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72
272
하오문주가 기분 좋게 말했다.
“삼십육고질 정도는 될 겁니다.”
“에이, 그건 너무 쳐줬고.”
“후후후! 마음의 짐을 한 냥어치만 내려놓으면 건곤사괴와도 상대할 수 있을 텐데요.”
“정말인가?”
“문주께서 기르는 아이들이 있으시다니 언제 비무를 시켜보십시오. 하하하! 저놈은 들개입니다. 웬만해서는 꺾이지 않을 거예요.”
“자네…… 혹 저놈에게 하오문주를 맡기려는 심산인가?”
“호오! 그것도 괜찮겠네요. 문주님은 나이도 많으려니와…… 무엇보다 부려먹기가 힘들어서.”
“떽끼! 어른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두 사람은 한가하게 한담(閑談)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만나는 시간은 언제나 동일했다. 사시에 만나서 신시에 헤어졌다.
손에 물건을 들고 있기도 했다. 대부분이 비급이었지만 개방도가 쓰는 타구봉(打狗棒)을 들고 있기도 했다.
더욱 기막힌 것은 마야가 타구봉으로 몇 가지 동작을 취했는데, 틀림없이 타구십팔초(打狗十八招)였다.
개방도는 멀리서 볼 수밖에 없으니 단순히 흉내만 낸 것인지 진짜 초식을 펼친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아니, 그럴수록 더욱 진짜로 믿는다.
“이 짓도 이제 그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개방에서 손님이 온 모양이군.”
“칠결 정도 되는 자가 네 명이군요.”
“장…… 로 네 명! 어디? 그들이 어디 있는데?”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어찌 보고?”
하오문주는 마야의 말을 쫓아서 급히 물었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마야의 기력(氣力)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지고 있다. 그들이 담벼락 뒤에 꽁꽁 숨어 있어도 마야의 이목을 속이지는 못한다. 칠결? 눈으로 본 건 아니다. 하나 그들이 내뿜는 기도로 미루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남무림을 그렇게나 휘저어놓고 이제는 북무림까지……. 자네 이러다 천하에 발 디딜 곳이 없겠네.”
“벌써부터 없었습니다. 혈귀대주 그놈이 죽기 전부터 중원은 낯설었어요. 하하! 잊었습니까? 전 마인입니다.”
“그렇군. 잊고 있었어. 자네가 마인이란 걸. 허허허!”
마야와 하오문주는 양리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모른 척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애써 무심해지는 마음이다.
무공이 강한 호채마까지 만일을 염려해서 끌어들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무공조차 모르는 여인이 가까이 다가와서 어쩌자는 것인가.
“딱 한 번만…… 안아주실 수 없으신지.”
“물러가라.”
마야는 양리리에게 기파를 쏘아냈다.
진걸이 사시나무처럼 떨었고, 호광 분타주가 고개를 들지 못했던 기파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으니 양리리 같은 여인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감당할 수 없다.
“차, 차라리 죽이시지요!”
양리리가 털썩 무너지며 흐느껴 울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떤다. 무서워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런데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죽여달란다.
마야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놀랐다. 양리리의 마음에 감동했다는 것보다 기파가 통하지 않은 것에 놀랐다.
적멸주는 인간의 마음 중 공포심에 가장 큰 영향을 준다.
천적을 만났을 때 몸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강렬한 공포심을 안겨주어 행동까지 억제시킨다.
양리리도 공포심을 느꼈다. 진걸이나 개방 호광 분타주처럼 지옥을 그려낼 정도로 강렬한 공포를 맛봤다. 한데도 이겨냈다. 마음속에 사랑, 희망이라는 공포와는 정반대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건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사랑이 없다는 걸 말해준다.
나비의 일갈에 맥 못 추고 나가떨어진 게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미련이 없기 때문이다. 희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있는 척해왔다. 불가능은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모두 가식이다. 진짜였다면 적멸주가 통하지 않았다. 지금 양리리가 보여준 것처럼.
‘후후후! 적멸주의 천적은 따뜻함이던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하오문주도 참 불쌍하다.
그는 대범한 척한다. 세상 전체와 맞상대하고 있는 지금도 까짓것 한 번 붙어보자는 식으로 밀어붙인다. 겁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는 것처럼 대범함을 보였다.
아니다. 그는 무서워한다.
죽을까 봐 겁내고, 하오문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런 마음이 있기에 적멸주가 통했다.
“차 한 잔 줘.”
“네?”
양리리의 고개가 발딱 들려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 매화방에 들어온 이후, 정자에 한 번도 오르지 않았군. 오늘은 정자에서 차를 즐겨야겠어. 준비해 줘.”
“그럼요!”
양리리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가을이다.
나뭇잎이 노랗게 불게 물든다. 한 잎, 두 잎…… 벌써 잎을 떨구는 나무도 있다.
그래서일까? 연못 속에 노니는 잉어도 어쩐지 스산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입는 옷도 바뀌었다.
팔이 다 나오는 짧은 옷을 입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긴 소매 옷을 입고 있다.
이런 걸 모두 느끼지 못했다. 느낄 틈도 없었다.
마음에 사랑을 담아야 적멸주를 이겨낼 수 있다.
자신만의 전유물로 여겨왔던 적멸주가 타인의 입에서 토해진 이상은 공격뿐만이 아니라 방어까지 배워야 한다.
‘후후! 사랑이라…….’
말은 쉽다. 사랑은 무공을 배우는 것처럼 수십 번 반복 수련하면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열락에 들떠서 육체적인 향연을 즐긴다고 사랑이 싹트는 게 아니다.
세상에 희망을 갖고 있느냐 하는 물음에 기꺼이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마야에게는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당장 눈앞의 일을 처리하기도 힘든데, 먼 후일까지 살아남아 아내들과 알콩달콩 살아가는 꿈을 꾸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무인이라면 모두 입장이 같으리라.
무인에게는 모두 적멸주가 통한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 도산검림 속에서 산다? 한 발만 삐끗하면 저승행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 적멸주를 이겨낼 수 없다.
어쩌면 마령음이 좋은 해답일 수 있다.
높고 낮음을 반복하면 더 큰 충격을 주리라 생각했다. 한데 이게 잘못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낮음으로 충격을 받은 사람이 높음을 건네받으면 더 큰 충격을 받는 게 아니라 충격이 희석되는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한데 섞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복합적인 것보다 따로 분류하여 깊이를 추구해야 한다.
“차 준비했어요.”
양리리의 손은 곱다. 살결도 부드럽다. 이목구비는 또렷하며 눈은 총명으로 반짝인다.
기루의 여인들이 여염집 여인들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건 미녀들이라서가 아니다. 그녀들이 항시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고 가꾸기 때문이다.
곡식도 마찬가지다.
벼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정성을 쏟고 가꾸어야 탐스러운 곡식을 맺어준다.
가꾸어야 한다. 가꾸지 않으면 있는 것도 잃어버린다.
마야는 가꾸지 않았다. 있는 것을 그냥 쓰기만 했을 뿐, 더 나은 상태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근래 적멸주에 심취한 결과는 어떻던가. 이제 사람을 선별하여 기파를 쏘아낼 정도까지 이르렀다.
지금으로는 부족하다. 더 발전해야 한다.
“맛있군.”
“멋있어요.”
“……?”
“여기 오신 이후, 웃는 모습 처음 봐요. 멋있어요.”
“그거야 네 마음이 내게 있으니 그리 느끼는 것이겠지.”
“반대는 아닌가요? 그런 모습이 있었으니까 제 마음이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세요?”
마야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양리리, 내가 좋나?”
“네.”
양리리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넌 많은 깨우침을 주는 여자야.”
“그런가요. 전 모르겠는데……. 어쨌든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분 좋네요.”
“궁금해서 묻는 건데 언제부터 내게 관심을 둔 거야?”
“오면서부터요. 그때는 방금 살인을 한 사람 같았어요. 뭐랄까? 미친 황소처럼 씨근덕거린다고 해야 할까요? 기루에 오면서 그런 사람은 없거든요.”
“그랬군.”
눈길을 다시 이파리 날리는 나무에게 돌렸다.
사부에게서 무공을 전수받는 순간부터 한시도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은 말이 있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공짜도 없다. 횡재를 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갚아야 한다.
양리리에게서 깨달음을 많이 얻었다.
적멸주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았고, 마령음과 혼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능력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다. 무공을 수련하는 것만큼 능력 개발에 힘썼다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으리라.
양리리는 하늘이 내려준 보물인가.
“양리리.”
“네.”
양리리의 대답 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내게 몸을 줄 수 있나?”
“지금요?”
“언제든.”
“언제든…… 언제든…… 안아만 주시면…….”
양리리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기녀가 부끄러워한다? 내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진심이다. 기녀라고 여인이 아닌가. 사내와 몸을 섞어봤다고 정사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새 남자를 만났을 때, 기녀의 육신은 순백의 모습이 된다.
“합방을 하면 우리의 인연…… 끊을 수 없을 텐데.”
“그건 오히려 제가 바라는…….”
마야는 한참 동안 양리리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다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가야겠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양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따라 일어섰다. 놀란 표정이다.
“이곳은 너의 집. 그러니 객(客)인 내가 가야겠지.”
“네? 왜 갑자기!”
양리리가 급하게 다가와 옷소매를 잡았다.
마야는 양리리의 토끼처럼 맑은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마음이 진정이라면…… 이것만은 진실로 말해줬으면 하는데.”
“뭘요!”
양리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였다.
“열두 명의 잔접 중 한 명이 넌가?”
“…….”
말을 잊었다.
“아니면 나비의 하수인?”
양리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세상에 우연은 없어. 공짜도 없고. 너에게서 많은 깨우침이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우연이 아냐. 고계 분타주 같은 사람은 취월루 출입을 못해. 그런데도 서슴없이 날 이곳으로 데려왔다면 사전에 손을 써놨다는 뜻이겠지. 물론 고계 분타주는 아무것도 모를 테고.”
“…….”
양리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건 날 제이성으로 돌려보내는 것만큼이나 효과적이었어. 덕분에 잔접이 왜 내게 연연하는지 이유를 알았으니까.”
“그런가요.”
양리리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순순히 시인했다.
“내가 가진 능력은 선천적인 것, 잔접이 가진 건 노력으로 얻은 것. 다른 건 몰라도 능력이라는 것……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지. 내가 노력까지 하면 잔접이 보여준 한 수는 어린아이 장난 수준이 될 거야.”
“휴우!”
양리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마야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 게 몹시 힘든 모양이다.
“한데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아. 어떤 식으로든 각성시켜 줄 필요가 있었겠지. 제이성으로 쉽게 가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럼 콘과 수의 능력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준비라도 시키자. 아닌가?”
“이렇게 빨리 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너무 과소평가했군요.”
“잔접인가?”
“잔접은…… 자진하지 않아요. 어느 순간, 어느 세상에서 절 다시 만나면 전 잔접일 거예요. 하지만 이후 영원히 볼 수 없다면 잔접이 아녜요.”
잔접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잔접’의 일임을 알고 행한 사람은 반드시 죽음으로써 비밀을 지킨다. 객잔 노인이 그랬고, 흑조편복이 그랬다.
“어쨌든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군.”
양리리가 안겨준 깨우침에 배신으로 응답했다.
이럴 수밖에 없다. 잔접이 무엇 때문에 무공 수련을 독촉하는지 몰라도 좋은 뜻은 아니지 싶다.
멸신구관의 일만 해도 그렇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서 콘을 백치로 만들었다. 한 여인을 음탕한 여인으로 변신시켰다.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잔접이 적인지 아닌지는 후일에 밝혀지겠지만 적이 아니라고 해도 어깨를 나란히 할 부류는 아니다.
양리리는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 그것만은 믿을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적멸주에 무너졌을 게다.
하나 잔접의 명을 받고, 또는 자신의 뜻으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다가온 여인.
이별 외에 무엇이 더 남았겠는가.
마야는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양리리는 아무 소리 없이 떠나가는 사람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녀에게는 그를 잡을 힘이 없었다.
“놀라운 일이군. 적과 웃으며 지냈다니. 한데 꼭 적이라고 할 건 없지 않아? 적이 왜 네게 무공을 배워라 배워라 고사를 지내나?”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저 애, 널 좋아하는 건 진심이야.”
안다. 그러나 잔접과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니 그녀와의 연분도 여기서 그쳐야 한다.
“가긴 가야겠는데, 어디로 가지?”
제이성으로 간다. 잔접이 다가오길 기다리며 이 난리를 피웠는데, 잔접은 이미 와 있었다. 잔접을 기다리는 동안 잔접은 하고 싶은 일도 다 마쳤다.
여기서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 제이성에 가서 콘과 수를 목각인형 삼아 무공 수련을 한다. 앞으로 나아가자면 그에 걸맞은 무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건 좀 야비하지만 말이야. 취월루주를 추궁하면 잔접에 대해서 알아낼 게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