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35
235
“이게 소용있을까?”
남방천마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방천마가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묵묵히 약봉지를 풀자, 곱게 갈린 하얀 가루가 나왔다.
냄새는 없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다. 단숨에 입에 털어 넣어도 괜찮아 보이는 하얀 분말이다.
사용 방법도 간단하다. 왕벌이 날아올 때, 조금씩 집어서 던지기만 하면 된다.
하얀 분말은 왕벌의 미세한 털에 달라붙어 살을 파먹는다. 그리고 개체수를 늘린다.
가루 하나가 왕벌에 달라붙었다고 가정했을 때, 살을 파먹으며 개체수를 완전히 늘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하다.
가루를 뿌리면 벌이 뚝뚝 떨어진다. 닿은 즉시 즉사한 것처럼.
왕벌 한 마리를 죽였을 때 늘어난 개체는 수천 배에 이른다. 이것들이 또 다른 벌을 찾아 부유한다.
시작만 해놓으면 벌들이 몰살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며, 시간도 지극히 짧다.
분말은 살아 있는 균(菌)이었다.
인체에 영향이 없고 오직 벌에만 작용하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사람이라는 종족은 말살되고 말았으리라.
서방천마와 남방천마가 가지고 있는 약 두 봉지면 왕벌을 몰살시키고도 남았다.
“빨리 처리하고 빠져나가자. 마야가 오면 죽도 밥도 안 돼.”
서방천마는 약 가루를 허공에 뿌리려고 했다. 그때, 왕벌들이 미리 눈치라도 챈 듯 일제히 날아오르더니 뒤로 물러섰다.
“허! 이것들…… 위험도 알아차리나? 영물이네.”
남방천마 역시 가루를 뿌리려다 말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바보.”
“……!”
“쓸데없는 소리 말고 죽을 준비나 해. 아무래도 오늘이 제삿날인 것 같으니까.”
서방천마가 숲 한가운데를 노려보며 소도를 뽑아 들었다.
숲에서 마도가 걸어나왔다.
일령도 걸어나왔다. 가벼운 경장 차림이다.
“후후후! 차륜전이라는 건가.”
서방천마가 혀로 소도를 핥으며 말했다.
“마도, 일령. 서방천마와 남방천마를 너희 제물로 준다. 남만에서의 패배를 씻어라. 놈들을 단숨에 죽이는 우(愚)는 범하지 마라.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토막씩 베어서 죽여라. 저들은 마인이다. 마(魔)로 대접하라!”
숲 속에서 들려온 마야의 음성이었다.
숲 전체가 웅웅 울리는 회성음(回聲音), 풀포기까지 파르르 떨리게 만드는 사자후(獅子吼), 하늘의 노함을 대신 알려주는 창룡음(蒼龍音).
마야의 음성을 들은 서방천마와 남방천마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앞에 나서는 자가 전에 싸워봤던 자이니 쉽게 상대할 수 있다. 이기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아직 방법은 생각나지 않지만 탈출할 기회는 생긴 셈이다.
“흐흐흐! 전처럼 할까, 아니면 상대를 바꿔서 할까.”
“빨리 끝내기나 해.”
서방천마는 말을 하는 중에 신형을 쏘아냈다.
쒜엑! 까앙!
무지막지하게 달려가 일도를 내둘렀는데, 핏빛 도광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헛!”
서방천마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전에도 혈염도와 부딪친 적이 있다. 하지만 강도가 달랐다. 전에는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릴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많이 늘었군.”
서방천마도 소도를 혀로 핥았다.
마도의 반응은 더 심했다. 그는 혈염도로 자신의 손바닥을 갈라 피를 먹였다.
‘강해졌다!’
마도에게 어떤 기연이라도 있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강해질 리가 있나.
서방천마의 무공은 빠른 공격에 근원을 둔다.
빠르다 하면 신법이 빠를 수도 있고, 손이 빠를 수도 있지만 그는 공격이 빠르다.
말이 안 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신법은 그보다 빠른 사람이 많다. 검을 놀리는 손도 제일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구든 그의 무공을 본 사람은 ‘빠르다’는 말부터 내뱉는다.
순간적인 폭발력을 타고난 덕분에 쉽게 무공을 배웠고, 쉽게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 남들이 하나를 노력하여 하나를 얻을 때, 그는 열 개, 스무 개를 얻었다.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만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밤잠을 자지 않고 수련에 몰입했다.
그렇다. 무림이란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자들이 기량을 겨루는 각축장이 되어야 한다.
마도처럼 재능도 없는 놈이 십 년, 이십 년 세월만 축내다가 겨우 한두 수 터득했다고 활개 칠 무림이 아니다.
무인의 기질을 타고 태어난 놈이 아니면 무림에 발을 딛어서는 안 된다.
그런 놈들을 경멸한다.
그런 놈들은 수십 년을 고련(苦練)해도 결국은 칼밥이 될 뿐이다.
서방천마의 판단에 따르면 마도는 영원히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 서로 도를 부딪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래 왔다.
‘이럴 수는 없어! 이토록 짧은 기간에! 넌 영원히 내 하수야.’
하수라고 너무 방심했다. 후후!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했거늘.
“타앗!”
서방천마는 신형을 쏘아냈다.
마도의 움직임이 보여야 한다. 혈염도가 허공에 그려놓는 궤적이 한눈에 읽혀야 한다.
카앙! 써어억!
귀청을 찢는 날카로움, 그리고 육질이 베어지는 소리.
서방천마는 휘청거렸다.
옆구리가 길게 베어졌다. 단 일도에. 단번에 싹둑 잘라낸 것도 아니다. 배꼽 바로 옆으로 들어와 둥그렇게 호선을 그리며 살결을 베어냈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기연을 얻었든, 수련에 매진했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든, 어쨌든…… 그는 사방천마를 눈 아래 굽어볼 정도로 강해졌다.
이번에는 방심이라고 자위할 수도 없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진기를 전력으로 끌어올렸고,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속도를 끌어냈다. 그런데도 베였다.
졌다.
서방천마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내장이 삐져 나가려고 한다. 옆구리 살이 자꾸만 넓게 벌어진다. 콸콸 시냇물처럼 흘러내린 피는 허벅지를 타고 내려와 무릎을 적시고 정강이를 물들이더니 신발 속에까지 들어왔다.
“혈염도(血染刀), 절대감각도(絶大感覺刀), 단맥도(斷脈刀), 철저한 살인도(殺人刀). 후후! 이름도 더럽게 많군. 모두가 불가능하다던 무적도(無敵刀)를 완성해 냈군.”
마도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는 냉랭한 눈길을 던지며 서방천마의 등 뒤로 돌아갔다.
서방천마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졌는데, 이미 죽음이 확실한데 더 싸워서 뭐 하나. 대신 입을 열었다.
“후후후! 마도, 너도 참 불쌍한 인간이군. 무적도를 완성해 놓고도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하니 말이야. 천하제일인은 언감생심. 정도나 마도 어느 한 군데라도 장악할 처지가 아냐.”
서방천마의 말은 맞다. 무적도의 완성은 무림사에 길이 남을 대사건이다. 한데도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만 더 하자. 비윗장 긁는 소리는 그만 하고, 무인다운 충고를 하지.”
서방천마의 옆구리에서 기어이 창자가 흘러나왔다. 혈유처럼.
“너흴 뒤따르면서 묘한 느낌이 들더군. 콘 말이야. 그놈, 나와 참 많이 닮았어. 병기도 같고, 성질머리도 같고, 도를 쓰는 수법도 그렇고. 똑같기는 한데 분명 나보다 두어 수 위야. 나중에 콘과 한 번 붙어봐. 좋은 승부가 될 거야.”
마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혈염도를 들어 서방천마의 목뒤에 댔다. 그리고 천천히 썰어나갔다.
서방천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도의 의중을 알았다. 하나 피하기는 싫다. 목이 완전히 잘릴 때까지 고통을 감수하는 것도 피곤하다.
그는 소도를 들어 심장에 찔러 넣었다.
일령과 남방천마가 부딪치기도 전에, 서로를 노려보며 다가서고 있을 때 마도와 서방천마의 싸움이 끝났다.
단 두 합 만에 결정된 승부였다.
“서방…… 천마.”
남방천마는 서방천마가 자신의 소도로 심장을 찌른 후에야 그의 명호를 나직이 불렀다.
물론 들릴 리 없다. 그는 이미 숨을 거뒀으니까.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은 아니다.
싸움을 하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 어떻게 항상 이기기만 하겠는가. 어쩌다가 졌는데, 그 어쩌다가가 오늘 같은 경우라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마도의 솜씨를 보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기에 멀리 가지 말고 잠시 기다려 달라는 뜻에서 별호를 부른 게다.
“어이, 계집! 우리도 시작해야지?”
일령도 마도처럼 말을 섞지 않았다.
“계집아, 싸울 거면 빨리빨리 병기를 뽑아. 이 어르신은 이게 병기니까.”
남방천마가 두 육장(肉掌)을 들어 보였다.
일령도 두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뜻은 분명했다. 권각(拳脚) 싸움이다.
“제길! 이 남방천마께서 계집과 주먹다짐을 할 줄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서방천마가 당한 것을 봤는데 방심하는 위인이 어디 있겠나.
“간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형을 화살처럼 쏘아냈다.
진기는 장심에 모았다. 양손에 가득 운집시켰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기 전부터 그의 장기인 일장쇄암을 연속적으로 갈겨댔다.
파앙! 팡팡팡팡!
잔뜩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는 것 같은 참으로 기묘한 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스으윽……!
일령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유유(幽幽)!’
일령의 무공은 알고 있었다. 선유비조신법이 어떤 것인지도 안다. 무공을 최극상으로 펼쳤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도 짐작한다.
그는 선유비조신법과 염화옥수를 꿰뚫고 있었다.
어떻게? 남만에서 한 번 싸워봤지 않은가.
그에게는 한 번 싸워본 무공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머리가 있다.
물론 무식하다. 성격도 단순하다. 그래서 말과 행동이 경망되게 보일 수도 있다. 하나 무공에서만은 다르다. 어떤 무공이든 싸웠던 무공은 절대 잊지 않는다. 그 부분에서만은 가히 천하 석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일령의 움직임은 예상이 빗나가게 만들었다.
부드러움, 빠름, 강함, 유연함…… 인간이 펼쳐 낼 수 있는 모든 동작을 하나로 버무려서 완벽하게 표현해 낼 때, 유유라고 한다.
다른 사람은 유유라는 말을 모른다. 그 혼자만이 아는 말이다. 해서 동작에 허점이 있을 때는 ‘신선이 구름을 타고 노니는 듯한 유유가 없다’는 말을 해주곤 했다.
여태까지 알아듣는 놈도 없었다. 그에게 그런 말을 듣고도 산 인간은 없었으니까.
일령이 모든 기록을 깨고 있다.
유유……!
일령의 움직임은 완벽하다. 신기루처럼 가까이 있는 듯한데 잡아보려 하면 잡히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 같으면서도 체향(體香)은 지척에서 풍기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 않은가.
청각, 후각은 이미 기능을 잃어버렸다. 남은 것은 육감인데, 그마저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남방천마는 유령들의 세계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느꼈다.
‘크크크큭! 선유비조…… 신선들의 세계에 새가 난다. 이런 것이었군. 이건 신선들의 세계가 아냐. 죽은 유령들의 세계지. 새? 저게 새인가? 유령이지. 유령들의 세계에 떠도는 유령…… 유령? 서, 설마 이 신법이!’
유령마제(幽靈魔帝)의 초혼신법(招魂身法)!
신법을 펼치는 것만으로 상대의 넋을 빼앗았다고 한다. 공격을 하지 않고도 죽일 수 있었다고 한다.
믿지 않았는데……
‘후후후! 공령문이 유령마제가 만든 것이란 말이지. 재밌군, 재밌어.’
재미는 없었다. 등에서 쇠집게로 살을 찝는 듯한 극통을 느꼈다.
‘염화옥수!’
아플 때는 차라리 낫다. 아픔이 가시면 죽음이 찾아온다. 이게 염화옥수다.
일령이 손을 거두고 물러섰다. 순간,
촤르르르릉……!
쇠집게로 집였던 곳에서 뜨거운 불기둥이 일어나더니 전신으로 확 퍼졌다. 그리고는 쇠꼬챙이 수백 개가 한꺼번에 틀어박히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아아아아아악!”
남방천마는 체면 불구하고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2
쥐를 가장 잘 잡는 짐승은 고양이다. 하면 고양이보다 더 잘 잡는 짐승은 뭘까? 쥐다. 쥐가 쥐를 잡을 때 가장 무섭다. 먹이나 습성, 이동경로를 체득하고 있다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다.
마인은 마인으로 하여금 때려잡는다. 도둑은 도둑이 잡고, 산적은 산적이 잡게 한다.
사방천마는 마인들을 때려잡기 위한 도구로 아주 유용했다.
하지만 그들도 변한 게 있다.
쥐를 잡으라고 불려왔을 때는 그들도 쥐였다. 하나 고양이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 고양이에 대한 습성도 환히 꿰뚫게 되었다. 쥐도 되고 고양이도 되는, 양쪽에 아주 위험한 사람들이 된 것이다.
동방천마는 제이무신가와 마야의 연락 두절을 맡았다.
마야 쪽에서 나오는 사람은 남방천마와 서방천마가 도륙할 것이고, 제이무신가에서 오는 사람은 그녀가 처리한다.
그녀는 칠부령에 자리를 잡았다.
마야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녀도 다른 자리를 마련해야 하지만 아직 이동한다는 소리가 없으니 칠부령만 지키면 된다.
‘눈과 귀를 철저히 잘라야 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그녀는 칠부령으로 올라서는 장사치 한 무리를 발견했다.
의심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장사꾼들이다. 하나 동방천마의 예리한 눈썰미는 그중 한 명에게서 고양이 냄새를 찾아냈다.
걸음걸이에 배어 있는 가벼움이 다른 사람들과 판이하게 차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