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87
287
무엇이 언장은마로 하여금 이토록 급하게 만들었을까?
그녀는 한참을 기어간 끝에 밝은 빛을 봤다. 저 멀리 조그만 구멍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
일단 모든 행동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조용하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세상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소리든 들렸어야 한다.
‘역시 잘못됐어.’
다담선자는 소리나지 않게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출구까지 기어갔다.
‘하나, 둘, 셋!’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그녀는 두 손으로 땅을 튕기며 몸을 띄웠다.
쉬익!
천와류(天渦流)가 유감없이 펼쳐졌다. 마도사에서 제일 빨랐던 십족신마의 독문신법이라 나는 새도 따라잡는다.
“다담이닷!”
누군가 그녀를 알아보고 외쳤다.
‘역시!’
불길하던 느낌이 현실로 나타났다.
“삼, 오, 칠! 격사(擊射)!”
쏴아아아!
눈앞에서 비가 내렸다. 쇠로 된 철우(鐵雨)다. 하늘부터 땅까지 빼곡히 들어차서 뚫고 나갈 길이 없다.
다담선자는 천근추(千斤墜)를 펼쳐 급히 내려섰다. 순간,
“이, 사, 육! 투망(投網)!”
또 다른 일갈과 함께 온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검은 투망이 하늘을 가리며 날아온다.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충(衝)!’
다담선자는 다시 허공을 재도약했다.
이번 도약에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그녀보다 한 발 앞서서 추명반이 허공을 날았다.
‘찢어라!’
간절히 원했다. 추명반이 철그물을 찢어주기를. 그래서 뚫고 나갈 공간이 마련되기를.
탁! 타탁!
추명반은 쇠그물에 거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실망이다. 뚫지 못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추명반이 주인의 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갓 잡아 올린 잉어처럼 쇠그물 주위에서 몇 번 푸덕거리더니 아교를 칠해놓은 것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자성(磁性)까지!’
잡히지 않을 수가 없다. 이자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호채마에 대해서 소상히 파악했다. 사용하는 무공은 물론이고 병기와 싸움에 임하는 자세, 성격까지 꿰뚫어 본다.
그에 반해 이쪽은 준비된 것이 없다.
“헛!”
다담선자는 헛바람을 토해내며 뒤로 쭉 물러섰다.
현재로서 달리 물러설 곳이 없다. 오직 뒤쪽뿐이다.
“잡았군.”
‘앗차!’
낯선 음성과 자책의 탄식이 터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삼, 오, 칠, 그리고 이, 사, 육. 일이 없다. 일은 순서상 가장 앞서 나와야 하는데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럼 어디에 있나.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바로 지금 자신이 물러서고 있는 곳이다.
촤아악!
땅속에서 불쑥 솟구친 쇠그물이 활짝 펼쳐졌다.
이제는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준비를 하고 나왔는데도 이 모양이니 정작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절혼마녀와 언장은마는 어땠겠는가.
그물이 온몸에 씌워졌다.
그녀를 사로잡은 사내들은 점혈이나 포박을 하지 않았다. 쇠그물에 걸린 그대로 질질 끌고 갔다.
돌부리에 채이고, 나뭇가지에 긁히고…… 그녀의 몸은 곧 엉망이 되어갔다.
이까짓 고통쯤이야 참지 못하랴. 하나 아이를 가진 절혼마녀가 이런 형극의 길을 겪었다니 마음이 찢어질 뿐이다.
거의 반 시진 정도는 질질 끌려간 것 같다.
옷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긁히고 패인 상처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말씀하신 대로 기다렸더니 이년이 기어나오더군요. 깔끔하게 잡아왔습니다.”
“잘했네. 진(陣)이 부족함은 없던가?”
“없었습니다. 이년은 몇 번 뛰지도 못하고 잡혔습니다. 선광(仙光)이라는 말도 다 허언 같습니다. 하하!”
“자만하지 말게. 뱀은 머리를 잘라야 죽이는 걸세.”
“마야 그놈도 조만간 잡힐 겁니다. 이 계집은…….”
“가둬두게.”
다담선자는 말하는 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냄새나는 발이 그녀의 머리를 짓밟고 있었다.
절혼마녀는 무사했다. 몰골은 형편없었지만 독기로 가득 찬 눈만은 여전히 살아서 꿈틀거렸다.
“언니, 괜찮아요?”
“너까지!”
절혼마녀는 심히 놀란 듯했다.
“괜찮은 거죠?”
일부러 ‘아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적에게 생포되어 있을 때, 협박 요인이 될 만한 요소는 가급적 제거해야 한다.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처럼 크게 써먹을 것도 없으리라.
“괜찮아.”
큰 걱정은 덜었다.
“은마는?”
“땅속으로 들어가려다가…….”
절혼마녀가 말끝을 흐렸다.
“죽었어요?”
“다리 하나, 팔 하나를 잃었어.”
사지 중 두 개를 잃었다. 땅속을 주 무대로 삼는 그에게는 치명적이다. 이건 아예 사망선고와 다름없지 않은가.
“잡혔어요?”
“아니.”
“다행이네요.”
다담선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장은마는 팔다리 잃은 것을 크게 생각하지 않을 게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 쇠를 다루는 기술이다. 명검 보도는 만들지 못하지만 특이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낸다. 땅을 쉽게 파기 위해서 만들어낸 지조(地爪)만 해도 중원 천지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다.
그는 살아나기만 하면 의수, 의족을 끼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타날 게다.
“놈들이 사용한 무공을 봤어요?”
절혼마녀는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상의를 살짝 벗어 어깨를 드러냈다.
어깨 부근에 손톱으로 찢긴 듯한 상처가 있다.
“백사지(白蛇指), 맞죠?”
“나도 그렇게 봤어.”
“도깨비에 홀린 것도 아니고…… 이자들 정체를 뭐라고 해야 돼요? 무림 군웅요?”
“글쎄…… 공동파만 나선 건 아닌 게 확실해.”
백사지는 공동파의 지법이다.
공동파 무인이 다수 보이더라도 공동파가 나섰다고 보기는 어렵다. 의기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병기를 들 수 있는 여건이니 특별히 한두 문파만 거론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 너무 쉽게 잡혔어요. 마치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도 그래. 두 수 만에 잡혔다면 말 다했지.”
“두 수요?”
“왜? 동생도?”
“네. 저도 두 수 만에 잡혔어요.”
준비해도 아주 단단히 준비한 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호채마가 여주성을 뒤흔들 거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으며, 절혼마녀가 언장은마와 함께 제이성으로 갈 거라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나.
“우리, 이상한 놈들에게 잡힌 것 같네요.”
다담선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늦은 밤, 야음을 뚫고 한 인영이 다가섰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임시 뇌옥을 지키던 자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다.
“접니다. 괜찮아요?”
나타난 사람은 진걸이었다.
“어떻게 여길!”
“후후! 아직도 뇌물이 통하네요. 탈출은 어렵지만, 다치신 곳이 없을까 염려되어서 왔습니다.”
“괜찮아요. 우릴 잡은 놈들이 누구예요?”
다담선자가 웃으며 물었다.
“글쎄, 그게…… 구파일방 놈들이 죄다 섞여 있어서 딱 어느 문파라고 짚어낼 수가 없네요.”
이미 예상했던 사실이다.
정말 무림 군웅들이 이런 일을 벌인 걸까? 북검문, 남도문이라면 모를까 무림 군웅들에게 그만한 결단력이 있을까?
“우선 이거라도 드십시오.”
진걸이 향긋한 냄새가 나는 환단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별것 아닙니다. 송백단(松柏丹)이라고, 허기를 달래주기도 하고 상처를 치료해 주기도 합니다. 저희 같은 놈들은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복용하죠.”
“고마워요.”
다담선자와 절혼마녀는 동시에 환단을 복용했다.
소나무의 향긋한 내음이 입 안 가득히 퍼진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환단은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좋은 환단이네요.”
“아주, 아주 좋은 환단이죠. 후후후!”
갑자기 진걸의 말투가 변했다. 뭐라고 할까? 약간의 적의를 담고 있다고나 할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다담선자의 말투도 싸늘하게 변했다.
“음양고(陰陽蠱)를 복용했으니 좋을 수밖에. 후후후! 내 너희들 볼 때마다 얼마나 욕심났는지 알아? 아주 좋게 됐어. 너희 둘을 한꺼번에 잡을 줄이야. 하하하! 기왕이면 꼬마 계집애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긴 하나쯤은 후일을 위해서 남겨두는 것도 좋지.”
“으음!”
“윽!”
절혼마녀와 다담선자는 거의 동시에 배를 움켜잡고 쓰러진 후 데굴데굴 굴렀다.
“후후후! 조금만 더 참아. 몸이 활활 타오를 테니까. 그때 이 서방님이 시원하게 갈증을 풀어줄게.”
진걸은 치솟는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는 듯 침을 꿀꺽 삼켰다.
“하아!”
“으음……!”
드디어 절혼마녀와 다담선자의 입에서 달콤한 향내가 풍기기 시작했다.
진걸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부리나케 열쇠를 꺼내 뇌옥 문을 연 다음 안으로 들어섰다.
“흐흐! 어느 년부터…….”
“하아!”
선택은 그가 하는 게 아니었다. 다담선자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그래, 너부터.”
순간이다. 다담선자의 손끝에서 번쩍! 하고 섬광이 터졌다.
“훗!”
진걸은 다급하게 몸을 피하려고 했다. 하나 추명반은 신법으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퍼억!
진걸의 가슴을 관통한 추명반이 빙글 돌더니 다담선자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어, 어떻게…… 추명반을 빼앗…….”
그는 추명반에 대해서 잘 몰랐다.
다담선자는 언제나 한 개만 사용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손질도 한 개만 했다. 사용한 것만 손질하면 되었으니까. 그래서 진걸은 추명반이 하나인 줄만 알았고, 군웅들에게도 그리 전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배은망덕한 놈! 마야가 네게 어떻게 해주었는데!”
절혼마녀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음양고, 음약 중에서도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것. 하나 다담선자나 절혼마녀에게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녀들의 몸은 반쯤은 만독불침(萬毒不侵)이었다.
이것 역시 진걸의 치명적인 실수다.
사천제일룡이 있었다면 당장 혈도부터 제압했을 게다.
“그래…… 봤자…… 헉! 마인…… 마도 놈…….”
“그래서 정도에 붙었나? 그럼, 우릴 때려잡으면 도둑놈을 정도로 인정해 준다더냐? 사기꾼을, 노름꾼을 고운 눈으로 봐준다더냐! 한심한 위인 같으니.”
절혼마녀의 마지막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숨이 끊어져 버린 진걸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진걸이 이상하다고 생각된 것은 그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다.
그는 탈출이 어렵다고 했다. 천만에! 마야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온다.
진걸이 혼자 왔다는 것은 마야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오문주가 위험해요!”
다담선자는 침울했다.
마야가 마음을 주고 아낀 사람들 중에서 아직까지 그를 등진 사람은 없었다.
진걸이 최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두 여자의 미색을 탐했기 때문이지만, 마야를 등진 것은 마도가 싫었기 때문이다. 마인으로 낙인찍혀 도망 다니며 사는 삶이 견딜 수 없었던 게다.
앞으로 하오문도들 중에서 이런 자는 부지기수로 나오리라.
어떤 자는 하오문주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걸이 그랬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차기 하오문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인물이지만 문주 직에서 큰 미래를 보지 못했다.
하오문주가 되어도 평생 쫓기며 사는 삶이라면, 하오문도보다 더 위험한 처지가 된다면 굳이 하오문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게다.
그는 마야를 팔아먹었다.
하오문주가 가만히 있을까? 그가 하오문주의 눈과 귀를 막을 수 있을까? 막을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정도무림에 하오문주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를 제거하는 거다.
“하오문주만 위험한 게 아냐. 우리도 위험해.”
절혼마녀가 천천히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공을 알고 있는 자와 싸우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다담선자와 절혼마녀는 이런 싸움법을 근 일 년 동안이나 수련해 왔다.
다담선자의 무공은 천와류에 이른 추명반.
파해 방법은 소림사의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에 있다. 정중동의 이치를 극한으로 펼치면 추명반을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피해낼 수 있다.
그럼 금강부동신법을 깰 수 있는 무공은 무엇인가.
아미파(峨嵋派)의 소청검법(少淸劍法)에 해답이 있다. 무극무변(無極無變)으로 내력 대결을 펼쳐야 한다.
움직임은 필요없다. 말 그대로 무극무변, 고정(固定)의 검을 써야 한다.
다담선자는 진걸의 검을 움켜잡았다.
절혼마녀는 파해 무공을 수련하지 않고, 탈백섭심공을 극성으로 깨우쳤다.
원래 그녀는 탈백섭심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낙화향 시절에 아무 무공이나 강하면 된다는 생각에 몸을 주고 배운 무공이지만,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에 떳떳하지 못했다.
마야가 이런 생각을 고쳐 주었다.
적멸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나 탈백섭심공이나 마찬가지이니 이왕 배운 것, 극성으로 수련해 내라고 다독여 주었다.
그녀는 수련했다.
지아비가 믿고 끌어주는데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