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75
275
놀라운 일은 절혼마녀와 다담선자에게서도 희망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들과는 한 이불을 덮고 잤으니 따로 깊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말은 언제든 들을 수 있었고, 말보다도 더 확실하게 말해주는 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들에게는 사랑이 있다. 하나 희망은 없다. 그나마 다행이다. 사랑이라도 있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한다.
“가아아아아…….”
일령이 충격을 받지 않을 정도로 아주 미미한 소리를 흘려냈다.
적멸주다.
순간, 일령은 혈유의 죽음을 떠올린 듯 얼굴빛이 핼쑥해졌다.
이 정도 적멸주에 얼굴빛까지 바뀔 정도라면 마음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녀는 호채마와 함께 행동하면서 사랑의 열병을 혼자 앓다가 혼자 접어야 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찾아온 사랑은 죽음 저편으로 돌려세워야 했다.
일령은 지금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게다.
‘불쌍한…….’
“됐어.”
마야는 일령의 수다를 중단시켰다.
‘이 여자는!’
뜻밖이다.
아무도 희망을 갖고 있지 않은데 오직 한 여자, 금연화만은 희망을 갖고 산다.
음정에 밝음이 묻어 나온다.
“가아아아…….”
금연화는 살짝 아미를 찡그렸다.
그뿐, 그녀는 살짝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호호호! 그런데 일령 조것이 절 꼬집는 거예요. 지금도 귀엽지만 그때는 얼마나 귀여웠다고요. 처음 봤을 때 아기 얼굴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가아아아아…….”
“휴우! 오늘 기분이 이상해요.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하기는 평소보다 열 배는 말을 많이 하니까요.”
원래부터 금연화는 명상(明相)이다. 따스하나 뜨겁지 않고 깨끗하고 맑으나 차지 않다.
그녀의 성정은 밝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유지할 줄은 전혀 몰랐다.
무엇이 그녀에게 희망을 주는가.
“됐소.”
마야는 금연화의 말도 중단시켰다.
실제로 마야 자신은 적멸주를 시전하지만 깊이 연구하지는 않았다. 한 번 듣고 몇 번 연습한 것만으로 시전이 가능했으니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었다.
잔접은 다르다. 그들은 적멸주를 창안한 사람 못지않게 깊이 연구했다. 장점은 물론이고 단점까지도 세세히 파악했다.
자, 단점이 나왔다. 가만 내버려 둘까? 그럴 사람은 없다. 어떻게든 보완을 했을 게다.
자신도 그럴 필요가 있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적멸주를 깰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금연화다.
난감한 노릇이다. 벗의 연인이기에 가장 어려운 사람인데. 마궁 궁주라 하여 반말을 하고, 복종을 요구한 것도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었는데.
“만약…… 이 싸움이 끝난다면,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다면 무엇을 할 생각이오?”
“딱히 생각해 보진 않았어요. 그런 것 생각하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전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 많은 싸움을 하고도 살아남았다니. 더 이상 바라는 건 없어요.”
“놈의 복수도 잊었소?”
“더 이상은 벅차요. 솔직히 제가 어떻게 궁왕 상대가 되겠어요. 그런데 궁왕도 흉수가 아니잖아요. 가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궁왕을 허수아비로 내세울 수 있는 사람요. 제가 뭘 더 어떻게 하겠어요.”
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연화는 여기서 그만둬야 할 사람이다. 일령도 마찬가지다. 이 두 여자는 더 이상의 싸움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마지못해 따라다닐 뿐이다.
“내 수련 상대가 되어주겠소?”
“제가요?”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그럴게요. 그 정도 못해 드리겠어요.”
금연화는 활짝 웃었다.
2
눈이 내린다.
기묘하게도 밖에는 눈이 내리는데 제이성은 완연히 봄 날씨다.
콘과 수는 이대로 행복하다.
그들은 무림을 잊었다. 살인도 잊었다. 콘의 살기가 수에게 통하지 않고, 수의 요염함이 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콘과 수는 둘 다 백치지만 상태는 전혀 다르다.
콘은 고금 무림사에 다시없을 도법을 지녔지만 사용하지 않는다. 수는 미쳐 날뛴다. 콘이 좋아서 죽다가도 돌연 마녀로 돌변하여 죽이려고 든다.
콘은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다. 단지 방어만. 절대로 수를 상하게 하는 일은 없다.
미쳐서 날뛸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깨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평화로웠다.
수가 미쳐서 날뛸 때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들 스스로 알아서 처리해 나갔다.
단, 마야가 나타나면 평화는 단번에 살벌함으로 바뀌었다.
콘은 굶주린 맹수가 먹이를 봤을 때처럼 으르렁거렸다.
수는 얌전했었다. 한데 콘과 같이 지내는 동안 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마야를 원수 대하듯 했다.
“가아아아…….”
적멸주를 써봤다. 그리고 적멸주를 파해하는 방법이 꼭 사랑과 희망을 가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콘과 수는 적멸주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콘은 이렇지 않았다. 강변 싸움에서 콘은 적멸주와 마령음을 연달아 얻어맞고 다 이긴 승리를 놓쳤다.
한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아예 고막이 막힌 사람 같아서 적멸주를 토해낸 마야가 무색해진다.
백치와 광인도 적멸주를 깬다.
덕이 높은 사람, 세상을 밝게 보는 사람, 백치와 광인, 그리고 귀머거리까지 적멸주를 깰 수 있는 사람은 무척 많다.
“역시.”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다.
멸신구관의 무공이 잔접의 것이라면, 그리고 콘을 마야의 무공 상대로 던져 준 것이라면 적멸주가 쉽게 먹혀들어서는 안 될 터이다.
콘의 정신을 백치로 만든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이 적멸주를 깨기 위함이었다.
순수히 본신무공으로 상대하라. 중원 제일의 도를 무공으로 이겨봐라.
잔접의 의도는 분명했다.
반면에 마야는 수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를 보면 색욕이 생긴다. 끌어안고 싶다. 탐스러운 가슴이며, 깊은 밀지(密地)를 마음껏 탐색해 보고 싶다.
수를 본 다음에는 욕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좌정 묵상을 할 정도였다.
수의 구혼음태는 적멸주와 같은 효능을 발휘했다. 덤벼들지 못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그런 콘과 수가 하나가 되었다.
마야의 비기는 모조리 봉쇄되었고, 콘과 수의 장기는 막을 틈도 없이 밀려든다.
파앗! 파아앗!
하루가 멀다 하고 깊은 상처가 생겼다.
가슴이 패이는가 하면 관자놀이를 스쳐 지나가는 아찔한 상황도 있었다.
녹광성초와 왕벌의 침으로 금강불괴(金剛不壞)에 가까운 몸이 되지 않았다면 진작 죽었을 게다. 명뇌인(明腦引)으로 고통을 망각시키지 않았다면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아누웠을 게다.
마야는 콘과 수를 매일 찾았다.
그들을 떼어놓을 필요가 없어서 한 방을 쓰게 했다.
콘을 삼실에 두고, 수를 사실에 두게 한 것은 지나친 정사가 화를 부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말이지만 콘과 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콘은 묘하게도 수의 구혼음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눈에는 수가 단순한 여인으로 보이는 듯했다.
“가아아아아…….”
오늘도 싸움을 먼저 건다. 통하지 않는 적멸주이지만 일단 토해내고 본다.
“타앗!”
우렁찬 고함과 함께 신형을 날린 건 그다음이다.
“이러다 죽어요.”
다담선자와 절혼마녀는 금창약과 새 붕대를 만드는 데 하루해를 다 보내야만 했다.
“모두들…….”
“다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다담선자가 눈을 곱게 흘기며 말했다.
호채마도 모두 잔접에 대한 말을 들었다. 그가 마야의 적멸주를 사용했으며, 절혼마녀의 귀적무 또한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말까지 빠짐없이 들었다.
사실이라면 공포스런 존재가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야와 절혼마녀는 최소한 그자에게는 결코 이길 수 없는 하수(下手)가 된 셈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의 무공을 빼다 박았는데, 다른 사람의 무공이라고 모를 리 없다.
모두들 자신의 무공을 자신이 파해하기 시작했다.
일견후즉파 마야는 거의 확실한 해답을 주었다. 그들의 무공을 어떻게 하면 깰 수 있는지 요체를 말해주었다.
마야는 언제든지 그들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마도의 혈염도를 깨기 위해서는 강력한 패력(覇力)이 필요하다.
절대감각이 소용없을 만큼 원거리에서부터 광풍을 일으키며 달려드는 게다.
절대감각이란 종이 한 장 차이의 승부에서 빛을 발한다. 폭풍우 속에서는 일반 검이나 매한가지가 된다.
철탑거추가 양손에 대부(大斧)를 들고 정신없이 몰아쳤다면 좋은 승부가 되었으리라.
요즘 마도는 패도(覇刀)를 수련한다.
누가 자신의 무공을 써왔을 때, 깨기 위해서.
자신도 같은 무공을 사용하여 능숙함으로 승부를 결하려는 생각은 잘못이다. 마야가 말하지 않았나. 잔접이 훨씬 능숙하게 사용한다고.
모두들 같은 상황이다.
모두 무공 수련에 여념이 없다.
“금 소저.”
다담선자와 절혼마녀가 상처를 씻고, 금창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동안 금연화는 마야의 맞은편에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그게 마야가 그녀에게 요구한 수련 상대였다.
“가아아아…….”
적멸주가 끊임없이 흘러나갔다.
금연화는 움찔거렸다. 무언가 기분 나쁜 벌레가 어깨에 앉은 것처럼 툭툭 옷을 털어내기도 했다.
“이런 게 정말 수련이 돼요?”
“난 지금도 공격하고 있소. 소저는 막고 있고. 우린 지금 비무를 하는 중인데, 소저가 조금 유리한 것 같소.”
적멸주는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봄이 왔다.
산이라고 해봐야 바위밖에 없지만 봄이 온 것은 안다.
겨우내 켜켜이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했고, 꽁꽁 얼어붙었던 폭포도 시원한 물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아아아…… 타앗!”
적멸주를 수에게 쏘아내며, 콘을 쳐나갔다.
콘의 도법은 변화막측하다. 어떤 때는 대도(大刀)를 사용하는 게 더 좋겠다 싶을 정도로 거력이 깃들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공격해 오는 것이 아름답게 보일 만큼 현란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콘의 도법은 여전히 빨랐다. 도와 목표점 간에 가장 빠른 거리를 쳐왔다.
콘의 도법이 자유분방하다고 느낀 건 그의 도를 직접 상대해야 하는 마야뿐이다.
까앙! 깡! 깡! 깡……!
단도와 검이 부딪쳤다. 손 한 번 뻗고, 숨 한 번 돌렸을 뿐인데 교합(交合)은 십여 회를 넘어섰다.
상처를 입지 않고 물러났다.
운 좋은가? 운 좋다. 다음날은 또 상처를 입었으니까.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상처를 입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여름이 어떻게 지났나?
가을이 온 것은 안다. 천멸도주와 다담선자가 예쁘다며 낙엽을 한 움큼이나 주워왔다.
“가아아아……!”
수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적멸주가 완벽하게 통한다. 백치가 공포를 느끼고 물러선다.
콘도 마찬가지다. 희한한 것은 적멸주를 얻어맞을수록 마야에 대한 광기에 가깝던 적의도 사라진다는 거다.
겨울이 돌아왔을 때, 마야는 콘의 수법을 모두 깨우쳤다.
초식이 몇 가지나 될까? 이백까지는 헤아렸는데, 그다음은 귀찮아서 세는 것을 포기했다. 또 묻자. 초식이 몇 가지나 될까? 답은 다르다. 초식이 있었나?
무(無)에서 시작하여 유(有)를 이뤘고, 다시 무(無)로 돌아왔다.
“내일은 바깥바람 좀 쐬자.”
제이성을 나가자는 말이다.
“그럼 우리 주루부터 가자고. 아이고! 이놈의 술배가 술 고프다고 난리야!”
시마가 제일 먼저 반색했다.
“흑혈마공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놈 대갈빡에 꼬챙이를 쑤셔 넣지.”
시마가 송곳같이 생긴 병기를 꺼내 보이며 히죽 웃었다.
흑혈마공을 깰 수 있는 비기는 점창파(點蒼派)의 사일검법(射日劍法) 중 사양무광(斜陽無光)을 꼬챙이로 펼치는 것이다.
소리가 없고, 빛이 없으며, 눈앞에서 신형이 어른거리는 순간 이마에 구멍이 뚫리는 초절정수법이다. 속(速)으로 독(毒)과 폭발을 모두 막아내니 꼭 흑혈마공을 깨뜨리기 위해서라기보다 한 가지쯤 비밀 수법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아주 좋은 공부였다.
“이곳은 금 소저가 지켜주고.”
“남으라고요? 이곳에요?”
“혼자서는 미칠 거야. 일령, 같이 남아.”
“왜요? 귀찮아요?”
일령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죽은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죽을 자리까지 찾는다.
“저 혼자 남을게요. 콘과 수. 아주 평화로워 보여요. 저 사람들은 이곳에서 나가면 안 되잖아요.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밥도 줘야 하고. 수발들 게 한두 가지인가요?”
“그러지.”
마야는 승낙했다.
그동안 금연화는 아주 좋은 수련 상대였다. 덕분에 적멸주의 성취가 들어올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아졌다. 하나 싸움에 흥미를 잃었으니 쉬는 것도 좋으리라.
일령 또한 억지로라도 남겨두려 했다.
그녀 역시 마음이 죽어버렸으니 억지로 떠밀리듯 무림에 나갈 필요가 무엇인가.
한데 죽을 자리를 찾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건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될 병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치료를 해야 할 병이다.
“오늘은 푹 자자고.”
마지막 말에는 마령음을 섞었다.
진기가 충만해지면서 활기를 얻으리라.
그래, 오늘은 쉬자. 내일부터는 신경이 바짝 곤두선 상태로 살아야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