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292
292
그래도 싸움은 안 된다. 싸움이 일어나면 승자는 없고 패자만 존재하게 된다. 진 쪽은 몰살당하겠지만, 이긴 쪽 또한 향후 백 년 동안은 기치를 세우지 못할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너무도 거대한 힘이다. 거대한 세력이다.
“이…… 걸…… 우리 몇 명이 친다고?”
시마가 머릿속이 텅 빈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남은 네 개는 뭐요?”
마야가 아직 꽂지 않은 침 네 개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나는 유계의 주공.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꽂지 못했죠. 다른 두 개도 이름만 흘러 다닐 뿐, 존재는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는 만도비창(萬刀飛蒼)이라는 자인데 남도문주와 자웅을 결하기 위해 길러진 자라고 들었어요. 다른 한 명은 무검무봉(無劍無峰)이라고 불려요. 북검문주를 목표로 길러진 자인데, 이들 두 명은 주공도 마음대로 못한대요. 마지막 하나는 무심마(無心魔)라는 자인데, 유계의 머리라고 할 수 있죠.”
“허풍이지?”
시마가 못 믿겠다는 듯 말했다.
양리리는 대답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대답이 되었다. 백 마디 말보다도 더욱 현실성있게 와 닿는 대답이다.
“궁주, 제가 만멸폭을 너무 적게 만든 것 같습니다.”
사망혈인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는 만멸폭 백 개를 만들며 이 정도면 중원무림 전체와도 한바탕 싸움을 벌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중원 전도에 꽂힌 침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만멸폭 백 개로는 도저히 승산이 점쳐지지 않는다.
“중원을 동서남북 빠짐없이 훑어야 해요. 이건…… 그냥 구경만 하면서 돌아다녀도 이십 년은 걸리겠어요.”
다담선자도 싸움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
유계는 유람만 해도 이십 년이 걸리는 광대한 지역에 마인들을 고루 풀어놓았다.
심산유곡이나 고해절도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 틈에 섞여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살심(殺心)을 숨긴 채, 흉포한 마음을 감춘 채.
아니다. 유계의 마인들은 호채마와는 다르다. 호채마는 살인을 즐기지 않지만 유계는 쾌감을 얻기 위해서 살인을 한다.
그런 자들은 절대 살심을 감추지 못한다.
“이들이 있는 곳에는 살인이 밥 먹듯 일어나겠군.”
“그래요. 꽤 많이 일어났어요. 처참하게 찢겨 죽은 시신도 발견되었고, 중독사한 시신도 있었고…… 공통점이라면 흉수를 잡지 못했다는 거죠.”
“전부 다?”
절혼마녀가 물었다.
살인자를 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가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잡지 못했다는 건 납득할 수 없다.
“거의요. 더러 꼬리가 잡힌 경우도 있었는데, 알죠? 마인들의 습성.”
“꼬리 자르기.”
“누군가에게 의심을 산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죠.”
“각 성(省)별로 참살대(慘殺隊)가 있겠네.”
“맞았어요. 귀축마(鬼畜魔)라고 불리는 자들인데, 무공이 아주 강해요. 어떤 자든 꼬리가 드러났다 싶으면 가차없이 잘라 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죠.”
양리리는 유계에 관해서 사정이 밝았다.
캐묻지는 않았다. 잔접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아는 것도 많지 않겠나.
“마인들을 이렇게 풀어놓았다는 건…… 무심마라는 자, 병법에 정통한 자군요.”
다담선자가 말했다.
“그것도 맞았어요. 언니는 형세를 단번에 꿰뚫어 봤군요. 호호! 무심마는 천재 중에 천재예요. 북검문의 삼뇌보다 한 수 위라고 보면 될 거예요. 만사무불통지와 필적하려나?”
“흥! 별 볼일 없는 사람 명호를 또 듣네. 만사무불통지가 그렇게 잘났나? 우리한테 매번 깨지기만 한 사람인데 뭐가 잘났다고 그러지? 할배, 만사무불통지가 잘났어요?”
일령이 툭 쏘아붙였다.
그녀는 아직도 양리완을 크게 혼내주지 못한 게 앙금처럼 남아 있는 모양이다.
“만사무불통지의 머릿속은 자신밖에 몰라요.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날개 꺾인 병아리 신세와 같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항상 끝에서 웃었어요.”
양리리는 일령의 날선 창을 포근한 미소로 받았다.
“이건 참 묘해. 어찌 보면 각개격파(各個擊破)하기 딱 좋을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한날한시에 병기를 고쳐 잡고 들고 일어섰다 생각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중원무림은 전력의 삼 할이 깎여 나갈 것 같은데…….”
“맞았어요! 무심마가 노리는 게 그거예요. 정도무림 품 안에서 비수를 잡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거죠. 물론 북검문, 남도문도 이런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요.”
턱 밑에서 비수를 들이대고 있는데 손대지 못했다? 알고 있고, 칠 수 있는데 치지 못했다?
방치한 것과 치지 못한 것은 차이가 크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손대지 못한 이유가 뭔가?
양리리가 말했다.
“유계는 정보망이 꽤 깊어요. 각 문파마다 한 명씩은 간자가 숨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거예요.”
“그들이 문제군.”
“그래요.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유계에 역공당하기 십상이에요.”
시마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을 듣자 하니 유계가 한 수 위에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유계가 숨어 있는 까닭은 뭔고?”
“초반 선공은 유계가 유리하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역시 정도가 낫죠. 정도는 초반에 입을 막대한 피해를 저어해서 건드리지 않는 것이고, 유계는 몰살당할 게 뻔하기 때문에 싸우지 않는 거예요.”
상황이 이렇게 돌아간 데는 남도문과 북검문의 혈전도 한몫했다. 남무림과 북무림이 서로 싸우지만 않았어도 유계는 벌써 멸절당했을 게다.
남과 북이 날이면 날마다 서로를 할퀴고 있는 상황에서 유계까지 건드릴 수는 없을 터이다.
“일 년. 일 년 안에 끝낼 방도가 있소?”
마야가 물었다.
“북검문과 남도문의 협조를 받으면 돼요.”
양리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말은 쉽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어림없는 수작이다.
유계를 치자면 그전에 남무림과 북무림이 한시적일지라도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
여기에는 상당한 이해관계가 섞여 있다.
유계와의 싸움에서 양쪽이 모두 균등한 피해를 입는다면 문제가 없는데, 싸움이란 게 그렇지 않다. 어느 한쪽은 더 심하게 할퀴어진다.
남과 북은 먼저 자신들이 입을 상처를 생각할 게다. 그리고 상대보다 심하다고 생각되면 죽어도 협정 같은 건 안 한다.
남과 북 중 어느 한쪽이 더 심하게 손상되는 건 피치 못하니, 결국 협정이란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도 모두 북검문이나 남도문이 마야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전제하에서 생각한 거다.
실제로는 거기까지 가지도 않는다.
그들은 마야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싸울 수는 있지만 말은 안 된다. 마인과 협정, 교환, 거래 등등의 인상을 풍길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게 정도무림이다.
마야가 말했다.
“우리로서는 늙어 죽는 게 더 빠르겠어. 하니…… 다담, 방법을 모색해 봐. 양 소저의 머리를 최대로 활용하면 또 모르지, 어떤 방법이 나올지.”
제7장 량두제(兩頭擠) ― 양쪽에서 밀다
1
마야가 중년 부인을 찾아온 것은 중원 전도를 완성한 이틀 후였다.
“쌍둥이는 교감이 남다르다던데, 양 소저는 어떤지 궁금하군요.”
“어떤 교감을 말하는 거죠?”
“생과 사. 어느 한 사람이 죽으면 알아챌 수 있냐 하는 거요.”
“그건 모르죠. 누가 죽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누가 아프면 즉시 알아채곤 했어요. 몸은 물론이고 마음도. 한데 그건 왜 묻죠?”
중년 부인 대신 양리완이 뼈있는 말을 했다.
“쌍둥이에 영매까지. 그럼 교감 또한 남다르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거요.”
“남다르면 써먹을 데가 있나요?”
“있소. 양 소저, 나와 함께 여행 좀 다녀오겠소? 죽을지도 모르는 험난한 여행인데.”
양리리에게 말했다.
그녀는 즉시 대답했다.
“갈게요.”
세상에는 영매를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허풍이나 사기, 속임수, 또는 연극이라며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마야는 찾지도 않지만 무시하지도 않는다.
양리리나 양리완이나 그녀들이 지닌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는 못했다. 접신(接神)을 한다든가, 기파(氣波)로 공격하는 능력 같은 건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좋은 연락망이 된다.
양리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양리완이 느낄 터이고, 양리완에게 일이 생기면 양리리가 알게 될 터이다.
양리리만 데려가면 송택에 남겨둔 사람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시마와 수검, 그리고 사망혈인이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만에 하나 불상사가 생긴다면 즉시 알게 되리라.
그날 밤, 마야와 몇 여인이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수검은 중년 부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놓아주지도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대화라도 나누지.”
“말하면 할수록 그녀가 아냐.”
“아닌 건 알았잖아?”
“…….”
“멀거니 지켜보는 건 또 뭐야?”
“꼭 그녀 같아. 다시 살아온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볼을 꼬집어보곤 해. 꿈이 아닌가 싶어서. 말을 걸면 환상이 깨지니까 이대로가 좋아.”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나도. 다 잊어버린 줄 알았어.”
마도와 수검은 중년 부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중년 부인도 수검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사정을 듣고 난 후인지라 애틋한 눈길을 보내올 때도, 추억에 젖어 아련한 표정을 지을 때도 애써 담담함을 유지했다.
처음에는 말을 걸어왔었다.
예의없게 손목도 만지고, 볼을 쓰다듬기도 했다.
그녀는 평생 사내의 손길을 모르고 살아왔다.
사내가 싫다. 무조건 싫다. 사내의 체취도 싫고, 투박한 손길도 싫고, 거친 수염도 싫다.
사내는 싫었다.
평소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싸대기를 후려쳤을 게다. 수검 같은 자는 안중에도 없기 때문에 머리통을 부셔놨을지도 모른다.
싫은 느낌을 꾹 눌러 참았다.
마야가 내건 조건 때문이 아니라 죽은 아낙을 그리워하는 수검을 위해서였다.
어디까지 허락할까가 관건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손목 이상은 힘들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내, 그것도 눈에 차지도 않는 사내와 알몸으로 뒹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점은 수검이 알아서 물러나 주는 바람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해결했다.
눈길이 따라붙는 게 귀찮다. 하나 그 정도는 양해해 주기로 했다.
“느낌은?”
그녀는 불쑥 양리완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양리완이 태연히 대답했다.
“정말 대담한 자야. 유계에 대한 말을 듣고도 칠 생각을 하다니. 겁이 없는 건지, 무모한 건지.”
“전…… 어쩌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왜?”
“거침없이 나아가잖아요. 다른 사람 같으면 말만 들어도 손을 휘휘 내저었을 텐데, 누가 봐도 방법이 없는 곳에서 방법을 찾잖아요. 저런 사람은 드물어요.”
양리완이 마야를 극찬했다.
그녀들도 마야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양리리와 함께 험난한 여정을 한다는 것밖에는 모른다. 하나 그 여정이 도피가 아니라 공격을 위한 준비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유계의 진면모를 알았으면서도 싸우려고 한다. 왜? 싸운다고 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신경이나 집중해.”
“집중하고 말고 할 게 있나요, 그냥 느껴지는 건데.”
송택은 여전히 고요했다.
사망혈인은 하루에 한 번씩 담장을 따라 순찰을 돌았다. 매설된 화약이 잘못되지 않았나, 도화선을 쥐나 고양이가 건드리지 않았나 싶어서다.
마야가 없는 송택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
사망혈인이 설치한 폭약이라고 해봐야 일, 이차 공격만 간신히 막아낼 뿐이다. 운이 좋다면 삼차 공격까지는 막겠지만 사차부터는 무리다.
그다음부터는 온전히 무공만으로 싸워야 하는데,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남자 셋, 여자 셋이다.
남자로는 수검, 시마, 사망혈인이 싸울 수 있고, 여자로는 절혼마녀, 중년 부인, 양리완이 있다.
솔직히 얼마나 버틸지 자신이 없다.
사망혈인은 조금이라도 더 저지선을 넓히기 위해,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마도도 이 악물고 도를 잡았다.
완전한 몸 상태를 유지하려면 한겨울 정도는 조리를 잘해야 하는데, 한 사람의 힘이라도 간절히 필요한 시기에 몸 편히 누워만 있을 순 없었다.
쒜엑! 파앗!
핏빛 도가 허공을 갈라 나무 기둥을 격타했다. 그리고는 큰 숨을 들이마셨다.
“후웁!”
옆구리가 뻐근해진다. 어깨 근육도 뒤틀리고, 다리는 각목에 얻어맞은 것처럼 둔통(鈍痛)이 치민다.
어느 곳 하나 편한 곳이 없다.
“너무 무리하지 마.”
“아니. 마야가 올 때까지는 온전한 몸을 만들어놔야 해. 바로 싸움이 시작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