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9
29
일령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장이라도 일장을 터뜨려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표정이었다.
“괜히 시비 걸지 말아줘. 그런 것 때문에 온 게 아니니까. 아침에 나누는 말, 본의 아니게 들었어요. 이쪽 벽은 있으나 마나 해서.”
여인이 정색하며 금연화를 쳐다봤다.
“저희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알 건 알아요. 세 분이 왜 단문협에 가려 하는지도 알죠. 아까 이란격석이라는 말도 나오던데, 그 말이 맞아요. 세 분이 무슨 일을 해도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마야를 끌어들이는 것만은 삼가세요.”
지금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단순한 충고가 아니라 경고다.
“무림에 마야라는 말만 흘러들어 가도 저 사람은 공적이 돼요. 저 사람은 마인이 아니라고 백 번을 우겨도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겠죠. 무조건 추살령이 떨어질 거예요. 알아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금연화가 딱 부러지게 말했다. 여인은 금연화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또 하나, 마야에게는 힘이 없어요. 몇몇 사람이 그를 따르니까 대단한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될 테지만, 사실은 아무런 힘도 없어요. 여러분을 데리고 여기까지 오면서 보여주었던 게 모두예요. 마도를 결집한다고요? 호호호! 삼십 년 동안이나 사냥당했는데 살아남은 사람이 있기나 하고요?”
거짓이 아니다. 여인의 말과 표정에서는 한 올의 거짓도 읽을 수 없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지만, 거짓이라고 해도 믿고 싶을 만큼 여인의 표정은 진지하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말을 듣다 보니 한 가지 불쾌한 점이 있더군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마치 악마라도 되는 듯이 말하던데……. 강간살인범이 있어요. 그는 죗값을 치러야죠. 하나 그를 숨겨준 부모도 강간살인범으로 매도해서 죽일 수는 없는 거예요.”
“동생,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절혼마녀가 선몽주에게 동생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말했다.
기녀들의 세계에서 언니, 동생 하는 것은 나이의 상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언니가 시마를 곱지 않게 본다는 것 알아요. 녹혈마공을 수련했기 때문이라죠?”
“무슨 말을 해도 어린아이를 잔혹하게 죽인 것만은 용서받지 못해.”
“언니가 봤나요?”
“뭐?”
“시마에게 물어봤나요?”
“…….”
“시마가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원정지기를 흡취했다면 주화입마에 걸리지 않았을 거예요. 잔혹한 방법이지만 수천, 수만 번의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방법이니까요.”
“그, 그럼?”
“시마는 마야에게 주화입마를 치료받고 있어요. 한 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삼 년 간격으로 찾아오죠. 어린아이 대신 원숭이 새끼를 사용한 결과예요. 아셨어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녜요.”
“그래도 마도는…… 절대감각을 유지시키기 위해 하루에 한 명은 꼭 죽여야 한다고…….”
일령이 급히 반박했다.
“그래, 마도는 혈염도를 수련했어. 그럼 지금도 매일 한 명씩은 죽여야 해. 오면서 봤겠네? 그가 사람을 몇 명이나 죽였어?”
“…….”
“마도의 옷을 벗겨보면 절대 감각을 어떻게 유지해 왔는지 알게 될 거야. 그는 사람을 죽이는 대신 자신의 몸을 썰었어. 세상에서 가장 상처가 많은 사람일 거야. 전신이 걸레가 되었으니까.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지. 혈염도를 수련했다는 이유 때문에.”
다담선자는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세 분도 조만간 마인으로 낙인찍힐 거예요. 살인강간범과 어울린 자는 무조건 살인강간범이 되는 세상이니까.”
우습다.
여인은 금연화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렸다.
마인이 싫다고 했다. 그러면서 도움을 받고 싶어한다. 몸 파는 기녀는 더러워하면서, 그녀들이 지어준 밥을 먹는다. 그들이 아니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면서 계속 투덜거리고 응석 부린다.
세 여인은 방문을 두들겼다. 판자 하나만 격해 있어서 얼굴을 보지 않고도 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지만 꼭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자 문짝이 이쪽 방과 저쪽 방을 구분짓는다. 천당과 지옥처럼 전혀 다른 세계가 문짝을 경계로 나뉘어져 있었다.
소립파가 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없다. 여인의 옷매무새가 몹시 흐트러져 있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보고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안해요. 아까는 너무 실례 많았어요. 이런 쪽으로는 문외한이라서. 아! 비하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요.”
여인은 방긋 웃었다. 하얀 박꽃 같은 이가 웃음 속에서 활짝 피어난다. 가지런하고 예쁘고…….
절혼마녀는 부산하게 생각했다.
이 정도의 미녀라면 소문이 나지 않을 리 없다. 장강 쪽에서 소문난 제일미녀라면 누굴까?
낙화향 퇴기들이 깔깔거리며 농지거리를 하던 말이 떠올랐다.
기녀이면서 웃음을 팔지 않고, 술을 따르지 않으며, 몸을 허락하지 않는 여자. 오직 다담(茶談)만 응하는 기이한 기녀라고 해서 다담선자(茶談仙子)라고도 불리는 기녀.
다담선자는 아닐 것 같다. 색(色)을 이토록 밝히는 여자가……. 그래도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어서 물어봤다.
‘그래, 맞아. 장강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럼 이 여자가…….’
“혹시 다담선자 아닌가요?”
“호호! 재미없게 단번에 알아맞히시네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낙화향의 마녀, 절혼마녀시죠?”
‘정말로 다담선자……?’
믿을 수 없다. 다담선자는 손님을 받지 않기로 유명한 기녀인데.
“호호호! 저야말로 재미없네요. 절혼마녀라는 별호는 신비에 가려져 있어야 재미있는데.”
“기녀이면서 웃음을 팔지 않고, 술을 따르지 않고, 몸을 허락하지 않으며 오직 다담만 즐긴다. 다담선자를 지칭하는 말인데…….”
절혼마녀의 말에 금연화와 일령은 놀란 토끼가 되었다.
“호호! 그런 다담선자가 색을 너무 밝힌다, 이거죠?”
“…….”
할 말이 없다. 막상 묻기는 했지만 남의 사생활이 아닌가.
“난 한 사람밖에 몰라요. 처녀를 준 것도 마야고, 선루를 맡고 있지만 마야 외에 다른 사람과 살을 맞댄 적은 없어요.”
“저, 정말요? 다, 다담만 즐기려면 다루를 운영하지 왜……?”
일령이 미안한 표정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직도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기녀이면서 몸을 허락하지 않는 여인이 있다니. 다담선자를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보지 않았나.
“마야가 원해서야.”
“예?”
“뭐어?”
세 여인이 거의 동시에 경악성을 토해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마야의 숨결 없이는 못 살아. 마야를 만나지 못했다면 사는 낙을 몰랐을 거야. 이런 일이면 어때? 마야가 원한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어제 일은 부부 사이의 일로 생각해 주면 고맙겠어. 마야를 욕하지도 말고.”
“…….”
아무도 말을 못했다.
혈귀대주의 죽음 때문에 복수를 결심한 금연화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담선자의 사랑도 대단하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자기 여자를 기녀로 만든 사내는 또 뭐란 말인가. 마야도 단물만 빨아먹고 몇 푼 은자에 팔아먹는 놈팡이였단 말인가.
“부부라면 정식……?”
절혼마녀가 물었다.
“웬걸요. 가끔 찾아주는 것만도 고맙죠. 그 이상은 꿈도 안 꿔요. 호호호! 언니가 어제 말했잖아요. 마야는 바람 같은 사람이라고. 그 말이 꼭 맞아요. 붙들어두려고 해도 붙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말이죠.”
“마야에게 당신 같은 여자가 많은가요?”
이번에는 금연화가 물었다.
“마야…… 잡을 수 없는 바람이지만 바람둥이는 아녜요. 제가 알기로는 저 혼자뿐. 모르죠. 워낙 말씀이 없으신 분이라 또 다른 여자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고요.”
착각일까? 말을 하는 다담선자의 얼굴에 광채가 어린다고 느꼈다. 세상에는 오로지 주기만 하는 사랑이 있다던데, 그런 것인가. 남녀 간의 사랑에 그런 사랑이 가능한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제 여자를…….”
여자를 팔아먹는 사내, 절혼마녀가 가장 혐오하는 사내 유형이다.
“마야가 선루를 맡기며 말했죠.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지’라고요. 그 말이면 전 족해요.”
알아들을 만하다. 다담선자가 기녀가 된 데는 모종의 사연이 있을 게다. 그것은 마야가 행하는 일과 연관이 있을 것이고.
세 여인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다담선자는 마야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여인이다.
염려하지 않아도 될 여인.
대단한 신뢰이지 않은가. 자하부의 금지옥엽인 금연화, 낙화향의 마녀인 절혼마녀도 그런 신뢰를 받지 못한다. 무공, 지모…… 모든 면에서 그녀들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다담선자는 신뢰를 받는다. 뛰어난 미색이니 지분거리는 자가 오죽 많을까. 더군다나 돈만 주면 품에 안을 수 있는 야화인 바에야. 때로는 돈으로, 때로는 힘으로, 또 권력으로 짓누르려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으리라.
다담선자는 여인의 몸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헤쳐 나왔다.
고절한 무공을 지녔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북무림이 인정하지 않는 무공을 소유했다면 차라리 지니지 않은 것만 못하다.
무공을 펼치는 즉시 북검문의 이목에 걸려들 터이고, 다담선자와 연관된 사람들은 대번에 주목받을 게다.
그랬다면 다담선자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도 없겠지.
무공을 펼쳐도 북검문의 이목에 걸려들지 않을 만큼 교묘하게. 무공을 지니지 않았다면 지모와 행동만으로 돈과 힘과 권력으로도 꺾지 못하는 야화라는 사실을 인식시켰다는 것이니, 어느 쪽으로 보든 뛰어난 여인이다.
선몽은 강릉에 정박했다.
이틀에 걸쳐서 주지육림에 푹 파묻혔던 손님들이 강릉 술맛을 보기 위해 하선했다.
선몽은 하루 동안 강릉에 머물다 하선했던 손님들을 다시 태운 후 적혈구로 돌아간다. 오늘 하루가 기녀들에게는 손님의 주머니를 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네요. 이제 막 만난 것 같은데 벌써 떠나실 때가 되셨다니.”
“섭섭하냐?”
“드릴 수 있는 건 다 드리려고 했는데 드릴 수 있는 게 워낙 없어서……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요?”
판자를 통해 소립파와 다담선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흥청거리던 손님들과 기녀는 모두 하선했다. 시종과 주자(廚子: 요리사)도 그들만의 즐거움을 찾아서 혹은 떨어진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뭍에 내렸다.
선몽에는 다담선자와 불청객들 외에는 남은 사람이 없다.
다담선자가 특별히 용채까지 건네주며 즐겁게 놀다가 오라고 했으니 해거름이 질 무렵에야 모습들을 비칠 게다.
“하선하지 않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되나?”
“알고 계셨어요? 네 명이요. 놀다 오라고 해도 가지 않네요. 어쩜! 눈짐작으로 지은 거라서 맞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꼭 맞네요.”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옷이야.”
“그래도 오늘 하루만 입어주세요.”
“그러지.”
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같은 여자로서 자존심이 상할 만큼 자신을 낮추고 있는 다담선자이지만 왠지 이 순간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 아닐까 싶다. 소립파가 떠난 순간부터 가장 고독한 여인이 되겠지만.
“네 명이라. 한두 명쯤은 만들어놓을 줄 알았지만 네 명이라니. 그대를 다 보지 못했군.”
“제 능력은 다 보셨어요. 제 마음을 조금 못 보셨을 뿐. 마야께서 원하시는 게 뭔지 알게 되니 죽을힘을 다하게 되더군요.”
“그런 것이었군.”
“지금 쓰시게요?”
“그래야겠어. 세 명을 추려서 단문협으로 보내. 자하령 일곱 명을 변복시켜서 단문협으로 보냈는데, 실수였던 것 같아.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라고 해.”
판자 너머로 말을 듣고 있던 세 여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럼 자하령들이 탈이라도 났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자하령을 아는 사람은 없다. 무림에서는 자하령이 있는 줄도 모른다. 그녀들이 어떤 무공을 지녔는지 용모는 어떤지, 모든 것이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
탈이라니!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코웃음 쳤을 일이지만 말한 당사자가 소립파이니 불안감이 가중된다.
“그런 일이라면 한 명만 보내도…….”
“세 명 모두 죽을 거야. 천랑대를 상대해서 살아나길 바라는 건 어렵지.”
“그렇군요. 그 일에 쓰시려는 거군요.”
“그대도 떠날 준비해. 선몽을 인계하고.”
“저…… 도 말인가요?”
다담선자의 음성에 잔잔한 흥분이 묻어 나왔다.
“선몽도 다칠 거야. 천비대가 선몽을 놓칠 가능성은 전무(全無). 기회를 잘 잡으라고 해. 조금이라도 빠르거나 늦게 도주하면 죽어. 그대에게는 친자매 같을 텐데, 살 수 있으면 살아야지.”
“단단히 일러놓을 게요.”
다담선자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찾아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사내의 사랑을 받고 싶은 여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할 수 있다는데 지옥이면 어떻고 가시밭길이면 어떤가. 기다림이 끝났는데…….
“여긴!”
선몽에 올라탄 후 처음으로 바깥을 본 세 여인은 입을 쩍 벌렸다.
강릉에 도착했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여기서부터는 강을 버리고 육지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도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했다. 소립파가 길을 안내해 주는 이상 여하한 일이 있어도 단문협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기가 막힌다.
온전한 강릉이다. 넓은 지역을 말하는 강릉이 아니라 정확하게 강릉이라는 도읍이다. 문제는 강릉이 강남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강북에 붙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때, 소립파는 강을 건너간 것이 아니라 되돌아왔단 말이 된다. 천비대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천비대가 출동시킨 전선들 사이를 뚫고. 그들이 펼쳐 놓은 그물망을 헤치고.
“말도…… 안 돼.”
금연화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휴우! 언제는 말이 됐고?”
절혼마녀도 기가 막혔지만 이유가 있겠지, 하고 생각하니 체념이 빨리 들었다.
“그럼…… 그럼 우린…… 계속 천비대의 추적을 피해서 도주해야 한단 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