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81
281
“아아! 그만, 그만. 난 싸우러 온 게 아니네.”
언장은마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그것참……. 사형제를 만나기에 그냥 돌아가도 되겠다 싶었는데, 참 묘한 사형제간이네.”
언장은마는 품속에서 작은 목갑 하나를 꺼냈다.
“궁주께서 말씀이야, 마도 상태를 보고는 자네 상태도 미루어 짐작하셨지.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멀쩡히 걸어간 놈인데 무슨 소리냐 싶었거든. 한데 궁주님 말이 맞네그려.”
언장은마가 너스레를 떨었다.
마야가 마궁이라는 정체불명의 궁(宮)을 만들고, 자신이 궁주 행세를 한다는 소문은 익히 들은 바다.
“그래서?”
“그래서는 뭔 그래서. 치료를 해주라고 날 보냈단 소리지. 치료받기 싫으면 말아. 나도 해주고 싶지 않으니까. 마도를 그렇게 만든 놈인데 뭐가 좋다고 이곳저곳 약을 발라주나.”
“괜찮으니 가라.”
곤륜취자는 몸을 돌렸다.
마야라는 자가 놀랍다. 그의 넉넉한 배포가 부럽다. 적을 치료해 주기 위해 사람까지 보내다니. 한데 사형은 어떤가. 상처가 중한 걸 봤으면서도 금창약 하나 내주지 않았다.
사람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마야 같은 자가 곤륜에 있었다면, 구파일방의 수장은 소림사가 아니라 곤륜파가 되었을 게다.
정도에는 사람이 없고, 마도에는 사람이 있다.
그게 안타까워서 몸을 돌린다.
“마도가 한마디 하던데.”
곤륜취자는 걸음을 멈췄다.
“꼭 승부를 내자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마도를 보면 마야를 알고, 마야를 보면 호채마가 보인다.
언장은마라는 이자만 해도 그렇다. 말은 치료해 주기 싫다면서 당연히 치료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마인이…… 아냐. 투사(鬪士). 투사일 뿐이야.’
곤륜취자는 털썩 주저앉았다. 검을 내려놓고 두 발을 쭉 뻗은 뒤에, 두 팔까지 큰대(大) 자로 활짝 열어젖혔다.
언장은마가 걸어오며 중얼거렸다.
“곤륜이 주인을 잘못 정해서 족히 반백 년은 침체한다더니…… 쯧!”
제3장 담색변(談色變) ― 말만 듣고도 얼굴빛이 달라지다
1
소림사(少林寺)는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峰) 북쪽 기슭에 위치한다.
복마동(伏魔洞)에서 태실산(太室山)을 감상하며 내려오다 보면 태실산이 아기를 보듬듯 동그랗게 감싼 듯한 산형(山形)이 나오는데, 이 산이 바로 소실봉이다.
갈림길에서 소림사로 들어서지 않고 내처 태실산을 따라 걸으면, 소실봉 우측을 따라 흐르는 소림하(少林河)를 만난다.
소림하를 따라 쭉 내려오면 왼쪽에 회선사(會善寺)가 나타나며, 이를 지나쳐 계속 걸으면 태실산으로 들어서는 길이, 또 그 아래로는 남쪽에서 소실봉으로 들어서는 관도와 만난다.
소실봉 남쪽 기슭에는 연화사(蓮花寺)가 있으며, 이 역시 상당한 불력(佛歷)을 자랑한다.
해시(亥時).
만물이 잠을 청하는 시간이다. 산의 밤은 더욱 짙어서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이 시간,
쉬익!
누군가 날렵한 신형으로 산길을 쏘아갔다.
잠시 후 또 한 명의 인영이 날렵하게 산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연화사다.
“아미타불!”
고요함을 깨고 창노하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음성이 들린 것은 한밤중인 자시(子時)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별래무양하셨는지요?”
노승은 합장배례를 했다.
“허허! 대사(大師)께서는 어찌 나이를 거꾸로 드시는 게요. 내, 노안(老眼)이 든 건지 방장께서 젊어지신 건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 수 아래 배분인 줄 알겠소이다. 허허!”
“허허! 그렇게 보아주시니 고마울 뿐이군요. 아미타불.”
연화사에 모인 사람들은 허물없이 한담을 주고받았다.
늦은 시각, 은밀하게 모인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누는 말도 은밀해야 한다. 하지만 회동은 은밀하게 했지만 거칠 것은 없다는 투였다.
그렇다. 당금 무림에서 이들을 어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파일방의 장로들.
이 자리에 모인 열 명은 가히 이 시대 최고수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들은 장문인의 권한을 전격 위임받은 상태다.
거칠 것이 없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만도 획기적인 역사가 될 게다.
원래는 장문인들이 모였어야 한다. 하나 장문인들은 가급적이면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회동 사실이 유출되고, 악의를 품은 자가 사실을 접한다면 자칫 몰살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림은 무공만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온갖 암계와 술수가 난무하는 곳이다. 생존에 필요한 것이 십(十)이라면 무공이 차지하는 비중은 삼(三)밖에 되지 않는 것이 무림이다.
해서 구파일방의 공론을 모아야 되는 자리에는 장문인의 권한을 전격 위임받은 장로(長老)나 부문주(副門主) 혹은 장문인의 친인척이 대신 참석한다.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먼 길들 오셨소만, 이 회합은 축시(丑時) 전에 끝내야만 하오이다. 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소이다.”
차 한 잔 대접하지 않는 회합이었다.
“노화자(老化子)가 먼저 말씀드리겠소이다.”
소림승의 말을 받아 개방에서 온 걸개가 입을 열었다.
“본 개방은…… 북검문주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소이다.”
“으음!”
누군가 침음을 터뜨렸다.
이미 예상했던 사항이다. 북검문주가 실종되지 않았다면 북검문이 이토록 나약할 리 없다.
수장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파의 뿌리를 뒤흔든다.
“둘째, 마야의 졸개들이 상상외로 강합디다. 이는 곤륜에서 말씀해 주실 거외다.”
도복을 입은 도인이 바로 말을 받았다.
“이미 소문을 들으셨겠지만 본 파의 곤륜취자께서 검을 드셨소이다. 그 결과, 양패구상(兩敗俱傷). 엄밀히 말하면 양패동사(兩敗同死)가 맞을 겁니다. 상대는 마도. 선광마무(仙光魔舞), 도혈검착(刀血劍鑿), 노독소수(老毒小手), 마은서은(魔隱鼠隱) 중에 도혈이었소이다.”
개방 걸개가 곤륜 도인의 말을 이었다.
“그 후로 마도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하나, 곤륜취자의 모습 또한 볼 수 없으니 둘 다 한동안 무림에 나설 수 없는 중상을 입었다고 봐야 할 것이고…….”
이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새삼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인 몇 명 때려잡는 데 도대체 얼마나 희생을 치러야 하나. 다른 문파를 앞세우고 뒤에서 지켜보는 게 상책 중에 상책인데, 자칫 비겁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터이다. 그렇다고 앞장서 달려나갔다가는 떼죽음을 면치 못한다.
마도의 실력으로 가늠하건대 호채마를 몰살시키려면 적어도 문파 전체의 사활을 걸어야 한다.
앞장설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묘한 상황이다.
“이대로는 무림 동도들을 대할 면목이 없으니 조만간 행동을 취하기는 해야 할 텐데…….”
공동파다.
소림승이 다시 한 번 앞으로 나섰다.
“아미타불! 먼저 언급했듯이 이 자리는 고민이나 숙고를 하는 자리가 아니올시다. 축시래야 앞으로 반 시진도 안 남았으니 중언부언할 시간도 없소이다. 해서…… 본사(本寺)는 북검문이 나서줄 것을 통첩할 생각이외다.”
통첩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어떤 강도로 하느냐가 문제다.
“거두절미하고, 본사는 파맹서(破盟書)를 쓰고자 하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신지?”
“…….”
쉽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놀라는 사람도 없었다. 연화사에 비밀회합을 하러 올 때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한 상태였다.
사실 그동안 구파일방은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다.
남도문으로 구심점을 모은 남무림에 대항해서 북검문에 생사여탈권을 맡긴 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세월이 장장 삼십 년이다.
현재에 와서는 구파일방의 명성은 땅에 묻혔고, 오직 북검문의 위세만 창천을 찌른다.
그렇다고 북검문이 딱히 큰일을 한 것도 없다.
장강을 수비하는 무인들은 각 문파에서 차출해 왔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서 통솔하는 역할만 한다. 애써서 무공을 전수시켜 놓으면 장강으로 끌고 가서 고기밥을 만들어 버린다.
구파일방은 갈수록 쇠퇴해졌고, 북검문의 위용은 높아만 갔다.
전비(戰費)만 해도 불만이 많다.
북검문은 북무림 곳곳에서 이권을 챙겨 막대한 은자를 벌어들인다. 그러면서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전비를 요구한다.
북검문은 풍족하다. 반면에 구파일방은 갈수록 쪼들려 간다.
그랬으면, 그랬으면 이번과 같은 일은 쉽게 처리했어야 하지 않은가. 구파일방이 모이기 전에 먼저 일을 처리해 놓고 통보를 해줬어야 할 것 아닌가.
마인이 북무림 정중앙에 턱하니 버티고 있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지켜만 보고 있으니.
이러려고 그 많은 제자를 죽이고, 있는 것 없는 것 탈탈 털어 전비로 내민 게 아니다.
남무림을 장강에서 막은 것은 인정하지만 안방 단속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어디 낯을 들고 다닐 수 있나.
아니다. 이 모든 게 핑계거리에 불과하다. 마야 사건을 빌미로 그동안 잃었던 구파일방의 위신을 다시 찾고 싶은 욕심이 든 게다. 북검문은 북검문대로 하나의 문파가 되면 된다. 그리고 구파일방은 동격(同格)의 입장에서 도울 건 돕고, 요구할 건 요구하면 된다.
파맹서라는 건 애당초 없다.
남무림과 싸우는 것이 급급하여 급조하듯 북검문으로 마음을 모았으니 세세한 사항이 준비되었을 리 없다.
강력한 무공을 지닌 무신들이 북검문에 있으니 그들이 앞장섰다.
한데 그게 장장 삼십 년이나 지속되고, 북검문이 맹주 역할을 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파맹서란 이제 북검문 뜻에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구파일방이 하나로 뭉쳐서 주도적으로 난국을 타개하겠다고 공언하면 그게 바로 파맹서가 된다.
연화사에 모인 사람들은 장문인들의 뜻을 알고 있다.
북검문주와 삼원로의 무공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강하다. 그들이 없다면 당장 남도문주와 만사무불통지, 그리고 궁왕을 막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속으로만 끙끙 앓아온 것인데…….
“저희 곤륜파는 검을 떼어놓고는 말할 수 없는 문파입니다.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검을 믿어야 하는 게 저희 숙명입니다. 소림사와 뜻을 같이하겠습니다.”
곤륜파에서 파견된 장로가 제일 먼저 찬성의 뜻을 밝혔다.
곤륜파는 선종(仙宗)이다. 선종현문(仙宗玄門)으로 도가(道家) 삼조(三祖)를 모신다.
시조(始祖)는 홍균(鴻鈞)이다. 홍균시조는 검조(劍祖)와 도조(道祖)를 둔다.
곤륜파가 도와 검을 병행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허허! 저희 무당도 같은 생각이오이다. 자소대전(紫 大殿)을 나설 때 목숨을 묻고 왔소이다.”
무당파(武當派)도 뜻을 같이했다.
구파일방은 뭉쳐야 한다. 구파일방 중 어느 문파도 북검문을 상대할 수 없다. 하나 대문파 열 개가 똘똘 뭉치면 북검문도 어찌하지 못한다.
파맹서를 쓰면 당장 삼원로의 압력이 쏟아질 게다.
남무림에 앞서서 북검문부터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당대 제일의 고수라는 삼원로를 꺾어야 한다. 무공을 사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북검문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무공을 사용한다면 맞상대해야 한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구파일방의 위신을 되찾으려면 그에 합당한 희생을 치러야 한다. 더 이상 북검문에 의지해서도 안 된다.
소림승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뜻이 다른 분, 계시오?”
침묵이다. 소림승을 제외한 승도속(僧道俗) 아홉 명은 중원이 발칵 뒤집힐 대반란에 동조했다.
***
남무림 사정은 북무림보다 더 나빴다.
남도문은 무인들의 신망을 잃어버렸다.
마야가 누군가? 삼천 무인을 몰살시킨 흉악한 자다. 그런 자를 잡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된통당했다.
남도문 외장 삼첨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천하의 지자들이 천 명이나 모였다는 야광은 밤하늘을 밝히는 반딧불보다 못한 존재였다.
무신이란 자들은 어떤가.
만사무불통지는 남만까지 쫓아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고, 궁왕은 장남이 죽고 막내 아들은 마인이 되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남도문주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사무불통지, 궁왕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겐가.
마야가 북무림으로 갔다. 남무림을 쑥대밭으로 휘저어놓고 당당히 장강을 넘어갔다.
이젠 어쩔 텐가. 떨어진 위신을 어디서 찾을 겐가.
“무림에 남도문만 있는 건 아니죠. 써야 할 때 쓰지 못하는 무공을 어디에 쓴답니까.”
괄괄한 음성이었다.
“개망신이란 개망신은 모조리 당한 거지요.”
차분한 음성이었다.
“사천제일룡은 좀 어떱니까? 충격이 컸을 텐데.”
“왜,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번 일에 충격을 많이 받아서 불철주야 연구만 거듭하고 있습니다. 콘과 마야가 동시에 덤벼도 찰나 만에 녹여 버릴 수 있는 독을 만들겠다고 결심이 대단합니다.”
“허허허! 그럴 겁니다. 사천제일룡은 그러고도 남을 인재지요. 당문은 정말로 전화위복이 된 것 같습니다.”
“광동(廣東)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