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62
262
천멸도주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진기를 최대한 이끌어 검에 집중했다.
‘한 번은 막을 수 있겠는데…….’
마야가 가르쳐 준 수로(壽路)를 사용할 생각이다. 수로는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육신을 보호해 주는 호신(護身) 경맥(經脈)이다. 피가 멈추고, 심장이 멈추고, 뇌까지 멈춘 후에도 한참 동안은 육신을 떠나지 않다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이 수로의 생기(生氣)다.
육신이 음약에 찌든 이 순간에도 수로는 건재하게 움직이고 있을 터이다.
물론 마야만큼 자유자재로 수로를 움직이지는 못한다.
수로를 활용할 필요도 없었다. 마야는 주로(走路)를 쓰지 못했으니 대체 수단으로 수로를 활용했지만 처음부터 넓고 탄탄한 주로를 사용해 내공을 수련한 사람들은 굳이 좁고 황폐한 땅을 개척할 필요가 없었다.
내공이 증진되는 정도만 활용하면 되었다.
그것 또한 많은 도움은 되지 못했다.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데 얕은 시냇물이 끼어든 격에 지나지 않았다. 조그만 증진도 태산같이 받아들일 줄 아는 고수들이니 티끌만 한 도움도 크게 받아들였지만 짧은 시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데는 현재까지가 최고였다.
지금은 거의 잊어버리고 있던 수로가 최후의 순간에 목숨을 구해줄 줄이야.
쒜엑!
움직임을 모르던 검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쏘아졌다.
‘흡!’
달려들던 여인은 느닷없는 반격에 깜짝 놀랐다. 복면을 하고 있고, 소리도 흘리지 않았지만 얼마나 놀랐는지는 살수의 감각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푸욱!
검이 여인의 목을 쳤다. 그녀의 머리가 툭 떼어져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발길에 채인 돌멩이처럼 힘을 잃고 멀리 나가떨어졌다.
‘제길!’
천멸도주도 힘을 잃었다. 수로를 지탱시켜 주던 진기마저 말끔히 끌어쓴 후인지라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한데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스스슷! 스으읏……!
묵사가, 묵사들이 방향을 틀어 움직인다. 그녀를 향해 기어오던 묵사가 여기저기로 흩어져 간다. 바로 복면 여인들이 은신해 있는 곳으로, 그녀들을 물려고…….
‘마야!’
이런 기막힌 일을 할 사람은 마야밖에 없다.
따악!
풀숲 한가운데서 나무로 나무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신호였다.
천멸도주의 검에 목숨을 잃지 않은 여섯 여인은 비조처럼 우아하게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갔다.
“차라리 죽었어야지. 멍청한 년들! 오성연주(五星聯珠)를 보이고도 무사하길 바래!”
천멸도주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심하라고 했잖아.”
마야가 다가왔다.
“너도 그래! 재주는 뒀다 메주 쒀먹을 거야! 뱀새끼들을 움직일 수 있으면 빨리빨리 움직일 일이지…….”
천멸도주는 성질도 제대로 부리지 못했다. 회음혈에서 일어난 열기가 전신을 뒤덮었다. 가만히 서 있을 수도 없다. 자꾸 하반신이 비비 꼬인다.
놀라운 효능이다. 이토록 신속히 퍼지는 음약이 있었나.
“좀 쉬었다 가자. 저녁을 일찍 맞이했다 생각해.”
마야가 천멸도주의 허리를 움켜잡았다.
“미쳤어! 대낮에…… 하악!”
“거부할 처지도 아니면서.”
천멸도주는 고개를 돌렸다.
싫지 않다. 마야와 함께 하는데 싫을 리 있나. 품에 안기는 일이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사양치 않으리라.
하나 너무 밝다. 밝음 아래서 정사를 벌이는 일이 창피한 게 아니라 나병에 할퀴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신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니 그게 싫다.
“걱정은…… 우리에겐 천군만마가 있잖아.”
마야가 천멸도주의 복면을 벗겼다.
그때, 그녀는 보았다. 수천, 수만 마리의 왕벌이 구름처럼 날아와 주위를 에워싸는 걸.
그녀는 마야의 입술을 힘껏 빨기 시작했다.
제5장 파미아(破謎兒) ― 수수께끼를 풀다
1
“무슨 생각해?”
“이것들을 어떻게 때려잡을까 하는 생각.”
“허!”
마야는 기가 막혀 천멸도주를 쳐다봤다.
무려 한 시진에 걸쳐서 정사를 벌였다. 그런 끝에 한 말인데 기껏 한다는 말이 누굴 때려잡는다는 말이다.
“넌 분위기 맞추는 법 좀 배워야겠다.”
천멸도주는 대답이 없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복면 여인들을 때려잡을 생각밖에 없다.
“이거야 원…….”
“그것들이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는 한 날 건드릴 수는 없는데…… 누가 사주했기에 거절을 못한 거지? 거절하는 것보다 나에게 당하는 게 낫다는 소리잖아.”
천멸도주가 늘 이렇지는 않다. 천멸도를 버리고 마야를 택할 만큼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이다.
그녀가 복면 여인들에게 집착하는 건 그녀들이 다름 아닌 살수이기 때문이다.
살수 집단이 살수계의 전설인 천멸도 도주를 친다는 건 천멸도와 정면 승부를 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해결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싸움이다. 아주 치열한 싸움, 몇십 년이 걸리더라도 둘 중에 하나가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 싸움이 시작된 거다.
이게 살수들의 싸움이다.
머나먼 곳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천멸도 식솔들까지 싸움판에 휘말린 것이다.
천멸도주가 말을 이었다.
“오성연주를 사용하는 문파…… 내 기억이 맞는다면 연자암(連紫庵) 비구니들이야. 그렇지?”
벌써 알고 있었다. 일견후즉파인 그가 신법까지 봤는데 문파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심각한 것은 연자암 비구니들은 살수가 아니라는 거다.
살수도 아니면서 살수 행각을 벌였다.
천멸도가 나선다면 연자암 비구니들은 몰살당할 것이다. 천멸도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겠지만 살수들의 싸움이 시작된 이상 도주는 반드시 연자암을 지상에서 지워 버릴 게다.
그렇지 못할 경우, 천멸도는 살수계를 떠나야 한다.
천멸도는 살수를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나병에서도 벗어났고, 열심히 일하면 먹고살 걱정은 없어진다.
그럴까? 아니다. 천멸도는 단지 몇몇 사람들의 섬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환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성소(聖所)다. 천멸도에서는 나환자일지라도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고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천멸도에는 끊임없이 나환자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다.
살수는 끊임없이 양성될 것이고, 약을 찾기 위한 노력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 한 지속될 게다.
청령단이나 황정초 같은 영약이 흔한 것도 아니고, 마야의 피가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것도 아니다.
천멸도는 새로운 약을 찾아 나서야 한다.
결국 살수행은 그들의 삶이 될 것이다.
천멸도 살수들도 그 점을 알고 있으니 연자암과의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연자암 비구니들은 왜 결과가 뻔한 싸움을 시작했을까? 누구의 사주이든 비구니들의 목숨을 모두 사버렸으니 대단한 자이지 않은가.
마야는 그 이유도 안다.
천멸도와 연자암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발단이 천멸도주의 암살에서 비롯되었으니 도주 또한 싸움을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녀는 떠나야 한다. 천멸도 살수들에게로.
연자암 비구니가 마야와 천멸도주를 급습한 것은 천멸도주를 마야에게서 떼어놓기 위한 술수다.
누굴까? 유계는 아니다. 유계의 마인들은 마야와 천멸도주 모두를 죽이려고 했다. 회유되지 않으면 죽인다는 게 유계의 방침이다. 굳이 술수까지 부려가며 천멸도주를 떼어놓을 필요가 없다.
‘원하는 대로…….’
마야는 말했다.
“연자암에는…… 오성연주를 바탕으로 한 염화신무(炎火神武)가 일절이야.”
“알아.”
“하나 더. 팔명진(八明陣)를 제대로 수련했다면 은신술을 거둬낼 수 있어. 천멸도로 말하면 뭐랄까? 상극을 만났나고 할까? 피해가 꽤 클 거야.”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야겠네?”
“원래 그러려고 했잖아. 네가 고집을 부려서 따라온 거지.”
천멸도주가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우리 또 언제 만나지?”
등을 돌린 채 말해왔다.
천멸도와 연자암의 싸움도 기나긴 싸움이 될 것이다. 모두가 한꺼번에 벌판에서 만나 일전을 벌이는 것이라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겠지만 중원을 무대로 숨고 쫓는 숨바꼭질을 벌인다면 그야말로 기약이 없다.
마야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천멸도주가 말했다.
“먼저 끝나는 쪽이 찾기로 해.”
“그래.”
“꼭.”
“그래.”
천멸도주는 등을 돌린 채 경장을 입고 복면을 썼다.
‘돌아보지 않을 거야.’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마야를 들판 한가운데 버려두고 훌쩍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갔다.
“가아아아…….”
지극히 낮아서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극저음이 허공을 뒤흔들었다.
우웅! 우우웅!
화답이라도 하듯 왕벌이 날아올랐다.
“가아아아아아…….”
다른 때 같았으면 그쳤어야 할 소리였지만 이번에는 한참을 이어나갔다.
날씨가 가을 문턱을 넘어섰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그가 행로로 잡은 차가움이 북쪽은 훨씬 빨리 찾아온다.
왕벌이 움직이기에는 부적합한 환경이다.
이놈들을 어디다 숨겨놓을까?
남만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그곳까지 보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혹여 중간에 흩어지거나 알지 못할 곳에 둥지를 트는 경우라도 생기면 애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장강에서 가까운 곳, 인적이 드문 곳.
마야는 장강을 넘기 전에 드나들었던 땅굴을 생각해 냈다.
그곳이면 왕벌이 한겨울을 넘기기에 딱 알맞은 온도를 제공해 줄 게다.
저놈들은 그동안 꿀을 거둬들이지 못했으니 한동안 부지런히 움직여야 되겠지만 결국은 생존해 낼 게다.
“가라!”
마야는 회색 구름이 되어 사라져 가는 왕벌 떼를 지켜봤다.
한 잔, 두 잔…….
술잔이 거듭되었고 빈 술병은 늘어만 갔다.
천멸도주가 떠난 지도 반나절이 지났다. 그녀와 정사를 나눴던 곳에서 십여 리는 더 걸어왔다. 그리고 허름한 객잔에 여장을 풀고 술잔을 기울였다.
기다리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계의 마인이든, 북검문도든, 연자암 비구니들을 움직인 사람이든, 마군이든…… 누구든 나타나기를 기다렸건만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서두를 건 없다. 급한 건 그들이다. 자신이야 이대로 사라져 버린들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물론 그전에 할 일은 있다. 최소한 혈귀대주의 심장에 화살을 틀어박은 궁왕과 일전을 겨뤄야 한다. 지든, 이기든 한 번은 싸워줘야 되는 게 놈에 대한 의리다.
“여기 술 한 병 더 주쇼.”
객잔을 운영하는 노인은 삶에 찌든 고단한 낯빛이었다. 주름진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구릿빛이고, 손마디는 억센 일을 많이 한 탓에 굵디굵다.
“벌써 댓 병이나 마셨는데, 괜찮겠는가?”
“하하!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취기가 돌지 않는군요. 아니면 술에 물을 타셨나?”
“허허! 없으면 안 팔지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네.”
노인이 술 한 병을 다시 내왔다.
술이래야 값싼 화주(火酒)다. 맛이 별로 없고, 취하면 상당한 두통을 안겨준다. 하나 싼값에 이처럼 독한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주당들에게는 행운이다.
시마가 즐겨 마시던 술이다.
쪼르륵……!
술병에서 흘러나온 백색 액체가 술잔에 가득 찼다. 그 순간, 술을 따르던 마야의 손끝에 미미한 떨림이 있었다.
저벅! 저벅!
멀리서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아는 사람이다. 이번에 만나면 죽여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만나고 싶지 않은데 만나고자 온다.
차라리 창문가에 앉지 말고 안쪽에 앉았더라면 걸어오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삐걱!
그가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그는 객잔 안을 휘 둘러봤고, 마야를 금방 찾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객잔에 손님이라고는 마야밖에 없었으니 장님이 아닌 이상 찾지 못할 리가 없다.
그가 걸어왔다.
“잠시 앉아도 되겠나?”
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이면서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 흑조편복이 맞은편에 앉았다.
“기억을 되살립시다. 세 번의 기회, 다 끝나지 않았소?”
“끝났네.”
“사자(使者)로 온 거요, 죽이러 온 거요?”
흑조편복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면서 생각했네만…… 난 자네 상대가 되지 못했어. 전설적인 살수? 흥!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자네는 보이지 않는 갑옷을 입었고, 보이지 않는 무기를 든 사람인데.”
마야는 술을 마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만 죽는 건데, 괜히 그 여자를 끌어들였어.”
그 여자는 적안사태를 말하는 것일 게다.
“나도 한 잔 주겠나?”
마야는 술병을 내밀었다.
잔은 없다. 흑조편복은 개의치 않았다. 내밀어진 술병을 집어 들고 병째로 들이부었다.
꿀꺽! 꿀꺽!
독한 화주가 술술 넘어갔다.
“난 자네 진가(眞價)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던져진 미끼에 불과했던 거지. 허허허!”
“…….”
“미끼라고 해도 작은 미끼는 아니었네. 내게 명이 하달되었을 때, 그 명은 진짜였어. 반드시 널 죽이라는 진심이 담겨 있었지. 그런데 그게…… 호랑이는 제 새끼를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뜨린다고 하네. 그중에서 살아 나온 놈만 기른다지? 내게 죽을 정도였다면 그냥 죽여 버리는 거고,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써먹는 거고.”
“잔접이군.”
“알고 있었나?”
“지금 그럴 거라는 짐작이 들었소.”
“잔접에는 열두 마리의 나비가 있네. 만나보겠나?”
“…….”
대답하지 않았다. 섣불리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