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19
219
서군봉은 산주보다도 콘의 상태를 더 정확히 읽어냈다.
콘은 강금산의 기억을 모두 지웠다.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수를 안고부터는 잊어버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역시 사천당문의 기물(奇物)은 허튼 것이 하나도 없다.
아주 만족한다. 이제 곧 무신에 버금가는 무의 제왕이 그녀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릴 게다.
‘마야도 괜찮았는데.’
서군봉은 강변으로 향했다.
우선 왕벌을 죽여야 한다. 왕벌이 있다면 콘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게다.
다음으로는 호채마가 싸움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까지 가세한다면 아무리 콘이라도 어려운 싸움이 될 수 있다. 잘하면 모두 도륙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싸움이 끝난 후를 대비해야 한다.
강변 싸움은 아무도 몰라야 한다.
아직은 콘이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도 너무 위험하다. 남무림이나 무신이 나서면 상당히 피곤해진다.
오늘 저녁, 콘은 수와 달콤한 밤을 지낼 것이다.
그동안 준비를 마친다.
‘그 정도 준비하는 데 하룻밤이면 충분하지.’
***
만사무불통지가 콘의 종적을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담선자가 콘에 대해 묻자, 그는 세 시진 간격으로 밀서(密書)를 보내왔다.
“묘하네요. 콘이 마치 우릴 따라오는 것 같아요.”
“우릴 따라와?”
“행적이 그래요. 여기 적힌 게 맞다면, 그는 우리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서 따라오고 있어요.”
“흠! 철사문은 상당히 운이 나빴군.”
“괜찮겠어요?”
“뭐가?”
“전 왠지 불안해요. 가가를 믿지만…… 아무래도 콘의 목표가 가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요. 그도 자신있으니까 쫓아오는 거겠죠?”
“싸움은 항상 자신 있는 자들끼리 부딪치는 거잖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게 사람이라는데. 정말 싫어요. 한 치만 앞을 볼 수 있어도 좋을 텐데.”
마야는 다담선자를 꼭 껴안았다.
“재미없잖아, 앞을 볼 수 있으면.”
“재미없어도 이럴 땐 봤으면 좋겠어요.”
마야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담선자를 살며시 밀어냈다. 그리고 두 눈을 응시했다.
“뭐야?”
“뭐가요?”
“설마 만사무불통지와 같은 생각인 거야?”
“그게…….”
“세상에! 하하! 우하하하! 다담, 다담도 그런 걸 믿어? 사부님이 그럴 분이야? 그분이 중원무림을 멸망시킨다고? 하하하! 설마 다담이 그런 말을 믿을 줄은 몰랐는데.”
“혈귀대주의 죽음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다담선자의 음성은 차분했다.
“혈귀대주가 죽지 않았다면 가가께서 무림에 나왔겠어요? 그냥 너흰 너희끼리 살아라, 우린 우리끼리 산다 하며 지냈을 거 아녜요.”
“그놈 죽음까지 끼어 넣는 건 너무 지나친 비약인데.”
“아뇨. 그래야 말이 돼요. 복수하러 나왔지만 상대는 궁왕 강창도. 상조문도 있고, 독조림도 있었지만 가가 눈에는 궁왕만 보였겠죠. 너무 벅찬 상대였으니까요.”
“족집게군.”
“그래도 어떻게 뚫어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금 동생이 석신을 깨버린 거죠. 모든 걸 팽개치고 멸신구관을 찾아 남만으로 가게 된 이유예요. 가가께서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라 갈 수밖에 없으니까 간 거예요. 즉, 남도문주와 궁왕이 가가를 멸신구관으로 밀어 넣은 거죠. 안 그래요?”
“그것도 비약이야. 꿰어 맞추다 보면 맞추지 못할 게 없어.”
“우리가 멸신구관에 도착할 때까지 남도문은 꼼짝하지 않았어요. 겨우 외장삼첨만 꼼지락거렸죠. 만약 남도문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면 상조문이나 독조림 대신 우리가 몰살당했을 거예요.”
“그거야…….”
“우리가 남무림에서 난장을 피울 때 북검문과 남도문은 평화협정이라도 맺은 것처럼 싸움을 뚝 그쳤어요. 우리를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다담, 오늘 왜 그래?”
다담선자는 만사무불통지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저도 제 말이 억지란 건 알아요. 하지만 뭔가…… 뭔가 확 풀리지는 않는데 그럴 것이라고 생각될 때 있죠? 이건 꼭 잘 짜인 연극 같아요.”
“후후! 그래서 지금 이 일을 하는 거잖아. 나도 씨앗, 콘도 씨앗이라니 쭉 캐나가다 보면 뭔가가 나오겠지. 다담, 날 믿어. 선사는 절대 그럴 분이 아냐.”
“하나만 더 말할게요.”
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가의 능력, 우리 중에서는 따를 자가 없지만 말예요.”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충분히 조심한다니까.”
‘이번 싸움은 가가가 패할 가능성이 많아요. 가가는 콘을 탄생시키는 도구. 콘이 탄생한 이상 길잡이는 필요없잖아요.’
다담선자는 하고 싶은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
“후후! 그렇지, 그렇지. 쉽게 죽을 리 없어.”
흑조편복, 그는 서평루에서 빠져나와 멀리 사라지고 있는 혈유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참으로 바쁜 일정이었다.
제삼무신가에 들려서 호채마를 멸살시켰다는 싸움 장소를 둘러보고, 이곳저곳 탐문도 해보고, 그러다 다시 방향을 돌려 멀리 사은부까지 왔다.
마야가 이런 곳에 숨어 있을 줄이야.
늦었지만 이렇게 찾았으니 다행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마야에게 얻은 목숨 세 개 중 마지막 하나를 걸어야 할 때다.
‘콘이 지척에 있지.’
콘과 마야를 부딪치게 할 수 있다.
콘만으로는 안심이 안 된다. 콘의 살명(殺名)은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마야란 놈이 워낙 귀신같은 놈이라 비장의 한 수를 더 준비해 두어야 한다.
‘적안사태, 조금만 기다리라고. 내 곧 저놈을 보내줄 테니.’
흑조편복은 그에게 날아온 두 번째 명을 상기했다.
마야(魔爺) 필사(必死). 기한(期限) 십일월(十一月) 한(限). 삼(三).
전설의 살수인 흑조편복에게는 그야말로 치욕적인 주문이다.
십일월 안에 마야를 필히 죽여라. 성공 가능성은 삼 푼이다.
삼 푼, 삼 푼, 삼 푼이라니!
그래도 첫 번째 명에는 구(九)라는 글자가 있었다.
구가 삼으로 내려왔고, 다음 밀명 때는 일(一)이 되어 있을 게다.
일 푼이라. 거의 죽일 가망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밀명은 다시 오지 않는다. 대신 그를 죽일 살수가 나타날 게다. 지옥으로 도주하면 지옥까지 쫓아올 살수가.
그때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도주해 봐야 힘만 빠진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마야가 목숨을 거두지 않아도 그가 거둘 것이니 이승에서 활용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인 셈이다.
죽는 건 두렵지 않다. 두려운 것은 흑조편복도 죽일 수 없는 인간이 있더라는 세간의 평가다.
한 가지 더 있다.
아무에게도 말 못할 일이지만…… 피붙이 사망혈인에게도, 사망혈인을 낳은 천염문주에게도, 평생의 정인이었던 적안사태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있는데…….
‘마야부터 죽이고…….’
그는 비장의 한 수를 준비하기 위해 신형을 띄웠다.
제8장 호습호(虎啃虎) ― 막상막하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1
강변에 찬바람이 불었다.
모래밭은 햇볕에 반짝이는데 강물은 어쩐지 추워 보인다.
“독이 살포되어 있군.”
마야의 후각은 강변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를 단번에 맡아냈다.
“노골적이군요.”
다담선자도 강변을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독인 듯싶은 것이 눈에 띈다. 돌멩이에 묻어 있기도 하고, 모래밭에 뿌려진 것도 있다.
“사람 수를 줄이려는 목적이군. 나 혼자 갈 테니 모두 여기 있어.”
마야가 강변에 발을 디뎠다.
호채마에게 독은 위협거리가 되지 않는다. 사천제일룡의 독을 견뎌 냈으니 독에 관해서라면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 더욱이 지금처럼 독이 눈에 빤히 보이는데 중독될 리는 더더욱 없다.
마야와 함께 들어서도 된다. 하나 남았다. 모두 독밭 바깥에서 안을 지켜보았다.
저쪽도 사내 한 명만 들어가 있다.
커다란 덩치에 멀리서 보기에도 굳센 팔뚝.
한때는 궁왕의 삼자(三子)로 유궁이라는 별호를 가졌던 강금산이다.
그런 그가 평생 수련해 온 활을 버리고 단도를 취했다. 살도 중에 살도, 마도 중에 마도를.
그를 따라다닌다는 사람도 보인다.
일남일녀(一男一女)가 강둑에 앉아 콘을 쳐다보고 있다.
둘 다 무심한 표정이다. 마야만 한 상대와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긴장하는 빛이 전혀 없다.
갑자기 여인이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헉!”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던 다담선자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토해냈다.
“언니, 왜?”
“언니, 언니.”
다담선자는 급히 절혼마녀를 불렀다.
“언니, 저 여자를 봐줘. 유심히.”
“저 여자? 예쁘네. 수라는 여자지? 콘과 함께 다닌다는. 왜?”
“모르겠어요? 저 여자, 환락궁(歡樂宮)의 구혼음태(句魂淫態)를 수련한 것 같아.”
“구, 구혼음태!”
절혼마녀도 깜짝 놀라 황급히 여인을 주시했다.
수는 따분한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강물을 쳐다봤다.
한데 묘한 분위기가 풍긴다.
정상적인 사내라면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풋풋함이 풍겨난다. 끌어안아도 저항하지 않을 것 같고, 입술을 탐하면 더욱 적극적으로 응할 것 같은 음탕함도 보인다.
수는 여러 가지 색깔을 지녔다.
그런데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랫동안 사랑해 온 여인을 안는 것처럼, 육체를 탐닉하여 얻는 쾌락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과 정신적, 육체적 일체가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최상의 편안함이 배여 있다.
“맞네. 구혼음태.”
“몇 성이나 되는 것 같아요?”
“저 정도면 거의 팔성(八成) 정도 되지 않을까?”
십성의 구혼음태는 창기를 성녀로 탈바꿈시킨다.
어떤 사내든 무릎걸음으로 매달리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구혼음태를 수련하는 여인이 많아야 될 것 아닌가.
구혼음태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머리가 하얗게 빈 백치만이 인간 본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만들어진 무공이 구혼음태다.
정상적인 여인은 구혼음태를 표현해 낼 수 없고, 백치는 구혼음태의 묘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이론상에 그친 무학이 되는가 싶었는데…….
쾌락을 추구할 목적으로 합궁(合宮)하는 종족은 인간밖에 없으니, 쾌락 추구는 인간이 누려야 할 최대의 혜택이라는 기치 아래 온갖 음악한 짓을 일삼던 환락궁이 구혼음태에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구혼음태를 실현해 냈다. 두 가지, 천인공노할 문제와 함께.
하나는 구혼음태를 시전한 여인은 백치가 된다는 점이다.
인위적으로 뇌를 손상시켜서 백치를 이끌어내니 차마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둘째로는 뇌가 손상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녀가 보았던, 절실히 매달리고 싶었던 사람의 말이라면 자진하라는 명까지 받든다는 것이다.
모순되게도 자신을 백치로 만든 사람의 명을 목숨 바쳐 수행하는 일이 벌어진다.
환락궁은 구혼음태 때문에 몰살당했다.
당시 정도 무림은 구혼음태의 시술 방법이 외부로 흘러나갈 것을 우려해 개미새끼 한 마리 살려두지 않았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환락궁은 물론 반경 일 리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돌림병처럼 취급한 것이다.
“누군가 아주 대담한 짓을 했는데.”
절혼마녀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수를 쳐다볼 수가 없다.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니 너무 안쓰러워서 당장이라도 달려가 어깨를 껴안고 싶어진다.
물론 함정이다. 구혼음태에 휘말려든 결과다.
지속적으로 쳐다봐서는 안 되고, 지금과 같이 잠시라도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다시 주시하는 것이 상책이다.
“서군봉일 거예요.”
“말도 안 돼. 그 여자는 육신녀야. 북검문 후계자로 거론되는 칠성군 중에 한 명. 아니, 그런 건 다 차지하고라도 아버지 낯이 있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틀림없어요. 서군봉이 시술자예요.”
“천기수사가 알면 부끄러워 죽지도 못하겠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다담선자의 단호하게 단정 지어서 말할 때는 반드시 근거가 있다.
맞을 게다.
“수는 화근덩어리예요. 안됐지만 제거해야 돼요. 셋째, 막내, 못 말리는 사람들 좀 어떻게 해봐.”
다담선자가 금연화, 일령에게 말했다.
마도, 수검, 시마, 사망혈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들은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 그윽한 눈빛이 되어 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멋! 정말 구혼음태가 지독하긴 지독한가 보네.”
“못 말린다니까.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고 시마 할배까지 넋 빠졌네. 할배!”
금연화와 일령은 각기 두 사람씩 골라서 등에 일장을 쳐냈다.
‘서군봉, 그녀가 안 보여. 그녀를 찾아야 돼!’
다담선자는 머리카락 한 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예리한 눈빛으로 사위를 훑어나갔다.
“크크큭! 마야.”
콘은 마야를 알아봤다.
“강금산.”
“강…… 금산?”
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강금산이라는 이름을 난생처음 들어보는 듯 생소해 했다.
“유궁.”
“크크크! 마야…….”
콘은 징그럽게 웃으며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 두 팔을 머리까지 들어 올리며 마야를 노려봤다.
‘지독한 마공! 자신이 누군지도 잊어버렸어.’
이는 매우 중요하다.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천하의 기학인 환희마소가 통하지 않는다.
음공도 마찬가지다. 생각이라는 그물망이 쳐져 있어야 충격을 가할 수 있는데, 그물망 자체가 없으면 빈 통로에 소리를 내지르는 것과 같다.
말 그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게 된다.
콘과의 싸움에서는 마야가 지닌 능력들 대부분이 소외된다.
순수히 육체적인 본능과 감각, 그리고 지금까지 수련한 무공만이 통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