠군.’
웬만큼 죽이다 보면 살인도 질리는 법인데 콘과 수는 타고난 살인마들이다.
살아 있는 자도 죽였다. 시녀들, 부인들, 어린아이들…… 저항 능력을 상실한 힘없는 부녀자들은 그녀 몫이었다.
콘과 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철사문을 혈해(血海)로 이끌었다.
제6장 료불기(了不起) ― 매우 놀랍다
1
호채마가 갈 곳은 없었다. 세상은 그들을 원하지 않았다.
“저…… 죄송하지만 영업 끝났는뎁쇼.”
주뼛거리며 다가온 점소이는 많이 듣던 소리를 늘어놓았다.
‘왜’냐고 물으면 어디를 가야 한다거나 식재료가 동이 났다거나 하는 한눈에 봐도 거짓말이 뻔한 소리를 해댈 게다.
“간단한 국수면 되는데, 정말 안 되겠어요?”
“죄송합니다. 지금은 도저히…….”
하루를 꼬박 굶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산길을 택하는 건데, 도읍으로 들어선 후인지라 꿩 한 마리 잡을 길 없다.
“이것들이 정말 너무하는군.”
수검이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냉대를 참아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어쩌랴. 사람들은 그들이 호채마임을 안다.
정도무인들을 무참히 도륙했으며, 추혼단까지 몰살시킨 자들.
호채마에게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것은 호채마와 한통속이라는 오해를 산다.
호채마가 머무를 때는 아무 일이 없을지 모른다. 하나 그들이 떠나고 난 후, 겁쟁이 의인이 있어 천하 정의 운운하며 검을 뽑는다면 악 소리도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
마인을 돕는 일은 정도 무인이라는 사람들에게 날 죽여줍쇼 하고 청부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호채마의 동태를 소상히 아는 것일까?
마주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인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감시자다. 호채마를 본 사람은 주위 사람에게 즉시 말을 전하고, 말은 날개를 달고 천 리를 간다.
호채마의 일거수일투족이 알려졌다.
술을 마신다? 술병을 비우기도 전에 백 리 밖에 있는 사람이 소식을 전해들을 정도다.
사정이 그러하니 누가 그들에게 음식을 줄 것이며, 잠자리를 제공할 것인가.
“휴우!”
다담선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주점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다른 주점들은 문을 닫느라고 난리법석이다. 이쪽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혹여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길까 봐 전전긍긍한다.
“가요.”
“쳇! 정말 사람들이 너무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잖아.”
일령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모두 푸념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들과 거리를 두려 한다.
억지로 빼앗는 것은 지금도 가능하다. 점소이나 주점 주인을 힘으로 억압하고 음식을 찾는다면 그깟 것 먹지 못할까.
하나 그리하면 영영 마인이란 오명을 벗지 못한다.
정도무인들을 무참히 도륙할망정 행동거지는 올바라야 한다. 그래야 호채마와 유계의 마인들이 구분된다.
강하고 또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 무인의 업(業)이다. 자족하여 주저앉거나 퇴보한다면 무인의 생명은 끝났다고 본다.
호채마는 무인의 숙명에 충실한 사람들일 뿐이다.
살기가 진한 것도, 초식이 잔혹한 것도, 결과가 끔찍하여 사용이 금지된 무공도 강해지기 위해서 취한다.
인성(人性)만 잃지 않으면 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인성을 잃은 자와 잃지 않은 자의 차이는 엄청나다. 호채마와 유계의 차이다. 무공 정진에 분투하는 것과 살육을 즐기는 차이가 될 것이다.
그래도 호채마를 탓하고 싶은가? 무공으로 이기면 된다. 호채마가 못마땅한 사람은 언제든 도전하면 된다. 무리를 지어서 공격해 와도 좋고, 호채마 중 일인을 지목하여 결전을 신청해도 괜찮다.
모두 받아준다.
이것 외에 호채마와 정도무인들이 다른 점은 없다.
사람들의 냉대가 정도를 지나쳤다고 해서 무력을 휘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낄낄! 멧돼지 고기도 괜찮잖아. 부지런히 움직이면 자정 전에는 먹을 수 있을 거야. 쩝! 술만 곁들이면 딱 좋은데.”
시마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멧돼지 한 마리 잡는 건 일도 아니다. 잡아서 손질하고 익을 때까지 굽는 것이 고역스럽다. 허기가 잔뜩 져 있는데 구수한 냄새를 맡으면서 견뎌야 하다니.
이럴 땐 차라리 천멸도 살수들이 부럽다.
그들은 지금쯤 요기를 끝냈을 게다.
두더지, 지렁이, 개구리, 박쥐…….
그들이 먹지 못하는 것은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움직이는 것은 모두 좋은 식량이다. 땅속에 숨어서 몇날 며칠을 내버려 두어도 굶어죽지 않는 비결이다.
“간단한 걸로 잡자고. 멧돼지 같은 건 시간을 두고 천천히 구워먹어야 하는 거고, 지금은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었으니까 새가 어때? 조그만 놈으로 여러 마리.”
수검이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지 불퉁거렸다.
저녁노을이 들판을 물들인다. 호채마가 긴 밤을 밝힐 산도 붉게 물들었다.
한겨울이 아닌 것만도 감사해야 할 판이다. 한여름도 곤란하다. 산모기는 사람을 혹 덩어리로 만들어놓는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돌지만 산에서 지내기에는 딱 좋은 가을. 그나마 계절은 그들 편이다.
호채마는 산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어느 부인(夫人)께서 다담선자이신지?”
낯선 사내가 호채마 앞으로 다가와 포권지례를 취하며 말했다.
그는 부인(婦人)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부인(夫人)을 썼다. 마야의 부인을 일컬으면서 존중심을 담았다.
“전데요.”
다담선자가 앞으로 나섰다.
호채마 중에 낯선 사내를 경계하는 사람은 없었다.
행동거지만 봐도 상대의 무공을 짐작할 수 있는데, 사내는 경계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했다.
“변변찮지만 음식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벌써 보았다. 사내의 등 뒤로 야전 천막이 쳐져 있고, 그 안에서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누구시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
“최대한 존중해서 대접하라는 명이라 받듭니다만,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마인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는 게 썩 좋지는 않군요. 전 제 할 바를 하는 것이니 그 외에 것은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후후! 말은 공손하게 하지만 말뜻은 처먹으라는 소리보다 더 하군. 이봐, 그렇게 말하려면 아예 내놓고 말하는 게 어때? 명령 뒤에 숨어서 군소리를 하는 꼴이 역겹게 보이는데 말이야.”
마도가 신경을 건드렸다.
“그럼 맛있게 드시기를.”
사내는 다시 한 번 포권지례를 취한 후, 두 번 다시 보기 싫다는 듯 냉랭한 태도로 등을 돌렸다.
“도깨비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의 등 뒤에 대고 혈유가 중얼거렸다.
음식에는 독이 없다.
독이 있어도 먹었다. 호채마는 세상에 알려진 경락을 운용할 뿐 아니라 신세계나 다름없는 수로까지도 운용한다. 그런 그들에게 독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잡채를 한 입 먹고 진기를 운용해 보고, 게살을 파먹고 진기를 운용하고…….
모든 음식을 꼼꼼히 점검했지만 독은 없다.
“이거 정말 대접인데. 안심하고 먹어도 되겠어.”
아직도 망설이는 사람은 없었다.
호채마는 빙 둘러앉아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음식을 먹었다. 사내가 누구인지 왜 음식을 제공하는지는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허기를 달래는 데 주력한다.
“궁주님의 선물이에요.”
어느 정도 요기가 끝난 후, 다담선자가 불쑥 말했다.
“말투나 행동으로 봐서 아까 그자는 정파인일 거예요. 마계(魔界)와는 연락이 닿지 않고, 유계는 천적이나 마찬가지이니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고.”
마계와는 연락이 닿지 않는 게 아니다.
호채마와 같이하는 사람들…… 마야와 뜻이 비슷한 사람들…… 그들은 거의 대부분 몰살당했다. 오백 마인이 죽었을 때, 마계는 소멸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럼에도 마계를 말한다. 이 세상이 마인을 꾸준히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인성이 사악한 마인은 당연히 공적으로 분류하여 제거해야 하지만, 단지 마음에 안 들게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마인 낙인이 찍히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런 사람들은 이 시간에도 생기고 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마계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유계는 호채마도 상종하지 않는다. 살인이 즐거워서 살인을 하는 자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정도인들은 호채마를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낯선 사내는 정도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하오문도 있고, 마계의 생존자일 수도 있는데.
마야가 정도인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천멸도 살수들이 그의 곁을 떠날 때, 그는 정도인들의 공격권 아래 놓여 있었다. 그리고 대숲 싸움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
싸움의 흔적은 없었다. 모두 한결 같은 의견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멸도주가 확신하니 믿어도 된다.
싸우지도 않고, 행방불명이라.
이는 마야가 자발적으로 따라갔다는 뜻이고, 지금쯤 모종의 결과가 나왔으리라. 마야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어떤 결과를 얻어냈어야 한다.
그게 이거다. 낯선 사내가 마련해 준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내일부터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주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네요.”
“난데없이 궁주님 선물은 뭐고, 흥미로운 일은 또 뭐야?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 봐.”
시마가 이제야 술병을 입에서 떼었다.
다담선자는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해 나갔다.
꼭두새벽, 어제 그 사내가 찾아왔다.
“항포(?浦)로 가라는 전갈이오.”
“전갈? 누구 전갈?”
대뜸 퉁명스럽게 받은 사람은 혈유다.
“말을 전했으니 가든 말든.”
“자식…… 그렇게 더러우면 말을 전하지 말던가. 보아하니 무공께나 수련한 자 같은데, 그 나이에 남의 심부름이나 하면서 목에 핏대 세울 건 없잖아?”
“뭐야?”
“꼴값 떨지 말고 가라. 배짱 있으면 부딪쳐 보든가.”
사내는 매서운 눈길로 혈유를 노려보았다. 하나 공격을 가해오지는 못했다.
“붙어보고 싶어? 내가 먼저 시작해 줘?”
“너, 이 꼬마…….”
쒜엑!
사내의 입에서 ‘꼬마’라는 말이 터지기 무섭게 혈유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