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4
24
이들은 어떤가. 마인이라고는 하지만 오직 앞만 보고 달린다. 자기가 천하제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도 거리낌없이 부딪친다.
삼행필유아사(三行必有我師)라.
세 명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던가.
이들은 마인이기에 앞서 스승이다. 무공 증진에 매진하라고 채찍질하는 사부다.
자신의 무공이 이들 중 한 명과 동수만 이뤘어도 단문협에 가는 일이 어렵지 않았으리라. 복수도 자신만만하게 시작했을 게다. 비록 중도에서 꺾이는 한이 있더라도 시작할 때만은 망설임이나 두려움 같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라면 그랬을 것 같기에.
지금부터라도 쉬지 않고 수련해야 한다. 무공이란 것이 며칠 만에 일취월장(日就月將)할 수는 없지만 몸 상태만이라도 최고로 만들어놔야 한다.
금연화는 날이 밝을 때까지 운공조식을 거듭했다.
사방이 환하게 밝아올 무렵, 고루쌍마가 터덜거리며 걸어왔다.
“준비 끝.”
“크크크! 그 새끼들 단단히 독 올랐나 봐. 적혈구에 새까맣게 깔려 있더라고. 골목마다 그놈들 없는 곳이 없어. 휘유! 천비대 천라지망이 무섭다더니 빈말이 아니더라니까. 깜빡했으면 우리도 들통날 뻔했지 뭐야. 새끼들이 얼마나 눈깔에 힘주고 있던지.”
두 사람의 말은 상반되었다.
한 사람은 준비가 끝났다고 했고, 한 사람은 힘이 빠지는 말만 골라서 했다.
소립파는 고루쌍마가 아침거리로 가져온 떡을 잘게 씹어 먹으며 물었다.
“강을 봉쇄한 것은 청호방과 천비대일 텐데?”
“완전히 족집게라니까. 맞아. 천비대가 강심에서 밀적산진인가 뭔가 하는 것을 펼쳐 놓았고, 청호방이 강안을 맡았어. 그놈들이 펼친 게 금문…… 뭐라고 했는데.”
“금문혼진.”
“맞아. 금문혼진. 나는 새도 빠져나갈 수 없다지 아마?”
“밀적산진과 금문혼진이라면 그만한 자부심을 가질 만해.”
“그럼 돌아가는 게 어때?”
“왜? 뒤가 빈 것 같아서?”
“사실 비었지 뭐.”
“후후후! 천비대의 눈은 하늘에도 있다. 잊어버렸어?”
“제길! 우라질 놈들!”
고루쌍마가 털썩 주저앉아 떡을 한 움큼 베어 물었다.
소립파는 떡 한 조각을 다 먹은 후 절혼마녀에게 다가왔다.
“상처는 어때?”
“고마워. 다 나은 것 같아.”
“나와 같이 있는 동안에는 어중간한 말은 사용하지 마. 판단에 오류가 생기니까. 확신이 서지 않으면 다 낫지 않은 거야. 운공조식으로 몸 상태를 살피고 이야기해 줘.”
“낫지 않았으면 술 먹이게?”
절혼마녀는 혀를 반쯤 내밀며 말했다.
귀여운 모습이다.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하나 소립파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는 혈유에게 갔다.
“어때?”
“하루 더 쉬어야 돼.”
세 여인은 혈유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혈유를 사경에 빠뜨린 상처는 네 군데다.
가슴에서 복부로 그어 내려진 검흔 하나. 등 뒤를 뚫고 들어와 배 앞쪽까지 삐져나온 검흔 하나.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까지 가로지른 검흔 하나. 왼쪽 옆구리를 파고들어 늑골을 갈라 버린 검흔 하나.
어느 하나만 해도 몇 달은 요양해야 될 중상이다.
그런데 뭐? 하루만 더 쉬겠다고?
소립파는 혈유를 끌어안고 술을 먹였다.
“그래. 하루 더 쉬어.”
맙소사! 그럼 오늘 당장 움직이게 하려고 했단 말인가? 중태인 사람을 겨우 하루 쉬게 하면서 큰 인심이나 쓰는 척 말하다니.
“이놈의 술은 너무 써서…….”
혈유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술을 받아 마셨다.
절혼마녀는 운공조식을 해보지도 않고 급히 말했다.
“나, 난 다 나았어.”
마도와 수검은 들것을 들고 산책이라도 하는 듯 유유자적 걸어갔다.
혈유는 술을 먹은 후부터 혼곤한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들것에 실려 가는 줄도 모르고 있을 게다.
길을 안내하는 자는 고루쌍마다. 그들은 십여 장을 앞서 나가며 주위를 살폈다.
“우, 우리…… 뒤로 물러섰다가 하루나 이틀쯤 쉬어 가면 안 돼요?”
일령이 소립파에게 다가와 하기 힘든 말을 꺼낸다는 듯 어렵게 말했다.
“안 돼.”
소립파의 대답은 단호했다.
“적혈구로는 못 들어가잖아요. 강으로도 갈 수 없고요. 반면에 우리가 왔던 길은 텅 비어 있는데…….”
금연화나 절혼마녀도 같은 생각이다. 하나 그녀들은 일을 벌인 입장이기 때문에 소립파의 강행군을 말릴 명분이 없었다. 일령이 그런 점을 눈치채고 대신 나선 것이다.
소립파는 금연화를 힐끗 쳐다본 후 설명하듯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적혈구로 들어가고 있잖아. 그리고 뒤는 비어 있지 않아. 천비대의 눈은 하늘에도 있다고 말했는데, 못 들어봤어?”
“못 들었어요.”
“도대체 자하부는…… 그놈다운 짓이군. 자신은 야망을 추구하면서도 꿈이 큰 여자는 싫어했지. 자기는 밖에서 일을 찾고, 여자는 안에서 행복을 찾고. 후후후!”
금연화는 혈귀대주를 떠올렸다.
그는 편안한 걸 좋아했다. 조용한 곳을 즐겨 찾았고, 꽃 한 송이에 활짝 웃는 자신을 보고 기뻐했다. 요란하고 사치스러운 것보다 검박한 것을 사랑한 사람이다. 무공이 높은 여자보다는 조그만 것에 기뻐하는 여자를 좋아했다.
‘가가…… 당신은 정말 어떤 일에 휘말린 거야. 무슨 일을 겪은 거냐고! 어떡해. 뭘 해야 하는데 앞이 깜깜하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게 가버린 거야.’
혈귀대주를 생각하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소립파의 음성이 멀리서 들리는 듯 아련하게 들려왔다.
“천비대에는 적선서 말고도 또 다른 영물이 있어. 비응(飛鷹). 평소에는 전서를 주고받는 데 사용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천비대의 눈 역할을 해. 이른바 천목(天目)이야.”
천목…… 혈귀대주에게 들은 적이 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같아서 듣는 즉시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비응은 사람을 식별할 수 있도록 조련받았다. 비응을 하늘에 띄워놓으면 사람을 발견하는 즉시 ‘꾸욱!’ 하는 소리를 내지른다. 당연히 비응 뒤에는 소리를 확인하는 천비대원이 있다. 그들은 천비대 중에서도 가장 신법이 빠른 자들로 구성되었다. 천비십조 중 제일 마지막 조인 십조다.
천비십조장 한 명과 천비십조원 이십 명, 그리고 비응 스무 마리가 천목이다.
“비응이 발견하면 천비십조원이 확인해. 찾는 자가 맞으면 즉시 천비대 전원이 몰려들어. 천비십조원을 죽여도 비응이 끝까지 따라붙지. 비응까지 죽여 버리면 방원 십 리에 걸쳐서 천라지망이 전개돼. 독 안에 든 쥐가 되는 건 마찬가지야. 그럴 바에는 준비된 쪽으로 가는 게 낫지.”
“그러네요.”
일령이 힘없이 말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잊었어.”
“뭘요?”
“지금도 단문협에서는 흔적이 제거되고 있어. 지금까지 돌아온 것은 천비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여기서 더 돌아갈 수는 없는 거야.”
“그래요. 미안해요. 괜히 귀찮게 해서.”
소립파는 괜찮다는 듯 일령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고루쌍마가 안내한 곳은 적혈구 인근에 위치한 공동묘지다.
조그마한 야산에 나무라고는 하나하나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물고 온통 누런 봉분으로 뒤덮여 있다.
고루쌍마는 익숙한 솜씨로 석대를 잡아 들어올렸다.
석대 밑으로 사람 한 명이 걸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입을 쩍 벌린 채 드러났다.
시마가 제일 먼저 어두컴컴한 묘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마도와 수검이 따랐고, 세 여인이 뒤따라 들어섰다.
한 사람이 편히 걸을 수 있을 만큼 잘 닦여진 통로였다. 밑으로 내려가는 길은 돌계단이고, 앞서 간 시마가 밝혀놓았는지 통로 군데군데 횃불이 밝혀져 있다.
그륵! 그륵……!
통로 입구에서 무거운 것을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고루쌍마가 묘지 안으로 들어선 후 안쪽에서 석대를 제자리로 옮겨놓는 소리인 듯.
돌계단은 십여 장이나 밑으로 내려간 후에 일직선으로 곧게 뚫려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여러 사람이 내딛는 발걸음 소리만이 불협화음을 이루며 귓전을 울렸다.
한참을 걸었다. 끝도 없는 암굴을 걷고 또 걸었다.
이 굴은 어디까지 뚫려 있는 것일까? 적혈구까지 뚫려 있으면 좋을 텐데. 굴을 나서는 즉시 배를 타고 장강을 건널 수 있다면.
그러나저러나 대단한 건축술이다.
처음에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긴장도 했고, 앞서 가는 사람을 따라가느라고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통로가 사방으로 갈라져 있다. 시마가 안내하는 길은 이리 휘고, 저리 꼬부라져서 통로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이런 지하 세계를 건설한 사람은 누구일까?
물자도 적지 않게 들었을 터이고, 동원된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닐 텐데 어떻게 천비대의 이목을 속이고 이런 공사를 할 수 있었을까?
앞서 가던 시마가 우뚝 멈춰 섰다.
똑똑! 똑! 똑똑똑! 똑똑똑똑똑!
두 번, 한 번, 세 번, 다섯 번.
시마가 석문을 두들기자 ‘그르릉’ 하는 묵중한 소리와 함께 벽 한쪽이 힘들게 열렸다.
열린 벽 바깥쪽에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몸이 날렵하게 생긴 사람들이 일행과 엇갈려 나오며 말했다.
“어느 길로 오셨습니까?”
“칠로(七路).”
“알겠습니다. 뒤는 걱정 마시고 푹 쉬십시오.”
그들은 큰 유등(油燈)을 밝혀 통로를 환하게 비췄다. 그리고 일행이 걸어온 길을 더듬어 나갔다. 시마가 밝혀놓은 횃불을 끄고, 새로운 홰로 갈아놓으면서.
바깥쪽에서 기다린 또 한 사람,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얼굴에도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사람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서 오시지요.”
세 여인은 목욕다운 목욕을 하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안내된 방이 무척 호화롭다. 걸려 있는 그림은 명가의 숨결이 묻어 나온다. 하다못해 물잔 하나만 해도 시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명기(名器)다.
“이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이잖아?”
절혼마녀가 창가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금연화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방금 목욕을 끝냈는지 머리칼에 싱싱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오층 누각에서 바라보니 적혈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가는 배들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고, 끝도 없이 펼쳐진 장강은 장엄하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가무음곡(歌舞音曲)이 귀를 어지럽힌다.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사람들의 목청이 한껏 드높다. 술 냄새, 음식 냄새만 아니라면, 그리고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사람들만 아니라면 몇 달이라도 있고 싶은 곳인데.
도읍 곳곳에 잠사검귀들이 쫙 깔려 있다. 하나, 정작 당사자들은 적혈구 한복판에서 경관을 감상하고 있으니, 나중에라도 천비대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복창이 터져 죽으리라.
“언니.”
“왜?”
“그 사람, 꼭 잡아.”
“호호호! 동생이 그런 말 하지 않아도…….”
“꼭 잡아서 가가의 복수를 하게 해줘. 미안해. 미안해, 언니.”
금연화는 창틀을 으스러지게 움켜잡았다.
울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는 울지 않는다고. 그렇기에 울 수가 없다.
절혼마녀가 뒤에서 팔을 돌려 금연화를 껴안았다.
“어려울 줄은 알았잖아. 난 동생보다 경험도 많고,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란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동생을 따라나선 줄 알아?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여자, 사내에게 몸을 내주지 않은 여자. 그런 여자 중에 나보고 언니라고 부른 건 동생이 처음이야. 넌 내 동생이야. 알지? 힘내. 우리 힘내자.”
날씨는 아주 쾌청했다.
2
적혈구에서 제일 큰 기루인 낙선루(樂仙樓)는 낮과 밤이 따로 없다. 벌건 대낮에도 술 취한 사람들이 비틀거리고, 만물이 숨을 죽이는 오밤중에도 풍악 소리가 질펀하게 늘어진다.
낙선루는 하루 십이 시진 쉬지 않고 운영된다.
출입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선별된다. 대부호이거나 이름난 명사가 아니면 문턱조차 밟지 못한다.
예외는 있다. 장강 제팔역을 담당하고 있는 청호방 무인들이나, 북무림 패주인 북검문 무인들은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수시로 출입이 가능하다.
천비대주와 만박선생은 낙선루 제삼각(第三閣)에서 마주 앉았다.
기녀도 없다. 가무도 없다. 소채 서너 개와 술병 하나, 잔 두 개가 고작인 조촐한 술상을 앞에 놓고 그마저도 즐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놈들이 또 사라졌어. 목서에 걸리지도 않았고, 천목도 무용지물. 지금까지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그럼 놓쳤다고 봐야 하는 건가?”
“…….”
만박선생은 침묵했다.
“파암과 청호방 쓰레기들이 벌인 수전이 마지막 기회였던 건 아니겠지? 한낱 수묘인 따위에게 천비대가 농락당한 꼴이라니.”
“그자들은 아직 배를 타지 않았어요.”
“후후! 지금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나?”
“배를 타지 않은 것은 사실이죠. 뒤로 빠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에요. 천목에 걸리지 않고 뒤로 빠질 정도라면 앞으로도 나갈 수 있는 것이니 굳이 물러설 이유가 없겠죠.”
“후후후! 추혼의 팔을 잘랐다. 옥면의 눈을 뽑았어. 그러면 난 무엇을 내놓아야 하지?”
“아직은 아무것도 내놓지 마세요. 여기 분명한 두 가지 사실이 있죠. 그럼 그자들은 어디 있을까요? 여기. 여기예요. 그자들은 틀림없이 적혈구로 스며들었어요.”
“자넨 확신을 잘하는 편이군.”
“확실하니 말하는 거예요.”
“그럼 잠사검귀들이 장님이라는 소리군.”
“지나친 말씀.”
만박선생은 술병을 들어 천비대주의 잔을 채웠다.
“우선 한 잔 드시고.”
천수공자는 만박선생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술잔을 들어 마셨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그의 눈길은 만박선생을 직시했다.
“앓는 소리는 할 필요가 없겠군. 후후후!”
“그렇죠. 그자들은 아직 수중에 있으니. 자,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상소에서 잠사검귀 다섯이 요절했죠. 아이들의 몸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사인(死因)이 똑같더군요. 수전(手箭)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혈(死穴)을 꿰뚫렸어요.”
“수전? 수전을 사용하는 사람은 드문데…… 혹시!”
만박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전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지만 목전(木箭)을 사용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죠.”
“독수전(禿手箭)…… 그럼 묵검(墨劍)도 봤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