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30
230
확실히…… 그는 달라졌다.
무엇이 그를 다르게 만들었을까? 독이 통하지 않는 것을 목도했으면서도 전혀 꿀림 없는 언사를 내뱉을 수 있는 자신감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가.
마야는 빠르게 사천제일룡의 전신을 훑었다. 그리고 보았다. 사천제일룡의 열 손가락에 껴져 있는 열 개의 반지를.
‘십지환(十指環)!’
십지환이란 사천당문의 걸작 중 하나로 열 개의 반지를 의미한다. 반지는 진기의 힘을 빌어 쏘아지며, 빠르기가 추명반과 버금간다는 절대 신기(神器)다.
하나 십지환의 무서움은 빠름에 있지 않다. 빠름만으로도 어지간한 무인은 저승으로 보낼 수 있지만, 십지환의 진가는 폭발에 있다. 십지환 하나가 지닌 폭발력은 방원 이십여 장을 초토화시키고도 남는다 하니, 열 개가 일시에 폭발했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는 능히 상상된다.
마야는 폭발 범위는 벗어날 수 없다.
현재 중원에서 가장 빠르다고 인정받은 섬전잔영도 피해내지 못한다. 마도제일의 준족이었던 십족신마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신인 무신들도 폭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십지환 열 개가 모이면 무신 한 명이 나선 것과 다름없다 했다.
한데 열 개가 모였다.
대소를 터뜨리던 사천제일룡이 뚝 웃음을 멈췄다.
“봤나?”
“…….”
“봤군.”
사천제일룡은 씩 웃으며 열 손가락을 활짝 펴 보였다.
“아직도 뺏어갈 자신이 있나?”
“콘을 제압해서 어쩌려고?”
“그거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삶아먹든 구워먹든 내 맘 아닌가. 오늘은 구원(舊怨)을 따질 마음이 없으니, 싸울 생각이 없거든 그만 가지 그래?”
마야는 사천제일룡의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지그시 눈을 들여다봤다.
사천제일룡은 왜 콘을 제압했나. 콘은 널리 알려진 악마다. 다른 점은 고사하고 철사문을 초토화시킨 사실만 놓고 볼 때도 죽여 마땅한 자다.
한데 제압만 했다. 왜?
죽여야 마땅한 자를 살려뒀다는 것은 쓸모가 있다는 뜻이다.
마야는 사천제일룡의 의중도 읽어냈다.
서군봉은 백일몽을 써서 콘과 산주, 그리고 구혼음태를 수련한 여인을 수족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허황된 계획은 아니었다. 실제로 무적인 듯 군림하던 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일몽에 중독되어 있었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서군봉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을 게다.
물론 그녀에게 월로초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되겠지만, 월로초도 지니지 않았으면서 백일몽을 사용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한데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백 일이라는 날짜가 흐르기 전에 사천제일룡을 만났다. 그리고 제압되었다.
이제 칼자루는 사천제일룡이 쥐었다.
그는 무엇을 할까?
어처구니없게도 사천제일룡은 서군봉이 저지른 일을 이어받을 생각인 듯하다.
백일몽은 당문의 독이다. 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는 힐끔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으리라.
가공할 살인 병기를 셋이나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더욱이 북무림 칠성군 중에 한 명인 육신녀까지 손아귀에 거머쥐게 되었다.
힘을 쏟을 필요도 없다. 그저 땅에 떨어진 것, 줍기만 하면 된다.
사천제일룡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많지 않다.
백일몽을 알고 있고, 월로초를 지녔다면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나지 않을 게다.
마야는 다시 한 번 사천제일룡의 눈을 주시했다.
말이 통할 상태인가? 아닌 것 같다. 두 눈에 가득 담긴 것은 사흘 굶은 거지가 떡을 주운 것보다도 더한 탐욕이다.
기어코 싸움을 벌일 작정인가? 십지환이 터지면 그 역시 무사하기는 힘들 텐데? 그럴 것 같다. 아니, 십지환이 있는 이상 싸움을 걸어올 수 없다는 자신감이 똘똘 뭉쳐 있다.
말로는 안 된다. 하면 콘을 포기하고 돌아가든가, 십지환의 폭발을 감수하고 싸우던가 해야 한다.
마야는 항복한다는 의미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돌아가지, 돌아가. 십지환을 앞에 두고 모험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대답할 수 있는 거면.”
마야가 순순히 돌아간다고 해서인지, 아니면 십지환을 믿기 때문인지 사천제일룡의 표정은 한결 느긋해졌다.
“알고 있겠지만 콘과 난 어느 한쪽이 죽기 전에는 발 뻗고 자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어. 해서 묻는 건데, 콘을 죽일 건가? 죽여줬으면 하는데.”
“후후후! 마야도 그런 걱정을 하는군.”
사천제일룡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마야의 두 손이 번개같이 번뜩였다.
―불은 양(陽)의 생(生). 열과 근원이 같고……
뇌귀(雷鬼)의 독문신공인 뇌력금황기(雷力金黃氣)가 두 손에 가득 운집되어 있었다.
2
쒜엑! 파앙!
수천 가지 신법 중에 하나를 선택하고, 그가 지닌 능력으로 허점을 보완하여 천하제일신법으로 탈바꿈시킨 부풍약영. 번개가 찰나에 전신을 관통하여 전신 경락이 찢기고 단전까지 태워져야 얻을 수 있다는 뇌력(雷力), 뇌력금황기.
마야의 움직임은 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주먹에 담겨진 공세는 태산도 무너뜨릴 만큼 강렬했다.
마야와 사천제일룡 간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사천제일룡은 꿈틀거렸다.
지금 그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달려드는 마야를 향해 십지환을 쏘아내는 것, 그리고 쏘아내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십지환을 손가락에 낀 상태로 폭발시키는 것.
어느 것을 선택하든 살지는 못한다.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어차피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쏘아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때,
퍼엉!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강력한 권력(拳力)이 사천제일룡의 가슴을 가격했다.
사천제일룡은 실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갔다가 암벽에 부딪친 후,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비명 소리도 없었다. 반항할 여지도 없었다. 가득 끌어올린 진기를 십지환에 주입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마저 할 틈이 없었다.
사천제일룡으로서는 기가 막힐 것이다.
그는 무인이다. 독과 암기를 놓고 진신무공만 가지고 논하더라도 단번에 상승고수 자리를 꿰차고도 남을 무공을 지녔다.
그런 사람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기습을 당했다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는 잊은 게 있다. 마야를 만나는 순간부터 경각심을 가지고 경계를 늦추지 말았어야 했는데, 간과하고 말았다. 아주 중요한 것을. 마야는 얼굴을 쳐다보는 것 자체, 말하는 자체가 무기라는 것을.
환희마소가 그의 신경을 속였다.
포근하고 넉넉한 웃음 때문에 사천제일룡은 마야의 움직임을 잘못 읽고 말았다.
마야의 움직임은 그가 판단한 것보다도 배는 빨랐다. 반응속도도 늦었다. 마야가 지척에 이르러서야 기습을 느꼈으니 제대로 된 대응이 나올 리 없다.
환희마소뿐만이 아니다. 마야의 음성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름다운 노랫가락을 듣는 듯,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시원해졌다.
이것은 묘한 쾌감이었다.
마야가 말을 하면 좋고, 말을 끊으면 신경질나고…… 그래서 아무 말이고 한마디라도 더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고.
사천제일룡이 맥없이 나가떨어진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휴우!”
마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천제일룡에게 십지환이 있을 줄이야.
텅 빈 공간, 사람은 많지만 모두들 정신을 놓아버려 빈 울림만이 가득한 공간이다.
소립파는 쓰러진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
콘의 상태는 최악이다. 단정침이 꽂혀 있고…… 그가 판단하기에는 아무래도 단정폐맥술을 시술당한 듯하다. 하면 깨어나도 꼭두각시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구혼음태를 수련한 여인도 상당히 안 좋다.
쓰러져 있는 이유는 미혼산에 중독되었기 때문인데,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준다. 문제는 구혼음태다. 뇌가 상당히 부풀어 올라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보인다.
‘구성에 이르렀어. 조금만 지나면 천하의 요물이 될 터.’
콘과 여인을 편하게 해주는 길은 죽여주는 것뿐이다. 그것도 정신을 잃고 있는 지금, 아주 조용히 끝내주는 게 가장 인간적이다.
산주의 상태는 양호했다. 그는 정신을 잃은 것뿐이니 손을 쓸 필요가 없다.
이들 세 명은 모두 미혼산뿐만이 아니라 백일몽 냄새도 풍긴다. 하나 서군봉에게서는 백일몽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녀는 왜 쓰러져 있을까? 사천제일룡에게 당했으리라. 그렇다면 중독이다.
사천제일룡까지 다섯 명이 쓰러져 있다.
이 중에 가장 위중한 사람은 서군봉이다.
우선 살려놓고 보자. 매듭이 얽히고설켜 있어도 살아 있을 적에는 풀어나갈 희망이 있다. 죽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소립파는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때, 그녀의 몸에서 청아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났다. 맑고 시원한 향이기는 한데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라서 무슨 냄새인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립파가 기이한 향에 의아해할 때, 등 뒤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으읏!
콘이 소리없이 일어섰다.
공기의 흔들림조차 잡아낼 수 있는 마야의 감각도 콘의 움직임만은 잡아내지 못했다. 바로 등 뒤, 지척에서 사람이 움직이고 있건만 기척은커녕 이상하다는 느낌조차 갖지 못했다.
콘의 움직임은 절혼마녀가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완벽한 귀적무(鬼跡舞), 귀신의 움직임이었다.
스읏! 슈욱!
콘은 소도를 뽑아 들었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립파의 등에 찔러 넣었다.
‘앗차!’
소립파는 도기(刀氣)가 지척에 이르러서야 위기를 감지했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제삼의 눈을 피할 수 있었나. 영기(靈氣)를 띤 만공심안이 낮이나 밤이나 잠을 잘 때에도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도기가 지척에 이르러서야 알게 되다니.
푸욱!
소도는 가차없이 틀어박혔다.
요양관(腰陽關)과는 그야말로 한 치 간격, 단 일도에 절명할 수 있는 위치였다.
소립파는 극통을 참으며 앞으로 몸을 빼냈다.
소도가 반쯤 뽑혔다. 한데 그 순간, 소도가 또 움직였다.
스읏! 촤아악!
조금만 더 움직였으면 소도를 완전히 빼낼 수 있었는데…… 비정한 소도는 등줄기를 쭉 가르며 치솟았다.
등에 뜨거운 물이 부어졌다. 뜨거운 물벼락을 맞았다. 너무나 뜨거워 정신이 번쩍 들고, 곧이어 흘러내리는 축축한 물줄기가 기분을 구겨놓는다.
“그만! 그만! 그만!”
음성이 회오리쳤다.
그가 내지른 소리는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콘에게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들을 수 없었다. 소립파는 입만 벙긋거렸을 뿐이다. 소리는 결코 흘려내지 않았다.
아니다. 소리는 튀어나왔다. 지극히 제한된 음역(音域)을 들을 수 있는 몇몇 동물들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스읏! 스으읏!
콘은 또다시 공격해 왔다.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어디를 공격하는지도 알 수 없다.
은신술로 몸을 가린 채 가해져 오는 공격.
어떻게 이런 공격을 할 수 있을까? 콘의 무공은 난폭하고 거칠며 빠른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런 특징만으로도 그는 능히 태산이 되었다.
한데 새삼스럽게 은신술까지 섞다니!
이런 유의 공격을 즐겨 쓰는 사람들은 살수들이다. 그중에 제일은 천멸도 살수라고 할 수 있다. 또 있다. 절혼마녀의 귀적무도 이런 유에 속한다.
콘의 공격은 그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월등히 뛰어났다.
파아앗!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이어지는 도흔(刀痕)이 그어졌다.
깊은 상처,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아직까지도 콘을 바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연속해서 두 번이나 등을 공격당하고도 몸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콘은 몸을 돌려세울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무인 대 무인의 싸움이 아니라 철저히 살수가 살인 대상을 공격하는 방식이다.
그는 기회를 잡았고, 놓지 않으려고 한다. 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싸움을 끝내려고 한다.
그는 몸을 돌리기는커녕 당장 쏟아져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는 것도 급급하게 만들고 있다.
의도적인 공격이다.
억지로 몸을 돌린다면 돌릴 수는 있다. 하나 그 순간, 소도가 심장에 틀어박힐 건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등에 칼을 맞으며 서 있을 수만은 없다.
이거야말로 진퇴양난이지 않은가.
혼절해 있다고 너무 방심했었다. 한순간의 방심이 이토록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되어 돌아왔다.
‘어떻게든 해야겠는데…….’
그때, 소립파의 눈에 비친 게 있었다.
서군봉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처음에는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는 정도에 불과했는데, 고개를 들었고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소립파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복면으로 가려져서 눈밖에 볼 수 없지만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서군봉!’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매듭이 갑자기 확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알겠다. 자초지종이 어떻게 된 건지 이제는 알겠다.
깜짝 놀랄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콘…… 그는 자의로 일어선 게 아니다.
소도를 휘두르고 있지만 누구에게 왜 휘두르는지도 모를 게다. 콘은 역시 꼭두각시다. 단정침과 단정폐맥술, 거기에 백일몽까지 겹쳐서 완벽한 주구가 되었다.
의문이 있다.
콘은 서군봉보다 먼저 일어섰다. 서군봉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