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00
300
“…….”
“그렇다고 엉뚱한 생각 말아요. 가가가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혈유에게 마음을 주었는데, 혈유가 그렇게 되니…… 마음은 있어도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해서 가가께 요구하는 것도 큰 것은 아닐 거예요.”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래요. 들어줄 수 없게 되었네요.”
“후후!”
“왜요?”
“머리라면 다담을 철저히 믿었는데, 이런 수조차 생각해 내지 못하고 말이야. 다담을 너무 믿은 것 아냐?”
“어멋! 이제 와서 그런 말 하기예요?”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덜컹!
그렇게 때려도 꿈쩍조차 하지 않던 바닥이 너무 쉽게 열렸다.
마야는 망설이지 않았다. 다담선자를 안은 채 바닥 안으로 뛰어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바닥 밑에는 긴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횃불이 군데군데 켜져 있어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도 찾기 쉬웠다.
마야는 곧장 나가지 않았다. 어둠 한구석을 쳐다보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인가?”
“…….”
“이상한 위인이군. 적인가, 아군인가?”
“…….”
“잔접. 당신이 잔접인 것은 확실해. 그렇지? 잔접만이 자결을 하지 않으니까. 최소한 흑조편복보다는 한 수 윗길의 고수야. 그러니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겠지.”
“…….”
“곡 부인에 이어 당신까지 내 뒤를 보살펴 주는 이유가 뭔가?”
“유계를 친다고 들었다. 넌 약속만 지키면 된다. 그리고…… 앞으로는 신중히 행동해라. 지금은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어 보이겠지만, 너만 한 고수를 헤아리는 데는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스스스슷!
잔접은 귀적무를 펼쳐 사라졌다.
2
구선신옹(九仙神翁)은 정도인의 표상이다. 나이가 들었어도 불의가 일어난 곳이면 천 리를 마다 않고 달려가곤 했다.
마야가 여주성에 둥지를 틀었다는 말이 전해진 후, 그는 즉시 여장을 꾸렸다.
“놈이 죽든 내가 죽든.”
구선신옹이 집을 나서기 전에 늘 하는 말이다.
이번에도 그는 같은 소리를 하며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같이 간단한 행낭 하나와 평생을 함께해 온 애병 청조(靑釣)를 둘러맨 채 휘적휘적 걸었다.
그는 여비가 필요없었다.
인근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를 본 사람은 남에게 뒤질세라 식사 대접하기에 바빴다.
“오늘 날씨가 어떤가?”
그가 물었다.
“간만에 청명합니다.”
그를 존경하는 후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죽기에 좋은 날씨야. 그렇지 않나?”
“왜 불길한 말씀을…….”
구선신옹은 청조를 둘러매고 일어섰다.
“여주에 다녀오려네.”
“호, 혹시 송택에?”
“놈이 죽든 내가 죽든. 놈을 지척에 두고 이리 시간만 축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나 같은 늙은이라도 먼저 나서서 본때를 보여야지. 그러다 죽으면 뒷사람이 나서줄 테고.”
그는 세상을 유유히 살아온 사람 특유의 여유를 가지고 여주성을 향해 걸어갔다.
성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나 무인은 없었다. 장식으로라도 병장기를 패용한 사람조차 없었다.
구선신옹은 여주성에 들어서자 주루부터 찾았다.
“술 한잔 주게.”
그는 창밖에 환히 보이는 곳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한 잔, 두 잔, 석 잔…….
시간이 흘러갔지만 창밖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한참을 더 지켜본 후 드디어 일어섰다.
“이보게, 점소이. 여기 마야가 있다는 송택이 어딘가?”
구선신옹의 발걸음은 점소이가 알려준 길을 더듬어가지 않았다. 파락호가 득실거릴 것 같은 골목길만 골라서 걸었다.
축! 사사삭!
길이 넉 자에 이르던 청조가 어느새 줄어들어 단봉으로 변했다.
구선신옹은 단봉을 허리에 찔러 넣고,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개천가로 들어섰다.
그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사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
그제야 그는 안심하고 낡은 집들 중 한곳으로 쑥 들어갔다.
“미행은?”
“없지.”
“요즘 이상하지 않아?”
“나도 그게 이상해서 말이야. 개방 놈들이 주위에서 얼씬거리는데 영 신경 쓰이더라고.”
“어쩔 셈인가?”
“어쩌긴. 마야와 싸운다고 나왔는데 다시 돌아갈 수 있나. 난 이제 끝났어. 은마(隱魔)나 되어야지. 한동안 재미있게 살았는데 말이야.”
“흐흐흐! 실컷 즐겼으면 됐지 뭘 그래.”
“여긴 어때? 쓸 만한 애들 있어?”
“자네 취향이 영 까다로워서 말이야. 밑에 두어 명 있어. 골라서 하나만 잡아. 그리고 참! 배때기 좀 난자(亂刺)해 놓지 마. 치우는 데 얼마나 골치 아팠는지 알아!”
“흐흐흐! 그 맛이 아니면 왜 잡아? 바로 그 맛 때문에 잡는 건데.”
구선신옹이 득의롭게 웃었다.
구선신옹은 잘못 알았다. 그의 뒤에는 그림자가 붙어 있었다.
‘인면수심(人面獸心)! 이런 쳐 죽일 놈!’
개방에 입문하면서부터 오늘날까지 타구봉을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은 사람, 신봉개였다.
“아아악! 아악!”
낡은 집에서 자세히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구선신옹이 동남(童男)을 난자하는 소리다.
죽이는 이유는 없다. 단지 쾌락을 위해서 죽인다. 같은 깊이로 칼질을 하되 얼마나 오랫동안 목숨이 붙어 있게 하느냐가 그의 관심거리라고 했다.
원통한 것은 때려죽일 놈이란 걸 빤히 알면서도 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愚)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지금 이놈들을 때려죽이면 다른 마인들이 숨어버린다. 아니면 역으로 급습을 가해올 수도 있다.
모든 게 마야의 말대로다.
‘이런 빌어먹을! 모두 눈뜬장님이었단 말인가. 이런 놈들이 세상을 좀먹고 있는데 어찌 발견하지 못했누. 이런 병신, 이런 돌대가리.’
신봉개는 낡은 집을 단단히 점찍어놓은 후 뒤돌아섰다.
***
마야는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소문 없이 돌아왔다. 개걸산 사건으로 세상을 또 한 번 뒤집어놓았지만 마치 송택을 떠난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그런 점은 다담선자와 일령도 닮았다. 개걸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면 싸움 좀 있었다는 대답이 고작이었다.
양리리도 침묵했다. 마야를 보는 눈이 더욱 깊어졌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떠날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동안 송택은 많이 변했다.
담장이며, 마당이며…… 모든 곳에 사망혈인의 손길이 닿았다. 그가 길을 일러주지 않으면 뒷간도 못 갈 정도로 온 천지가 화약 밭이다.
마도는 펄펄 날았다. 언제 중상을 입었냐는 듯 말끔해 보였다.
얼마 후, 언장은마도 돌아왔다. 비록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어차피 땅속에 숨어사는 인간, 쳐다볼 사람도 없다며 껄껄 웃었다.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안팎으로 해결할 문제가 산재해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평범한 촌사람이 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런 평화는 말끔한 유삼(儒衫)을 입은 학인(學人)이 찾아오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마야를 만나러 왔는데요.”
정문을 지키던 사람은 시마였다. 그는 유생을 힐끔 쳐다본 후, 두말 않고 길을 열어주었다.
“옷만 뺀질뺀질하게 입으면 그만인가? 그놈의 냄새하고는. 목욕 좀 하고 입으면 오죽 좋아.”
“가까이서만 보지 않으면 냄새와는 상관없죠. 히힛!”
유생은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하나 마야가 나타나자 그는 즉시 정색을 하고 포권지례를 취했다.
“개방 후개 황초화(黃初華)올시다.”
마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수(上手)가 하수(下手)를 대하는 예다.
황초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천진난만하게 활짝 웃는 모습이 정말 얼굴 하나는 두껍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날 정도였다.
“담뢰는 어찌 됐나?”
“불행히도 명을 달리하셨죠.”
“훗!”
마야는 실소를 지었다.
주화입마를 당했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다. 한데 며칠 만에 목숨을 잃었다면 살해되었다고 봐야 한다.
개방은 정도와 사도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방파다.
“먼저 용건부터. 일(一), 귀하의 제안을 수락한다. 이(二), 본 방 이 내건 조건을 어겼을 시, 이번 협약은 자동 파기된다. 삼(三), 귀하는 정보만 제공할 것이며, 제반 결정사항은 본 방이 알아서 한다. 히힛! 어때요?”
마야는 다담선자와 양리리를 쳐다봤다.
두 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고하게. 일러준 대로 준비가 갖춰지면 말하라고. 표적은 즉시 제공할 테니.”
“아! 그걸 말하지 않았네. 그건 염려 마시랍니다. 준비되는 대로 연통하겠다고요. 그보다…… 히힛! 타구봉법을 한 달 안에 수련해 내야 하지 뭡니까.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청하는데, 시연(試演)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 에구! 이놈의 팔자가 어찌 된 것인지 후개가 되면 뭘 합니까? 누가 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개방에서 연통이 올 때까지 여기 있겠단 소린가?”
“많이도 안 바랍니다. 하루에 한 번씩만 시연해 주시면 그걸로 족합죠. 히힛!”
개방 후개가 외인에게 타구봉법을 배우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한데도 황초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신경이 무딘 자이거나 심계가 깊은 자다. 적어도 담뢰보다는 한 수 위인 것 같다.
용두방주는 이런 자를 제쳐 두고 왜 담뢰를 선택했을까?
아니다. 이에는 더 깊은 사연이 숨겨져 있다.
후개는 두 명이다. 한 명은 앞에 내세웠고, 다른 한 명은 음지에서 가르쳤다. 양지의 후개는 껍데기만 얻은 반면, 음지의 후개는 모든 걸 얻었다.
황초화는 타구봉법을 알고 있다. 당장 방주가 되어도 괜찮을 만큼 상당한 수준까지 연성해 냈다.
그가 시연을 보고자 하는 건 마야의 타구봉법과 자신의 봉법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더불어서 허점도 찾을 터이고.
“있어도 좋다.”
마야는 웃으며 받아들였다.
***
그들은 모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두 명이었으나 이제는 일곱 명밖에 남지 않았다. 세 명은 죽고, 두 명은 축출당했다.
“개방이 움직였소.”
감정이 북받치는지 약간은 들뜬 음성이었다.
“관건은…… 끝까지 비밀을 유지하는 건데. 개방에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
쥐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마야는 북무림만 생각하고 있어요. 유계 마인들은 남무림에도 있습니다. 그들은 어찌할 겁니까? 잡초를 뽑을 때는 삭초제근(削草除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 뿌리라도 남겨두면 곧 다시 무성해지죠.”
“마야에게 남무림까지 맡기는 건 무리가 아닐까?”
“우리가 나설 수도 없는 문제잖습니까? 마야가 아니면 누가 합니까? 궁왕이 천멸도주를 데리고 있으니 잘 연결시키면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개방이 일을 마무리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나?”
“아무래도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어렵겠죠. 구파일방이라고 하지만 모두 생각이 다르니까요. 다행히 요전에 북검문에 대항하자고 연합한 바가 있으니 그나마 시도해 보는 거지, 다른 때 같으면 어림없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마야에게 남무림까지 맡겨야겠어.”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합니다.”
“콘과 수가 나타났으니 이용만 잘하면…….”
“사천제일룡도 망나니짓을 하고 있는 모양입디다만…….”
“그 둘을 잘만 엮으면 좋은 그림이 되겠는데요?”
“마야가 유계를 치기로 했으니 모든 초점을 유계에 맞추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숙의했다.
광대하기 이를 데 없는 땅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독버섯을 캐내는 일은 쉽지 않다.
외인이 들으면 정신병자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할 만큼 기가 막힌 말들이다.
이들은 앉아서 중원천하를 요리하고 있지 않은가.
금연화는 이 모든 상황을 똑똑히 보았다.
이들은 정신병자가 아니다. 철저히 무자비하고, 계산적이며, 타당한 일만 추진한다.
그녀는 이들을 통해 마야가 무사함을 알았다. 최근 동향도 엿들었다. 개방에서 빠져나온 일하며, 북검문에 들어갔다가 탈출한 사실도 알았다.
잔접은 암암리에 마야를 돕고 있다.
상당한 무공과 노련한 경륜으로. 한데도 이들 모두가 무림에 나설 생각은 없는 듯하다. 단지 암중에서 장기를 두듯이 말을 움직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 보인다.
아니다. 이들 대부분은 중원에 다른 신분이 있다.
잔접이 위장인지, 중원에서의 신분이 위장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배분이 높은 사람들인 것만은 확실하다.
‘여길 빠져나가야 돼.’
그녀가 부지런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잔접의 화제가 그녀의 관심사로 향했다.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일이 진행되다니……. 이게 모두 혈귀대주 덕분입니다.”
“쉿!”
이미 늦었다. 금연화는 듣고 말았다.
“무슨 소리죠?”
그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은 없었다. 어느 때처럼 조용히 일어서서 한 명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곧 어둠이 닥쳐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또 혼자가 될 것이다.
“제발 말해주고 가요!”
그녀는 소리를 빽 질렀지만 무정한 철문은 굳게 닫히고 말았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