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02
302
타앙!
백회혈을 두들긴 진기가 급속하게 증폭되더니 임맥(任脈)을 타고 흘렀다.
‘백회 타통!’
하늘과 땅이 서로 연결된다고 해서 천지현관타통(天地玄關打通)이라고까지 불리는 초상승경지에 들어섰다. 천지자연의 조화를 한 몸에 받아들이니, 육신이 지닌 생명력 또한 지고지순한 조용함 속에 유유히 흐른다.
금연화는 피식 웃었다.
기연 중에 기연을 얻었건만 마음은 크게 들뜨지 않았다. 허(虛)에 실(實)이 있고, 실에 허가 있으니 큰 덕을 얻었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세상사 이치니, 많이 얻은 만큼 돌려줘야할 의무도 지닌다.
심산유곡에 숨어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얻은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
백회 타통을 이루기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줄줄이 풀려 나왔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속이건만 사방이 대낮처럼 밝아서 걸음을 떼어놓는데 어려움이 없다.
일신의 모든 감각이 한층 더 깊어지고 넓어졌다.
눈은 어둠을 꿰뚫어 보고, 귀는 십 장 밖에서 기어가는 개미 소리를 듣는다.
이 정도의 기연이면 환골탈태(換骨奪胎)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기연은 육신의 변화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무려 백여 보를 옮긴 끝에 동혈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 아니다. 입구는 없다. 꽉 막힌 막장이다.
길을 잘못 들었나? 반대로 왔나?
예전 같았으면 그리 생각했을 게다. 허나 이제는 아니다.
그녀는 꽉 막힌 입구에서 출구를 찾아냈다. 입구를 보자마자 오래 전에 읽었던 기문이서(奇門異書)를 떠올렸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일치하는 기관도해(機關圖解)를 찾아냈다.
열한 살 때인가, 열두 살 때인가? 아버님 서적을 잠깐 펴보았던 것뿐인데, 그게 생각났다. 기관도해를 이해하고 본 것도 아니다. 그림이 있어서 호기심에 본 것 뿐이다.
그리곤 잊었다. 조금 더 성정한 후에는 무공수련을 하느라고, 혈귀대주를 만나느라고 기관진식은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헌데 생각난다. 그것도 방금 전에 본 것처럼 똑똑히 기억난다.
‘의심은 걷어가고 진실은 각인된다더니……’
괜히 천지현관 타통이라고 불린 게 아니다. 하늘과 땅의 이치를 스스로 깨우칠 수 있을 만큼 영민해지니 그런 말이 나온 게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무인뿐만이 아니라 문인도 반드시 무공을 수련해야 한다. 손발을 쓰는 게 싫으면 진기토납(眞氣吐納), 심공이라도 수련해야 한다.
금연화는 손을 들어 벽에 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쑥 밀었다.
그그그긍……!
거대한 석벽이 움직이며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밝음이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걱정 근심을 한 아름 안고 나서는 길이지만 세상이 밝아 보이는 것을 어쩌랴.
‘대주…… 마야……’
푸른 하늘에 두 사내의 얼굴이 그려졌다.
2
살인은 사람을 끌어 모은다.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살인이 남긴 결과물이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꿰엑! 꺄아악!
날개에 붉은 칠을 한 비응(飛鷹)이 쇳소리를 토해내며 하늘 높이 맴돌았다.
“크크크! 크크크……!”
악마의 웃음소리가 창공 높이 떠있는 비응을 비웃었다.
소리는 또 있었다.
다각! 다각! 다각……!
동서남북, 사방을 포위한 기마군단이 악마를 노리며 거리를 좁혀왔다. 천천히, 천천히……
“크크크! 뭐야?”
“북검문 천랑대입니다.”
산주가 공손히 대답했다.
천랑대는 북검문에서도 가장 강한 힘이다. 남북전쟁이 시작된 이래, 장강을 건너 남무림 깊숙이 쳐들어간 전력도 가지고 있다.
“약 이백여 명 정도 추산되니…… 천랑(天狼) 사대(四隊) 중에 일대만 온 것 같습니다.”
“크크크……!”
콘은 다시 웃었다.
당금 무림에서 천랑대를 앞에 놓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건방진 놈들! 천랑대주가 직접 와도 모자랄 판인데, 겨우 졸개 놈 하나 덜렁 보냈다 이거지?”
“천랑대는 열세 명씩 모두 십오 조로 구성됩니다. 이들이 펼치는 파상공세는 그야말로 숨 돌릴 틈도……”
산주는 말을 중단했다. 어느새 콘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기다려도 금방 검을 부딪칠 텐데,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파팟! 쒜엑!
“아악!”
바람이 일렁이면 죽음이 펼쳐진다.
콘의 손속은 남만에서나 중원에서나 변함이 없다. 펄쩍 뛰어올랐다 싶으면 핏물이 허공에 흩뿌려진다.
아아! 천랑대여!
중원을 질타하던 천랑대였건만 콘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파앗! 푹! 쒜에엑! 히히힝!
목 동맥을 베인 말이 앞발을 쳐들며 힘껏 발버둥 쳤다가 썩은 지푸라기처럼 맥없이 나뒹굴었다.
말을 타고 있던 무인도 말과 함께 떨어졌다.
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말이 찔리는 것을 보고 허공으로 신형을 띄웠지만 어느새 다가온 소도가 그의 목마저 꿰뚫어 버렸다.
콘은 검의 부딪침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검기가 옷깃을 스치는 것도 마다했다.
굼벵이 사이를 토끼가 누빈다. 성난 늑대가 물어뜯는다.
“아아악!”
“아악!”
눈 깜빡할 사이에 천랑대원 네 명이 절명해버렸다.
“이, 이럴 수가!”
천당삼대 대주는 눈을 부릅뜬 채 경악성만 연신 내뱉었다.
눈 앞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콘의 무공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다. 무신이 아니면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허나, 수하들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너진다. 쓰러진다. 죽는다.
콘은 천랑대로 막을 자가 아니다. 천랑삼대 이백십이 명이 아니라 천랑 사대가 모두 달려들어도 개죽음만 당한다.
도대체 검이 섞이지 않는다. 천랑대원이 검을 한 번 휘두르는 동안 그는 네다섯 차례나 올려치고 내리찍는다.
“대주님!”
그를 호의하고 있던 네 명의 호법이 삼대주를 일깨웠다.
“그렇지.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휘익!”
새삼 정신을 차린 삼대주는 길게 휘파람을 불어 비응을 불렀다.
비응이 쏜살같이 달려들더니 그의 팔뚝에 내려앉았다.
삼대주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천조각 중에 몰살을 보고하는 빨간 천은 비응의 오른쪽 다리에 무신이 직접 나서기를 요청하는 검은 천은 왼다리에 묶었다.
“흐, 흑천(黑天)입니까?”
호법이 검은 천을 보며 말했다.
“후후! 이것도 부족해. 이것보다 더한 경고가 있었으면 그걸 썼을 거야. 겨우 흑천으로 경종을 울릴 수밖에 없으니 안타깝군.”
“겨우……”
“풍문이 맞았어. 저 놈은 무신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자야.”
삼대주는 비응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가라. 너와도 마지막인 것 같구나.”
삼대주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이백십이 명이 죽는데 걸린 시간은 채 반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삼대주의 죽음이라고 천랑대원과 다를 바 없었다. 그도 다른 대원들처럼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빈 허공만 훑었을 뿐이다.
소도는 어느새 목 주위를 한 바퀴 휘돌고 지나갔다.
병기를 부딪치지도 못하고,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하고…… 천랑대는 그렇게 몰살당했다.
“크크크! 크크크크!”
콘은 쇳소리 같아서 듣기 거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다른 자들이 또 있는 것……”
“가!”
“예?”
“마야. 그놈에게 안내해!”
“알겠습니다.”
산주는 아직도 떠나지 않고 창공을 맴도는 비응을 흘깃 쳐다봤다.
비응이 떠나지 않았다는 건 주위에 다른 자들이 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자는 비응을 다룰 줄 아는 자다. 허면 북검문 무인밖에 더 있으랴.
헌데 콘은 그냥 가잔다.
‘마야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 났어.’
산주는 피비린내를 뒤로 하고 걸음을 떼어놓았다.
요즘 들어 콘과 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언제부터인가 몸을 섞지 않고 있다. 잠을 잘 때도 따로 자고, 길을 갈 때도 남남처럼 데면데면하게 군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다른 때 같았으면 수도 같이 날뛰었을 것이다. 천랑대원 중 몇 명은 그녀의 미염공에 휘말려 틀림없이 정혈을 뻬앗겼을 터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남녀의 정사가 펼쳐지는 귀축도가 펼쳐졌을 게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팔짱을 낀채 싸움 구경만 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콘과 수는 왜 정사를 나누지 않는 것인가.
싸웠나?
아니다. 이들은 마음이 통해서 상대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동물적인 감각으로 서로를 탐할 뿐이다. 그렇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다. 이미 지난 일이니 동물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산주는 뒤를 돌아봤다.
콘이 바짝 붙어서 따라온다. 수는 대여섯 걸음 뒤쳐져서 걸어온다.
산주는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부지런히 걸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어. 무슨 변화가 생긴 건데…… 무슨 변화인지 알아내야 해. 어쩌면 이게 이들의 약점일지도……’
휘이익!
바람이 시신을 건드린다. 피 냄새, 죽음의 냄새를 가득 품어 멀리, 멀리 퍼트린다.
“……”
그들은 한 동안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이래서…… 나서지 말라 했던 겝니다.”
한참 만에 침중한 음성이 주검을 건드렸다.
“놀랍군요. 콘의 무공. 이건 마치 빛의 무공 같습니다. 섬광, 뇌(雷). 세상에서 가장 빠른 무공이 아닐까 싶군요.”
언제나 조용하며 차분한 자, 만박선생이 말했다.
“저 역시 크게 놀랐어요.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허! 천랑삼대가 반 시진도 버티지 못할 줄이야. 최소한 두 시진은 격전을 벌일 줄 알았는데.”
항상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자, 육능자가 만박선생의 말을 받았다.
천랑삼대의 주검이 널려있는 자리에 북검 삼뇌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시신들을 자세히 점검했다.
사실 점검할 필요도 없었다. 육신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건드리기만 해도 즉사할 부위에 소도를 틀어박았다.
목, 심장, 폐, 머리…… 화타가 달려와도 되살릴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죽였다.
콘은 한 사람에 단 일도만 사용했다.
삼뇌는 죽음의 흔적을 찾을수록 가슴은 더욱 답답해져갔다.
“휴우! 이 자…… 함정이나 기관진식으로 잡을 수 있는 자도 아닌 것 같습니다.”
육능자가 긴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안 되도 되게 하는 게 저희 일이잖습니까? 놈이 강하다면 더 강한 덫을 놓아야죠.”
만박선생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그들이다. 시신을 점검하는 동안 그들 머릿속에는 콘을 상대할 계획이 차곡차곡 수립되고 있었다.
“콘의 실력은 알았으니, 일단 마야와 부딪치게 놔두세.”
첫째 계획은 이게 아니다.
콘과 같은 살인마를 마야에게 양보해서야 정도 체면이 서겠나.
삼원로가 나서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콘이 강하다고 하지만 늘 함께 다니는 삼원로를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
두 번, 세 번 고쳐 생각해봐도 제일 상책은 삼원로가 콘을 죽여주는 것인데…… 삼원로를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처럼 중원 정세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시점에서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참으로 곤혹스럽다.
일단 파관(破關)을 청해보기는 하겠지만 안 되기가 십상이다.
허면 남은 수는 콘과 마야의 상잔이다.
어설픈 함정 같은 것은 곤란하다. 더욱이 콘과 마야는 멸신구관조차도 빠져나온 인물들이 아닌가. 멸신구관조차도 잡아놓지 못한 자들을 급조한 함정 따위로 잡을 생각을 하면 곤란하다.
콘과 마야가 싸우면 둘 중 하나는 죽을 게 뻔하고…… 허면 남은 놈을 잡는다. 어떻게?
그 방책까지도 삼뇌의 머릿속에서는 수립되었다.
장(將)을 부를 때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이 최고다.
마야와 콘을 제거하면서 이 기회에 북검문 후계자 구도도 재정비하면 좋지 않을까?
천랑대와 천검대를 모두 투입한다.
천랑대는 일공자를, 천검대는 이공자를 지원하고 있느니만치 현 시점에서 그들은 없느니만 못하다.
그들이 나서면 일공자와 이공자도 나설 수밖에 없는 입장.
십공봉도 같이 쓴다. 십대문파의 이름으로 나선 자들이니 사문에 욕을 보이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해야 할 게다. 후후후! 십공봉의 후원을 입고 있는 사공자도 나서게 될 터이고.
후계자 칠성군(七星君) 중에서 셋을 제거한다.
다행히도 그런 점에서 삼뇌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다.
만박선생이 말했다.
“일단 돌아가서 의논하는 게 어떻습니까?”
“조용히…… 조용히 시신을 수습하라!”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백에 이르는 무인들이 뛰쳐나와 시신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침착했다.
떨어져나간 살과 뼈를 찾아 시신에 꿰맞췄다. 찢어지고 갈라진 곳은 바늘로 꿰매기도 했다.
그러나 음성은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명을 내린 자는 시신 사이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는 조용히 걸었지만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태산이 움직이는 듯한 압박감이 풍겨나왔다.
천랑대주 왕립위(王立偉)다.
“장강을 넘어…… 남무림을 휘젓다가 죽을 것이지 이렇게 죽고 말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