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2
22
소립파가 태연히 마당을 가로질러 가 토방에 앉았다.
“긴장하지 말고 들어와.”
타닥! 타닥!
마당 한가운데 피워놓은 모닥불이 기세 좋게 타올랐다.
‘시마…….’
절혼마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히 불기를 쪼이고 있는 시마를 착잡한 심정으로 쳐다봤다.
녹혈마공을 수련한 자는 인세에서 사라져야 할 마두. 그러나 그는 도와주려고 온 사람. 자신들은 도움을 받아야 할 입장. 어찌해야 하나. 삭사를 사용해도 이기리란 보장이 없는데…… 그래도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싸움을 벌여야 하나, 눈 찔끔 감고 참아야 하나.
“시마는 본 적이 있으니 소개할 필요 없고.”
땅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게슴츠레한 눈길로 모닥불을 쳐다보던 소립파가 묵직한 침묵을 깼다.
“이 친구는 마도(魔刀)라고 해. 한때는 도광불승참(刀光不僧斬)이라고 불린 적도 있지.”
소립파가 턱짓으로 팔짱 사이에 도 한 자루를 끌어안고 있는 중년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광불승참 양작사(楊作師)!”
절혼마녀는 태연할 수 없었다. 너무 놀라 봉목이 한껏 부릅떠졌다.
도 한 자루를 끌어안고 중원이 좁다며 활개 치던 자다. 절정무인들을 찾아다니며 백이십칠 회의 비무를 벌였고, 똑같은 수의 시신을 남겼다.
그에게 따라붙는 별호는 많다. 그의 도법을 깰 자가 없다고 하여 무적도(無敵刀)라는 말을 들었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승려는 베지 않는다고 하여 도광불승참이라고도 불렸다.
그가 무림공적이 되어 쫓기게 된 것은 무당파(武當派) 장로인 화암(和巖) 진인(眞人)을 죽이면서부터다.
화암 진인이 죽으면서 남긴 말은 ‘혈염도(血染刀)’였다.
절대 감각을 유지시키기 위해 하루에 한 명씩은 꼭 죽인다. 살을 베고 뼈를 가르는, 피가 튀는 느낌을 전신 감각과 도에 전달시켜 줘야 한다. 악마의 도법이다.
그는 추살령을 받았지만 죽지 않았다. 한동안은 추살자들을 상대하여 숱한 죽음을 만들어냈다. 나중에는 죽이는 것도 귀찮아졌는지 홀연히 종적을 감춰 버렸다.
정사마(正邪魔)를 통틀어 가장 강한 자 중에 한 명으로 꼽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 중년인인가!
집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던 살기도 양작사의 작품이리라.
“저기 죽검(竹劍)을 든 친구는 수검(獸劍)이야. 자칭 무적검(無敵劍)이라고 떠들다가 마도에게 한 칼 맞았지.”
세 여인은 죽검을 옆에 놓고 있는 자, 이십대 후반의 외눈박이 검사를 쳐다봤다.
조용히 불길을 응시하는 눈길이 평온한 바다처럼 착 가라앉아 있다. 호흡 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 또한 소립파처럼 아무런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상당한 고수야. 어디서 이런 자들이 튀어나온 거야!’
이런 자들이 집 안에 있었으니 숨이 막힐 수밖에. 금방이라도 검이 틀어박힐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돼지를 굽는 꼬마는 혈유(血流)야. 빠르기로만 따지면 당금 무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
“헤헤! 몇 손가락이라니, 무슨 섭섭한 말씀을. 당연히 이거지.”
꼬마는 아니다. 단지 키가 꼬마처럼 작을 뿐이다. 모닥불에 바짝 붙어서 통돼지를 굽고 있던 작은 사내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소립파의 말은 과장되지 않았으리라.
마도, 수검, 혈유, 시마.
이들은 각기 한 문파를 상대할 수 있는 무서운 자들이다. 웬만한 문파의 문주쯤은 일합에 꺼꾸러뜨릴 수 있는 거력(巨力)이다.
‘이 사람들만 도와준다면…….’
금연화는 꿈도 꾸지 못할 생각을 했다. 아니다. 꿈만은 아니다. 소립파는 혈귀대주의 벗이지 않나. 이런 힘이 있으니 당연히 복수를 해주는 것이 도리이지 않은가.
“동방주.”
소립파가 절혼마녀를 불렀다.
“당신 결정만 남았어. 단언컨대 장강을 넘으려면 이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해. 도움을 받는다면 당신 역시…… 세상에서 말하는, 결코 살려둬서는 안 될 인간 속에 포함되는 거고. 어떤 선택이든 상관없어. 여기서 드잡이질을 벌일 건 아니니까. 같이 가느냐, 헤어지느냐만 선택하면 되는 거야.”
절혼마녀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눈빛은 반대로 강렬하게 빛났다.
“마도…… 나도 마도인이 되는 거네. 날…… 보호해 줄 수 있어?”
‘언니가!’
금연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절혼마녀를 쳐다봤다. 남한테 보호해 달라 말라 말할 사람이 아닌데.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보호해 달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같이 모여 있으니 돼지고기라도 구워 먹는 거고, 흩어지면 남남이 되는 거야. 누가 누구의 가슴에 검을 꽂을지도 모르고.”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냐. 네가 날 보호해 줄 수 있냐고 묻는 거야.”
“역시 위험한 여자.”
소립파가 손을 내밀자 혈유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직 안 구워졌어. 조금 더 기다려야 돼. 이거 맛있게 구워지려면 두세 시진은 구워야 돼.”
“대답 안 해줄 거야?”
절혼마녀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보호라면 다른 사람을 골라. 난 힘이 없어.”
소립파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절혼마녀도 더 이상 치근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더더욱 요염해져만 갔다.
“쥐새끼들이 몰려오는군.”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독한 화주를 들이키던 마도가 말했다.
“쥐새끼는 쥐새끼인데 큰 놈들이야. 천비대가 이렇게 강했나?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겠는걸.”
고기를 뜯어 먹던 수검이 말을 받았다.
“잠사검귀라고 지옥 수련을 거친 놈들이 있지. 아마 그놈들일 거야. 떼거리로 몰려오는 걸 보니 총출동한 것 같은데? 빌어먹을! 재수도 더럽게 없지. 저놈 덕에 목숨을 건지긴 했는데 하필이면 북검문 일에 끼어들게 됐으니. 재수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만, 하필이면 내가 아플 때 혈귀대주가 뒈질 게 뭐야.”
시마가 금연화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눈은 옅은 녹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세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사검귀? 그런 자들도 있었나?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혈귀대주의 연인이었던 금연화조차도 잠사검귀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시마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피차일반, 마도만 아니었으면 나도 이런 자리에 있지 않았지.”
수검이 마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심장을 갈라줄 수 있는데.”
마도도 지지 않았다.
“운 좋게 한 칼 먹인 것 가지고 기고만장하기는. 후후! 네 수는 다 읽었어. 이번에는 내 차례야. 머리통이 떨어지고 싶나?”
“자신있으면 언제든.”
“지금 할까?”
“좋지.”
파라랑……! 스스슷!
마도와 수검 사이에 미증유의 기류가 흘렀다.
‘농담이 아냐. 정말 싸우려고 해.’
금연화는 숨을 멈췄다.
마도는 술병을 내려놓지 않았다. 수검은 죽검을 잡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병기를 잡고 잡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이 몸을 움직이는 순간 생사가 판가름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기이한 것은 소립파의 태도다.
그는 두 사람이 싸우건 말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편히 누워서 밤하늘만 올려다봤다.
혈유와 시마의 태도도 같다.
시마가 수검과 마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소립파에게 말했다.
“어떻게…… 깨줘?”
“아니. 괜히 주목받을 필요 없어. 잠사검귀는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야. 쓸어버리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득에 비해 대가가 너무 커. 남무림과 북무림은 철천지원수 간이지만 마도인에 대한 정보는 서로 공유해. 이 땅은 그들의 땅이야. 마도인이 설 자리는 없지. 저들을 치면 발붙이고 살기 힘들어. 그냥 피한다.”
“흐흐흐! 내 말이 그 말. 그럼 도망가야지? 자, 도망갈 준비나 하자고. 장강 건너는 건 포기하는 거지? 보나마나 적혈구 부근에 쫙 깔려 있을 텐데, 호구로 머릴 들이밀 필욘 없잖아.”
“혈유. 적선서가 일곱 마리 있어. 그것들을 처리해.”
“헤헤헤! 그 정도야. 그럼 그걸로 난 빼주는 거지?”
“…….”
“끄응! 야! 너 약값 너무 비싸게 받아 처먹는 것 아냐!”
“자시말(子時末)에 떠날 거야. 그때까지 적선서를 처리한 후에 강가로 와. 참고로…… 잠사검귀는 모두 백이십 명. 삼십 명씩 하나의 검진을 형성한 채 움직인다. 철벽구망진(鐵壁九網陣). 포위되면 살아나기 힘들어.”
“철벽…… 구망진? 그건 또 뭐야?”
“만박선생이라는 자가 있어. 이름은 사마건위(司馬建偉). 공명(孔明)의 현신이라는데, 사마중달(司馬仲達)의 후손이야. 사공명(死孔明) 주생중달(走生仲達)이라는 말에 나오는 바로 그 중달. 웃기는 이야기지. 중달의 후손이 공명의 현신이라는 말을 들으니.”
“대가리가 엄청 좋은 놈인가 보네.”
“잠사검귀는 만박선생이 손수 양성한 수하들이야. 시마 말처럼 지옥 수련을 거친 자들이고, 온갖 검진에 능통해. 그중에서도 철벽구망진은 단연 으뜸이야. 간단하게 생각하면 돼. 마도나 수검 같은 친구와 전력으로 붙는다. 짜릿하지?”
“그…… 그 정도야?”
“적선서만 처리한다면 간단한데 잠사검귀가 있으니…… 이번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혈유밖에 없어.”
“빌어먹을! 호랑이 앞에 토끼를 들이밀면서 하는 소리 하곤.”
키 작은 사내가 툴툴거리며 일어섰다.
“동방주, 혈유와 함께 가.”
“나, 나도?”
“절체향초(絶體香草)의 효과는 한 시진밖에 지속되지 않아. 적선서가 따라붙는 건 당연하지. 미끼가 필요해.”
팔두마차에서 몸 냄새를 제거시켜 준 풀이 절체향초인가? 효력이 한 시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면…… 자신들과 대체해서 마차에 탔던 세 여인은 잡혔을망정 죽지는 않았으리라. 다행이다. 마음 한 켠이 묵직했는데.
“동생, 동생 때문에 내가 이런 대접을 받잖아. 동방에 있었으면 지금도 공포의 화신이 되어 있을 텐데, 겨우 미끼 취급이나 받고. 호호호! 정말 하늘 밖에 하늘이 있었네.”
절혼마녀가 배시시 웃으며 일어섰다.
“그 미끼, 제가 하면 안 되나요?”
일령이 급히 절혼마녀를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그냥 있어. 나를 지목했으니…….”
절혼마녀가 말을 꺼내자마자 소립파가 가로챘다.
“사람마다 체향이 다르지. 동방주의 체향은 율금향. 적선서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야. 일령이 미끼로 나서면 한두 마리는 일령을 쫓겠지만 다른 놈들은 동방주를 쫓아와. 동방주가 미끼가 되면 일곱 마리 모두 달려들지. 동방주가 제일 맞아.”
소립파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게 좋다는 소리야, 나쁘다는 소리야?”
“좋다는 소리는 아닌 것 같네요.”
금연화가 절혼마녀를 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웃지 마. 어쩌면 목숨을 내놓을지도 모르니까 심각하게 받아들여. 신법이 딸린다면 백중백 죽게 될 거야.”
세 여인은 숨을 멈췄다.
소립파는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그가 그렇다면……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단순히 미끼 노릇을 하는 것인데도.
소립파가 마도, 수검을 보며 말했다.
“붙고 올 텐가, 아니면 지금 움직일까?”
마도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술병을 입에 댔다. 그제야 수검도 들고 있던 고기를 모닥불에 던져 버렸다.
2
“헤헤, 여자. 여자가 가진 신법은 뭐야?”
혈유는 절혼마녀와 동행하게 된 게 기분 좋은지 실실 웃어가며 말을 걸어왔다.
“너 몇 살이니?”
“엥?”
“나 스물아홉이야. 누님이라고 불러.”
“에엥? 여자야, 여자야. 이 몸은 서른넷이라네. 시퍼렇게 어린놈으로 보아주니 기분 좋기는 한데, 누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걸.”
‘서, 서른넷?’
절혼마녀는 혈유를 다시 쳐다봤다.
겨우 스물 대여섯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녀가 사람을 잘못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런 일이 생겼다. 성인군자라는 사람부터 파락호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몸을 섞으며 살아왔으니 사람 보는 눈만은 정확하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본 것도 있다. 혈유의 나이는 잘못 짚었을망정 성격은 제대로 봤다. 혈유는 자유분방하여 구속됨이 없지만 정을 준 사람에게는 한없이 양보하는 사람이다.
절혼마녀는 편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친구 하면 되겠네.”
“엥? 그건 무슨 셈법이야?”
“넌 나보다 나이가 많고, 난 너보다 키가 크잖아.”
절혼마녀의 양 볼에 보조개가 깊이 패였다.
혈유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절혼마녀를 쳐다보다가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넌 요물이야, 요물. 빌어먹을! 쳐다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니. 너 창기였던 것 맞아? 이놈저놈 아무나 끌어안고 나뒹구는.”
듣기 싫은 말, 하나 사심없이 한 말이기에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맞아.”
“여자야, 나 너 안고 싶다.”
“낙화향으로 돈 갖고 찾아와.”
“휴우! 여자야, 너 왜 그러니?”
“뭘?”
“아까 보니까 마야(魔爺)에게 꼬리치던데, 마야가 그렇게 넘어갈 인간이 아니거든. 키키! 마야 고놈, 생각 밖으로 단순해.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딱 부러져. 좋은 놈이야. 아! 그놈 앞에서는 마야라는 소리, 꺼내지 마. 인상 박박 쓰거든.”
‘그 사람이 마야?’
처음으로 들었다. 사람들이 그를 뭐라고 부르는지.
마야(魔爺)라면, 마인들의 아버지라는 소린데…… 무엇 무엇의 아버지라면 존경과 흠모의 대상인데…… 마야라고 부르면서 이놈, 저놈 하는 경우는 또 뭔가?
확실히 마인들의 세계는 이해하지 못할 구석이 많다.
절혼마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에게 정이 깊은가 봐?”
혈유가 절혼마녀를 쳐다봤다.
“계집이 예쁘기는 더럽게 예쁘네. 휴우! 며칠 전에만 만났어도 꼴까닥 해치웠을 텐데. 여자야, 마야에게 마음이 있걸랑 창기에서 벗어나. 고루쌍마에게 돈만 주면 안길 수 있다고 했다며? 여자야, 여자야.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것 아냐. 마야를 마음에 담지 말던지, 말과 행동을 조심하던지.”
‘이 사람, 마야를 진심으로 좋아해. 마야를 마음에 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날 보호하려고 해.’
“알았어. 말조심할게.”
혈유는 절혼마녀를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아깝단 말이야. 동방이란 곳에 너 같은 여자 또 없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