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67
267
“지금이라도 순순히 따라가지?”
“지금이라도 물러나. 그럼 목숨은 보존할 수 있어.”
“맞으면 꽤 아플 거야.”
“너 병신이니? 별걸 다 걱정하네?”
사내는 피식 웃더니 또 먼저처럼 급하게 돌진해 왔다.
쒜에에에엑!
머리 위에서 기분 나쁜 파공음이 들리는 것도 똑같다.
방심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바짝 긴장했다. 이런 유의 싸움을 하는 자는 사람 심리를 아주 잘 꿰뚫는다. 언젠가 자신의 꾀에 자신이 당할 날이 있겠지만, 무척 약은 자다.
쉬익!
이번에는 옆으로 가는 대신 앞으로 치달려 나갔다. 사내가 있는 곳이다.
“그래야지. 그렇게 마주쳐 와야 맛이 나지.”
쒜엑!
아래에서 올라온 발이 직각으로 방향을 틀면서 머리를 노려왔다.
시도는 좋은데 하필이면 벽추검이 있는 쪽이다. 벽추검을 곧추세우기만 해도 사내의 발목이 절겅 잘려 나간다.
천멸도주는 누구나 환히 보는 수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사내와 엇비껴 지나가며 몸통을 그었다.
검을 세웠다면 먼저와 같은 결과가 나왔으리라. 막대한 타격이 몰아쳐 와 벽추검을 잡고 있을 수 없었을 게다.
사내는 그어오는 검을 막으려는 듯 팔꿈치를 찍어 내렸다.
팔과 검!
천멸도주는 이번에도 충돌을 피했다. 그리고 갑자기 사라졌다.
“은신술! 천멸도의 은신술이 일품이라는 소리는 오래전부터 들어왔는데, 이제야 보게 됐군.”
사내는 너무 말을 많이 했다.
쒜엑! 까앙!
벽추검이 사내의 정강이를 잘랐다. 한데 역시 생각했던 대로 쇠붙이와 부딪쳤다.
“당황스럽나?”
대답하지 않았다. 은신술을 구경하고 싶었다니 철저하게 구경시켜 줄 참이다.
쒜에엑! 팟!
이번에는 무릎 관절을 찔렀다.
몸에 쇠창살 같은 것을 댔어도 관절만큼은 비워야 한다. 신법을 펼치려면…… 아니, 신법까지도 필요없다. 보통 사람처럼 움직이는 것, 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려면 구부리고 펴는 동작을 제대로 해야 한다.
한데 이상한 느낌이다. 탄탄한 소가죽을 나뭇가지로 찔렀을 때처럼 어느 정도 들어가는가 싶더니 다시 튕겨 나온다.
‘가죽!’
어떤 가죽인지 모르지만 온갖 병기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니만큼 베거나 뚫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정보를 줄까? 머리를 노려. 머리밖에 벨 수 있는 곳이 없어. 다른 곳은 공연히 헛힘만 빼는 거야.”
아무리 논리 정연하게 말하는 설객(說客)이라도 벽창호와 마주하면 할 말이 없게 된다. 무당검법십삼세와 천멸도의 절기로 중무장한 그녀였지만 뚫리지 않는 갑옷을 입은 자와는 싸우기가 힘들었다.
파해법은 간단하다. 진기란 진기는 모두 모아 검에 주입한다. 그리고 단 일 초식에 승부를 건다. 쇠창살을 잘라내거나 베이거나 양자택일(兩者擇一)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나?
머리는 노리면 되는데, 이 또한 사내의 속임수다.
몸에 갑옷을 두른 자가 머리라고 남겨두었을까. 천만에. 머리에도 보호장치가 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검을 막을 수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결국 정면승부뿐이다.
천멸도주는 진기를 끌어 모았다.
우우우우웅!
피가 뜨겁게 흐른다. 혈류는 빨라지고 혈관은 무섭게 팽창한다.
이럴 경우에 십이면 십, 백이면 백 은신술이 깨진다. 폭발 직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진기가 외기와 충돌하면서 섬뜩한 기운을 풍겨내기 때문이다.
사내는 결코 그런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지루한데 이제 그만…….”
파앗! 슈욱!
천멸도주는 검을 힘껏 쳐냈고, 사내는 손을 쑤욱 뻗어왔다.
까앙! 파앗!
검과 팔이 부딪쳤는데 불똥이 튀었다.
누구의 승리인가? 기적은 일어났다. 불똥을 마지막으로 옷 속에 감춰져 있던 쇠붙이는 절겅 잘려 나갔다.
몸에서 잘려 나간 팔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팔에서 솟구친 피가 둑 터진 물길처럼 좔좔 흘러나온다.
“크윽!”
사내의 비명은 제일 나중에 나왔다.
겨우 팔 하나일 뿐이다. 팔을 잘라냈다고 좋아하다 보면 숨통이 되짚인다.
쒜엑! 쒜에에에엑!
천멸도주는 내처 쳐갔다.
사내도 천멸도주가 쳐올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가 다가오는 길목에 세침 한 무더기를 뿌리며 뒤로 물러섰다.
천멸도주는 비 오듯 쏟아지는 세침을 온몸에 고스란히 맞으며 쏘아나갔다. 이 기회를 놓치면 사내를 잡을 기회는 영영 없어진다.
파앗!
벽추검이 화려한 검광을 쏟아냈다.
“헉! 헉! 헉……!”
이제는 검을 들고 서 있을 힘도 없다.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손에 가시만 박혀도 아픈 법이다. 하물며 온몸에 세침을 꽂아 넣었다.
그런 상태로 할망구와 부딪쳤다.
할망구는 죽장(竹杖)을 병기로 사용했는데, 질기기가 쇠심줄 같아서 벽추검 같은 명검으로도 잘라내지 못했다.
쉽게 끝날 싸움이 아니다.
한데 또 다른 인물들이 나타났다. ‘할멈’ 하며 나타난 자는 다짜고짜 연수합격을 취해왔다.
노인 부부는 손발이 척척 맞았다. 평생 연수합격만 수련한 듯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공격을 보여주었다.
가슴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온몸을 적셨다.
과다출혈이다. 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볍게 여긴 세침에 독이 잔뜩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천멸도주는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벽추검이 날아갔다. 자검마저 손에서 놓쳐 버렸다.
뒤늦게나마 은신술을 펼쳐 보았지만 몸을 물들인 피 때문에 펼치지 않느니만 못했다.
“쯧! 얌전히 따라가면 괜찮을 걸, 왜 바동거려.”
할망구가 호두를 까서 입 안에 털어 넣으며 다가왔다.
싸움을 끝내고 싶다. 이들은 너무 강하다. 하나하나가 마도나 수검 수준이다. 그들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못하지 않다.
유계의 마인들!
이상한 건 전에도 이들을 만났지만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는 거다.
전에는 가자고 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려고 했다. 위협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살초(殺招)를 전개했다.
이번에는 완전히 다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납치해 가려고 한다. 독을 사용하고, 통하지 않으니까 무력을 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까지 몰아치고, 유유히 승리를 즐긴다.
절정고수를 일곱 명이나 죽였으니 그만하면 됐다.
말이 일곱 명이지 호채마를 혼자서 말살시킨 것과 다름없으니 굉장한 승리 아닌가.
그녀가 정파 인물이었다면 지금 죽어도 영웅 대접을 받으리라.
천멸도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푸르다. 맑다. 이팔청춘의 아름다움이 물씬 담겨 있다.
그때는…… 어렸을 때는 저 하늘처럼 자신도 싱싱했던 적이 있었는데. 한 남자를 만났고, 아름다운 사랑을 나눴는데.
진기를 끌어올렸다.
잡혀가면 안 된다. 저들이 자신을 사로잡으려는 목적은 마야에게 있다. 설마 그 정도 눈치를 못 챘을까.
호채마를 칠 수 있었으면 쳤다. 하나 그들은 너무 은밀하게 행동해서 종적을 찾지 못한다.
그러던 참에 천멸도주가 혼자 떨어져 나왔다.
마야와 같이 있을 때는 천하무적이던 여인이 홀로 떨어지니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마야가 있음으로 해서 호채마가 무적이 될 수 있었다.
유계의 마인들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천멸도주와 마야의 관계를 소상히 알고 있으니 그녀만 잡으면 마야를 잡는 것과 같다는 걸 모를 리 없다.
마야를 유계로 데려갈 수 있는 것이다.
천멸도주도 그 점을 알고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안다.
진기를 일주천(一週天)시키다가 심맥(心脈)을 향해 질주시켰다.
심맥만 끊으면 된다. 그럼 아주 조용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흐흐흐! 요망한 것! 뉘 앞에서 잔재주를!”
그녀의 자진은 할배의 손짓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할배도 심맥을 건드린 것은 맞지만 그녀처럼 날카로운 진기가 아니라 아주 부드러워 살살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었다.
“으음!”
천멸도주는 할배의 누런 이를 마지막으로 보면서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놓고 가라.”
묵직한 일갈과 함께 불청객이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힘깨나 쓰게 생긴 사람이다. 나이가 꽤 많은 것 같은데 워낙 몸이 좋아서 기껏해야 쉰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노인 부부에게는 새파란 애송이다. 그런데 반말지거리를 해대니 참을 수 있나.
노인 부부는 느닷없이 나타난 노인을 귀찮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뉘고?”
불청객은 노인 부부를 무시하고 태연히 천멸도주를 향해 걸어갔다.
불청객은 몸만 장대한 게 아니었다. 기개(氣槪)도 태산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집채를 옮겨놓는 듯 진중했다.
“그놈 참…….”
어지간해서는 주먹부터 날리고 볼 할배지만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웃기는 말이지만 기도에서 눌린 것이다.
불청객은 천멸도주 앞에 이르렀다.
안아 들고 가려나? 아니다. 그는 태연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상처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노인 부부를 등 뒤에 세워두고, 무방비 상태로 가슴을 두르고 있는 백포부터 벗겨냈다.
“햐! 이거 살다 살다 별 괴상한 놈 다 보겠네. 야, 꼬마야. 그 여자 내버려 두고 가지 않으련?”
할망구도 선뜻 손을 쓰지 못했다.
명색이 유계의 마인이다. 유계에 몸이 묶여 있어서 그렇지, 자유로운 몸이었다면 한 지방의 패주 정도는 되고도 남았다. 진주언가(晋州彦家)? 그게 뭐 대단한가? 그 정도 가문은 코흘리개 시절에나 세우는 것이다.
한데도 불청객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손을 쓰지 못하다니 이 무슨 개망신인가.
“허허!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청하는 놈일세.”
할배가 공격을 할 생각이다.
그때, 불청객이 불쑥 말했다.
“나, 궁왕이다.”
할망구와 할배는 얼어붙었다.
이 시대 최강자 중의 한 명. 그들이 속해 있는 유계의 주공과 필적한다는 사내.
“구, 궁왕이 어찌 북무림에…….”
“너, 너 가짜지? 너…… 괜히 해본 말이지?”
불청객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는 품에서 금창약(金瘡藥)을 꺼내 상처에 바른 다음 깨끗한 붕대로 정성스레 가슴을 싸매주었다.
노인 부부는 서로 마주 보았다.
사실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천멸도주를 데려가거나 죽거나 어느 선택이든 해야 한다. 물론 선택은 천멸도주에게 달려 있었고,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자신들이 죽으면 다음 자가 나타난다.
끝없이, 끝없이…… 천멸도주를 유계에 잡아들이기 전까지는 싸움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도 근처 어딘가에서는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을 게다.
자신들이 죽으면 다른 자에게 연락을 취하고, 천멸도주를 데려가면 유계의 연락을 취할 자가 도끼눈을 뜨고 지켜볼 것이다.
한 번에 한 명씩, 부부일 경우에만 두 명이 연수합격을 허용한다. 진(陣)을 이뤄 공격하는 자들은 특별히 예외로 한다.
이것이 이번 출행(出行)에 내려진 제약사항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멸도주 정도는 진작에 꿰어차고도 남았으리라.
왜 그런 제약을 두었는지는 주공밖에 모른다.
추측컨대 유계의 마인들이 무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행동권한을 보장받는 과정에서 현 무림의 패자인 북검문과 남도문이 내건 조건이 아닌가 싶다.
이것도 황감하다. 전에는 아무도 무림을 활보하지 못했으니까. 기껏 사방천마가 남도문 조무래기 노릇을 한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헤! 궁왕이래도 좋고, 아니라도 좋은데…… 그 여자, 데려갈 거야, 놓고 갈 거야? 웬만하면 싸우기 싫어서 그래.”
할배가 솔직히 말해왔다.
“데려간다.”
“그래? 그럼 우리도 어쩔 수 없고.”
말은 곧 공격으로 이어졌다.
노인 부부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냅다 죽장과 손도끼를 날려왔다. 하나 그보다 먼저 허공을 가른 게 있었다.
쒜엑! 쒜엑!
“크윽!”
“헉!”
노인들은 원래 힘이 없는 건가?
바람 소리만 들렸는데 그들의 몸은 기름에 튀겨진 메뚜기처럼 펄쩍 뛰어오르더니 무려 사 장이나 날아가 떨어졌다.
가슴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궁왕이 쓰는 은형시는 아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화살이다. 한데 위력은 천하 강궁에 못지않는다.
불청객은 죽은 노부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멸도주를 안아 일으켰다.
스스슷!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정말 궁왕이었어.”
풀숲 한가운데서 개미 기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7장 호완아(好玩兒) ― 흥미 있다
1
진걸(陳傑)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주 간단했다.
동정호에 가서 문주를 만나뵙고 서신을 전하라는 것.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말할 필요도 없고 설명을 요구하는 명령도 아니었다.
문주를 뵙기 전까지는 절대 한눈팔지 마라.
목숨을 버릴지언정 서신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도중에 도적을 만나 서신을 빼앗길 지경에 이르면 차라리 서신을 없애 버려라.
이러한 세부사항은 열 번을 고쳐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진걸은 이러한 명령을 수행하기에 아주 적합했다. 그는 영악했고, 충성심도 높았다.
진걸은 마을을 빠져나와 부지런히 말을 몰았다.
아주 먼 길을 가야 한다. 문주가 있는 동정호까지는 죽을힘을 다해 가도 장장 보름이 소요된다.
진걸은 보름을 열흘로 앞당길 생각이었다.
“할 수 있어?”
진걸에게는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그는 어떠한 임무에도 항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라고. 그리고 임무를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