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69
269
지금쯤 객잔은 활활 불타고 있으리라.
분타주를 비롯하여 낯익은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사실 이곳 고계 분타와 그가 소속된 추음(秋陰) 분타와는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같은 하오문이지만 영역의 경계가 맞닿아 있는 곳은 으레 사소한 분쟁이 생기기 마련이고,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는 한쪽은 손해를 보게 된다.
고계 분타가 손해를 볼 때도 있었고, 추음 분타가 양보를 할 때도 있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다.
마방(馬房)이 운행권을 가지고 다투고, 기녀가 손님을 가지고 다투며, 수투(手偸)가 남의 영역에서 소매치기를 하다가 손목이 잘리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좋은 사이도 벌어지게 된다.
하나 모두 하오문 한 가족이다.
정작 목숨을 버려야 할 때, 그들은 진걸을 위해서 기꺼이 죽어줬다.
‘꼭…… 꼭…… 문주님께 전해 드려야 해.’
진걸은 땅속에서 나흘을 버텼다.
사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기력이 쇠진해질 때까지 무작정 누워 있었다.
준비해 온 음식이 떨어졌다. 물도 동이 났다.
더 앉아 있는다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매한가지다.
‘어디로 나가지?’
출구? 아니면 객잔?
모험을 해야 한다. 아직 개방도가 지키고 있을 건 자명하다. 하지만 우르르 몰려 있지는 않을 것 같고, 한두 명 정도 지키고 있을 게다.
‘객잔.’
그는 객잔을 택했다.
출구 쪽은 무너진 흙더미를 파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엄두가 안 난다. 개방도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을 테니 객잔 쪽을 지킬 공산이 크다.
입구는 돌로 가려져 있다. 진걸은 돌을 살짝 밀어젖혀 틈을 내며 바깥 상황을 살폈다.
객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검은 잿더미와 타다 남은 나무만 남아 있다. 황폐한 모습이다.
‘불을 지르다니!’
정말 불을 질렀다. 안에 있은 사람을 모두 죽였다. 대문파 개방도의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건 마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감시자가 있나 살폈다. 역시 있다. 걸인 두 명이 몸을 숨기고 폐허를 감시한다.
진걸은 기다렸다. 이제 시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신을 전해주는 게 관건이다.
어떤 방식으로 전해야 하나?
서신은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잡히는 날에는 꼼짝없이 뺏긴다. 이곳에 운집한 개방도의 면면으로 보면 발각되는 순간 잡힌다고 봐야 한다.
그는 서신을 뜯었다.
‘외워서 전해주면…….’
하나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뜰 뿐, 신음 한마디 흘릴 수 없었다.
서신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처음 그대로…… 백지였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배, 백지! 백지 때문에 분타주님이 죽음을! 백지 때문에!’
그가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살며시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누……!”
그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여는 것보다 투박한 손이 입을 틀어막는 게 조금 더 빨랐다.
“조용히 해라.”
고계 분타주의 음성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조용히 하고 따라와.”
진걸은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앞장서 가는 고계 분타주를 무작정 따라갈 수밖에.
2
현 무림에서 가장 광대하고 정확한 정보망을 가진 문파를 거론할 때면 으레 네 군데가 거론된다.
북검문의 천비대, 남도문의 추혼단, 그리고 개방과 하오문이다.
이들의 정보 수집 방법은 각기 다르다.
북검문과 남도문은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는 힘으로 정보를 얻어내고 있는 반면, 개방과 하오문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한 문도 수를 바탕으로 정보를 수집한다.
실제로 개방이나 하오문이나 문도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인원을 모르고 있다면 말 다 한 게 아닌가. 문주나 방주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문도가 한 번이라도 본 문도보다 훨씬 많은 실정이다.
그들은 온갖 곳에서 정보를 수집한다.
그들 중 한군데인 개방이 또 한군데인 하오문 분타를 불질러 버렸다.
중원이 발칵 뒤집힐 대사건이다.
하나 중원은 조용했다. 하다못해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도 오르지 못했다.
하오문의 위상이 극히 낮은 탓이다. 낮은 정도라면 차라리 낫다. 무림에서는 하오문을 하오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오문 패거리’라고 부른다.
거지들조차 무시하는 천민 중에 천민들이니 몇십 명쯤 맞아 죽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하오문주가 죽었다면 관심의 대상이 될지 몰라도 분타 하나 정도 불타 버린 것은 인근 마을 사람들 이야깃거리이지 무인의 이야깃거리는 아니다.
개방이 과감하게 불을 지른 이유도 그것이었다. 질러도 될 만하니까 지른 것이다.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쉿! 조용히 하고 따라와. 여기가 어디라고 큰 소리야.”
아직도 곳곳에 걸인들이 나뒹굴고 있다. 벌건 대낮인데도 누워서 빈둥거린다.
저런 놈들이 그래도 개방문도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세상이다.
진걸은 고계 분타주를 따라 이리저리 굽어진 골목길을 지나쳤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분타주가 좌우를 살피더니 작은 쪽문을 밀고 들어갔다.
진걸도 누가 볼세라 재빨리 따라 들어갔다.
궁금한 것이 참 많다. 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방에 앉아 있을 것 같으니까 묻고 싶어도 참는다.
“어디 계시냐?”
“매화(梅花) 방(房)에 계세요.”
분타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리에 익숙한지 이내 발길을 옮겼다.
진걸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냈다. 안으로 들어서기는 처음이지만 오고 가면서 몇 번 본 기억이 난다.
취월루(翠月樓).
기루이나 하오문에는 소속되어 있지 않은 고급 기루다.
기녀의 품격도 다르다. 천하일색에다가 온갖 가무(歌舞)에 능숙하며, 달변에 잠자리까지…… 사내들 혼을 빼놓는단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곳 기녀가 하루에 벌어들이는 수입을 하오문 기녀 열 명으로도 채우지 못한다고 하니 진걸 같은 사람은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다.
더군다나 매화방이란다. 사군자(四君子)를 본따서 만든 매란국죽(梅蘭菊竹) 네 개의 방은 특급 중에서도 특급이라 고관대작도 함부로 들어서지 못한다는 곳이다.
일 년에 서너 번밖에 사람 온기가 머물지 못한다는 곳인데…… 누가 그곳에 있단 말인가. 자신이나 분타주나 처지는 엇비슷한데 이런 곳을 들어서다니. 미쳤나?
매화방은 말이 방이지 전각(殿閣)이다.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잉어가 가득한 연못이 보인다. 연못 한가운데는 정자가 있고, 정자로 갈 수 있도록 동서남북 네 군데에 다리가 놓여 있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정자는 시작일 뿐이다.
정작 매화방은 삼십여 장 밖에 있는 이층 전각이다. 그곳에서부터 연못까지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사방에는 계절에 맞는 화초가 피어난다.
웬만한 사람은 이런 집에서 살아보지도 못하고 한평생을 마감하는데, 어떤 놈은 하루 유흥거리로 이런 곳을 빌린다니.
“데려왔습니다.”
분타주가 문밖에서 공손하게 말했다.
고계 분타주가 이토록 공손할 때도 있었나? 문주를 대하듯 허리를 절반이나 꺾다니.
“데리고 들어와.”
방 안에서 얼음장처럼 차디찬 음성이 들렸다.
진걸은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냈다. 치가 떨리는 음성을 듣고도 신분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병신이다.
“드, 들어가야 됩니까?”
진걸이 분타주의 옷깃을 잡아채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들어가기 싫다는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분타주가 속삭였다.
“누군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가는 줄 알아! 사지(四肢)가 찢기고 싶지 않거든 얌전히 들어와.”
마야!
단정한 이목구비에 단단한 몸을 가진 호남아다. 키도 훤칠하다. 음성이 조금 낮고 진중하다. 나쁘지 않다. 흠이라면 농담을 잘 못하는 것인데 무인치고 농담 잘하는 인간은 몇 되지 않으니 넘어가도 좋을 성싶다.
아무리 봐도 께름칙한 사람은 아니다. 한데 그의 앞에만 서면 오금이 저린다. 다리가 주책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음성까지 덜덜 떨려 나와 온갖 망신을 다 준다.
망신이고 뭐고 다 좋다. 그냥 빨리 이 자리나 벗어났으면 좋겠다.
“수고했다.”
“네, 네.”
진걸은 자신이 뭐를 수고했는지 알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것도 많다. 왜 백지 서신을 줬으며, 고계 분타주는 어떻게 해서 개방도의 눈길을 벗어날 수 있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하나 한마디도 묻지 못했다.
“개방 오결 앞에서 버텨낼 정도라면 담이 크군.”
“네, 네.”
“쓸개 없는 놈.”
“네, 네.”
진걸은 무조건 머리를 조아렸다.
사실 마야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다. 아니다. 지옥에 있는 악마가 달려나와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다. 재수없다. 불길하다.
“문주에게 뭘 하사받았나?”
“네, 네.”
“진걸!”
“네, 네?”
진걸은 마야가 뭘 물어왔다는 걸 깨달았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눈길을 접해야만 했다.
짜르르르르…….
독사의 눈빛이다. 마주 선 사람을 쥐로 만들고, 자신은 독사가 되는 그런 눈빛이다.
“뭐, 뭐를…… 무, 물으셨는…… 지, 지요?”
“문주에게 뭘 하사받았나?”
“네?”
“십비지공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들었고…….”
진걸은 마야가 무슨 말을 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냥 막연히 하오문에서 뭘 하느냐고 묻는 것 같아 하는 일을 대답했다.
“사, 사실 전…… 머리 회전이 빨라서…… 노름이나 하면 딱 알맞겠다고 해서…… 도박을…….”
“도곤(賭棍)이냐?”
“네, 네.”
“특기는?”
“죽패(竹牌)올습니다.”
“도박에서도 죽패라. 머리가 대단히 좋은가 보군.”
마야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 내렸다.
뱀이 기어가는 것 같다. 차디찬 냉혈동물이 온몸을 혀로 핥아대는 느낌이다.
사람이 이토록 소름 끼칠 수도 있을까?
“넌 지금부터 내 시종이야.”
“네, 네. 네?”
진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다.
여기저기 쏘다니며 남의 등도 쳐보고, 전낭도 훔쳐 봤지만 시종 노릇을 해보기는 처음이다.
마야가 처음 시킨 일은 발 씻을 물을 떠오라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내가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거야? 지놈이 뭔데 내게 이래라저래라야.”
할 수 없다. 해야 한다. 상관인 추음 분타주에게서 자신을 고계 분타로 전출시킨다는 전출서가 도착했고, 고계 분타주는 마야가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하라는 지시를 남겼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할 판이다.
“떠, 떠왔습니다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의 직업은 도곤이다. 숱한 사람을 만나봤다. 대부분 첫인상만 보고도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상태가 어떤지도 추측해 낼 수 있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도박판에서 자칫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치도곤당하기 십상이다. 재수없는 놈과 도박을 벌이면 기껏 따고도 자신의 돈까지 빼앗긴다.
사람을 잘못 보면 칼침 맞는 게 도곤들이다.
한데 마야만은 읽지 못하겠다. 그가 무섭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무서운지 어디가 무서운지 도무지 모르겠다. 용모가 거친 것도 아니고, 말투가 사나운 것도 아니고 무력으로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섭다는 생각만 든다.
“씻겨.”
“네?”
“꼭 말을 두 번 하게 하는군. 앞으로는 한 번에 행하도록. 발을 씻기도록 해.”
‘끄응!’
정말 못할 노릇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런 빌어먹을 놈!’ 하고 욕지거리가 나왔을 텐데, 속으로라도 욕은 못하겠다. 혹여 들을까 봐 겁난다.
진걸은 대야를 내려놓고 마야의 발을 들어 올렸다.
마야는 발을 들지 않았다. 힘을 주는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저…… 발을 씻겨 드리려면…….”
“잘 들어.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발을 들어서 대야에 넣기까지 반각이 걸려야 한다. 물을 떠서 발에 끼얹는 데는 일다경이 걸려야 하고, 발목부터 발끝까지 문지르는 데 최소한 일다경은 소요되어야 한다. 알아들었나?”
“허억! 네, 네, 네.”
진걸은 급히 대답했다.
마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칼로 사람을 쑤셔댄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등골이 오싹거리면서 소름이 돋는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 상상하기도 싫다.
진걸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기와 연배가 비슷한 사람의 발을 씻긴다는 치욕도 잊어버렸다. 속으로 욕하는 것도 잊었다.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도,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었다.
마야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는 머릿속이 텅 빈 백지 상태에서 두 손으로 마야의 발을 받쳐 들었다.
‘반각. 반각. 반각. 반각…….’
그냥 집어서 풍덩 넣으면 그만인데, 굳이 반각을 소요해야 하는 까닭이 뭘까?
모른다. 생각도 하지 않는다. 생각이라니, 이 무슨 호화스런 소리인가. 반각이란 시간을 지켜야 한다. 반각, 반각, 반각, 반각……
그의 손은 개미가 기어가는 것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진걸에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지옥에서 생활한 지 칠 주야째 되는 날,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처럼 하오문주가 나타났다.
“문주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문주가 이토록 반가웠던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