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6
26
마야 2
불시불보(不是不報) ― 복수한다
제1장 하선루(河船樓) ― 강 위의 기루
1
소립파가 괴물 같아 보인다.
그의 노래를 듣는 순간에 내력이 두서너 배나 급증해 버렸으니. 몸으로 경험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절혼마녀와 금연화는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생각을 거듭했다. 소리만으로 내력을 급증시켜 주는 무공이 존재했나? 현재 혹은 과거에 존재했던 무공인가?
결론은 ‘없다’다. 들은 적도 없고 읽어본 적도 없다.
“그만.”
상념은 혈유의 정선 명령 때문에 중단되었다.
장강 한복판이다. 계속 나아가면 되는데 왜 또 멈춘단 말인가.
“헤헤! 아쉽지만 선장은 여기까지.”
혈유는 앉아 있기 힘든지 뱃전에 드러누웠다.
여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빨리 운기하여 전신 경략을 살폈다.
세상만사는 순리대로 돌아가야 한다. 우주의 질서가 그렇고, 사람들의 삶 또한 순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순리를 벗어나면 반드시 부작용이 뒤따른다.
소립파 때문에 급증한 내력은 비정상이다.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한데,
‘아무 이상 없어. 경략이 매끄러워.’
이건 놀라운 기적이다. 무림사에 한 획을 그을 새로운 무공의 탄생이다. 소리를 질러서 내력을 급증시켜 주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무엇이 무서우랴.
세 여인은 경이에 찬 눈으로 소립파를 쳐다봤다.
실로 경이로운 자다. 어떤 말로도 가슴속에 스며든 놀라움을 모두 표현해 낼 수 없다.
‘무공을 지녔어. 그렇지 않고서야…….’
아니다. 소립파가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래! 마공! 마공이야! 탁기가 쌓이고 경맥이 굳은 건 특이한 마공을 수련한 탓일 거야.’
금연화는 몸을 돌려 선미(船尾)에 앉아 있는 소립파를 봤다.
무엇인가 물어보려고 했다. 무공을 익혔는지, 노인처럼 경맥이 굳어버린 이유는 무엇인지, 하다못해 진기를 북돋워 준 소리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턱을 괴고 앉아 강을 쳐다보고 있는 소립파를 본 순간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생각이 깊은 것인지, 흐르는 물결에 넋을 빼앗긴 것인지.
다른 사람들도 노를 놓은 지 오래되었다.
혈유는 잠이 든 것 같다. 고루쌍마는 고루음공, 고루양공에 대해서 티격태격한다. 수검은 소도를 꺼내 손톱을 다듬고 있으며, 마도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모두들 말이 없다.
소립파가 무슨 말이든 한마디만 하면 즉각 움직일 사람들이지만 말이 없으니 천지가 개벽해도 묵묵히 기다린다.
금연화는 기억 한편을 끄집어냈다.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혈귀대주와 혈귀대원들의 관계가 이랬다.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무인들의 모습이다. 혈귀대주를 전폭적으로 믿고 따랐던 대원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흔히 마인들은 어울려서는 살지 못하는 족속들이라고 한다. 절친했던 동료라도 틈만 보이면 칼을 쑤셔 박는 게 마인들의 특성이라고 한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게 마인들이라고.
이들에게서는 그런 점들이 엿보이지 않는다.
명문정파에서 잘 다듬어진 사람들, 사지(死地)를 숨 쉬는 것만큼이나 숱하게 넘나든 전사들의 모습이 비쳐진다.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시마, 마도, 수검, 혈유, 고루쌍마…… 한 사람만 무림에 나가도 세상이 발칵 뒤집힐 사람들이야. 이런 자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이토록 조용하다면 누가 믿겠어. 이들의 구심점은 저 사람……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야?’
소립파와 혈귀대주가 비교되는 것은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다. 소립파가 말한 것처럼 그와 혈귀대주가 정말 벗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수묘인이나 향도였다고 말한 것처럼 벗이라는 말도 거짓말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벗이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와 혈귀대주가 하나로 묶여 생각된다.
평생을 같이하기로 다짐했던 혈귀대주, 하나 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다.
사문(師門)이다.
혈귀대주가 북검문에 들어와 사용한 무공은 모두 여섯 가지다.
검, 쌍검, 대부, 활, 창, 판관필로 펼치는 여섯 가지 무공은 무림사에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초유의 무공이었다.
평가도 좋았다. 북검문의 개파절기인 십절공(十絶功)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들었을 만큼 뛰어난 절학이었다.
그런 무공이 일개 가전무공(家傳武功)일 수는 없다. 심신 단련을 목적으로 수련한 무공치고는 터무니없이 강하다. 사문을 밝히기 곤란하니까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게다.
북검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문에 관한 일은 본인이 밝히지 않는 한 묻지 않는 것이 예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북검문이 여타의 문파도 아니고 북무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파인 만큼 문도들의 출신 성분은 의외로 중요하다.
북검문도 중에서 출신 성분을 정확히 말하지 않고 입문이 허락된 사람은 혈귀대주밖에 없다.
그의 무공이 너무도 광명정대한 정공(正功)인지라 사악한 기운이라고는 조금치도 엿보이지 않았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무신이라 일컫는 북검문주가 대번에 승낙했으니 토를 다는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여덟 명의 청년 무인을 선발하여 자신의 절기를 한 가지씩 전수했다. 그리고 아홉 명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투진(鬪陣)도 만들어냈다.
단 아홉 명이 일대(一隊)가 되는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혈귀대주는 북검문 창건 이래 가장 뛰어난 기재라고는 할 수 없으나 차기 북검문주로 유력시되던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다.
거침없이 무림을 질타하던 혈귀대주와 천비대를 조롱하는 소립파, 뛰어난 능력과 기이한 능력.
수하들에게서 절대적인 신망을 받았던 그와 마도인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소립파. 소립파와 혈귀대주가 벗이라면…… 어쩌면 사문도 같지 않을까? 이와 같은 사람들을 키워낸 사문이라면 보통 사문이 아닐 텐데, 중원 천하 어느 구석에 있는 사문일까?
아니다. 소립파의 경우에는 경맥이 굳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무공을 수련한 흔적이 없으니 사문이 있을 리 없는데, 동문일 리가 없는데 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걸까.
둥둥둥……! 둥둥둥……!
장강 양쪽에서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저, 저기!”
일령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북소리가 들려온 곳을 가리켰다.
일견하기에도 백여 척은 넘어 보이는 전선(戰船)들이 질서 정연하게 선열을 유지하며 다가온다.
남의 일 같으면 돈 주고라도 구경 올 만큼 일대 장관이다.
비조선을 놓친 천비대가 추적을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뒤따라오는 것은 안다.
그럼에도 태연히 배를 멈추고 잠시나마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전역(戰域)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장강에는 보이지 않는 줄이 두 가닥 그어져 있다. 한쪽은 북무림이 차지한 영역으로 북역(北域)이라 하며, 다른 한쪽은 남무림의 영역으로 남역(南域)이라고 한다. 북역과 남역의 중간 지대, 강심(江心)은 전역이라 부르며 수상 전투의 대부분은 전역에서 이루어진다.
그럼 보이지 않는 선의 경계는 어디일까?
강안에서 대포를 쏘아 닿지 않는 곳이다.
양쪽 강안에서 동시에 대포를 쏘았을 때도 유유히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전역이다.
전역이라고 안전한 곳은 아니다.
강안 대포의 사정거리는 벗어났지만 배에 실린 대포의 사정거리까지 벗어난 것은 아니니까.
천비대의 배들이 가까이 다가와 대포를 사용해도 될 즈음, 남무림에서도 전선이 출동했다.
소립파 일행에게는 천우신조랄까?
양쪽에서 출동한 선단은 무려 이백여 척.
싸움이 벌어지면 양쪽 모두 무사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대회전이 될 것이다.
“천만다행이네. 남무림에서는 우릴 탈출자로 생각한 것 같아.”
금연화가 말했다.
누구에게 한 말이 아니다. 어마어마한 무리에게 쫓김을 당하다가 원군을 만났다고 생각하니 안도의 숨이 저절로 새어 나와 중얼거렸을 뿐이다.
소립파의 반응은 달랐다.
“후후후! 재미있군.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인데…… 사슴까지 곁눈질한단 말이지. 꼼짝없는 외통수였는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는군. 후후후!”
“지금 무슨 소리를……?”
절혼마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조금만 더 나아가 남역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살길이 열리는데 외통수라니?
아! 그렇다! 남무림과 북무림이 철천지원수가 되어 싸우고 있지만, 마도에 대한 대응만은 공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천비대가 전서 한 통만 띄웠다면 남무림의 창칼도 소립파를 향했을 테고, 앞뒤로 꽉 막혔으니 새장에 갇힌 꼴과 다름없다. 소립파가 기이한 능력을 또 한 번 발휘해 주면 몰라도 꼼짝없이 잡힐 운명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루쌍마는 알아봤을 텐데. 혈유는 직접 싸우기까지 했고. 마인이 한 명이라도 타고 있다면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 남무림에 알리지 않은 거야.’
금연화는 소립파의 말을 절반 정도 이해했다. 그때 소립파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 가지. 이대로 거슬러 올라가. 전역을 벗어나지 말고.”
금연화가 급히 말했다.
“자, 잠깐만! 남무림에서는 우릴 모르는 것 같은데, 굳이 사정거리 안에서 움직이는 이유가 뭐야?”
소립파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아예 질문을 허용하지 않아.’
비조선은 강심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왼쪽으로는 남무림의 선단이, 오른쪽으로는 천비대가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내포하고 조용히 따라왔다.
포탄 한 알이면 산산이 조각나 버릴 비조선, 그러나 어느 쪽에서 쏘든 포성이 울리기만 하면 걷잡을 수 없이 여기저기서 쏘아댈 것이 눈에 빤히 보인다.
대혈전이 벌어질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함부로 쏠 수 없다.
실제로 그렇다. 양쪽 모두 따라오기만 한다. 전역으로 들어서거나 대포를 사용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충돌을 자제하는 것 같다.
“낄낄! 저놈들 호위를 받으며 강을 거슬러 올라갈 줄이야 누가 알았나. 내 생전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꿈도 못 꿨지.”
시마가 긴장을 완전히 풀어버리고 낄낄 웃었다.
긴장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세 여인만이 아직도 긴장감을 풀어버리지 못한 채 선단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시마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 것은 세 여인이 너무 긴장하고 있는 게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단문협까지 이렇게 가는 건가요?”
절혼마녀는 시마가 말을 걸어주어서 고맙다는 듯 즉시 물었다. 그러잖아도 누구와 무슨 말이든 나누고 싶었는데.
“그거야 나도 모르지.”
시마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철썩! 철썩!
노가 강물을 때리는 소리만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소립파는 결코 서둘지 않았다. 힘들 것 같으면 정선하여 쉬고, 지루한 것 같으면 배를 움직였다.
석양이 진다. 배는 붉게 물든 석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하늘도 빨갛고, 강물도 빨갛고, 세상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그만. 오늘은 여기서 쉬지.”
마인들은 일제히 노를 거뒀다.
오직 한 사람, 지금까지 뱃전에 누워 잠을 청하던 혈유가 부스스 일어나 눈곱을 떼어내며 고루쌍마에게서 노를 넘겨받았다.
‘노를 거둬? 그럼 물살을 타고 다시 하류로? 밤새도록 흘러가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말 거야.’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하나, 이번에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묻는다고 대답해 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녀들도 어느덧 소립파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마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마음을 풀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가능한 편한 상태로 누워 잠을 청했다.
별이 유난히 총총하다. 달빛도 시리도록 밟다. 물기 섞인 밤공기도 폐부를 시원하게 해준다.
이건 맛이다. 고소한 맛, 밤이 지닌 독특한 맛.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새 잠들었다. 눈꺼풀이 사르륵 감긴다 싶더니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읍!’
그녀는 낯선 감촉을 감지하고 화들짝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가 입을 틀어막은 걸 알았다. 무의식중에 얕은 소리를 질렀다. 물론 입 밖으로 새어 나올 소리가 아니었지만.
“쉿!”
‘소립파?’
그녀뿐만이 아니다. 다른 여인들도 입을 틀어막은 사람이 다르다는 차이가 있을 뿐, 그녀와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
“쉿! 조용히.”
시마의 음성이다.
“쉿!”
짧고 강렬한 말, 마도의 음성.
금연화는 고개를 끄덕여 알아들었다는 뜻을 표시했다.
입을 막은 손길이 그제야 풀렸다.
소립파는 일어나 앉은 그녀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왜요?’라던가 ‘뭐 하는 거죠?’라는 반문을 했을 게다.
그녀는 순순히 업혔다.
소립파는 밧줄로 그녀의 엉덩이 밑으로 한 가닥, 등으로 한 가닥을 묶었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잡아 어깨 위로 올려놨다.
“단단히 붙잡아.”
‘무, 물속으로 뛰어들려고? 맙소사! 여기서 저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유, 유영을!’
이번에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시키는 대로, 먼 옛날에 아버지에게 업혔던 기억을 되살려 목을 꽉 끌어안았다.
스륵! 스르륵……!
불행히도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소립파는 구렁이가 담 넘듯이 물방울 한 올 튀기지 않고 물속으로 잠수했다.
유영 정도는 할 수 있다. 잠수로 장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 다소 부담되기는 하지만, 이들이 할 수 있다면 자신도 해낼 자신이 있다. 다 큰 처자를 어린아이처럼 다루니 자존심 상하지 않나.
잠깐 동안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이었지만 물속에 들어간 이후에는 말끔히 지워 버렸다.
물속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유부에 발을 들여놓은 듯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다. 혼자서 잠수를 감행했다면 적잖이 당황했을 게 틀림없다.
낮과 밤의 차이, 경험의 차이.
소립파는 물고기나 된 듯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 방향 감각조차 없다. 그래도 불안하지는 않다. 소립파가 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같이 일을 꾸미는 사람들의 능력을 충분히 고려해서 감행하는 행동들이다. 의문이 치솟아도 질문할 필요가 없다. 무조건 믿고 따르면 된다.
소립파의 등이 넓고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