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65
265
곤란해진 게 있다.
적멸주는 영능을 깨뜨린다. 마야가 최고의 무공이라 여겼던 영능이 무용지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럼 남은 건 본신무공, 상대할 수 있을까?
이자는 한다면 하는 자다. 흑살마녀를 죽이겠다면 죽이고야 만다.
“두 가지만 의문을 말해주시오. 그럼 얌전히 제이성으로 돌아가 콘의 무공을 수련하겠소.”
“뭐냐?”
“사부님, 살아계시오?”
“마군. 죽었다.”
“그럼 적멸주는…….”
“두 번째 물음이냐?”
마야는 고개를 저었다.
“잔접에서 멸신구관을 만들었소?”
“멸신구관은 합작품이다. 중원제일의 거부 이약도가 재산을 내놓았고, 오귀가 이약도의 팔귀당천지관에 자신들의 절학을 가미시켜 누구도 파해할 수 없는 기관을 만들어냈지. 그걸 파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명, 너뿐이었다.”
마야는 멍해졌다.
예상은 했지만, 멸신구관에서 오귀와 연관된 걸 곳곳에서 봤지만 정작 그들이 만들었을 줄이야.
“그럼 제이성으로 돌아가는 걸로 알겠다. 돌아가지 않으면, 흑살마녀를 죽인 후에 찾아오마.”
나비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한 걸음…… 그가 마야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감쪽같이,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귀적무!’
절혼마녀의 귀적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절정신법이다.
마야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돼.’
제6장 강인강(强人降) ― 강자를 다스린다
1
생각할 게 많다. 정말로 많다.
소립파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자신만의 능력인 줄 알았던 적멸주를 자연스럽게 내뱉고, 절혼마녀와는 완전히 격이 다른 귀적무를 펼쳐 내고…… 달려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든 괴물.
그는 무신보다도 강해 보였다.
무신들의 강함은 잘 알고 있다. 멸신구관에서 함께 생활하다시피 했는데 모르면 말이 되겠는가.
나비는 단연코 그들보다 강하다.
세상에! 당금 무림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라 하여 무신이란 명호를 듣는 사람들인데, 그들보다 강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지금 꼭 꿈을 꾸는 것 같다.
‘북검문주나 남도문주라면!’
그렇다면 가능성있다. 북검문주는 삼원로보다 강하다. 남도문주는 만사무불통지나 궁왕보다 강하다. 강하다고 해봐야 티끌 하나 차이라고 하지만 실제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얼마나 강한지는 무신들밖에 모른다.
사부나 오귀는 제외했다.
사부와 오귀는 눈감고도 알아볼 수 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보자기로 전신을 가리고 여러 사람 속에 섞여 있어도 냄새만으로 찾아낼 수 있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단연코 사부와 오귀는 아니다.
남도문주일까, 북검문주일까. 둘 중 한 명이라고 치면 더욱 혼란스럽다. 그들이 왜, 무슨 목적으로 마인을 양성한단 말인가. 다른 건 고사하고 멸신구관에 석상을 놓아둔 일만 사실로 밝혀져도 대협(大俠)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난리가 날 것이다.
“타앗!”
삼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울렸다. 더불어서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도 급박하게 터져 나왔다.
마야가 들으라고 일부러 내지른 고함이다.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제이성으로 가라는 독촉이다.
누구와 싸우는 건 아니다. 동료들끼리 허장성세로 검을 쩡쩡 부딪치고 있을 게다.
목소리가 크고 급박하지만 살기가 깃들어 있지 않다. 진정으로 싸우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가라면 가야지.”
소립파는 일어나 휘적휘적 걸었다.
깊은 산, 정처없이 걷다 보니 길을 잃었다.
조급하지는 않다.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딘가는 나오리라. 한데 그런 생각이 그를 점점 깊은 산속으로 끌어들였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산은 경사가 져 있다.
높은 쪽이 있고, 낮은 쪽이 있다. 높은 쪽으로 가면 산봉이요, 낮은 쪽으로 가면 계곡이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높아졌다가 낮아지고, 낮아지는가 싶으면 다시 높은 곳으로 향한다. 무작정 높은 곳만 골라갈 수도 없고, 낮은 쪽만 택할 수도 없다.
산에도 길이 있다.
그는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길을 잃은 것은 염려거리도 안 된다. 물소리마저 끊겼고, 그럴수록 갈증은 더욱더 치밀지만 아직은 웃으며 참을 수 있다.
정작 번잡한 것은 마음이다. 아직도 나비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단 몇 마디 나눈 것뿐, 잠깐 본 것뿐인데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만한 무공이라면 한 세상 질타할 자격이 충분하다. 어둠 속에 숨어서 잔꾀를 부리지 않아도 당당히 세상을 활보할 수 있다. 밝은 세상으로 나섰다면 벌써 무신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게다.
자신은 따라가지도 못할 무공이었다. 콘과 수의 정혈을 남김없이 빨아먹어도 간신히 발끝이나 잡을까? 그를 상대로 검을 겨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다.
적멸주를 듣는 순간에 전신 진기가 산산이 흩어졌다. 주로의 진기뿐만이 아니라 수로의 진기까지 꽁꽁 숨어버렸다. 한마디로, 사지에 맥이 풀려 힘을 쓸 수 없었다.
영능으로 펼친 것이든 내공으로 펼친 것이든 나비는 적멸주를 펼칠 줄 알고, 또 자신보다 위력도 강하다.
적멸주가 이토록 놀라운 무공일 줄은 생각지 못했는데.
나비가 죽이고자 했다면 자신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가마를 들고 온 무인들이 파리처럼 나뭇가지에 맞아 죽듯이 자신도 똑같은 방법으로 죽을 수 있었다.
때리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죽일 수 있는데,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른 곳을 치고 있다. 평생 수련한 무학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무인들은 빗나간 일검이 자신의 실수인 줄만 알고 회의의 눈빛 혹은 자조의 웃음을 흘리며 죽어갔다. 마야의 기파에 순간적으로 진기가 뒤틀린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비는 똑같은 무공을 사용한다.
사실 그가 토한 음성이 적멸주인지, 다른 무공인지는 분간되지 않는다. 소리의 성격이 적멸주와 똑같고, 음파 역시 자신이 펼친 것과 동일했다.
옆 사람도 모를 만큼 고요하게 흘러서 적(寂). 모래성을 무너뜨리듯 산산이 짓밟아 죽이기에 멸(滅). 저주의 최고봉이라 주(呪). 적멸주(寂滅呪).
그렇다. 적멸주는 무공이었다. 또 마령음도 무공이다. 자신의 수준이 미약해 무공으로 사용하지 못했을 뿐이지 지상 최강의 음공(音功)이다.
“가아아아아아…….”
지극히 낮아서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후두두두두둑!
산새들이 깜짝 놀라 마구 날아올랐다. 다람쥐도 화들짝 놀라 황급히 달아났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던 적멸주가 아니다. 사물의 기를 상쇄시키는, 말 그대로 공격성을 지닌 음파. 적멸주다.
이따위 소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겼다.
세상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직 파괴만을 할 수 있는 소리가 무슨 필요가 있나.
아니다. 때로는 파괴도 필요하다.
“고오오오오오…….”
이번에는 마령음이다.
천 근 바위처럼 단단하기 이를 데 없던 콘도 마령음과 적멸주를 번갈아 쏘아내자 마침내 흔들리고 말았다. 그의 내부가 텅 빈 북처럼 공동(空洞)이 되었고, 강맹하게 흐르던 진기는 중심을 잃고 이슬비처럼 흩뿌려졌다.
아직도 기억난다. 강변에서 콘과 싸우던 일이.
“고오오…… 가아아…… 고오오…… 가아아…….”
마령음과 적멸주가 연달아 터졌다.
허공에 쏘아낸 것은 아니다.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 세상이란 넓고 넓어서 소리가 머물 곳이 없다. 땅에 물 한 바가지 쏟는 것과 허공에 소리 지르는 건 매한가지다.
소립파는 눈앞에 있는 작은 나무를 향해 이 소리, 저 소리를 번갈아 쳐냈다.
나뭇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나와 하늘하늘 휘날렸다.
나무는 어린아이가 발길질을 하는 것과 비슷한 충격을 받고 있을 게다.
이 얼마나 미숙한가.
나비 같았으면 큰 바위로 내리찍는 것과 같은 충격을 주었을 텐데, 자신은 가볍게 쓰다듬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소리를 멈춘 마야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마령음이 흘러가던 곳, 적멸주가 도도하게 넘쳐흐르던 곳.
그렇게 시간을 잊어갔다.
낮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별이 뜨는가 싶더니 다시 날이 밝아온다. 그리고 똑같은 일상이 두 번이나 더 반복되었다.
“후후후!”
소립파는 가벼운 웃음을 흘려냈다.
좌정에 들어간 지 꼭 사흘 만이다.
“그래. 제이성으로 돌아가야겠어.”
시야에 바싹 마른 나무가 들어왔다.
사흘 전, 적멸주와 마령음을 번갈아 얻어맞은 나무다. 그동안 잎이 다 떨어져서 앙상한 나뭇가지만 드러내고 있다. 나뭇가지 또한 끝이 마르고 있어서 조만간 말라 죽을 것 같다.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멸신구관을 만든 사람이 오귀와 이약도라는 사실을 안 것만도 큰 수확이다.
나비가 누군가? 그런 사람이 열두 명이나 있다는데,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무신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들이 모른다면 누가 알랴. 알고 있을 게다.
여러 가지 번잡한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모두 생각일 뿐,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
그것 또한 알아내야 한다.
그가 침묵의 시간을 가진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콘과 수의 모든 것을 알아냈다 싶은데 나비는 왜 다시 제이성으로 돌아가라 할까?
이것 한 가지를 풀기 위해 사흘을 침묵 속에서 보냈다.
언뜻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건 나비가 누구냐는 것이다.
그 질문은 백번, 천 번 해봤자 지금 단계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
차후로 넘겨야 할 생각이다.
두 번째로 든 의문은 그만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 왜 자신 같은 사람에게 연연하냐는 것이다.
나비의 무공은 일견후즉파인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항거불능의 완벽한 무공이다.
내공을 무력화시킨 후 강맹한 내력으로 쳐내면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북검문주나 남도문주 같은 경우에도 내공이 절반쯤 삭감되는 희생은 감수해야 할 터이고, 그 정도나 물러섰다고 하면 이길 공산이 없다.
남도문주와 북검문주를 만나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나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런 그가 자신처럼 무신의 상대도 되지 못하는 사람에게 왜 무공을 전수하지 못해서 안달하냐는 거다.
멸신구관을 만든 건 오귀와 이약도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이용한 사람은 틀림없이 나비다. 어쩌면 오귀와 이약도는 멸신구관만 만들었고, 석상무공은 나비가 가져다 놓은 게 아닐까?
그것도 난감하다. 석상무공을 가져다 놓으려면 멸신구관에 들어가야 하는데, 당시 멸신구관은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 모든 게 아리송하니 이 문제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로 든 의문도 있다.
나비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건 아주 잠깐이다. 특별한 내용도 없었다. 다시 말해서 굳이 천멸도주를 떼어놓지 않아도 된다. 한데 비구니까지 동원하면서 왜 떼어놓았냐는 것이다.
간단히 생각하면 싸움을 자신 혼자서 치르게끔 손썼다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야 자신의 무공을 낱낱이 볼 수 있으니까. 그가 보고 싶었던 것, 영능을 사용하여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반격하여 요절내는 장면을 똑똑히 볼 수 있을 테니까.
천멸도주가 있었다면 그녀가 절반쯤은 해결했을 게다.
자신 역시 그녀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 일반적인 무공을 사용했을 게 분명하고.
정말 그럴까? 천멸도주를 떼어놓은 게 그 이유 때문일까?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나비의 눈썰미라면 단 한 명과 싸워도 영능을 사용하면 알아볼 수 있다.
아마도…… 정말 생각하기 싫지만…… 천멸도주는 인질이 되었을 공산이 크다.
그녀는 많은 것을 주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성의 사랑을 일깨워 주었다. 절망감도 받았다. 나병에 걸린 그녀를 보았을 때의 절망감은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다. 사랑이 쪼개질 때의 아픔은 열병에 걸린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남겼다.
그녀가 인질이 되었다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찾아와야 한다.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녀가 천멸도까지 제대로 갔는지 확인해 봐야 알 일이다.
그녀와 더불어서 다른 생각도 든다.
호채마는 제이성에 무사히 도착했을까?
나비가 손을 썼다면 그들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인질로 삼는다면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낫고, 두 명보다는 호채마 전부를 낚아두는 게 낫지 않겠나.
모든 게 나중 일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 콘과 수에게서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느냐 하는 문제만 집중해서 생각했다.
자신의 영능을 똑똑히 보았고, 손속도 확실히 파악한 사람이 한 말이니 더 배울 게 있는 건 확실하다.
그게 무언가?
거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그렇게 해서 무공을 완벽하게 배운 후에는 어쩌란 말이냐 하는 생각까지 미치지만 현재로서는 그전에 생각을 멈춰야 한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사흘의 숙고 끝에 얻어낸 게 있다.
콘의 무공은 전설의 무공을 연상케 한다. 인간 세상의 무공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설화(說話)다.
악마가 천수여래(千手如來)를 꺾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일수광음파천불(一手光陰破千佛)이라는 무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