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33
233
구순 노인이 툴툴거리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이제 본 가와 유계의 밀월 관계는 끝났습니다.”
구통부주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후후후! 놈들 덕분에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앞으로 진무부(振武部)가 바빠지겠구먼.”
“사방천마가 추인들을 죽인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콘을 방해하는 자는 모두 죽인다는 일종의 선전포고(宣戰布告)죠.”
“허허! 그럼 유계는 콘을 밀어주기로 했단 말이군. 하긴 유계 입장에서는 고착화된 현 무림을 어떻게든 뒤흔들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콘만 한 자가 없지.”
“왜요, 마야도 꽤 쓸 만했지 않습니까?”
“아냐. 마야는 근본적으로 유계하고 달라. 마야란 놈은 사술은 익혔어도 사람을 개 잡듯 죽이지는 않거든. 그게 콘과 다른 점이지. 마야는 죽어도 혼자 죽을 놈이고, 콘은 떼거리로 죽을 놈이고. 콘이냐 마야냐 하는 건 고민거리도 아냐.”
두 노인은 침착함을 되찾고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추인들은 죽기 마련이다. 이번에는 전례보다 훨씬 빨랐지만 사방천마가 손을 썼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한데, 할 말을 다 했으면 돌아갔어야 할 구통부주가 아직도 뻣뻣이 서 있다.
“왜? 또 할 말이 있는가?”
“마야에게 붙인 추인.”
“그들…… 그들도?”
“역시 사방천마의 솜씨였습니다. 마야와 본 가의 밀약을 알고 중간 다리를 끊어놓을 속셈인 듯싶습니다.”
“여, 여섯 모두?”
“…….”
“이런 죽일 놈들!”
열여덟 명을 배출했는데 열두 명이 명을 달리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이무신가가 처리하기 곤란한 지저분한 일들을 도맡았던 인간 백정들에게.
“자흐, 흑조편복에게 붙은 놈들은?”
“아직 무사합니다.”
두 노인은 나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음 추인들을 빨리 양성해야겠군. 좀 쉬려 했더니.”
구순 노인이 혀를 차며 일어섰다.
할 말을 마친 구통부주는 깊이 예를 취해 보인 후, 등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2
강아지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로써 어떤 일이 있어도 콘의 뒤를 밟게 해줄 것이라던 약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것 참! 이놈 왜 이래?”
“끌끌! 기운없어서 그런 거 아냐?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어야 사는 게지. 어제부터 먹은 게 없는 것 같던데 기운인들 나겠어.”
“줘도 안 먹는 걸 어떻게 해요.”
모두들 모여서 한마디씩 했다.
강아지만 철석같이 믿었다. 만사무불통지가 자신하며 보내준 영물(靈物)인데 어찌 믿지 못하랴. 실제로 시험까지 해봤고, 기가 막히게 콘을 찾아냈다.
“혈유.”
“쩝! 또 나네.”
혈유가 몸이 찌뿌듯한지 길게 기지개를 켜며 나섰다.
“우린 콘을 추적할 방도가 없으니 할 수 없잖아.”
마야가 담담히 말했다.
“알았어. 내 후딱 다녀오지 뭐. 발 빠른 것도 죄네. 남들은 모두 편히 쉬는데 나만 똥줄 빠지게 왔다 갔다 해야 하고. 그런데 저놈은 데려가 봐야 되는 거 아냐?”
혈유가 강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쯧! 멍청한 놈하고는. 일부러 가져갈 필요가 뭐 있누. 가서 정황설명만 하면 될 것을.”
시마가 대뜸 핀잔을 주었다.
혈유가 맞받아 뭐라고 하려는데 마야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가서 이번 일만 처리하지 말고, 강아지가 또 움직이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이럴 경우에 대비해서 다른 방도도 강구해 달라고 해. 인편이든 전서구든 다른 연락 방법이 있어야 될 것 같아.”
“알았소. 내 후딱 다녀오지.”
혈유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신형을 날렸다.
혈유는 반 시진 동안이나 줄기차게 달렸다. 하나 속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처음 신형을 날렸을 때나 지금이나 민첩함과 영활함은 변함이 없었다.
‘저 고개만 넘고.’
그는 휴식할 곳을 물색했다.
인근 주민들에게 칠부령(七富嶺)이라고 불리는 고개가 숨 가쁜 모습으로 마주 서 있다.
오르막길이 아찔하게 다가온다.
혈유는 내처 달려서 칠부령을 오른 다음에 쉴 작정을 했다.
만사무불통지를 만나러 제이무신가까지 갈 필요는 없다. 가까운 곳에 있는 남도문 분타에 용건을 말하면 전서구를 날리든 말을 타고 달리든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한다.
혈유가 실제로 달려야 할 거리는 마야가 위치한 곳에서부터 남도문 분타까지다.
이번 경우에는 운이 나쁘게도 칠부령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분타가 나타난다.
‘강아지를 줄 것 같으면 좀 멀쩡한 놈으로 주던가. 어찌 된 게 한 번 써먹으니 말을 안 듣네.’
칠부령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평지를 달릴 때와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땅을 밟는 발의 위치가 달라져야 한다. 일반인들은 모두 똑같이 걷지만 혈유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미미한 차이도 속도 차이를 가져온다.
발이 땅을 밟는 게 아니라 움직이기 위해 아주 작은 공간을 잠깐 빌리는 것이다. 그러니 힘차게 밟을 필요가 없다. 구르듯이 미끄럽게 타넘어야 한다.
혈유는 항우장사도 서너 번은 쉬어야 오를 수 있다는 칠부령을 단숨에 올랐다.
“휴우!”
칠부령에 올라 광활하게 펼쳐진 산야를 보면서 깊은 숨을 들이쉬고 토해내는 맛은 정상에 올라보지 못한 자는 느낄 수 없는 진미다.
그는 잠시 정상에 오른 자의 즐거움을 마음껏 만끽했다.
내려가는 길은 순식간일 테고, 거기서 남도문 분타까지는 대략 일다경(一茶頃) 정도 걸린다.
넉넉잡아 반 시진이면 소식을 전해줄 수 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반나절은 꼬박 걸릴 거리를 한 시진 만에 해치우는 셈이다.
‘하! 고거…… 고거를 어떻게 한다.’
혈유는 일령을 떠올렸다.
어리게만 봤는데 언제부터인지 여인 냄새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마음에 있다. 혼자만의 사랑이 아니라 둘이서 예쁘게 만들어가는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일령이 마야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안다.
경쟁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야이기에 물러서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둘을 엮어주기 위해서 애쓰는 게 눈에 보인다.
자신이 봐도 빤히 보이는데 일령인들 보지 못할까.
일령은 좋다 싫다 표현을 하지 않지만 그에게는 싫다고 거절하지 않은 것만도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제는 자신이 나설 차례다.
남들이 애를 쓰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인 자신이 뒤로 물러서 있다면 말이 안 된다.
‘이번에는 손이라도 잡아봐야겠어.’
혈유는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그치지 못했다.
그도 일령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사내였다. 하나 그전에 무인이었다.
“누구…… 엇!”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한기가 치밀고,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물론 그 혼자만의 느낌이다.
강적과 마주쳤을 때, 막다른 궁지에 몰렸을 때는 꼭 이런 기분이 들곤 했다.
혈유는 자신을 불안하게 만든 게 무엇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무엇인가가 날아오는 중이었고, 황급히 몸을 빼내기에도 급급했다.
쒜엑! 파악!
그가 앉았던 자리에서 경쾌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낱 나뭇가지다. 나뭇가지가 깊이 틀어박혔다. 끝 부분만 남아 있어서 어느 정도의 나뭇가지를 던졌는지도 모르겠다.
‘강…… 자!’
혈유는 바짝 긴장했다.
상대가 할 수 있는 것, 자신도 할 수 있다. 단지 상대처럼 깔끔히 못할 뿐이다.
이로써 상대가 더 강하다는 게 입증되었다.
그렇다고 주눅 들 필요는 없다. 나의 장점은 상대의 약점이 되고, 나의 약점은 상대에게는 장점이 된다.
지금은 상대의 장점을 봤을 뿐이다.
싸움이란 얼마나 빨리 약점을 버리고 장점으로 이끄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역시 빠르군.”
나뭇가지를 던진 자가 여유있게 웃으며 걸어나왔다.
그는 소도를 들었다.
그는 소도를 혀로 핥는다.
“서, 서방천마!”
“크크크! 야! 서방만 보이고 난 안 보이냐! 좌우지간 요즘 어린것들은 몽둥이찜질을 해야 정신 차린다니까. 말로 해서는 안 들어요, 안 들어.”
서방천마에게 눈길을 빼앗긴 사이, 등 뒤에서 걸쭉한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남방천마다.
“헤헤! 남방천마도 납셨네. 나 한 사람 타작하자고 이렇게 우르르 납신 건 아닐 테고, 무슨 일로 납시셨나.”
혈유는 옆 걸음으로 물러섰다.
서방천마와 남방천마를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과 삼각구도를 형성하면……
혈유는 생각을 정정했다.
옆 걸음으로 이동한 건 좋았는데 방향이 잘못되었다. 이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움직였어야 한다.
그가 움직이던 쪽에서 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나왔다.
‘동방천마까지. 우! 저놈의 욕금진기…….’
쳐다보기만 했는데 욕정이 치민다.
그러고 보니 이들과 콘의 일행이 많이 닮았다.
콘과 서방천마는 모두 손바닥만 한 소도를 애용한다. 동방천마는 욕금진기를 수련하여 욕념을 자극하고, 수는 환락궁의 구혼음태를 수련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미치게 만든다.
남방천마는 패악하다는 점에서 산주를 닮았다.
죽은 북방천마는 굉장히 냉정한 자였다. 사방천마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자는 서방천마이지만 북방천마의 의견을 상당히 존중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북방천마는 서군봉으로 대신할까?
묘한 우연이다.
“우! 이거야 보기만 했는데도 몸이 달아올라서…… 보는 눈만 없으면 한 번 달라고 해보겠는데.”
혈유는 불길함을 예감했다.
사방천마에게 둘러싸였으니 빠져나갈 길은 없다. 마음을 편히 먹고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이 누님에게 안겨서 죽겠다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고. 너무 작아서 깐작거릴 것 같긴 하지만.”
‘죽음? 왜?’
동방천마의 농담 속에서 죽음을 읽어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다. 왜? 무엇 때문에 죽이려는 것일까? 가는 길이 다르니 죽일 수도 있다. 유계 인간들에게 왜 죽이냐고 묻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기분 나쁘다고 괜히 죽이는 인간들이 그들이니까.
하지만 사방천마 정도 되는 자들이 사람을 죽이려 할 때는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싶다.
“헤헤! 내가 이래 봬도 상당한 대물(大物)인데. 놀라서 기절하지나 않을지 몰라.”
“그럼 말로만 할 게 아니라 봐야겠지?”
동방천마가 손을 쑥 뻗어왔다.
빙옥같이 하얀 손, 얼음처럼 차디찬 손…… 음령소수(陰靈素手)!
“자, 잠깐! 잠깐! 조금 더 몸을 달궈놓고…….”
혈유는 황급히 뒤로 몸을 물렸다.
한쪽은 서방천마가 있고, 다른 쪽은 남방천마가 지키고 있으니 물러설 곳도 한 곳뿐이다.
“호호호! 자칭 신법제일인의 움직임이 이 정도에 불과한 거야? 실망했는데.”
음령소수는 잠깐의 여유도 주지 않고 바짝 따라붙었다.
백척간두에 선 몸이지만 혈유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냉정함도 잃지 않았다. 그는 싸움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신법에서는 내가 한 수 위.’
물러서면 쫓아온다. 또 쫓아오는 만큼 물러선다.
혈유는 계속 물러서기만 하면서 동방천마의 신법 정도를 파악했다.
누구와 싸워도 마찬가지다. 무공이 비등(比等) 정도의 견적만 나와도 일단은 물러서고 본다. 그러면서 냉정한 눈으로 상대의 신법을 파악한다.
적이 빠르냐, 내가 빠르냐.
무공을 보는 것은 빠름을 알고 난 다음이다.
이것이 혈유가 싸우는 방식이다.
동방천마를 살펴보건대 전력을 다하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다.
전반적인 무공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지만 신법만 가지고 논할 때는 자신이 한 수 위다.
알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싸운다.
쒜에엑! 파앗!
혈유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 갑자기 옆으로 튕겨 나갔다. 동시에 손에서 한 대의 화살을 던져 냈다.
그의 성명병기인 수전(手箭), 독수전(禿手箭)이다.
목표를 놓친 적이 없다. 혈(穴)을 노리고 던져서 한 치의 오차도 낸 적이 없다.
타앙!
음령소수와 독수전이 부딪쳤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면서.
이럴 수는 없다. 음령소수는 단단하기가 빙옥 같다지만 사람의 손을 벗어날 수 없고, 독수전은 못 뚫는 것이 없다지만 목전(木箭)의 한계를 지닌다.
쇳소리가 나다니!
음령소수에 실린 힘이 상상외로 강하다. 아니, 터무니없이 강하다.
“호호호! 이게 독수전이구나. 기대했는데 어린아이들 장난감 같잖아. 후회하지 말고 검을 뽑아. 혈유의 묵검(墨劍)도 상당히 알아주는 편이잖아?”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혈유는 묵검을 뽑았다. 그 순간,
쒜에엑!
무엇인가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다.
“헛! 비겁…… 크윽!”
혈유는 몸을 비틀었다. 옆구리가 활처럼 휘어 서방천마의 소도를 피해내려고.
하나 서방천마의 소도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한 치는 더 길었다.
푸웃! 파아앗!
옆구리가 길게 갈라지며 피가 샘솟듯 뿜어져 나왔다.
“거 자식! 되게 팔딱거리네.”
걸걸한 음성도 곧바로 뒤를 이었다.
‘빌어먹을! 합공이라니!’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철판이 등짝을 후려쳤다.
빠앙!
일장에 바위를 부순다는 일장쇄암(一掌碎巖)이다.
“커억!”
혈유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토해냈다.
이 순간, 그는 신법을 잃었다. 솔직히 말하면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