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01
301
마야 13
성사재천(成事在天) ―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
제1장 척편의(拓便宜) ― 이득을 얻다
1
‘빠져 나가야 해!’
금연화는 강렬한 투지에 휘감겼다.
그녀에게는 제이성이나 뇌옥이나 지금 갇혀 있는 곳이나 매한가지였다. 어느 곳에서고 마음을 편히 가질 만큼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삶에 회의(懷疑)를 느낀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는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왔다. 스님들이 면벽참선을 하듯이 내면을 다듬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러니 조용한 곳이라면 뇌옥이든 사찰이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제는 다르다.
잔접의 입에서 ‘혈귀대주’가 거론되었다.
‘혈귀대주 덕분.’
자꾸 같은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혈귀대주에 관한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다 생각했거늘, 오히려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가 마인을 친구로 두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북검문의 중책을 맡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보통 마인도 아니고 마야라고 칭송받는 마인과 교분을 주고받는다는 게 있을 법한 일인가.
그 일만 해도 충분히 놀랐는데, 이번에는 잔접과도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빠져나가야 한다.
금연화는 두 팔, 두 다리를 쭉 펴고 큰 대 자로 누웠다.
잔접은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지만 진기를 사용할 수 없게끔 단전을 봉혈(封穴)시켰다.
지금까지는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전이 봉혈되었다고는 하지만 활동에 제약을 받는 건 아니다. 움직이거나 뛰는 데는 전혀 이상이 없다. 더군다나 그녀가 갇혀 있는 공간은 십여 장 밖에 되지 않아서 뛸 필요가 없었다. 사는데 불편하지 않는데 풀 필요가 무엇인가.
또 하나, 봉혈을 풀기 위해서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잔접의 점혈법은 아주 특이하다. 십이경략(十二經略)에 두루 걸쳐서 점혈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한 것인지 단전혈(丹田穴)만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금연화로써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수법이었다.
풀고 싶지도 않았고, 풀 필요도 없었으며, 풀만한 능력도 없었다.
이제는 없는 능력도 만들어내야 한다.
‘마야!’
이 순간, 그녀의 눈에 그려진 사람은 무뚝뚝한 마야였다.
마야와 고락을 같이 한 게 몇 해인지 모른다.
그동안 따뜻한 말 한 번 들어보지 못했다. 포근한 눈길은 기대도 않는다. 잘잘못을 일깨워주는 말조차도 가뭄에 콩나물 나듯이 들었을 뿐이니 참 멀리 있는 사람이다.
그는 늘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결코 가까워질 수 없게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었고, 간혹 잊어먹을라치면 어김없이 상기시켜 주었다.
그에게 자신은 친구의 여인이다.
마야에게 자신은 가까워질 수 없고, 가까워져서도 안 되며, 그러면서도 보호는 해주어야 하는 아주 귀찮은 존재에 불과했으리라.
안다. 그래서 제이성에 남으라고 했을 때, 기꺼이 남았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의 짐이 된다는 건 창피한 노릇이다. 하물며 마야의 짐이 된다는 건 더욱 견디기 힘들다. 결단코 마야 앞에서만은 꿋꿋한 모습으로 서있고 싶다. 정인(情人)을 잃고 힘없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왜? 모른다.
혈귀대주가 사랑했던 여인이라면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이제 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또 짐이 될지라도.
다 끝났다 싶은 일을 다시 해야 한다. 혈귀대주의 복수를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봐야 한다. 거의 마무리되었다 싶어서 뒤로 물러섰는데, 끝까지 파고들어야 할 것 같다.
혼자서는 하지 못한다.
잔접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더군다나 그들이 끝이 아닌 것 같다. 복면을 쓰고 어두운 암굴에서 만나 토의를 하는 것만 봐도 안다. 그들보다 더 강한 자가 있다. 그렇기에 눈치를 살피는 게다. 숨어서 활동하는 게다.
이 일을 해줄 사람은 마야뿐이다.
파아아아……!
진기가 전신 경맥을 따라 휘돌았다.
물론 일반적인 진기는 아니다. 수련으로 닦은 진기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와 죽는 순간에서 흩어지는 진기, 수로(壽路)에 잠재되어 있는 진기다.
이 역시 마야가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을 대발견이다.
임독 양맥과 십팔경략만 생각했지 그 곁에 죽은 듯이 숨어 있는 또 다른 경맥이 있으리라고는 누가 생각했으랴.
수로의 존재를 안 것만으로도 목숨 하나는 여벌로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
전신을 일주천(一週天)한 진기가 살며시 십팔경략으로 스며들었다.
금연화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시도하려는 해혈법(解穴法)은 그녀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확신이라는 말을 꺼낼 수도 없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고 무리(武理)로는 그럴 듯해서 시도해보는 것이니 성공보다는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많다.
단전은 진기의 샘이다.
잔접은 샘에서 물을 긷지 못하게 뚜껑을 닫아 놨다.
형체가 없는 투명한 뚜껑이다. 허 이음새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 뚜껑의 두께나 넓이도 계산되지 않는다.
샘 안에 물이 환히 보이는데, 사용할 수 없는 경우다.
설명은 간단하지만 잔접의 점혈법은 이보다 훨씬 고명하니 해혈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이건 수수께끼와 같다. 투명하여 보이지 않는 뚜껑을 어떻게 열 것인가.
열 방법이 없다.
잔접의 점혈법을 알지 못하는 이상은 해혈 자체가 불가능하다. 경맥을 점검해보면 막힘이 없다. 건드린 흔적도 없다. 헌데 단전은 단단한 돌이 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금연화는 다소 충격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샘에 뚜껑이 덮여 있다면 샘을 부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샘이 흘러나올 게 아닌가.
간단한 발상이지만 매우 효과적이다.
문제가 있다. 실제로 단전을 부술 수는 없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샘에 균열을 일으키면 물이 흘러나온다. 바로 수로에 있는 진기를 이용하여 단전에 침투시키면 단전에 고인 진기가 수로로 흘러나온다는 발상이다. 물이 물을 끌어당기는 원리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큰 위험이 있다.
첫 번째 위험은 수로의 진기가 단전을 파고들지 못하고 충격만 줄 경우에 일어난다.
이는 금제수법을 억지로 풀려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자칫 단전이 완전히 손상되고 마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 위험은 생각한대로 수로의 진기가 단전의 진기를 끌어냈을 때 발생한다.
마야는 수로의 진기를 능숙하게 활용한다. 그는 주로(主路)보다 수로를 더 애용한다.
호채마들도 마야 덕분에 수로를 안다. 진기가 급상승하는 기연도 얻었다. 솔직히 수로를 알게 되어서 무공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허나 호채마는 여전히 주로의 진기를 사용한다. 수로는 주로의 보조 역할을 할 뿐, 진기를 휘돌리는 경략은 여전히 주로다.
주로를 완전히 봉맥(封脈)하고 수로만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진기는 거의 사용하지 못한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게다.
큰 강에 샛강이 섞이면 강이 더 커지지만, 큰 강을 버리고 샛강만 쓴다면 형편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금연화가 하려는 일은 샛강에다가 큰 강의 도도한 물길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샛강이 버틸 수 있을까? 수로가 버텨낼까?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크다.
피해를 아무리 가볍게 축소해 봐도 사지가 멀쩡할 경우는 그려지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잔접이 언제 또 모일지 알지 못한다. 내일 모일 수도 있고, 일 년 후에 모일 수도 있으며,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회합을 가질 수도 있다.
그녀는 암굴에 혼자 갇혀 있다.
무공을 온전히 사용해도 암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말까 한데 무공이 없는 상태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파아아아아!
수로의 진기로 단전을 강타했다. 순간!
꽈앙!
단전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활활 불타던 화로가 박살이 나며 뜨거운 불길이 온 몸을 휘젓고 다닌다.
엄청난 고통이었다. 뼈가 토막토막 부러지고, 살점이 조각이 되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심장은 인두로 지진 듯 화끈거리고, 폐는 꽉 막혀 숨을 쉴 수 없었다.
“아아아아악!”
금연화는 난생 처음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주로와 수로의 완벽한 결합은 진기가 배가(倍加)한 것만큼이나 큰 효과를 가져왔다.
수로의 진기는 음양의 조화가 고루 갖춰져 있다.
조화가 깨지면 육신에 병이 생긴다. 진기가 미약해지면 노화(老化)가 빨라지고, 흐름이 원활치 않으면 중병을 얻는다.
그렇기에 수로의 진기는 음양의 조화, 강약의 조화를 이루는 일을 최우선한다.
주로의 진기는 양강(陽剛)하기도 하고, 음유(陰柔)롭기도 하다. 수련한 심공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성질이 달라진다. 일점(一點)에 집중되기고, 발출된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주로와 수로는 성질이 다르다. 맡은 역할도 다르다.
두 진기가 한 줄기 물길로 섞인 후에도 맡은 역할은 달라지지 않았다. 약간의 변화가 생겼을 뿐이다.
금연화의 진기는 양유(陽柔)했다.
자하밀공(紫霞密功)의 성격상 양강의 진기를 지녔어야 하나, 음기가 성한 여인의 몸이기에 양과 음이 뒤섞여 양유라는 특이한 진기를 형성해냈다.
그녀만 이런 진기를 지닌 것은 아니다.
양강의 무공을 지닌 가문의 딸들은 대체적으로 양유라는 특이한 진기를 지닌다. 반대로 음유한 무공을 지닌 가문의 사내들은 음강(陰剛)의 무공을 지닌다.
수로의 진기는 양유한 진기와 섞이는 순간 큰 혼란에 빠졌다.
찬물과 뜨거운 물이 섞여 미지근한 물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팔팔 끓는 물이 부어진 것이다.
수로의 진기는 전신을 휘돌며 음기를 뽑아냈다.
찬물, 찬물…… 뜨거운 물을 식혀줄 찬물……
수로의 진기는 음양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 여타의 부작용은 전혀 고려치 않았다. 음양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육신은 이미 병들어가고 있었다.
수로의 음기 흡수는 생명력을 보존하려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금연화가 극심한 고통을 느낀 것은 이 때문이다.
뜨거운 불길이 전신을 휘젓고 다니는 것도 극통이었지만 음기가 수로로 빨려 들어가니 주로의 진기는 더욱 양강해 질 수밖에 없었고, 양강한 진기는 다시 수로와 섞이며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러면 수로는 또 음기를 흡수하고, 주로는 더욱 뜨거워지고……
악순환이 되풀이 된 것이다.
금연화가 정신을 놓았을 때, 그녀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로써는 정신을 놓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고통이었다. 인간이 참아낼 수 있는 고문이 아니었다.
주로와 수로는 팽창을 거듭한 끝에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치달렸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엄청난 압력을 견디다 못해서 백회혈(百會穴)이 터져버린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터졌다기보다는 뚫렸다는 말이 맞다.
정수리 숨구멍 자리는 하늘의 기운과 감응하는 혈(穴)이기에 뚫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화식(火食)을 하고, 세상의 혼탁한 기운을 접하면서 막혀버린다.
금연화는 갓난아기가 세상을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되었다.
기회를 만난 수로는 뚫린 백회혈을 통해 암굴의 음기를 빨아들였다. 고래가 물을 빨아들일 때처럼 엄청난 흡입력으로 삼켜댔다.
이윽고, 수로의 기운이 주로를 이겼다.
수로의 조화가 안정을 되찾자, 주로의 기운도 따라서 안정되었다.
주로의 양강진기는 더 이상 수로로 스며들지 못했다.
양강진기가 강성하다고는 하지만 호로병에 물이 가득 차 있으니 더 들어갈 곳이 없었다.
기혈이 안정되고, 경련이 잦아들고, 체온도 정상을 되찾았다.
‘여기는……?’
극심한 고통은 잠시 현실감각을 빼앗아가 버렸다.
금연화는 눈을 끔뻑이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판단하려고 애썼다.
정신은 금방 돌아왔다.
잔접, 암굴, 금제, 극심한 고통…… 모든 게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살았어!’
정신은 멀쩡하다. 사물을 올바르게 인지할 수 있고, 기억도 소멸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올렸다. 발을 움직였다.
사지가 자유롭다.
굳이 진기를 운용해 보지 않아도 주화입마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연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멀쩡한데 왜 정신을 잃을 만큼 고통이 극심하게 쏟아졌을까? 그만한 고통이면 적어도 반신불수는 되고도 남는데, 분명히 주화입마의 징조였는데.
진기를 일으키기가 겁났다.
지금은 멀쩡하지만 진기를 일으키기만 하면 탈이 날 것 같았다. 생각하기 싫은 고통도 찾아올 것 같고……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손가락을 오무려 단전을 가볍게 두들겼다.
통! 통! 통……!
단전의 울림은 정상이다.
그녀는 비로소 일어나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다.
쏴아아아……!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해일처럼 밀고 나간다. 거침없이 사지 백해를 휘돈다.
수로의 진기도 따라서 일어난다.
전에는 억지로 일으켜야 따라 일어났던 진기들인데, 이제는 주로의 진기만 휘돌려도 스스로 일어나 같이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