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17
217
금적금노는 대형 기루를 사들일 수 있었다. 그가 전력을 기울였다면 강을 한눈에 굽어보는 좋은 위치에 새로 지을 수도 있었다.
왜 하필이면 서평루인가.
서평루의 서평은 토로할 서, 부평초 평을 써서 뜨내기들이 잡담을 쏟아놓는다는 뜻이다.
과거에 뜻이 없거나 혹은 낙방한 선비들이 은자 몇 푼에 체면을 지키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서평루다.
기녀를 기녀로 대하지 않고 한 여인으로 대하며, 술자리에서 주고받는 말도 주로 시서(詩書)이니, 자연히 기녀들의 학식 또한 높아야 말 상대라도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서평루는 무인 출입이 없고, 문인들만 득실거리는 책 냄새 풍기는 기루였다. 금적금노는 항포를 돌아본 후, 희소가치가 제일 높으면서 운영이 안정적인 기루를 택한 것이다.
가야금 소리, 비파 소리, 피리 소리, 껄껄거리며 웃는 소리…….
서평루의 밤은 온갖 소리가 버무려졌다. 술 냄새와 음식 냄새가 진동하는 것도 다른 기루와 다를 바 없다. 몸에 넘치게 술을 마신 취객이 술주정을 부리는 것도 똑같다.
그런데도 서평루는 왠지 조용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호채마는 마야의 말대로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일과를 방 안에서 처리했다.
그들이 머무는 별채는 공식적으로는 비어 있었다.
한 사람, 혈유만이 간혹 들락거렸다. 하나 그의 행적이 워낙 은밀해서 왔다가는 사람을 본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호채마가 몰살당했네요.”
혈유가 가져온 서신에는 호채마 몰살에 관해서 모든 과정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호채마를 대신 죽인 사람들은 누굴까?
여자가 네 명이고, 남자가 일곱 명이다. 여자는 절색이어야 하고, 남자는 신장이며 연령이 각기 다르다. 인위적으로 꾸미기에는 너무 손이 많이 간다.
죽음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서신에는 그들 모두가 정말로 목숨을 빼앗겼다고 적혀 있다. 정말 죽인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가장한 것인가?
어느 쪽이든 대단하다. 죽음이 사실이라면 죽을 줄 알면서 제삼무신가에 도전한 사람들은 무어란 말인가. 그런 사람을 어디서 구했을까? 거짓 죽음도 놀랍다.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다는 뜻이니 감탄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호채마는 죽었다.
앓던 이를 뽑아낸 것처럼 속 시원하리라. 호채마의 죽음을 원한 사람이 한두 명이었나. 남무림 사람치고 호채마에 이 갈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오백 마인 참살에 이어 남무림 무인들이 환호를 내지를 쾌거다.
마야는 매미날개처럼 가느다란 흑면(黑面)을 내놓았다.
“밀삭(蜜索)으로 만든 가면이야.”
모두 무풍곡 싸움을 떠올렸다.
적안사태, 그리고 팔귀당천지관. 천멸도 살수들도 큰 피해를 봤던 지옥 불길. 절혼마녀가 여덟 사내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
“밀삭으로 만든 거라서 얼굴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고, 사용하기 괜찮을 거야.”
일령이 대뜸 하나를 들어 뒤집어썼다.
새까만 가면에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뚜렷하게 부각된다.
“이거 너무 가벼워요. 안 쓴 것 같아요.”
“앞으로 무림에 나설 때는 꼭 써야 할 거야.”
“무림인에게 본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 이게 우리가 지켜야 할 철칙 제일조가 된 셈이군요?”
“후후! 얼굴뿐만 아니라 모든 걸 숨겨야지. 행동, 음성. 아는 사람과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연습해.”
마야는 콩알처럼 작고 둥근 환단을 한 움큼이나 내놨다.
“변성환(變聲丸)이야. 효과는 한 시진. 우선 한 사람당 열 개씩 돌아가도록 만들었으니까 아껴서 사용해.”
얼굴도 잃고, 음성도 잃고…… 비로소 정말로 호채마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실감이 들었다.
“음! 이건…….”
두 번째 서신을 펼쳐 든 다담선자는 속 시원히 내용을 읊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무슨 내용이야?”
마야가 물었다.
“첫 임무부터 쉬운 게 아니네요. 콘을 생포하라.”
“헐! 생포? 그 살인마를? 듣자니 철사문 노문주 그놈도 대적 한 번 못하고 제 목을 제가 뎅겅 잘랐다는데, 그런 자를 죽이는 것도 아니고 생포해?”
시마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콘 곁에 있는 사람은 육신녀 서군봉, 산주, 그리고 수라는 여자라네요.”
“아무래도 서군봉 고거하고 강금산 그놈하고는 전생에 뭔가가 있었어. 그러니 이렇게 악착같이 붙어 다니지. 남녀가 접붙어도 지금쯤이면 싫증날 만한데, 고것들은 싫증도 안 나나벼.”
“흥! 그러니까 할아범이 홀아비지. 여자를 알아, 뭐를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만 거칠어가지고는. 그런 사람 좋아할 여자는 아무도 없네요.”
“요런 꼬마가!”
“꼬마라는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알아서 해요!”
“나도 마찬가지. 시마, 꼬마라는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게 아냐.”
시마, 혈유, 일령은 언제부터인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다. 주로 시마의 말에 일령이 딴죽을 걸고, 시마가 반박하면 혈유가 일령 편에 가세해 합공하는 형태였다.
“내가 참는다, 참아.”
“안 참으면 어떻게 할래요?”
“에잉! 젊은 것한테 꼴사납게 이게 무슨 꼴이야.”
시마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흥!”
“너무 몰아붙이지 마. 그러다가 녹혈마공을 펼치면 어쩌려고.”
“독을 비켜낼 기공이 있는데 뭐가 겁나요!”
“겁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일령, 그러지 말고 속 좀 가라앉혀. 좋은 차가 있어서 구해왔는데, 끓여줄까?”
“그럼 그럴까.”
혈유와 일령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미소만 지었다.
호채마 가운데 일령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당사자인 일령뿐이다.
그녀의 눈은 항시 마야를 쫓는다. 아침 기상에서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마야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그런 그녀를 혈유는 묵묵히 지켜본다.
그래도 볼 수라도 있을 때는 좋았다. 마야의 발이 된 지금은 바깥으로 돌아다니느라 일령을 쳐다볼 기회가 무척 줄었다.
그래서 시마가 끼어든 거다. 어떻게든 일령과 혈유가 같은 자리에 있게끔 만들어주려고.
일령은 지금까지 편히 지내왔던 사람이니까, 그녀와 뜻이 맞으니까,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해주는 사람이니까…… 편하기 때문에 혈유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러면 됐지 않은가. 서로 가깝게 지내다 보면 정인들 싹트지 않을까. 어느 순간,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까.
“이렇게 뺏기는 게 속 쓰리지 않아요?”
오랜만에 다담선자가 마야를 쳐다보며 농담했다.
콘 곁에 있다는 산주는 크게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호채마 중 누구라도 그를 상대할 수 있다. 그가 비록 남만에서는 죽음의 제왕으로 군림했지만 호채마에게는 무리다.
그는 내버려 두어도 상관없다.
수라는 여인은 누굴까? 그녀의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한다.
서군봉은 문제다. 그녀는 무공이 강할 뿐 아니라 지혜가 놀라워 조절하기에 따라서는 콘의 능력을 두 배, 세 배로 끌어올릴 수 있다.
서군봉만은 떼어놔야 한다.
‘책략이 필요하겠어.’
알아야 할 것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다담선자는 알아야 할 것을 서신에 적었다.
“이거 전하면서 말해줘요. 여기 적힌 걸 알게 되는 날이 우리가 움직이는 날이 될 거라고요.”
혈유는 늘 그래 왔듯 한 마리 비조가 되어 날아갔다.
점검 사항 중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면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마야가 콘을 상대할 수 있을까?
급진전한 마야의 무공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실전이 너무 부족해서 걱정이다.
“마야를 공격해 줘요. 정면 승부도 좋고, 기습도 좋아요. 어떤 식으로든 공격해요.”
“난 자신없어. 귀가 보통 예민해야 말이지. 귀야, 냄새야. 좌우지간 우린 접근 못해. 포기!”
천멸도주가 제일 먼저 기권했다.
“정식으로 붙는다면…… 칼 한 자루만 가지고 겨룬다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알다시피 마야에게는 음공이 있잖아. 우리에게는 기를 북돋아주는 역할만 했지만, 칼자루를 돌려서 공격해 온다면 진기가 반감될 것은 뻔한 거고. 자신없는데.”
마도도 손을 들었다.
예의 삼아 하는 말이 아니다. 마야의 무공과 기이한 능력을 그들보다 잘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으랴.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싸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도 그래. 궁주님만은…….”
수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 같은 생각이다. 마야와는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럼 합공해요.”
“사랑하는 낭군을 왜 이렇게 죽이지 못해서 안달일까?”
천멸도주도 다담선자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는 듯했다.
솔직히 마야에게는 무공이 그리 중요치 않다. 그가 오늘 이 순간에도 발전시키고 있는 기이한 능력은 어떤 무공보다도 강력하다. 실제로 호채마 중 그 누구도 마야의 기이한 능력과 겨뤄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마야는 지금도 충분히 강하다.
물론 콘도 강하다. 하나 그가 더욱 강하게 보이는 것은 무공이 강해서가 아니가 독심(毒心)이 유난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사람을 그렇게 찢어 죽인다면 강해 보이지 않을까?
또 있다.
칼이 아무리 빨라도 왕벌을 이길 수는 없다. 왕벌까지 이겼다고 치자. 다담선자의 추명반은 가만히 있을 것이며, 천멸도 살수들은 손 놓고 지켜만 볼까.
서평루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사람도 있다.
사망혈인이 버티고 있는 한, 문짝 하나도 함부로 열지 못한다.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겨 낙엽처럼 흩날리는 것을 원치 않는 한은 말이다.
그는 지금도 화약을 제조하고 있다.
천염문과 독조림에서 배운 지식에다가 마야가 뇌귀(雷鬼) 뇌화문(雷火門)의 진수를 전수했으니 화약에 관한한 가장 방대한 지식을 구비했다고 볼 수 있다.
퍽! 퍽! 피이익!
그가 터뜨리는 화약은 병아리 눈물보다도 적은 양이다. 한데 주먹으로 벽을 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울린다. 그가 만든 것이 주먹만 하다면 서평루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리라.
무엇을 걱정할까?
콘 한 명 잡는 데 이토록 부산을 떠는 이유가 뭘까?
다담선자의 생각은 달랐다.
‘가가는 콘을 잡는 게 아냐. 새로운 무공을 창안했다는 건 무신들을 상대하기 위해서야. 무신을 상대할 만한 무공…… 어떤 무공이든 실전을 통해야 허와 실이 드러나.’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마야를 공격하는 것만이 최상책이다.
“실전 경험을 키워야 해요. 마야는 지금 새로운 무공을 수련 중이에요. 그가 머릿속에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만든 무공이니 구결만 가지고 논한다면 천하제일 아닐까요? 일견후즉파가 자신이 익히려고 만든 무공. 궁금하지 않아요?”
“빌어먹을! 꼼짝 없이 대들게 만드네. 얻어터질 게 분명한데 꼭 기어나가게 만들어. 늙은이 뼈마디 쑤시는 건 보이지 않나.”
시마가 동의했다.
그의 말은 모두의 말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건 모르겠다. 한 가지, 일견후즉파가 자신이 수련하고자 만든 무공이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은 이기지 못하겠다.
움직이는 듯, 움직이지 않는 듯.
마야의 움직임은 매우 느렸다. 느린 정도가 아니라 거의 정지 상태였다. 하지만 움직였다. 가만히 지켜보자면 조금씩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양손의 위치가 바뀌었다. 발도 다른 곳을 밟았다.
그는 움직이고 있는데, 너무 느려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첫 공격은 천멸도 살수들이 시작했다.
촤아아아! 사아악……!
나병까지 치료되어 움직임이 더욱 자유로워진 살수들의 검공은 예전보다 배는 강해진 듯싶었다.
진형은 선(先) 육합(六合), 중(中) 팔괘(八卦), 후(後) 십방(十方)으로 모두 스물네 명이 공격에 가담했다.
공격방식은 일격필살(一擊必殺)이다.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살검만 쳐낸다.
실전에서는 아주 독한 마음을 먹어야 펼칠 수 있다. 동귀어진의 심정이 아니고서는 목숨을 내던져 가며 공격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할 수 있다. 설마 마야가 죽이기야 하랴. 마야의 손은 멈칫거리겠지만 살수들의 검은 최절정에 이른다. 공격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뿜어낼 테니, 알아서 막아보라는 심산이다.
마야는 움직이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이 전신을 난자해 오는 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머, 멈춰!”
일령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만큼 급했다.
한데 그 순간, 기적처럼 마야의 몸이 움직였다. 실낱같은 차이로 여섯 명의 공격, 선 육 검을 흘려냈다. 그야말로 머리카락 한 올 차이였다.
“저건 내 무공인데?”
일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야가 펼친 것은 언뜻 보기엔 공령문의 선유비조신법(仙遊飛鳥身法)처럼 보였다.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여 상대의 기운에 따라 같이 움직인다.
“아냐. 귀적무 같았어.”
절혼마녀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꾸라지가 기름으로 범벅이 된 곳을 기어갈 때처럼,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앞선 여섯 명의 공격은 무위로 그쳤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중 한 명은 검까지 빼앗겼다는 것이다.
천멸도 살수의 손에서 검을 빼앗을 수 있는 금나술(擒拿術)이 있었나? 손이 잘려 나가도 검은 빼앗기지 않는다는 살수들인데 어떻게 검을 놓게 만들었나.
까앙! 깡깡깡! 까앙……!
중 팔괘진은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