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68
268
‘말을 타는 건 관도(官道)에서만. 산은 절대 넘으면 안 되고…… 물길이 훨씬 빨라. 그러자면, 보자…… 영양(榮陽)까지 가서 배를 타면…… 반나절은 앞당기겠어.’
먼 길이다. 사람이 사는 세상인데 의외의 일이라고 왜 없을까. 변수는 왕왕 있다. 그렇기에 먼 앞날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생각은 하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보름을 열흘로 줄인다. 가능할까?
모른다. 하려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고, 지금은 반나절을 줄이는 데 성공할 것 같다. 내일과 모레 사이에 또 반나절을 줄이면 하루가 줄어들고…… 그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있는 데서 이뤄가다 보면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곤 했다.
이번에도 이뤄낼 수 있으리라.
한데 마을을 벗어나기 무섭게 낯선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관도 옆에 앉아 있다. 먼 길을 온 사람처럼 온몸에 먼지가 수북하게 얹혀 있다.
‘쉬고 있나?’
쉬는 것 같지는 않다. 쉬는 사람 같으면 으레 신발을 벗어 터는데, 이 사람은 그냥 앉아만 있다. 그럴 수도 있다. 신발을 털지 않는다고 꼭 쉬는 게 아니란 법은 없다.
진걸은 말의 속도를 늦췄다.
괜히 먼지라도 휘날려서 시빗거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촌각(寸刻)을 아껴야 할 때다.
다각! 다각……!
말이 사내 옆을 지나갔다.
‘제발!’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한데,
“이봐.”
사내가 기분 나쁘게 말을 걸어왔다.
제길! 제길! 제길이다!
진걸은 못 들은 척하고 말을 몰았다.
그의 이목은 온통 낯선 인물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할까?
“야! 귀머거리냐! 사람이 부르는데 안 들려?”
순간적으로 갈등이 일어난다.
그냥 냅다 말채찍을 가해 달려나갈까, 말을 세우고 무슨 일인지 알아볼까.
진걸은 달려나가는 쪽을 택했다. 낯선 자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거니와 아무리 미숙한 자가 보더라도 시비를 걸어오는 게 분명하니 상대할 가치가 없다.
“이럇!”
힘차게 박차를 가했다. 순간,
쒜엑!
날카로운 경풍이 일어난다 싶더니 등 뒤로 낯선 자의 손길이 느껴졌다.
“왜, 왜 이러…….”
신형을 날려 진걸의 등 뒤로 올라탄 사내는 진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서신 좀 보자.”
“예? 무슨 말씀…….”
“내가 뒤져서 볼까, 그냥 보여줄래?”
갑자기 사내에게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씻지 않은 사람에게서나 맡을 수 있는 고린내다.
비위가 뒤틀린다. 토악질이 치솟는다.
‘개…… 방!’
이 세상에 이런 냄새를 풍기는 사람은 개방도밖에 없다.
“어, 어르신! 왜 이러시는…….”
“자식, 참 말 많네. 서신 좀 잠깐 훑어보면 어디가 덧나냐?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맞고 보여줄래, 그냥 보여줄래?”
“제겐 서신 같은 게…….”
빠악!
뒤통수에서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
“너, 매 맞는 법 배웠니?”
“예?”
“난 때리는 법을 배웠어. 매 맞는 법을 배운 놈은 조금 버티겠지만 결국은 안 돼. 때려봐서 안다니까. 결국은 줄줄 토해내게 되어 있어. 한데 넌 매 맞는 법조차 배우지 않은 것 같은데, 견딜 수 있겠어?”
“…….”
“줘. 읽어만 보고 돌려줄게.”
진걸에게는 낯선 사내를 떼어놓을 힘이 없었다. 그는 하오문도 중에서도 분타주의 지휘를 받는 하급 무인에 지나지 않는다. 한눈에 봐도 고수인 개방도와 맞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더욱이 그가 말 위에 올라타는 한 수가 진걸로 하여금 잔뜩 주눅 들게 만들었다.
“저…… 사실은…….”
“뭔데?”
“전 미끼용으로…… 서신은 평옥(平玉)이 가졌는데…….”
“평옥?”
“네. 지금 간성(干城)으로 가고 있는데요.”
“그렇구나. 알았어. 이제 말은 그만 하고 서신 좀 보자.”
“네? 방금…….”
“네가 서신을 가져간다고 말해준 사람이 평옥이야. 그리고 이놈아, 알려면 똑바로 알아라. 평옥 그놈은 간성이 아니고 죽산(竹山)으로 향하다 개울물에 코 박았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진걸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자는 거머리다. 어떤 수로도 떼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웬만한 사실은 알고 있지 않은가. 혹시나 하여 평옥의 이름만은 사실대로 말했는데 단번에 알아챘다.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한 자다. 속일 방도가 없다.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그럼 누가 가져갔지? 정말 전 안 가졌다니까요.”
따악!
뒤통수에서 또 불이 일었다.
이번에는 정말 아팠다. 머리가 빠개지는 정도가 아니라 말고삐를 놓고 푹 꼬꾸라질 정도로 타격이 컸다.
“말로 해서는 안 될 놈이군.”
사내는 진걸을 말 위에 엎드리게 한 다음, 허리춤을 풀었다.
“뭐, 뭘 하시려고…….”
“똥구녕 파내려고 그런다. 내 참 더러워서. 하고많은 곳 중에 똥구녕이라니. 똥구녕에 서신 넣어가지고 다니는 놈들은 네놈들밖에 없어. 그렇지?”
“저, 정말 이건…… 전 안 가졌…… 악!”
바지가 까지고 손가락이 쑥 들어왔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휘젓기 시작했다.
말 위에 앉아 있기도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다.
항문을 뒤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휘저어놨다. 살이 찢어져 피가 흘러도 멈추지 않았다.
더군다나 말이란 놈은 주인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힘차게 발길을 내딛었다.
미칠 노릇이다. 말이 한 걸음 떼어놓을 때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결국 사내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물러났다.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다. 웬만한 정보는 파악하고 있는지라 긴가민가하면서 지켜볼 것이다.
진걸은 한 손으로 항문을 움켜잡고 한 손으로는 말고삐를 잡은 채 뒤뚱뒤뚱 객잔으로 들어섰다.
명령은 보름에서 닷새를 줄이라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닷새를 늘려야 할 판이다.
진걸은 서슴없이 늘리는 쪽을 택했다.
기간 단축보다 안전이 먼저다.
“이봐, 방 있나?”
“걸음이 왜 그렇소?”
“오다가 어떤 미친놈을 만나서 엉덩이를 까였어. 아이구! 내 별 미친놈을 다 만나가지고는. 이보게, 어서 방으로 안내해 주고…… 의원 좀 불러주게. 아이구, 엉덩이야!”
똥구녕이라…… 맞다. 서신은 똥구녕 속에 있다. 기름종이에 잘 싸서 자신의 항문이 아니라 말의 똥구녕 속에 넣어두었다.
말이 큰일을 볼 때마다 악취나는 분더미를 뒤적여야 하는 고충이 있지만 그보다 안전한 장소는 찾기 힘들다.
그놈이 아직도 지켜보고 있을까?
방문이 열리며 점소이가 들어섰다.
“음식 치울까요?”
“음. 치워주게. 음식이 아주 맛있어. 잘 먹었네.”
“헤헤! 저의 집 음식이야 알아줍죠. 이 맛을 못 잊어서 일부러 자고 가시는 분도 있습죠.”
점소이가 저녁상을 내갔다.
진걸은 귀를 기울였다.
“윽!”
짤막한 비명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그놈이 지켜보고 있다가 점소이를 낚아채 간 모양이다. 이곳이 하오문 분타 중 하나이니 무슨 연락이라도 취하는가 싶어서 닦달하는 것이겠지.
‘바보 같은 놈!’
진걸은 속으로 웃었다.
사람들은 종종 비밀스런 말은 서신이나 밀마(密碼)로 전한다고 생각한다. 천만에, 만만에다. 가장 비밀스런 말은 말로 전하는 게 제일 상책이다.
개방도가 끼어들었다.
객잔에 들어서기 무섭게 주인장에게 말해놨다.
말의 배설물을 치울 때 서신이 들어 있나 살펴봐야 한다.
이 역시 말해놨다.
자신은 쉬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분타주가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게다. 그놈의 눈길이 아무리 매서워도 조직적으로 일을 분담하여 신속, 정확하게 처리하는 데는 당해내지 못한다.
하오문을 얕보지 마라. 지금까지도 강한 무인들 틈바구니에서 잘살아왔다.
“아함!”
진걸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후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침이 되었을 때, 진걸은 일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사방이 온통 걸인들투성이다.
마을 전체가 걸인들로 뒤덮여 발을 떼어놓을 수가 없다.
상황이 정반대로 역전되었다. 이제는 하오문도가 개방도들의 조직력에 밀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판국이다.
‘서신에 뭐가 적혀 있기에…….’
개방이 일개 분타 정도의 인원을 동원할 정도라면 상당히 중한 일임이 틀림없다.
호승심(好勝心)이 생긴다.
개방과는 정보를 두고 항상 앞뒤를 다퉈오던 관계이니 이번에 누가 이기는가 끝장을 보고 싶다.
한데 이번에도 진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제 그 사내가 객잔 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주인을 찾았다.
“일다경의 시간을 주겠는데…… 그 안에 서신을 내와.”
“서신이라뇨?”
“어제저녁에 지시를 받았는데…… 휴우! 나도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사안이 워낙 중요해서 말이야. 서신을 끝내 감출 요량이면 감추도록 하게. 일다경 후에 우린…… 휴우! 이곳을 불질러 버릴 생각이네. 자네를 비롯해서 이곳에 있는 투숙객 모두, 짐승은 말을 비롯해서 개, 고양이까지 모두.”
“부, 불을 질러요? 이게 무슨 행팹니까!”
“보아하니 불을 질러야겠구만. 명복을 비네.”
사내는 두 손 모아 합장을 한 후 물러갔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명문정파인 개방이 이렇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서신 한 장이 일개 분타의 몰살로 이어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군다나 투숙객까지라니. 투숙객 중에는 무림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까지 모두 죽여 버린단 말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행패를 개방 같은 명문정파에서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괜히 해본 소릴 겁니다.”
“진짜 할 거네.”
진걸은 고계(高戒) 분타주의 말에 입을 쩍 벌렸다.
진짜라니! 정말 불을 지른단 말인가?
“저자가 누군지 아나?”
달리는 말 위에서 항문을 후벼 판 놈!
“호광(湖廣) 분타주야.”
“호, 호광!”
진걸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큰 거물이다.
분타주에도 급이 있다. 명칭은 같아도 모두 같은 처지가 아니다.
개방의 경우, 분타주는 삼결(三結) 제자들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성(省)을 아우르는 대규모의 분타까지 삼결에게 맡길 리 있나. 성은 총타(總陀)나 각 당의 당주와 버금가는 사람이 분타주를 맡는다.
말이 분타이지 성의 총타나 다름없다.
호광성(湖廣省) 분타주 역시 오결(五結)이다.
그의 허리춤을 자세히 봤어야 한다. 허리 매듭이 몇 개인지 살폈어야 한다.
겨우 일결(一結), 이결(二結)하고나 상대를 했던 진걸이 오결과 맞닥뜨렸으니 낭패를 당한 건 당연하다.
다행히 창피하지는 않게 되었다. 개방 오결에게 당했다고 하면 엉덩이를 파인 게 아니라 그보다 더한 치욕을 당했어도 분노가 강자인 오결에게 돌아간다. 진걸은 망신살이 뻗쳤지만 약자라는 이유로 동정을 받게 된다.
그 점은 잘됐지만……
오결이 명을 받았다고 했다. 누가 그에게 명을 내릴 수 있나. 칠결(七結) 장로(長老)나 팔결(八結) 후개, 최악으로는 구결(九結) 개방 용두방주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서, 서신을 내줄까요?”
진걸이 얼떨결에 말했다.
“그럼 자존심이 망가지잖아.”
고계 분타주는 타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죽자.”
“네?”
“재미있잖아. 그 서신을 준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마야예요.”
“마야!”
“전 무서워서 눈길도 마주치지 못했어요.”
“호걸이라던데?”
“아이구! 어찌나 무섭던지 오줌을 지릴 뻔했다니까요. 목소리가 꼭 귀신이 울부짖는 것 같아서…… 이구구!”
진걸은 그때 생각이 나는지 몸서리를 쳤다.
“마야라면 잘됐어. 마야와 문주님의 관계는 아주 돈독해. 후후후! 이제 우리 하오문이 무림에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일을 하게 되는군. 우린 그 선봉에 있는 거야. 우리 죽음이 하오문 번영의 단초가 되는 거라고.”
빌어먹을! 빌어먹을이다!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번영도 살아 있을 때 누리는 거지 죽으면 누가 알아주기나 한다더냐.
“분타주님, 기왕 죽을 바에는 금선탈각(金蟬脫殼)이 어떻습니까?”
지하 통로를 말한다.
분타주는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을걸. 입구에서 기다린다면 오도 가도 못해.”
“누가 나간답니까?”
“그럼?”
“안에서 불길이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요. 불길이 죽으면 이리로 다시 나오는 겁니다. 그럼 혹시 압니까? 기왕 죽을 거니까 해보자는 거지요.”
분타주의 눈빛이 반짝였다.
“진걸, 넌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놈이니까…… 꼭 문주님께 서신을 전해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걸은 단박에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분타주님!”
“시간이 없어. 어서 들어가!”
분타주는 술통 속에서 말똥이 묻은 기름종이를 꺼내 진걸에게 안겨주었다.
꽈앙! 꾸구구구궁!
커다란 폭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흙더미도 마구 쏟아졌다. 토굴이 완전히 붕괴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방 천지가 온통 흙더미로 가득했다.
‘이제 출구는 없어.’
개방도가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헛수고가 될 게다.
시간이 지나 아무도 나오지 않으면 호기심이 들어서겠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건 무너진 흙더미뿐이다. 재수 좋으면 추가 붕괴로 몇 놈쯤 황천으로 끌고 갈 게고.
객잔 쪽에도 화약을 매설했다.
“누구든 들어오기만 하면 같이 죽는 거야. 난 손해 볼 게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