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5
25
“잠사검귀들 중에 병기를 부딪친 자는 모두 서른한 명. 모두 이가 빠져 있더군요.”
“혈유…… 놈이 살아 있었군.”
“자하일봉이 혈유와 같이 있다?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후후후! 마도란 말이지. 후후후! 하하하하!”
만박선생은 천비대주의 잔을 또 채웠다.
“한 잔 더.”
천비대주는 단숨에 들이켰다.
“자하일봉이 혈유에게 손을 내밀었다면 천비대가 낭패를 겪은 것도 당연하죠. 목서, 천목이 무력해진 것도 이해가 되고. 생각나는 자가 없으신지.”
“낭패를 겪은 게 당연해? 그럴 수 있는 놈이 있단 말이지. 마도에서. 음……! 기억이 날 듯 말 듯하군. 그놈 이름이 뭐였지? 생쥐 같은 놈 말이야.”
“언장은마였죠.”
“그래, 언장은마. 두더지 창자 속에도 숨을 수 있는 놈. 그렇군. 그놈이 꼬리를 잘랐다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지.”
“혈유에 언장은마. 벌써 두 명이 걸려들었어요. 이것도 분명한 사실이죠. 자, 또 한 명 짚어볼까요? 그자들, 참 대단했어요. 비조선쯤이야 마련하기 쉽지만 무슨 돈이 있어서 팔두마차를 사용했을까요? 단정도 비싼 편이고. 비싼 것보다는 구하기가 쉽지 않죠. 또 있어요. 우리가 겪은 것만 해도 직강에서 한 번, 상소에서 한 번. 그자들은 두 번이나 마을을 통째로 들어 엎었어요. 대주님은 그만한 돈이 있으신지.”
“금적금노(金積金奴)를 말하는 건가?”
“아마도 그럴 것으로.”
“후후후! 지옥에 떨어졌던 놈들이 기를 쓰고 되살아났군. 남무림과 싸움을 오래하니까 날이 풀린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야. 이제 땅 밑에서 기어나온다 이거지.”
“혈유, 언장은마, 금적금노는 놓쳐도 반드시 잡아야 될 자가 있죠.”
“반드시 잡아야 될 자라…… 누군가?”
만박선생은 대답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천비대주를 쳐다봤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만박선생은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전 단지 생각으로 추려낼 뿐이죠. 이러이러한 일이 있으니 이런 자들이 있겠구나 하고. 하지만 천비대의 경우에는 장기간에 걸쳐서 축적된 정보란 게 있죠. 대주님, 저한테 숨기셔서 뭐 하시려고요.”
만박선생은 잔을 들어 조금씩 음미하며 마셨다.
“하하하! 하하하하! 과연 만박선생이야. 막강한 정보력을 지녔다는 천비대가 그대 머리를 당하지 못하는군. 하하하!”
천비대주는 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웃음을 그친 후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냉정해져 있었다.
“금적금노에 대한 단서는 잡고 있었어. 혈유나 언장은마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자! 자네부터 말해봐. 어떤 자를 잡아야 되는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혈유란 자는 자유분방해서 한곳에 잡아둘 수 없는 자. 언장은마는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자. 금적금노는 동전 한 닢에도 벌벌 떠는 자. 마도인들이란 대체로 이렇죠. 성격들이 괴팍해서 뭉치려야 뭉칠 수 없는 족속들이에요. 그러나 단 한 사람. 이들을 뭉치게 할 수 있는 자가 있어요.”
“그가 누군가?”
“혈유를 낳은 아버지는 혈유를 움직일 수 있죠. 언장은마를 낳은 아버지도 언장은마를 움직일 수 있고, 금적금노도 아버지의 말에는 돈을 내놓아야 되죠.”
천비대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혈유는 부모라도 얽매어놓을 수 없는 자다. 언장은마는 부모까지도 피해 다니는 자이고, 금적금노는 돈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부모를 팔아먹을 자다.
만박선생이 말한 아버지란 상징적인 존재다.
―마인도 친아비에게는 성질을 내지 못하지.
성질을 부릴 수 없는 자, 시키는 대로 따라 해야만 하는 자, 마인이 아니라 마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자, 그자가 마인의 아버지다.
만박선생이 결론을 말했다.
“꼭 잡아야 할 자. 그자는 마야죠.”
천비대주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침묵했다.
만박선생이 술병을 반이나 비웠을 때 천비대주가 눈을 떴다.
“오래전부터 한 인간을 주목해 왔어. 시마라고 들어보았나?”
“녹혈마공을 익혔다는?”
“맞아. 천비대가 시마를 찾아냈는데, 그때 놈은 녹혈마공의 부작용으로 무공이 전폐된 상태였지. 우린 놈을 놓아줬어.”
“차시환혼(借尸還魂)이군요.”
“놈을 풀어주면 도와줄 자를 찾아갈 것이고, 한두 놈쯤 잡아 족칠 수 있지.”
“그런데요?”
“놈이 찾아간 자는 의원이야.”
“의원이라…… 녹혈마공의 부작용이 의술로 고칠 수 있나요? 시기(尸氣)가 골수까지 파고들어 전신이 썩어 들어가는 일밖에 남은 게 없을 텐데요?”
“그때부터 우린 놈을 주목했어. 그게 삼 년 전이야. 시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고.”
“호오! 대단하군요. 반년이면 한 줌 고름이 되는데 삼 년씩이나. 한데 얼마 전까지 살아 있었다는 말씀은?”
“행방불명되었지. 두 놈 다. 묘하게도 혈귀대주의 죽음과 동시에 그놈들도 사라졌어.”
“그렇군요. 대주님과 저의 생각을 합하면 그자가 수묘인이며, 마야일 가능성이 높군요.”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중단하고 술 한 잔씩을 들이켰다.
만박선생이 술잔을 내려놓았을 때 천비대주가 입을 열었다.
“왜 자넬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아나?”
만박선생의 눈가에 웃음이 맺혔다.
“금적금노.”
“짐작했군. 그래, 이곳 낙선루는 금적금노가 가진 서른다섯 개 기루 중에 하나야. 놈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면 찾을 길이 없을 테고, 그래서 이곳을 주시하라고 했지. 어떻게든 연락을 취할 테니. 그런데…… 하하하! 뭘 봤는지 아나? 자하일봉. 자하일봉이 오층 누각에서 모습을 드러내더군. 창가에 서서 경치를 감상하는 거야. 하하하! 철부지도 그런 철부지가 있을까.”
“흐음!”
“아까 자네가 말했지. 자하일봉과 혈유를 연계시키니 그림이 그려지더라고. 지금도 그림이 그려지나?”
“자하일봉만 잡으면 대주님의 위명은 회복되죠. 천비대가 나선 목적은 달성되니까요. 그런데 모험을 하시려는 건가요?”
“놈들이 약을 올렸으니까 이쪽에서는 뿌리를 뽑아줘야지.”
“두 가지가 있어요.”
만박선생은 눈꺼풀을 반쯤 내리감았다. 먹이를 찾아낸 포식자의 버릇이다.
“첫째, 자하일봉을 당장 잡는다. 이건 위험 부담이 전혀 없죠. 그러나 선택권을 넘겨준다는 단점도 있죠. 천비대의 손에서 빼내갈 것인가, 손 털고 물러갈 것인가. 그자들의 목적이 크면 클수록 빼내갈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그럴 만한 일이 있을까요?”
“두 번째는?”
“자하일봉과 혈유는 잡을 수 있지만 금적금노는 잡을 수 없는 방법이죠. 금적금노는 인맥이 넓죠.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힘이 되고. 그를 잡으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자하일봉이 이곳을 벗어나게 되면 아무래도.”
“금적금노는 드러난 자. 잡을 기회는 많아. 그자는 그냥 잡아서는 안 돼. 그자가 숨겨놓은 누만금을 찾아내는 게 순서야. 정 안 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는 수도 있고.”
“그러하시면…… 아직 강을 건너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죠. 강을 건널 때 낚아채면…… 눈엣가시인 자하부까지 옭아맬 수 있죠.”
“자하부주…… 이제는 끝인가. 하하하!”
“잡지 못하면 낭패죠. 다행이랄까요? 기회는 한 번 더 있어요.”
“단문협.”
“그렇죠. 그들이 가는 곳은 단문협. 장강을 건넜더라도 단문협으로 가려면 다시 건너와야 하는데, 그때도 놓칠까요?”
천비대주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말했다.
“후자로 하지.”
***
모두 떠날 준비를 끝냈다.
넓은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있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목숨을 건 도박.
피를 뿌리게 될는지, 그냥 떠날 수 있을 것인지.
그들은 한 사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 낙선루의 주인이 활짝 웃으며 들어설 때에서야 긴장의 끈을 놓았다.
“잠사검귀들이 포위망을 풀었네. 제삼각 손님도 돌아갔고. 하하! 신산(神算)이 따로 없군. 따로 없어.”
소립파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비조선은?”
“준비됐네.”
“신세 졌군.”
“신세는 무슨.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마야에게 잘 보여야지. 여벌로 목숨을 서너 개쯤 갖고 있지 않은 한은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쓸데없는 소리는. 이 자리만 해도 자네를 죽일 수 있는 자는 다섯 명이 넘어. 하나,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네. 자네에게 검을 들이댄 자는 누구 손에 죽는지도 모르고 죽게 되니까. 그게 마야지, 달리 마야인가. 이제 그만 받아들여.”
소립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곤란해질 텐데.”
“하하하! 곤란은 무슨…… 걱정 말게. 금적금노라는 소릴 들을 때는 죽을 고비를 한두 번 넘긴 게 아냐.”
소립파는 금적금노를 끌어안았다. 금적금노도 소립파를 껴안고 등을 다독거렸다.
“그럼.”
“잘 가게. 또 봐야지?”
소립파는 한 손을 들어올려 안녕을 고한 후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나갔다.
금적금노는 남은 사람들에게도 일일이 인사했다.
“안녕히들 가시지요. 여기서 배웅합니다.”
마차 한 대가 낙선루를 빠져나갔다. 말도 한 필인데다가 마차도 한두 명이 간신히 탈 수 있는 작은 마차다.
일다경 후, 또 한 대의 마차가 낙선루를 나섰다.
마차를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아침만 해도 북검문 무인들이 지나가는 마차를 일일이 점검했는데,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일다경쯤 지난 후, 또다시 마차 한 대가 빠져나갔다.
마차는 반 시진에 걸쳐서 모두 네 대가 움직였다.
마차가 움직인 방향은 각기 다르다. 어떤 마차는 동쪽으로 갔고, 어떤 마차는 서쪽으로 움직였다.
금연화와 절혼마녀, 그리고 일령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나루터를 거닐었다.
어민들이 자판을 늘어놓고 손님이 기웃거리기를 기다린다. 자판에는 금방 잡은 물고기들이 살아서 펄떡거린다. 튀김을 파는 곳, 떡을 파는 곳…… 주위가 온통 먹을 것투성이다.
“삼 장 뒤에 한 명, 우측…… 사 장쯤 떨어진 곳에 한 명. 두 명이 따라붙었는데요.”
일령이 소곤거렸다.
“모른 척해.”
“그럼요.”
세 여인은 튀김도 사 먹고, 만두도 사 먹으면서 깔깔거리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왜 아직 소식이 없지? 호호호호!”
“글쎄, 곧 오겠지. 호호호!”
나루터에 도착하자마자 소식을 전해올 줄 알았는데 감감무소식이다. 더욱이 뒤쫓는 무리들을 발견하고 나니 마음이 바싹 타 들어간다.
세 여인은 나루터를 끝에서 끝까지 두 번이나 왕복했다.
배가 불러서 더 사 먹을 수 없다. 웃고 떠드는 것도 입이 아파서 못하겠다. 그때,
파아앗! 화악!
이십여 장쯤 떨어진 강에서 화광이 솟구쳤다. 붉은 폭죽은 일직선으로 솟구쳐 하늘 한복판에 아름다운 꽃무늬를 그려냈다.
그 순간이다. 지금까지 여유롭게 고기잡이를 하던 어선들이 군선(軍船)이나 된 듯 신속하게 움직여 일렬로 죽 늘어섰다.
“가!”
금연화는 소리를 내지름과 동시에 신법을 펼쳐 강으로 뛰어들었다.
쉬익! 쉬이익!
절혼마녀와 일령이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첫 번째 어선을 밟고, 두 번째 어선을 넘어서 세 번째 어선으로 내려섰다.
촤아악!
소임을 끝낸 어선들은 언제 그랬냐 싶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녀들은 순식간에 이십여 장을 건너뛰어 불꽃이 터진 날렵한 배에 내려섰다.
다리를 놓아준 어선들은 말끔히 사라졌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어선들 사이로 숨어버렸다.
“안 오는 줄 알았어.”
절혼마녀가 소립파를 보고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노를 잡아.”
소립파는 딱딱하게 잘라 말했다.
소립파가 가져온 비조선은 어느 비조선과 다를 바 없지만 약간 변형되었다. 다른 배들이 좌우로 두 단의 노가 있는 반면에 그들의 배에는 네 단의 노가 준비되어 있다.
고루쌍마가 제일 첫 단에 앉았다. 마도와 시마가 두 번째 단에, 수검과 일령이 세 번째에, 금연화와 절혼마녀가 마지막 네 번째 단에 앉아 노를 잡았다.
소립파는 맨 후미에, 뱃머리에는 혈유가 앉았다.
그는 중상을 입은 사람답지 않게 밝은 모습이었다.
“헤헤! 지금부터 이 몸이 선장이올시다. 잘 부탁…….”
“시끄럿! 저기 저놈들 나타난 것 안 보여!”
고루쌍마가 소리를 빽 질렀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장강이 온통 배로 뒤덮였다. 새카맣다. 대충 어림잡아도 팔십여 척은 훨씬 넘어 보인다. 포위망은 벌써 형성되었다. 앞뒤좌우 어느 쪽으로도 탈출로는 보이지 않는다.
천비대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자, 그럼 시작해 보자고. 하나! 둘! 하나! 둘!”
하나에 밀고, 둘에 당기고.
비조선은 배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치달렸다.
소립파는 하늘에 기원이라도 하듯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도록 눕힌 후 양손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무엇을 하는 것일까? 이 급한 상황에 얼굴을 스쳐 가는 바람이라도 즐기려는 것일까?
“행행중행행(行行重行行) 여군생별리(與君生別離).”
가네 가네. 님과 생이별.
이건 또 무슨 짓? 그의 입에서 느닷없이 고시(古詩)가 노랫가락이 되어 흘러나왔다.
순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지, 진기가!’
금연화, 절혼마녀, 일령은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깜짝 놀랐다.
진기가 격랑을 일으킨다. 고요히 흐르던 기운이 폭풍이 되어 몰아친다. 그녀 자신들도 믿지 못할 만큼 거대한 진력이 굽이친다.
진력은 양팔에 운집된다.
팔에서 쏟아져 나간 진기는 고스란히 노에 전달된다.
파아아앗……!
진기가 너무 강해서 노가 부러지지 않을까 싶다.
마도나 수검, 시마는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닌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전보다 훨씬 강해진 진기를 태연히 받아들여 노를 저었다.
쓰윽……! 쓰으으윽……!
비조선은 포위망 사이를 쏜살같이 헤쳐 나갔다.
비조선에 비하면 천비대의 배들은 느린 거북이다.
비조선은 거북이 사이를 헤쳐 나가는 토끼다.
“상거만여리(相去萬餘里) 각재천일애(各在天一涯).”
님 계신 곳 수만 리, 하늘 끝에 떨어져 사네.
소립파의 노랫가락 소리가 낭랑하게 장강 물결과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