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91
291
“지금이라도 바꿀 수 있어요.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니, 한 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일 수는 없지. 마의 하늘은 하나뿐이야. 유계가 되었든, 나 마야가 되었든. 승부를 낼 때가 되었어.”
이란격석(以卵擊石)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마도는 아직도 도를 쓰지 못한다. 쓸 수야 있지만 자신과 비등한 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두어 달은 정양해야 한다.
절혼마녀는 임신 중이다.
지금은 괜찮아도 두어 달만 지나면 배가 불러올 것이고, 싸움은 무리다.
마야, 수검, 시마, 다담선자, 일령, 그리고 사망혈인.
기껏 여섯 명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유계를 친단다.
아니, 그들은 칠 생각이 없었다. 워낙 전력 차이가 커서 엄두가 나지 않았을뿐더러, 유계가 신경을 건드릴 만한 도발도 해온 적이 없었다. 근래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유계는 자신들이 마도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마야는 자신이 마도를 추구할 뿐, 정점이라든지 하늘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저 마도의 일부일 뿐이다.
서로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니 충돌이 일어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기왕 피를 흘려야 한다면 정도의 피보다는 마도의 피를 흘리고 싶다.
사부가 마도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부가 원하는 것이 세상을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몰아넣는 것이라면 우선 마도부터 시작하련다. 사부가 그토록 추구하던 마도를 철저히 깨부술 생각이다.
“다담, 곡 부인께서 유계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같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해서 좋은 계획을 짜줘. 다담이 짠 계획대로 치고 나갈 거니까 아주 세밀해야 돼.”
“저도 같이할게요.”
양리리가 슬픈 눈으로 말했다.
그녀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의 진심을 왜 이리 몰라주냐고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했다.
“양 소저, 이 일은 장난이…….”
“흥! 리리의 능력도 모르면서 주둥이 나불대기는. 리리의 도움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니까 까불지 말고 고맙습니다, 인사나 넙죽해. 없는 것들이 꼭 있는 척한단 말이야.”
양리완이었다.
그녀는 다담선자와 절혼마녀를 아주 싫어했다. 뿐만 아니라 싫은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녀들만 없으면 마야는 양리리의 차지라고 생각하나 보다.
“야! 너 좀 나와봐!”
일령이 참지 못하고 불쑥 일어섰다.
스스스슷!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일령이 아니라 양리완이 선공을 펼쳤다. 마야의 심장을 털컥 내려앉게 한 의기살인을 전개했다.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데 고통은 찾아온다.
“계집! 어림없어!”
일령은 즉시 선유비조신법을 펼쳤다.
제이성에서 호채마는 많은 수련을 했다.
그중에 하나가 적멸주를 상대하는 방법이다.
마야로서는 제 살 깎아먹기에 다름없었지만 수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잔접이 적멸주를 구사하는 이상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속절없이 죽어갈 판이다.
마음속에 사랑과 희망이 있다면 적멸주는 물거품처럼 소멸된다.
굳이 수련이고 뭐고 할 필요가 없었다.
한데 호채마 중에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금연화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사랑은 있어도 희망은 없었다. 불투명한 미래가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마야는 적멸주 파해법을 모색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면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한다. 하면 고막을 막는다. 비록 들리지는 않지만 적멸주는 고막을 통해서 뇌를 제어하고, 제어된 뇌는 전신 기능을 약화시킨다. 심장은 예민해서 제일 먼저 반응이 오는 것이다.
고막을 차단한 후에는 진기의 흐름을 반으로 나누어 주로와 수로를 고루 사용한다.
주로는 타격을 받더라도 수로는 건재하다.
그렇다고 공격을 가해서는 안 된다.
상대는 귀적무를 절혼마녀보다 능숙하게 펼쳤다. 그만한 신법이라면 전력을 다해도 모자란데 절반의 진기만으로 공격한다는 건 자살 행위다.
신법을 펼치며 시간을 끈다.
단순히 시간을 끄는 게 아니다. 마야는 각자의 신법을 약간씩 손질해 주었다.
급간가중(級間加重)!
신법으로 진기를 유도해 내는 방법이다.
신형을 한 번 튕기면 진기가 전신에 유포된다. 두 번 튕기면 다시 유포되면서 먼저의 진기와 섞인다. 조금 더 강력해진다. 세 번 튕기면 새로 일어난 진기가 또 먼저의 진기와 섞인다. 전력을 다해 진기를 끌어올린 것과 같은 힘이 된다.
전신을 휘돈 진기가 다시 단전으로 돌아올 즈음에는 애초 쏟아낸 진기보다 세 배, 네 배 강해져 있다. 네 번째로 생성된 진기는 이 모든 힘을 가지고 튀어나간다.
파도가 끊임없이 너울지듯, 신법을 일으키고 있는 한은 진기가 고갈되지 않는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기력이 탈진하는 게 아니라 더욱 강해지니 만고에 다시없을 절학이다.
공격은 이때서야 이뤄진다.
일령은 길을 잃고 헤매는 불나방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승부는 이미 기운 듯했다. 양리완의 공격이 주효하게 먹혀들었고, 일령은 쓰러지는 일만 남은 듯했다.
“아무것도 아닌 게 꼴값…….”
양리완은 가늘게 흩어져 흐물거리던 안개가 하나로 뭉치는 듯한 환각을 보았다. 뭉친 안개는 화살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심장을 향해 쏘아져 왔다.
그녀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말을 끊고 헛바람을 내질렀다.
“헉!”
“어떻게 죽여줄까?”
눈앞에 일령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요악하게 웃었다. 자비를 잊은 악마의 얼굴이었다.
“여기 어때? 여길 터뜨려 줄까?”
일령은 쇄골 한가운데 있는 유부혈(兪府穴)을 살짝 짚었다.
“일령, 그만!”
마야가 제지했다.
일령은 듣지 않았다.
“이 계집은 한 번 크게 혼나봐야 돼요. 주둥이를 대패질해 버리든가. 말하는 것 보셨죠? 아예 위아래가 없는 계집이라니까요!”
“그만!”
일령이 손을 거두고 물러섰다. 하나 혈도를 터뜨리지 못한 게 못내 분한 듯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소저도…… 조심해 주시오.”
마야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게 고작이었다. 따끔하게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절혼마녀는 참을 수 없었다.
양리완의 태도는 호채마 사이에 분란거리로 작용할 소지가 컸다.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인데 보기만 하면 으르렁대니 어떻게 견디겠는가.
“양리리에게 관심있어요?”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깨가 뭉친 것 같아. 좀 주물러 줘.”
절혼마녀는 씨근덕거리면서도 어깨를 주물렀다.
“말해요. 양리리에게 관심있어요?”
“무슨 질문이 그래?”
“정말 관심있나 보네?”
“양리리는…… 날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어.”
“흥! 받아들이면 되겠네. 이미 한두 여자도 아닌데 뭐, 한 여자 더 받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러지 말고 좀 더 노력해서 아예 열 명 꽉꽉 채우지 그래요?”
“질투? 하하하! 질투는 태아에게 안 좋아.”
“그럼 신경 안 쓰게 해야지!”
“냉정하게 내치면 어디론가 숨겠지. 여기 있진 못할 거야. 한데 우린 지금 그녀가 꼭 필요해. 그녀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 다담, 도주, 그리고 당신. 세 여자만도 내겐 과해. 그녀의 마음은 그녀가 정리해야 되는데, 지금은 그게 어려워.”
남녀 간의 정분이란 아주 간단한 거다.
가까이 있으면 가까워지고, 멀리 있으면 멀어진다.
양리리가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는 뜻이다. 가까이 있으니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 것이고, 그러자니 정분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간다.
“그녀를 내쳤을 때, 돌아올 피해는 어느 정도죠?”
절혼마녀는 씨근덕거리며 마야 앞에 섰을 때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마야의 고충을 이해했다. 마야가 왜 아무것도 아닌 양리리를 중히 여기는지는 모르지만 옆에 둬야만 하는 사정이 있을 게다. 그리고 그 사정은 바로 호채마의 안위와 직결될 것이다.
“십 년이 걸릴 걸 일 년으로 앞당겨 줄 수 있는 여자야.”
어깨를 주무르는 손에 힘이 탁 풀렸다.
그 정도로 비중있다면 결코 내쳐서는 안 된다. 그녀가 눈꼴 시리게 구애를 해도 못 본 척해야 한다. 양리완이 독 오른 말을 풀풀 풍겨도 못 들은 척 해야 한다.
이건 매춘(賣春)이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랑을 용인하는 행위이니 매춘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대가가 너무 커서…… 호채마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커서, 마야는 고민한다.
알고 보니 문젯거리도 아니다.
잊었나? 절혼마녀가 낙화향 창기였다는 것을. 그녀는 이런 일을 처리하는 데는 이골이 난 지 오래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저에게 맡겨요.”
절혼마녀는 양리리를 만났다.
“쉽게 말할게. 나이가 한참 많으니 말도 놓고. 괜찮겠어?”
양리리의 눈빛에 총기가 돌았다.
그녀도 취월루를 운영해 본 경험이 있다. 많은 기녀들을 쥐락펴락했다. 뜻하지 않은 임신, 놈팡이 기둥서방…… 온갖 것들을 처리해 줘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여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고 할 때는 ‘떨어지라’는 말이 아니면 ‘잘해보자’는 말이다.
“괜찮고말고요. 저도 언니라고 부를게요.”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는데, 당분간 마야와 거리 좀 둬줄래?”
“네?”
양리리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도 되물었다.
전자다. 떨어지라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할 때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하면서 되묻는 여자를 보면 참 못난 여자라는 생각을 했었다. 한데 자신이 그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당분간 거리를 둬죠.”
절혼마녀는 잔인하게 잘라 말했다.
“저, 정말…… 안 되나요?”
“되든 안 되든 그것도 모르겠어. 사람 일을 어떻게 아나. 하지만 지금은 아냐. 지금은 오로지 유계를 치는 데 집중할 때야. 그러니 마야가 마음 편히 움직일 수 있게 놓아줘.”
“그럴게요.”
양리리는 풀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뭐라고 말하나. 알았다는 말밖에 무슨 말을 하나. 유계를 치는 데 집중하도록 신경 거슬리지 마라는데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절혼마녀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지금은 서로 부담이야. 중간에 장애가 있다는 걸 알면서 감정을 발전시킨다는 건 서로에게 괴로운 일이고. 그냥 편하게 지내자. 그러다 보면 네가 먼저 정리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랑이 깊어질 수도 있겠지. 그냥 편하게 지내.”
부담만 주지 말라는 이야기다.
마음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품어도 용납해 줄 테니, 겉으로만 내색하지 말란 소리다. 그러다 보면 마야와 그녀 간에 어떤 관계가 정립될 것이다.
남녀 간의 관계가 되었든, 오누이의 관계로 되든, 남남이 되든…….
“알았어요.”
양리리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양리리는 무인이 아니다. 무공을 사용할 줄도 모른다. 한데도 중년 부인의 제자라고 한다.
그녀는 무엇을 배운 것일까?
의문은 곧 풀렸다.
그녀는 길이 열 자에 이르는 중원(中原) 전도(全圖)에 거침없이 침을 꽂았다.
일다경, 이다경, 반 시진, 한 시진…….
시간이 흐를수록 침을 꽂는 시간도 더뎌졌다.
“몇 개 남았어?”
“일곱 개.”
양리완이 남아 있는 침을 헤아렸다.
“딱 맞네. 세 개 줘.”
양리완이 침을 건네주자 귀주성(貴州省) 상비령(象鼻嶺)에 한 개, 상비령 옆에 있는 반강하(盤江河)에 한 개, 그리고 동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신성소(新城所)에 한 개를 꽂았다.
“됐어요. 모두 사천이백마흔세 곳이에요.”
마야를 비롯해 지도를 바라보고 있던 호채마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원 전도를 펴놓고 침을 꽂기 시작할 때부터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지하, 어둠, 은막(銀幕) 등등 온갖 말로 표현되는 유계 마인들의 실체다.
유계의 무공은 무엇인가? 마인들의 수는 얼마나 되고, 어디에 숨어 있는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생존해 가고 있는가. 유계의 주공이란 자는 도대체 어떤 자인가.
유계를 말할 때면 언제나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의문이다.
양리리의 중원 전도에 해답이 있다.
그녀가 말했다.
“이곳이 유계 마인들이 있는 곳이에요. 모두 사천이백마흔세 곳. 각 장소마다 마인이 있고, 총인원은 일만 삼천구백칠십팔 명이에요. 여러분이 죽여야 할 숫자죠.”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는 게 아니라 더욱 크게 벌어진다.
이건 불가능한 싸움이다. 유계가 이토록 거대할 줄은 미처 몰랐다.
사실이라면…… 이게 사실이라면…… 유계는 북검문이나 남도문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유계 마인들이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들이 한군데에 모여 있다면,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들이 광풍노도(狂風怒濤)가 되어 중원을 휩쓸 걸 상상해 보라.
피, 죽음, 시신……
중원이 아비규환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물론 정도는 더 강하다. 유계의 인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으며, 마인들의 무공도 하나같이 절륜하다지만 중원 무인들의 힘 또한 만만치 않다. 인원이나 무공 면에서 마인들을 앞서면 앞섰지 뒤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