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51
251
마야 11
소이자하(所以者何) ― 그 까닭이 무엇인가
제1장 권포개(卷鋪蓋) ― 관계를 끊다
1
유계의 마인들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구순 노인, 무저부주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추적에 관해서라면 단연 중원 제일인자임을 자부하는 그였지만, 유계 마인들의 꼬리를 잡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유계, 유계 하더니…….”
시동처럼 곁에 따라붙은 부부주가 감탄을 토해냈다.
유계 마인들은 공격을 시도했고, 죽었다. 죽으면서 피도 흘렸고 살점도 떨어뜨렸다. 누가 시신을 가져갔다고 해도 생명 하나가 세상을 등진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한다.
한데 산은 여전히 산이고, 풀은 처음처럼 푸르다.
죽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핏방울 하나, 아니, 죽음의 향기까지도 사라져 버렸다.
무저부주와 부부주가 흔적을 찾지 못하는 경우는 딱 하나뿐이다.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티끌조차도 움직이지 않았을 때.
지금처럼 일이 벌어졌는데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너무도 분명한 일이기에 더욱 기막힌다.
마인들 중에 추적의 달인이 있으리라. 그리고 그자는 자신들과 버금갈 정도로 솜씨가 고명하다.
“이만한 실력들을 지니고도 숨어 지내야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꼬. 허허허! 앞으로 한동안 바쁘겠어.”
그때까지만 해도 무저부주는 여유로웠다.
유계는 추적의 대상이 아니다.
유계 마인들이 천둥벌거숭이처럼 사방 온갖 곳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어도 애써 무시할 판이다.
지금은 그들의 솜씨만 눈여겨 두면 된다.
하나 그로부터 반 시진이 흘렀을 즈음, 무저부주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가 그러니 부부주라고 별다를 리 없다. 그 역시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식은땀만 쏟아냈다.
“대단한 솜씨군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겐가!”
무저부주는 평정심을 잃고 고함을 빽 질렀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 그냥 흘려들으면 되는 말을 무심히 듣지 못했다.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다.
마야의 종적도 깨끗이 사라졌다.
사방팔방을 둘러보아도 어디로 도주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감이라…… 오죽하면 감까지 끌어들이겠나. 눈으로 볼 수 없고, 코로 맡아지는 게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으니 직감이라도 끌어들여야 하지 않겠나.
없다. 깨끗하다.
“이자…… 언장은마…… 정말 요절을 내야 할 자군.”
무저부주가 흙을 한 움큼 움켜잡으며 말했다.
흙은 모래처럼 푸석했다.
방금 파 들어간 곳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마야는 이곳으로 탈출했다.
하나 쫓아갈 수가 없다.
땅이 모래처럼 푸석한 이유는 언장은마가 헤집어놓아서가 아니다.
적의(赤蟻)!
붉은 개미가 수백 평에 이르는 땅을 헤집어놓았다.
묘하지 않은가. 남무림에 붉은 개미가 많은 건 사실이다. 어디를 가도 볼 수 있고, 아무 땅이나 헤집어봐도 적의가 기어나온다. 어렸을 적부터 짓밟기도 하고 가지고 놀기도 하며 자라왔기 때문에 친숙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곳에 깔린 것처럼 수백만 마리가 득실거리지는 않는다.
많아도 너무 많다. 적의가 이 정도로 모여 산다면 웬만한 사람은 겁이 나서 발걸음조차 들여놓지 못할 게다.
생각할 것도 없이 언장은마의 솜씨다.
무신들 앞에서는 감히 수작을 부리지 못했을 터이다. 당시에는 도주하기 급급했고…… 삼원로가 서군봉과 함께 사라지고, 만사무불통지와 진무부 무인들도 사라진 후에 그놈…… 언장은마가 다시 돌아와 수작을 부렸다.
대담무쌍한 놈이다. 무신 앞에서 도주했으면 감지덕지할 일이지 다시 돌아와 적의까지 풀어놓다니!
적의는 집을 짓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을 테고, 언장은마의 토굴은 순식간에 매몰되었다.
만사무불통지는 조그만 단서라도 잡아주길 바라겠지만, 도무지 손쓸 방도가 없다.
쫓아갈 길이 영영 막힌 것이다.
쫓아가지 못한다면 남은 건 예측과 기다림이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서 나타날까?
구통부의 모든 눈과 귀를 끌어 모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야광까지 접수해야 한다. 모든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야광의 두뇌를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무저부주는 혀를 내둘렀다.
무저부주의 생각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
일을 행하기 위해서 가주의 재가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만사무불통지는 부주들을 전격 신임했고, 부주의 재량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설혹 그 일로 인해 남무림이 뒤집히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그 일 때문에 만사무불통지가 무신이라는 칭호를 버리게 될지라도.
믿지 않으면 쓰지 않고, 쓰면 믿고 맡긴다.
남도문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지만, 제이무신가에는 기저에 깔린 믿음이었다.
야광을 접수해야 한다는 무저부주의 생각은 그가 산을 내려오기도 전에 구통부주에게 전해졌다.
구통부주는 남도문으로 들어섰다.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남도문에서 구통부주는 낯선 야인(野人)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이무신가 사람이지 남도문 사람이 아니다. 제이무신가에서는 처처에 깔린 것이 수하들이지만 남도문에서는 시동조차도 그의 명을 받지 않는다.
그는 남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이무신가 부주를 무시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구통부주는 무신의 명령을 직접 받는 사람인만큼 남도문 직위 여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남도문의 심장부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지만 그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썩었어. 이런 것부터 고쳐야 돼.’
제이무신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설혹 무신이 왔다 할지라도 일단 제지하는 것이 보초의 임무다. 그자가 궁왕을 가장한 살수라면 어찌할 텐가.
경계를 서는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막는 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
남도문은 썩었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지 못하는 건 큰 문제다.
남무림 무인들이 과도하게 떠받들어 준 탓도 있지만 겸손하지 못한 탓도 크다. 자신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무신들의 무공이 자신 것인 양 착각하며 산다.
남도문도 그렇고 무신가들도 그렇고, 모두들 똑똑히 알아야 한다. 무신들이 사라지면 그들이 일궈놓은 문파나 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모두 싸움이 없었기 때문이야. 이놈들을 빗자루로 확 쓸어서 장강으로 보내야 해. 북검문과 한 달만 치고받으면 정신이 확 들 테지.’
남도문 정문을 들어서서 구환자의 집무실에 이르기까지는 스물한 군데의 경계를 통과해야 한다.
구통부주는 구환자의 집무실에 이르기까지 스물한 번이나 ‘썩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벌컥!
구환자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정문을 들어서서 문을 열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반 시진이다. 그것도 남도문이 넓어서 반 시진이나 걸린 것이지 거리만 가까웠다면 시간은 더 단축되었을 게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돌부리 하나 가로막는 게 없다니! 쯧! 이렇게 썩었으니 마인 놈들이 제집인 양 설치지.’
구통부주는 다시 한 번 썩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구환자의 집무실로 쑥 들어섰다.
밝은 바깥에 있다가 실내로 들어선 탓인지 일시 사위가 어둑했다.
구환자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상은 초라했다. 투박한 나무에 못질 몇 번 해서 뚝딱 만들어낸 것 같다.
책상 위에는 물병 하나와 물잔 하나가 덩그렇게 놓여 있고, 책 몇 권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생각 하나로 남무림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야광 총수의 집무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검박했다.
“제이무신가에서 왔소.”
구환자의 고개가 쳐들리기 무섭게 구통부주는 거침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말투는 딱딱함을 유지했다. 어차피 좋게 끝날 사이는 아니다. 고함이 터지는 건 당연하다. 소리만 지르면 다행이다. 피를 볼 가능성도 농후하다.
“제이무신가…… 제이무신가의 누구신가?”
구통부주와 구환자는 초면이다.
남도문과 제이무신가는 한 울타리라고 할 수 있으니 서로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는다. 알아도 보통 잘 아는 게 아니다. 야광과 구통부는 일의 성격상 중첩되는 부분이 많으니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는 한다.
그런데도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누구냐고 물은 겐가? 아니다.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상대의 생김새나 기도 등으로 신분쯤은 벌써 짐작해 냈다. 누구냐고 물은 것은 일종의 확인이다.
“구통부주요.”
“구통부주. 그렇군. 말은 많이 들었네.”
구환자는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후후후!”
구통부주는 비위가 틀린 듯 고소(苦笑)를 토해냈다.
그에게 말을 놓는 자는 몇 되지 않는다. 한데 안중에도 없는 구환자가 대뜸 말을 놓았다.
구환자는 야광이라는 공인된 기관의 총수다. 반면에 구통부주는 무신의 심복에 불과할 뿐이다. 대우를 해줘도 그만, 해주지 않아도 그만이다. 구환자는 후자를 선택했고, 구통부주는 구환자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했다.
‘사람을 더 편하게 만들어주는군.’
구통부주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총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자리를 내어주시오.”
“…….”
“지위에 연연한다면 총수라는 직위는 유지시켜 줄 수 있소. 하지만 야광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눈 꼭 감고 간여하지 마시오.”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이 시간부로 구통부가 야광을 접수하겠소.”
“구통부가 야광을 접수하겠다?”
구환자는 짐짓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삼 놀랄게 뭐 있소. 답평이 죽어서 공석이 된 자리를 당신에게 준 게 누구요? 만사무불통지께서 주신 자리, 다시 거둬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아니, 그렇게까지도 생각할 게 없지. 야광을 영구적으로 접수하겠다는 게 아니고 필요에 의해서 잠시 빌리는 것뿐이니까 잠시 휴가나 즐기고 오면 딱 알맞을 게요.”
“제이가주가 준 자리, 다시 거둔다. 다시 말해서 구통부가 야광을 접수하는 게 제이가주의 뜻이라, 이 말인가?”
구통부주는 즉답을 피하고 잠시 생각했다.
구환자쯤 되는 인물이 지금까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되물은 것은 무엇인가를 확인하고자 함이다. 즉, 구통부가 야광을 접수하는 일이 만사무불통지의 지시하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걸 확답받고자 한다.
왜? 무엇 때문에?
자리에 연연한 자는 이런 확답을 원하지 않는다. 주로 반격을 가하는 자들이 확고한 증거를 원한다.
‘구환자, 이놈이 감히!’
구통부주는 즉시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에 고루 유포시킨 후, 오감(五感)을 활짝 열었다.
잡힌다! 봉창(封窓) 너머에 누군가가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부동(不動)의 극치를 보여준다. 위험을 내포한 고요함이다. 부동이 깨질 때, 그가 움직일 때는 상상도 못할 파괴력이 쏟아질 게다.
‘대단한 자!’
누군가? 남도문에 몸담은 자들은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는데 이만한 자는 없다. 알았다면 진작 경계했을 게다. 야광을 접수하는 일도 진무부주에게 맡겼을 게다.
외인이다. 밖에서 들어온 자다.
“이해해 주시오. 밖에 일이 생겼소. 우린 지금 즉시 야광의 모든 걸 이용해야 하오.”
“그러니까 이런 일을 지시한 게 제이가주인가 묻는 걸세. 간단한 물음인데 왜 대답을 못하는가?”
‘여우 같은 자식!’
구통부주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구환자쯤은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다. 진무부까지 동원하면 남도문을 접수하는 데 한 시진이면 족하다. 구환자가 외인을 끌어들였다면 이야말로 반역이니 남도문을 접수할 핑계거리를 만들어준 게 된다.
밖에 있는 자가 아무리 강해도 만사무불통지를 당해내지는 못한다. 이 시대 최강의 무인을 누가 상대하랴.
그런데도 만사무불통지의 별호를 밝혀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치밀었다.
“끙! 미안하오. 내 단독 결정이오. 서로 협조하면…….”
“네 이놈!”
구환자의 고함 소리가 쩌렁 울렸다.
“감히 구통부주 따위가 야광에 와서 뭐라! 야광을 접수하겠다? 죽고 싶은 게냐!”
“…….”
구통부주는 할 말을 잃었다.
단숨에 밟아 죽일 수 있는 자에게 당하는 치욕이라니.
“제이가주의 안면을 생각해서 이번만은 봐주마. 당장 가지 못할까!”
구통부주는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본 후, 획하니 몸을 돌렸다.
구통부주가 집무실에서 빠져나와 발길을 옮긴 곳은 낯선 자의 기운이 느껴졌던 곳이다.
싸울 생각은 없다. 느낌이 맞다면 자신의 무공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자다.
그런데도 과감히 발길을 옮긴 것은 상대도 자신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인다는 건 만사무불통지에 대한 도전이다.
제이가(第二家) 무인들에게 검을 들이댈 수 있는 자는 단언컨대 남무림에는 존재치 않는다.
누군가? 누구기에 감히 제이가 무인에게 살기를 쏘아냈는가.
구통부주는 몇 걸음 옮기지 않아서 낯선 자를 찾아냈다.
그는 대담하게도 도망가지 않았다. 볼 테면 보라는 듯이 지붕 위에서 태연하게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워 있었다. 구환자의 자리와 봉창과 사내가 누워 있는 지붕 위를 선으로 그으면 일직선이 된다.
“음…….”
구통부주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
사내를 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침 먹은 것이 얹힌 듯 숨이 막힌다.
남무림에 이런 고수가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