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39
239
그녀가 보따리를 내놨다.
선뜻 받을 수 없다. 이제 그만 길을 떠나달라는 축객령인 줄 알지만 마음 정리가 되지 않았다.
“마야가 숙제를 줬죠?”
“…….”
“마야의 숙제는 항상 ‘나’에게서 풀어야 해요. 다른 사람은 일절 개입시키지 말고 나만 생각해요.”
“나만…….”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요.”
사망혈인은 다담선자가 물러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앉아 있었다.
그가 육포 보따리를 들고 일어선 것은 해가 지고 사방에 어둠이 깔린 후였다.
“그런 거였군. 믿음이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올라가는 것이야. 믿게 해주면 믿는 것이고,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하면 믿지 못하는 거지. 위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아래에서 하는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것뿐이지.”
믿느냐 안 믿느냐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마야는 애초부터 믿었다. 그래서 배합도를 내줬고, 혼자 만들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가게 해주었다.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은 물론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데 자신이 물었다. 배신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자신 마음속에 배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다. 만멸폭이면 당장 천염문을 재건할 수 있다는 들뜬 희망이 그런 마음을 들게 한 것 같다.
마야는 정 마음이 그렇다면 가도 좋다는 허락을 했다.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정을 떼면서.
선택은 나에게 달렸다.
마야가 믿게 해줄 수도 있고 배신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마야는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일 게다. 복수니 뭐니 하면서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 게다.
“제길! 믿는다는 말보다 더한 말이었어.”
사망혈인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 시간, 시마는 공동묘지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하루 종일 마셨다. 독째로 들이붓다 보니 얼마나 마셨는지도 모르겠다. 취기가 오르면 봉분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았고, 정신이 들면 또 마셨다.
발치에 빈 술독이 늘어났다.
“후우! 후우!”
시마는 큰 숨을 토해냈다.
숨결을 따라 진한 술 냄새가 새어 나왔다.
“흑혈…… 흑혈…… 크큭! 흑혈…….”
시마가 토해낸 소리는 괴로움이었다.
마야가 원한 건 목숨이다. 하나뿐인 목숨을 이제 그만 내놓으라고 말한다.
녹혈마공의 최후 단계는 흑혈마공으로 이어진다.
전신의 모든 피가 독혈(毒血)이 된다. 살은 독육(毒肉)이 되고, 토해내는 숨결에도 독이 섞여 있다.
그는 완벽한 독인이 된다. 더 이상 인간과 섞여 살 수 없으니 천형을 자진해서 받아들인 독인이다.
인간의 음식도 먹을 수 없다. 그토록 좋아하던 술도 이제 끝이다. 정겨웠던 사람들과도 안녕이다.
그렇다고 천하무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흑혈마공을 전개하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전신(全身) 폭사(暴死).
전신이 갈가리 찢긴 채 죽는다. 적이 죽는지 죽지 않는지는 볼 틈도 없다. 그전에 자신이 죽어야 하니까.
부디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흑혈마공을 수련하기 위해 치른 대가가 너무 크다.
“후우!”
시마는 큰 숨을 들이쉬며 마지막 남은 술 단지를 들이켰다.
마지막 술이다. 이것이 이승에서 마시는 마지막 술이다.
“클클클!”
그는 기분 좋게 마셨고 빈 술독을 흔쾌히 내려놓았다.
“됐어. 이젠 됐어. 클클!”
시간을 끌게 무엔가. 전력으로 녹혈마공을 이끌면 되는데, 마지막 진기에서 한 번만 더 힘을 써주면 되는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쏴아아아아!
진기가 전신을 휘돈다.
남들은 치를 떠는 시독이지만, 그에게는 상쾌하기 이를 데 없는 청량제다. 시독이 전신을 휘돌 때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떠다니는 듯한 몽롱함이 일어난다.
기분 좋다. 무척 상쾌하다.
시독(屍毒)이 경혈을 자극하면 신경이 영향을 받아 미세한 떨림을 보이는데, 이러한 증상이 몸 전체에 고루 퍼져서 발생하면 칼에 찔린 통증도 잊을 만큼 강력한 환각이 일어난다.
녹혈마공에 손댄 자는 마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추살당해 죽는다. 안다. 그러면서도 끝내 녹혈마공을 놓지 못한 채 처절한 죽음을 택한다.
녹혈마공이 그렇게 만든다.
시작을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듯한 환각을 경험한 후에는 결코 마공을 놓지 못한다.
평소 같으면 이 상태에서 멈췄을 게다.
시마는 마지막 남은 진기를 싹싹 긁어모아 강렬한 힘으로 전신에 휘돌렸다.
파아아아앗!
진기가 격랑을 일으킨다. 경맥이 터져 나갈 듯이 부풀어 오른다.
멈춰야 한다. 진기를 계속 이끌 수는 있지만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독인이 되는 흑혈마공의 세계로 건너간다.
‘남은 미련은 없어.’
파아아앗!
시마는 진기를 계속 이끌었다.
격랑이 지나가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폭풍이 휩쓸고 간 바다처럼 부유물들이 떠 있는 황폐한 바다, 고요다.
시마는 진기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이게 끝이군.’
흑혈마공의 잔인함을 고려하면 너무도 담담한 시작이다.
이거야 원,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으니.
달라진 건 있다. 피부가 새까맣게 변색되었다. 입에서는 며칠 동안 이빨을 닦지 않았을 때처럼 비린내가 풍긴다. 머리도 간지럽다. 하도 머리를 감지 않아서 이가 득실거리는 것 같다.
독인이 되었다는 증거다.
몸에서 어떤 증상이 일어나든 이제부터는 참고 견디어야 한다.
손에 닿는 것은 모두 독이 된다. 머리를 감은 물도 독수(毒水)로 변한다.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저승길 보내기 딱 좋다.
불편한 점이 무척 많을 게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것은 진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제는 빨리 달릴 수가 없다.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수도 없고, 산을 오를 때도 거친 숨을 토해내야 한다.
진기는 전신폭사를 고려할 때만 사용해야 한다.
이 부분은 항시 조심해야 한다. 무심코 진기를 끌어올렸다가는 애꿎은 목숨, 허공에 날려 보내는 수가 있다. 개죽음하지 않으려면 진기를 사용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한다.
마야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흑혈마공을 사용해야 할 만한 상대가 있기에 요구했을 게다. 괜히 늙은이 하나 폐인 만들려고 흑혈마공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게다.
놈을 위해서라면 죽어줄 수 있다. 한 번이 아니라 열 번, 스무 번이라도 죽어준다.
‘후후! 마야, 난 준비 끝났다. 이제 필요할 때 부르기만 해.’
시마는 두 다리를 쭈그리고 옷깃을 부여잡은 채 잠을 청했다.
이런 잠자리도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할 게다. 사람들과 떨어져서 홀로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할 테니까.
***
“마야가 만멸폭을 만들 모양입니다.”
“만! 만멸폭이라고 했나?”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만사무불통지였지만 만멸폭이라는 말에는 관심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마야가…… 만멸폭 도식을 알고 있단 말이지?”
“사망혈인이라고, 변변치 않은 놈에게 일거리를 맡겼는데…… 원하신다면 놈의 목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아냐, 아냐. 만멸폭이라면 나도 흥미가 생겨. 만멸폭이 완성될 때까지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마.”
“흑혈마공도 완성되었습니다.”
“뭐라고!”
“시마가…….”
“알아, 알아! 이 세상에서 흑혈마공을 수련할 수 있는 사람은 시마뿐이지. 마야, 이놈…… 세상과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갑자기 만멸폭에다 흑혈마공에다, 정신없게 만드는구먼.”
“사천제일룡을 견제하려는 것이 아닌지요.”
만사무불통지는 피식 웃고 말았다.
흑혈마공은 마공의 위력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과는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서적에서 몇 줄 읽은 것으로 흑혈마공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흑혈마공은 위험하다. 만멸폭만큼이나 위험하다. 무신들도 흑혈마공을 수련한 사람은 조심한다. 아니, 조심하는 정도가 아니다. 곁에 가기를 꺼린다.
마야가 흑혈마공을 요구했다면 적어도 무신들 중 한 명은 때려잡을 결심을 한 게다.
누굴까? 혈귀대주의 원수인 궁왕 강창도?
만사무불통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궁왕은 마야와 연관이 있지 시마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마야의 복수를 위해서 시마의 목숨을 요구한다는 건 어딘지 모순된다. 궁왕은 아니다. 범위를 좁혀야 한다. 시마가 기꺼이 같이 죽을 수 있는 상대 중에서 찾아야 한다.
“다른 일은 없는가?”
“마야의 소식은 당분간 남도문 정보에 의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고?”
“마야와 저희를 잇는 모든 연결선이 제거되었습니다. 만멸폭을 만들고 흑혈마공을 완성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입니다.”
“누구 소행인고?”
“…….”
“흔적을 잡지 못했군.”
“티끌만 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이 흉수의 특징입니다.”
“허허허!”
만사무불통지는 웃었다.
이런 상태라면 구통부는 존재 가치를 잃었다. 눈과 귀가 도려진 것이다.
누굴까? 만사무불통지를 향해 선공을 가하는 자도 있다니. 넷 중 한 명이다. 북검문주, 남도문주, 주공, 그리고 마군. 분명히 그들 중 한 명이 선공을 가해온 게다.
“구환자에게 일러둬. 당분간 야광이 접수한 모든 정보, 제이무신가에 직송(直送)하라고. 분석은 자네가 하고.”
“알겠습니다.”
구통부주가 물러갔다.
‘시작인가. 전쟁이.’
만사무불통지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싸움은, 전쟁은 늘 사람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야광으로 집합된 모든 정보는 제이무신가로 직송하도록. 촌각도 지체치 말고.”
구환자는 명을 내리면서 때가 이르렀음을 감지했다.
제이무신가에서 야광의 정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구통부의 눈과 귀가 막혔다는 뜻이다.
누군가 선수를 쳤다.
이제…… 만사무불통지의 운명은 구환자 자신이 움켜쥐었다. 머리를 쓰는 자, 머릿속에 정보가 들어와야 한다. 눈과 귀가 가려진 상태에서는 정확한 해법을 돌출할 수 없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전임 야광 총수는 서둘다가 죽었다. 그래도 남무림에서는 답평이라는 이름자를 알아주었는데, 하루아침에 목이 베어졌다.
구환자는 자신의 목숨도 하루살이임을 안다. 만사무불통지가 눈을 흘기면 눈빛이 칼날로 변해 목을 친다.
‘먼저 문주님을 만나뵈어야 하는데…….’
야광 총수 정도 되는 자가 남도문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믿을 사람이 없을 게다.
실제로 그렇다. 구환자는 남도문에 입문한 이래로 남도문주를 본 적이 없다. 문주가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남도문은 이끌고 있는지 모든 게 의아스럽다.
표면화된 사람은 만사무불통지다. 그가 남도문 전권을 휘두르고 있다. 만사무불통지가 남도문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문주는 존재한다. 제일무신가에. 만날 수 없을 뿐.
문주를 만나야 한다. 문주의 의향부터 알아야 한다. 문주가 만사무불통지의 전횡을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있다면 그로서는 할 것이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한참 바빠질 것이고.
하나 문주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서는 안 된다. 만사무불통지가 먼저 명을 내리게 해야 한다. 문주를 만나러 가자고. 아니면, 문주님께 직접 보고하라고.
자신은 만사무불통지가 그런 명을 내리게끔 일을 만들어야 한다.
‘마야가 날뛸 때도 내버려 두고…… 콘이라는 놈이 살육을 하고 돌아다녀도 못 본 척하고. 이건 정도가 아냐. 남무림을 이끄는 남도문이 이래서는 안 돼.’
그는 양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몰입했다.
제6장 주모양(走模樣) ― 모습이 변하다
1
사천제일룡은 수를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불쌍한 여자다. 한 세상 호호 깔깔거리며 근심없이 살았을 여자가 알지도 못하는 무림에 발을 들여놓고 피바람을 구경한다. 그 피바람이 종래에는 자기 자신에게 덧씌워질 것을 까마득히 모른 채.
콘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의 잘못도 아니다. 육신녀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오로지 그녀의 운명일 뿐이다.
“오늘은 네가 자.”
육신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자? 자. 후후! 후후후!’
참으로 더러운 소리다.
그냥 자라는 것도 아니고 단서가 붙는다. ‘오늘은 네가.’
이놈 저놈이 한 여자와 잠을 잔다. 한 여자에게 욕정을 내뱉는다. 다른 놈이 품었던 여자인 걸 알면서도 안으러 달려간다.
구역질난다.
하지만 가슴이 뜨겁게 흥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숨길 수 없다. 양물은 벌써 단단해졌고 숨은 흥분으로 거칠어진다.
그녀와 나누는 정사는 하늘의 선물이다.
뱀처럼 착 달라붙어 부드럽게 꼬아오는 손과 발, 깊디깊은 늪처럼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비궁(秘宮),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까지 달디단 영약이다.
“오늘 콘은 심신을 가다듬어야 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 버릴 것처럼 신경을 곤두세워야지. 호호호호! 당화, 수가 외롭지 않게 잘해줘.”
수는 외롭지 않다. 외롭다는 말뜻조차도 모른다. 오는 사내 받아들이고 떠나는 사내 잡지 않는다. 열락에 들뜬 건 사내일 뿐,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아!”
사천제일룡은 번민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아서는 안 될 여인이건만…… 몸이 달려가고 있다. 벌써부터 그녀의 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수의 비궁은 천락지궁(天樂之宮)이다. 한 시대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하다는 천녀(天女)의 비궁이다. 거기에다가 환락궁의 구혼음태까지 수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