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3
23
“왜 없어. 많지.”
“아냐. 없어, 없어. 너 같은 여자는…….”
혈유가 말을 하다 말고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웠다.
그의 눈이 빠르게 좌우를 훑는다. 온몸이 긴장으로 뒤덮이고 맥박이 급속하게 가라앉는다.
“여자야, 네가 펼칠 수 있는 신법 중에 가장 빠른 신법이 뭐야?”
장난이 아니다. 지금까지 느긋하던 말투와는 사뭇 다르다.
“낙일비사(落日飛射).”
“쳇! 겨우 현현신법(玄玄身法)?”
‘현현신법이 겨우?’
혈유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좌우, 상하로 빠르게 빙글빙글 움직인다. 사람의 눈동자가 이렇게도 움직일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안 되겠어. 같이 움직이려고 했는데…… 여자야, 저 나무 위로 올라가. 속으로 백을 헤아린 다음에 낙일비사를 펼쳐서 최대한 빨리 강으로 달려가.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뒤돌아보면 안 돼. 돌아볼 틈도 없단 말이야. 알았지?”
“아, 알았어.”
“빨리! 빨리 올라가!”
절혼마녀는 혈유가 가리킨 나무 위로 신형을 쏘아 올렸다.
‘하나, 둘, 셋…….’
백이라는 숫자는 가동되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눈은 혈유에게 고정되었다.
쉬익!
혈유가 신법을 펼쳤다. 눈앞에서 무엇인가 번쩍인다 싶은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맙소사! 저런 신법이!’
너무 경악한 나머지 숫자의 헤아림을 깜빡 놓쳐 버렸다. 그러나 그녀 역시 절혼마녀라는 별호를 들을 정도로 무공이 높은 여인, 금방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수를 헤아렸다.
‘여, 열하나, 열둘…….’
파아앗! 꿰엑!
날카로운 섬광이 어둠을 뒤흔드는 순간, 돼지 멱따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야공을 갈랐다.
‘이게 적선서?’
꿰엑! 꿰에엑!
소름이 오싹 돋는 끔찍한 소리는 연이어 터져 나왔다.
혈유는 보이지 않는다. 잠사검귀라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아수라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만 쩌렁쩌렁 울려온다.
‘일흔일곱, 일흔여덟…….’
꿰에엑!
그녀가 여든을 헤아릴 무렵, 네 번째 괴음이 들렸다.
‘여든아홉, 아흔, 아흔하나…….’
꿰엑! 창! 창창창……!
아흔하나에서는 다섯 번째 울부짖음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콩 볶듯이 들려왔다.
‘적어도 십여 명.’
철벽구망진은 서른 명이 한꺼번에 움직인다고 했다. 그런데 절혼마녀가 판단하기에 합공을 펼치는 인원은 십여 명이다. 하나같이 상상을 초월하는 쾌공의 소유자들로 추측된다.
‘아흔아홉, 백!’
그녀는 망설임없이 신형을 튕겨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촌각의 망설임이 생사를 가른다. 적선서가 다섯 마리밖에 제거되지 않았고, 혈유의 처지도 모르지만 몸을 뺄 시기라는 것은 안다.
쉬이익!
그녀는 바람을 가르며 쏘아져 갔다.
꿰엑!
‘여섯 마리! 한 마리만 더!’
순간, 그녀는 뒷머리가 서늘해졌다. 알 수 없는 경기가 다가온다.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뒤돌아보지 마! 달려! 있는 힘껏 달려!’
환청인가? 혈유의 고함 소리가 귓전에 쟁쟁 울렸다.
절혼마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치달렸다.
까앙! 깡깡깡! 뻐걱! 파앗!
등 뒤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소리만 들어도 병기에 실린 힘을 짐작할 수 있다. 공격과 방어의 처절함이 느껴진다.
스슷! 스윽!
갑자기 기분 나쁜 느낌과 함께 종아리가 묵직해졌다. 무엇인가가 종아리를 타고 빠르게 움직여 허벅지까지 기어올라 왔다.
‘적선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소립파가 말한 항문을 꿰뚫고 들어가서 내장을 갉아먹는다는 소리만 웅웅거린다.
‘이, 이걸 어떻게…….’
절혼마녀는 당황했다. 손을 뻗어서 떼어내야 하는데 움직임이 너무 빠르다. 놈의 발톱은 무척 날카로워서 칼로 찍는 듯한 아픔을 주었다. 하나 그런 것에는 신경도 돌아가지 않는다.
놈이 방향을 틀어 엉덩이에 달라붙었다. 그때,
파앗! 꿰에엑!
엉덩이로 면도(緬刀)의 예기(銳氣)가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묵직한 놈은 괴성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솜털까지 쭈뼛 곤두선다. 멀리서 듣던 괴성과 몸에 달라붙어서 내지른 괴성은 천지 차이다.
무엇인가 기분 나쁜 것이 뒷다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적선서의 피거나, 내장이거나.
그런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창창! 차앙! 파아앗! 스스슷!
그녀의 앞은 인간 세상이되, 그녀의 등 뒤는 지옥이었다. 날카로운 쇠붙이는 끊임없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호흡 한 올만 흐뜨러지면 여지없이 난자당할 것이라는 불길함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어디를 어떻게 치달렸는지 모른다. 마을을 언제 벗어났고, 논인지 밭인지도 모를 곳을 어떻게 지나쳐 왔는지도 모른다.
눈앞에 너른 강이 나타나고 눈에 익은 비조선이 보일 때에서야 약속 장소에 다가왔음을 알았다.
휘익!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배에 누가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살필 겨를도 없었다.
스으으윽……!
배는 혈유를 태우지 않은 채 쏜살같이 나아갔다.
“자, 잠깐! 아직 혈유가…….”
그녀는 급히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다 배에 드러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는 혈유를 발견했다.
“어, 언제……!”
혈유는 무사하지 못했다. 언제 어디를 어떻게 당했는지 온몸이 피투성이다.
혈유 옆에는 소립파가 있다. 그가 혈을 짚어 지혈을 시키고 금창약(金瘡藥)을 발라준다.
“여, 여자가…… 더럽게 느려서…….”
“후후! 여기 느리지 않은 사람이 있나. 모두 느리지. 축하해. 이걸로 열 고개는 넘었어.”
“빌어먹을! 쓸 만한 놈에게 넘길 줄 알았는데…… 저런 풋내기들에게 열 고개를 넘길 줄이야. 아무래도 한 십 년은 더 수련해야 될까 봐.”
소립파는 시마에게 했던 것처럼 혈유를 끌어안고 술을 먹였다.
무슨 술일까? 어떤 병이든 말끔히 낫게 해주는 술이.
혈유는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혈유를 재운 소립파는 절혼마녀에게 다가왔다.
“뒤돌아서 누워.”
“난 괜찮아.”
“괜찮지 않아. 적선서 발톱에는 독이 있어. 곰도 마비시키는 극독이지. 적선서가 내장을 파먹지 않아도 동태처럼 딱딱하게 굳어져서 죽어가. 발톱에 긁히는 순간 끝났다고 봐야지. 다시 봐야겠는데? 내공이 정순하지 않으면 이만큼 달려올 수도 없거든.”
소립파가 싱긋 웃었다.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보는 싱그러운 웃음이다.
사람을 비웃는 듯 피식거리는 웃음은 몇 번 보았지만 좋은 기분으로 웃어주는 건 처음이다.
‘무슨 남자가 이런 웃음을…… 호, 혼이 빨려드는 것 같아. 환희마소…… 정말 환희마소인가?’
절혼마녀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소립파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기분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숨이 턱에 닿을 만큼 급하게 뛰어왔다는 사실도 망각했다.
그녀는 뒤로 돌아누웠다.
그의 손길이 종아리부터 엉덩이까지 낱낱이 누빈다. 손길이 닿을 때마다 짜릿한 전율이 전신을 관통한다. 몸과 정신이 붕 뜬다. 허공에 부유하는 느낌이다.
‘다, 당신…… 아……!’
절혼마녀는 끝이 보이지 않는 행복 속으로 추락했다.
“열 고개 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일령이 노를 젓고 있는 고루쌍마에게 물었다.
“죽을 고비를 열 번 넘겼다는 말이지.”
“그래요? 참 대단한 사람이네요. 그럼 이전에도 아홉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이잖아요. 보통 한두 번 넘기기도 힘든데.”
“여섯 번이야.”
“네?”
“저놈은 여섯 번 죽을 고비를 넘겼어. 이번 싸움에서 네 번이나 큰 걸 얻어맞았다는 말이지. 제길! 암울해지는구먼. 단문협에 도착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숨어야겠어.”
금연화와 일령은 할 말을 잃었다.
절혼마녀는 앞만 보고 달려오는 바람에 혈유의 신위를 보지 못했지만 그녀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혈유는 비조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빨랐다. 세상에 이토록 빠른 사람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을 네 번씩이나 죽음으로 몰아넣은 천비대는 어떤 사람들인가.
북검문도 아니다. 북검문 산하의 천비대다.
천비대가 이토록 무서웠나? 천비대가 이럴진대 전투의 달인들인 천랑대와 천검대는 어떻겠나.
단문협에는 천랑대가 있다. 그들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 마도, 수검, 혈유, 시마를 보고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고루쌍마가 가는 한숨과 함께 이야기했다.
“절혼마녀가 마음에 들었나 보지? 죽자 사자 보호하게. 자식…… 제 죽는 것 모르고. 제 몸만 빼냈으면…… 제까짓 놈들이 어떻게 혈유를 쳐. 마도, 수검도 잡지 못한 혈유인데.”
“크크! 아직도 혈유를 모르는군. 저놈이 제 좋아서 계집을 보호한 줄 알아. 그게 다…….”
고루쌍마는 소립파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문을 닫아버렸다.
***
“놀랍군. 놀라워. 잠사검주(潛死劍主)가 넷에다 잠사검귀가 백이십. 그러고도 강으로 몰아내는 데 그쳤으니.”
만박선생은 멀어져 가는 비조선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저보다 두 배는 빠른 자였습니다. 일 대 일로 겨뤘다면 제가 당했을 것. 무명소졸(無名小卒)이 아닙니다. 짐작 가는 자라도 있으신지……?”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은데 나라고 모두 알 수 있나. 이쪽 피해는 어떻지?”
“잠사검귀 다섯이 당했습니다.”
“전부 즉사?”
“네.”
“호오! 그 정도면 얌전히 보냈을 리는 없고, 저쪽은 어떤가?”
“신의(神醫)가 없다면 죽을 겁니다.”
“음……! 천비대주와 버금가는 자군.”
“대주님과요? 그렇게까지는 보지 않았습니다만.”
“후후! 천비대주와 철벽구망진 네 개가 어울린다면 어떨까? 양패구상(兩敗俱傷)이 아닐지. 잠사검주는 그자가 여자를 보호했다는 사실을 잊었군. 그자는 자신의 무공을 마음껏 펼치지 못했어. 그런데도 잠사검귀 다섯 명을 잠재웠다는 건…… 대주님과 버금가는 자야.”
“하마터면 우리가 큰코다칠 뻔했군요.”
“앗! 적선서!”
갑자기 만박선생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적선서가 몇 마리나 남았지?”
“모두 죽었습니다.”
“모두?”
“예.”
“아차차차! 이런, 이런, 이런. 또 당했네. 하하하! 이거 재미있는 사람인걸.”
“무슨 말씀이신지……?”
“그자가 상소에 머무른 것은 나보고 찾아오라는 뜻이었어. 북검문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는 자군. 나란 사람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어. 잠사검귀의 존재도 알고 있었고. 그자는 여기서 적선서를 몰살시킬 계획을 세운 거야.”
네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잠사검귀의 존재는 극비 중에 극비다. 북무림 무인들은 아는 사람이 없고, 북검문에서도 몇몇 수장만이 알고 있다. 한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자가 알고 있다니, 가능한 말인가.
정녕 믿을 수 없는 말이나, 그 말을 한 사람이 만박선생이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다.
“도주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역으로 친단 말이지. 하하하! 좋아, 좋아. 가만…… 이는 강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육지를 통해 적혈구로 들어가겠다는 심산인데. 하하하! 이걸 어쩌나. 천비대주가 애써서 마련한 모든 것들이 허탕이 되고 말았으니.”
만박선생은 눈을 반쯤 감았다.
상대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싶을 때 떠올리는 버릇이다.
“가자. 적혈구만 봉쇄하면 끝나. 하하하!”
만박선생의 웃음소리가 더욱 낭랑해졌다.
제10장 대도박(大賭博) ― 큰 도박
1
고루쌍마는 강줄기가 꺾이자마자 급히 배를 강가에 댔다.
굽이진 곳에는 절벽 바위처럼 암벽이 툭 튀어나와 있어서 상류 쪽을 볼 수 없는 지형이다.
“잘 수 있을 때 푹 자둬. 언제 바빠질지 모르니까.”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혈유에게 죽음의 고비를 네 번이나 안겨준 적이 코앞에 있다. 강으로 도주한 것을 그자들도 보았을 테니 틀림없이 뒤따라올 것이다. 죽어라고 도주해도 모자랄 판이 아닌가. 겨우 사십여 장쯤 이동한 다음에 쉰다는 생각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도가 축 늘어진 혈유를 안아 들고 일어섰다.
수검도, 시마도, 고루쌍마도…… 어느 한 사람 토를 달지 않고 일어선다.
그들이 간 곳은 강에서 이십여 보밖에 떨어지지 않은 초지(草地). 온갖 잡초가 무성하나 키 낮은 풀들밖에 없어서 토끼 한 마리 숨을 수 없는 곳이다.
마도는 그곳에 혈유를 내려놓고 자신도 벌렁 드러누웠다.
모두 같은 행동을 취했다. 몸 눕히기 좋은 곳을 찾아 거리낌없이 누웠다. 그리고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풀밭을 벗어난 사람도 있다.
고루쌍마는 사람들이 모두 내리자 배에 구멍을 뚫어 물속에 가라앉힌 후 어슬렁거리며 초지를 빠져나갔다.
“제길! 젊은 놈들은 퍼자고, 늙은이들은 밤이슬 맞고.”
“크크! 그러기에 이놈아, 한눈을 팔기는 왜 팔아. 네놈이 고루음공만 십성으로 올려놨어도 이런 푸대접은 당하지 않잖아. 칠성이 뭐야, 칠성이.”
“그래서 네놈은 고루양공을 팔성까지밖에 연성하지 못했냐? 주둥이만 까져 가지고는.”
“다 늙은 놈한테 주둥이가 뭐야 주둥이가. 하여간 못 배운 놈은…….”
고루쌍마의 티격태격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금연화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運氣調息)에 몰두했다.
이들을 만나면서 배운 점이 많다.
자신이란 존재가 얼마나 작았던가. 우물 안 개구리가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자족했으니 돌이켜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한때는 후기지수(後起之秀)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중원에 산재한 수많은 문파 중에 그래도 이름이 알려진 문파만 이천여 개. 그들이 배출하는 인재는 한 문파에 두 명씩만 잡아도 사천여 명이나 된다. 구대문파(九大門派)나 오대세가(五大勢家)의 경우에는 뛰어난 자가 열 손가락을 후딱 넘어서니, 사천 명이라는 숫자는 그야말로 최소한으로 적게 잡은 수다.
금연화는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의미한 숫자놀이에 불과하니까. 하나 후기지수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라는 믿음만은 확고했다.
넓은 세상을 보지 못했다.
그만큼의 후기지수가 있다면 그들을 양성한 고수도 그만큼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