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46
246
혈일뢰의 팔에 붉은 혈선이 그어졌다.
처음에는 실처럼 가느다란 선에 불과했는데, 곧 굵은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후후후! 귀여운 것들.”
혈일뢰는 당황하지 않고 손을 놀려 지압했다.
피는 곧 멎었다. 검은 옷에서는 붉은 핏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지만 그는 아픔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콘에게 또다시 공격할 기회가 주어졌다.
혈일뢰가 행한 일련의 조처는 적을 쓰러뜨린 후에야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적이 앞에 있는데 적을 쳐다보지 않고 상처를 본다는 건 죽여달라는 소리나 진배없다.
한데 콘은 공격하지 못했다.
혈일뢰의 두 눈은 상처를 쳐다본다. 하지만 제삼의 눈, 무인이 지니는 감각은 콘과 수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한 걸음을 움직이면 한 걸음만큼 따라오고, 주저앉으면 그의 감각도 아래를 향해 쏘아진다.
혈일뢰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단지 감각만으로 전신을 칭칭 동여맨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믿을 수 없지만 콘과 수는 진짜 동아줄로 묶였다는 인상을 받았다.
“크크크! 크크크크!”
콘이 마성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세상천지를 거침없이 쏘다니며 마음껏 살육을 자행해야 직성이 풀릴 그다. 하물며 누가 밧줄로 결박했다. 자유를 박탈했다. 갑갑해서 참을 수 없다.
“죽인닷!”
콘은 상상의 결박을 풀어헤치고 혈일뢰를 향해 쏘아갔다.
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공격이었다.
살기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진해졌다. 빠름도 공격의 실체를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쾌속했다.
쒜엑! 퍼엉!
이번에는 혈일뢰가 여유롭지 못했다. 바쁘게 허리를 굽혀 일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곧이어 펼쳐진 양손이 정확하게 콘의 양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이번에도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콘!”
수는 정신을 잃고 나가떨어지는 콘을 보며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도 가죽북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놓아야만 했다.
퍼엉!
나포는 포기다.
수검은 포기를 알리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게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혈일뢰가 가담했다면 승산이 적다.
혈일뢰뿐이 아니다. 산비탈에서 축 늘어진 서군봉을 안고 올라선 사람은 뚱뚱한 몸에 머리가 반쯤 벗겨진 대머리 노인, 통천서패 진혜력이다.
무신이 두 명이나 가담했다.
자의성검 석존무는 어디 있을까? 그도 이곳에 왔을까? 북검문 삼원로는 함께 움직인다고 들었으니 아마도 왔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중원을 떨쳐 울리는 무의 제왕들이 절반이나 모인 셈이다.
나포를 한답시고 길을 막아섰다가는 오히려 곤혹을 치른다.
수검이 늦지 않아야 되는데.
늦지는 않을 것이다. 언장은마가 파놓은 땅굴은 혈일뢰보다 두 배는 빠르게 나아갈 수 있다. 더군다나 혈일뢰는 상처 입은 산주와 사천제일룡까지 깨워서 데려가고 있으니 늦으려야 늦을 수가 없다.
그래도 모르는 게 사람의 일, 마야는 한적한 장소를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나포 취소. 나서지 마라. 나포 취소. 나서지 마라. 나포 취소. 나서지 마라…….”
마야는 같은 소리를 주문처럼 외웠다.
물론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는 말을 했지만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들어도 듣지 못한다. 영(靈)으로, 혼(魂)으로 느껴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다.
마령음이면 어떻고 적멸주면 어떤가. 어떤 때는 고음이 필요하고 어떤 때는 저음이 필요하다. 두 개를 굳이 나눌 것이 아니라 하나로 버무려도 괜찮지 않은가.
사자후나 창룡음은 인간이 낼 수 있는 한도에서 가장 고음이다.
자신의 소리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야만 토해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마령음, 마령음이면 족할 것 같다.
마야는 일다경 동안이나 마령음을 토해냈다.
‘이쯤 하면 됐겠군.’
마령음도 믿지만 땀 흘리며 돌아다닐 수검도 믿는다.
마야는 일어섰다. 그리고 허공에 대고 말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오래 기다렸습니다.”
2
“허허허!”
옆쪽, 노송 뒤에서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노부의 기척을 감지해 내다니 과연 마야일세.”
음성도 시원했다.
검은 머리가 옥에 티로 보이게 만드는 백발, 또 백발에 어울리는 백염이 나타난 사람을 신선처럼 여기게 만든다.
“자의성검께서 어인 일이신지요?”
“그보다 인사부터 나누세. 우리 참 오랜만 아닌가. 멸신구관에서 보고 처음이지? 그땐 도움 많이 받았네.”
“도움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씀.”
마야는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자의성검은 호의를 가지고 나타난 게 아니다. 웃는 얼굴 뒤에 적의가 번뜩인다.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만공심안은 그의 내면을 정확히 읽어준다.
느낌이다. 그는 적의를 가지고 나타났다. 말을 듣거나 싸움을 해야 한다.
“아니지. 자네가 아니었으면 우린 멸신구관에서 뼈를 묻었을 걸세. 대단한 곳이었지. 허허허! 그런 곳을 내 집 드나들 듯 헤쳐 나온 자네의 능력은 또 어떻고. 생각해 보게. 세상에 어떤 무공이 자네의 능력보다 나을 수 있겠나?”
“원하시는 게 뭔지 듣고 싶군요.”
마야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면을 숨긴다고 용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언부언 말이 많겠지만 결국은 용건을 꺼낼 게다. 그러기 위해서 왔으니까.
“허허허! 그때도 생각했지만 자네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참을성이 없다는 걸세. 난 운기조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줬는데, 자네는 안부 몇 마디 나누지 못하나?”
이건 참 다행이다.
마령음을 토해내고 있었는데, 운기조식을 취하는 것으로 봤다. 자의성검조차도 음의 파동을 느끼지 못했다. 이 시대의 절대 무인이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했다. 그러면서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말한 바를 듣는다.
마령음은 완벽한 절공이다.
마야는 양손을 등 뒤로 돌려 뒷짐을 졌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으신가 보군요.”
딱! 딱! 딱!
등 뒤에서 손가락과 손가락이 부딪쳐 소리를 냈다. 중지와 엄지가 만났다가 비껴날 때마다 소리를 울려냈다.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오직 마야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다.
소리는 공기 속을 흐르다가 자의성검에게 부딪친다.
딱! 퍽! 딱! 퍽!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나오고 자의성검은 매번 격중당한다.
“허허허! 자네하고라면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문득 말을 하던 자의성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야는 소리를 멈췄다.
자의성검이 느끼기 시작했다. 소리의 진원지는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점은 감지했다.
진기를 운용했거나 감각이 무척 탁월한 사람이다. 하기는 무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모욕이리라.
“자네가 장난쳤나?”
숨길 이유가 없다. 좋은 뜻으로 오지 않았으니 시답잖은 말은 이쯤에서 그치는 게 좋다.
“놀랍군요. 과연 무신입니다.”
“허허! 무신이란 이름이 괜히 붙은 줄 아는가. 그만하니까 붙은 걸세. 뭐였나?”
“아까 혈일뢰께서 풋내기라는 말을 쓰시더군요. 풋내기의 장난쯤으로 알아두시죠.”
자의성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투에 가시가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내가 온 뜻을 짐작하는가 보네.”
“말씀해 보시죠.”
“같이 가세.”
그럴 줄 알았다. 마야의 능력은 누구나 탐내지만 무공이 높은 자일수록 더욱 탐낸다.
무공이 낮은 자는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일성의 성취를 이끌어내지만 고수는 십 년, 이십 년을 분투해도 일 푼을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마야를 만나면, 마야의 도움을 받으면 단숨에 몇 단계의 성취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는 인간 자체가 보물이다.
마야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시다시피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손을 써야 되겠나?”
“좋으실 대로.”
마야는 다시 손가락과 손가락을 부딪쳤다.
딱! 퍽! 딱! 퍽!
조금 전과는 달랐다. 자의성검은 경각심을 높이고 있던 차인데 미미한 변화인들 놓칠 리 없다. 그는 당장 눈치 챘다.
“또 장난인가?”
장난이 아니다. 음파격타는 단지 심기만 건드리는 게 아니다. 그의 경혈을 쳐서 진기의 흐름을 끊어놓는다. 자의성검 같은 무인에게는 모기에게 물린 것처럼 간지럽기만 한 수작일지 모르지만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
한때는 무신과도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 정도면 천하제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런 무공으로 콘과 평수를 이뤘다. 서군봉이 생각한 것처럼 한 번은 지고, 한 번은 이기면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콘과는 서로가 상극이면서 상생 관계다.
콘이 혈일뢰에게 힘없이 무너졌다.
자신 또한 그렇게 될 공산이 크다.
무신들은 진신무공을 숨겨왔다. 어쩌면…… 그때…… 멸신구관에 들어갔을 때, 자신이 나서지 않았어도 이들을 붙잡아놓지 못했으리라는 느낌이 든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시길.”
“그렇군. 어쩌면 이게 자네에게는 최선일 수도 있겠어. 보겠나, 음양전도?”
자의성검 석존무의 진신절학.
그를 무신 반열에 올려준 무공이며, 무신이 된 이후로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다는 지상 최강의 무학이다.
마야는 본 적이 있다. 멸신구관에서 자의성검이 펼쳐 보인 적 있다.
“꼭 저를 데려가야 되겠습니까?”
“자네와 콘은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지. 데려가려면 둘 다 데려가야 하고, 아니면 모두 놔주는 게 나아.”
“모두 놔주시죠.”
“그러기에는 유혹이 너무 크니까.”
“……?”
“자세한 건 알 필요 없고…… 한 가지만 말해주자면, 지금쯤 만사무불통지는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을 걸세. 콘 때문이 아니라 자네를 놔준 것 때문에.”
“저를 데려가도 아무 도움이 안 될 텐데요?”
“허허허! 사람 일은 장담하는 게 아닐세.”
자의성검은 마야가 지닌 능력을 총동원하여 그를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한 듯했다. 마야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건만, 그를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건만.
자의성검이 말을 이었다.
“손을 써도 좋고, 쓰지 않아도 좋네. 허허! 자네는 정말 눈치가 없군.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산 정상에 말일세, 호채마가 있지 않나? 그들…… 더 이상 운이 좋은 마인들이 될 것 같지는 않네만.”
“뭐요!”
“지금쯤 혈일뢰와 통천서패가 정상에 올라섰을 걸세. 그들은 움직이지 않아. 정상에서 발아래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한숨 돌리고 있겠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란 법은 없지.”
“협박입니까?”
“선택하게. 따라갈 텐가, 아니면 삼원로와 척을 지고 한바탕 춤사위를 펼쳐 보일 텐가?”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줄 수 없네.”
자의성검은 칼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자신이 쥔 칼을 마음껏 휘둘렀다.
“내가 성검을 따라나선다는 것은 성검께서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뜻이오. 그만한 결정을 하는 데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없다는 거요?”
“줄 수 없네. 시간은 변화를 가져오니까.”
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날을 쥔 사람이 칼자루를 쥔 사람과 싸울 수는 없다. 그런 싸움을 한 사람치고 살아 있는 사람은 없다.
“좋소. 하지만 호채마…… 뒤를 따라올 수 있게 해주시오.”
“그건 안 되지. 우린 극비리에 장강을 건널 테니까.”
“장강을 넘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들을 남무림에 남겨놓을 수야 없지 않소.”
마야는 손을 들어 백회혈에 댔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자진하겠다는 의사표시다.
“허허! 북무림에 가도 설 땅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쯧! 자네 뜻이 그렇다면 그것까지는 허락함세. 단! 서로 만나서는 안 되네. 어떤 식으로 연락하든 그건 자네 하기 나름이지만, 누군가와 만나는 일이 벌어지면…… 한 번 만남에 목숨 하나씩을 빼앗겠네.”
석존무의 별호는 자의성검이다. 성검(聖劍), 성스러운 검이다. ‘빌어먹을’이 아닌가. 빌어먹을! 이따위 얄팍한 잔수나 쓰는 사람이 성검이란 말인가.
“어쩔 수 없이 쫓아가야겠군요.”
“선택의 여지가 없지. 난 자네를 아니까. 자네가 호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우선 그만한 능력이 되는지 알아봐야겠군요.”
“기어이 해볼 생각이군.”
자의성검이 두 손을 쭉 폈다.
맨손, 권각이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마야도 두 손을 펴 보였다.
“자신감인가, 오만인가?”
자의성검은 그런 물음을 던질 자격이 있다.
몇 번을 고쳐 생각해도 그와 싸워서 이길 공산은 적다. 아니, 전무한 편이다. 그렇다고 생각만으로 두 손, 두 발이 묶인 채 따라갈 수는 없다.
그와 싸우려는 이유가 또 있다.
자의성검의 진신무공을 견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자의성검 같은 사람이 어디서 권각을 놀리겠는가. 무신들에게는 일초반식이나마 보여달라고 사정할 수조차 없다. 사정한다고 보여줄 사람들도 아니고.
또 질 것이 분명하지만 큰 상처를 입지 않을 것도 분명하다.
목숨을 잃을 부담이 없는 싸움이다.
과연 무신은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녔을까? 자신과는 어느 정도나 격차가 있을까.
자의성검의 음양전도는 막강한 파괴력을 지녔다. 검이 아니라 육장으로 펼쳤을 뿐인데도 석벽을 무너뜨릴 정도다.
어떤 원리인가?
파앗!
마야는 힘차게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