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03
303
천랑대주는 한 시신 앞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삼대주의 시신이다. 부릅떠져 있는 눈에서 생전의 의지가 풀풀 피어난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삼대주의 눈을 쓸어 감겼다.
일다경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고, 장내는 붉은 핏물 밖에 남지 않았다.
천랑대가 흘린 피는 모이고 모여 내를 이뤘다. 천랑대와 운명을 같이한 말들도 엄청난 피를 쏟아냈다.
사방이 온통 핏물 투성이다.
“봤느냐!”
“봤습니다!”
우렁찬 일갈이 산천을 뒤흔들었다.
대답소리는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수백 명이 일시에 토해낸 소리였지만 마치 한 사람이 크게 말한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이제 우린! 마지막 일인이 쓰러질 때까지! 콘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각골(刻骨)! 또 각골!”
“각골!”
천랑대원들의 분기(憤氣)는 꽁꽁 뭉쳐져서 마음속 깊이 심어졌다. 반드시, 언젠가는 반드시 터트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천기수사는 아주 약은 자야. 심기를 예측한다는 건 불가능한 인물이지. 허니 어쩌겠나. 뱃속을 환히 내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안 그런가?”
“……”
“아! 아! 자네는 정치를 모르지? 아! 또 실수했군. 모르는 게 아니라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걸 깜빡했어. 요즘 내 정신이 이 모양이야. 항상 깜빡깜빡 한다니까.”
“공자(公子).”
천랑대주가 잔잔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허! 난 자네가 그렇게 부를 때가 제일 싫어. ‘공자’라는 말이 나온 다음에는 항상 쓴 소리가 뒤따르거든. 자넨 좋은 약도 너무 먹으면 독이 된다는 걸 모르나?”
“나 같은 놈은 싸움밖에 모릅니다. 삼뇌가 어떻고 칠성군이 어떻고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렇지, 그래.”
“하지만 두 번 다시…… 제 수하들을 이런 식으로 죽인다면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지금 책임이라고 했나?”
“……”
“후후후! 책임을 묻겠다? 좋은 말이야. 재미있는 말이고. 책임이란 좋은 거지. 암. 좋은 거고 말고.”
천랑대주가 몸을 돌렸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공자, 칠성군 중 일공자인 고굉성(顧宏星)이 차갑게 말했다.
“자네…… 내가 힘을 보태달라고 했을 때 군소리 한 마디 없이 그러마고 했지. 난 그때 말이야,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었어. 벌써 다른 쪽과 손을 잡은 건 아닌가 의심도 했고 말이야.”
천랑대주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걸음을 떼어놓았다.
“내가 일공자가 아니라면, 두 번째나 세 번째 정도 된다면 그래도 내 손을 들어줬겠나?”
“아니오.”
천랑대주의 대답은 짤막했다.
“자네가 지지하는 사람은 고굉성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북검문 대공자라? 후후! 그렇지. 자넨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좋아. 어떤 때는 단순한 게 가장 좋은 법이지. 헌데 저 삼뇌는 너무 복잡해. 단순한 게 좋은데 말이야. 후후후!”
“말 다했소?”
“아직, 아직. 사람도 참…… 뭐가 그리 급한가. 술을 권해주는 친구도 없으면서. 내 자네의 충심을 생각해서 조언 한 마디 해주지. 콘이라는 자 말이야. 천랑대 전체가 달려들어도 안 돼.”
“알고 있소.”
“하지만 삼뇌, 저 자들…… 저자들이 머리가 되고, 자네가 수족이 되면 절반의 힘만으로도 콘을 죽일 수 있어.”
“……”
“그게 삼뇌의 힘이야. 알겠나? 삼뇌가 천랑대를 달라고 했을 때, 선뜻 내준 이유를 알겠냐고? 비록 천랑삼대는 전멸했지만, 그로 인해서 자네가 콘을 만났을 때는 놈의 심장에 검을 틀어박을 수 있는 거지. 자네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나? 천랑삼대의 전멸인가, 아니면 자네를 포함해서 천랑대 전체가 몰살당하는 것인가?”
“그게 공자의 싸움. 제 싸움은 후자입니다. 백번, 천 번을 물어도 승리를 위해 수하를 희생시키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천랑대 전체가 몰살당하는 한이 있어도.”
“그래, 그렇지. 그게 자네야. 결국 내 충고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군 그래.”
“간계와 모략이 판을 치는 무림이라지만 무인이 무를 버리면 썩은 생선만도 못한 겁니다. 세상이 다 썩어도 북검문만은, 북검문에 썩은 냄새가 진동해도 천랑대만은…… 공자께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겁니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진정한 무인이 내 곁에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라?”
“북검문의 주인은 간계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무공으로……”
“됐어. 하하하! 조언 몇 마디 해줬다가 충고까지 듣는군. 삼뇌가 싸울 자리를 마련해 줄 거야. 그때 보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지 아닌지. 부디 껍데기만 가졌다는 회의감은 들지 않게 해주게.”
천랑대주는 일공자의 말을 뒤로하고 걸어갔다.
그의 뒤를 묵묵히 지켜보던 천랑대원들이 쫓았다.
천랑대주와 일공자의 대화는 한 마디도 못 들은 듯이 태연하게, 침착하게, 조용하게……
제2장 찬반아(攢拌兒) ― 많은 사람이 공격하다
1
스륵……!
조심스럽게 앞서 나가던 검귀(劍鬼)가 나뭇잎 떨어지듯 힘없이 나뒹굴었다.
“조심…… 훅!”
바로 뒤를 잇던 검귀 역시 말조차 끝맺지 못하고 주술에 걸려 혼을 잃은 사람처럼 쓰러졌다.
“빌어먹을!”
대여섯 걸음 뒤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피독(避毒)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봤어!”
몹시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검귀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더 나아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었다. 동료가 쓰러져 있어도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처럼 죽었거니 생각할 따름이다.
검귀 중에 한 명이 가죽주머니에서 작은 뱀을 꺼내들더니 땅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스르륵……!
뱀은 재빠르게 달아났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몸을 마구 뒤틀며 순식간에 일 장 거리를 나아갔다.
허나 뱀의 움직임은 거기까지다. 검귀들이 쓰러진 곳에 이르자 작은 뱀의 움직임도 멈춰버렸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펄쩍 뛰어오르더니 곧 잠잠해졌다.
“지독한 독! 허공에 풀린 독이 아직도 흩어지지 않다니! 검주님, 아무래도 오늘은 득보다 실이……”
“입 다물어!”
말을 잇던 검귀는 입을 다물었다.
검주라 불린 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사방을 훑어보았다.
반다경쯤 지났을까? 검주의 입에서 상처 입은 짐승이 토해내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으…… 음! 이놈! 이놈! 이놈이……!”
검주의 말은 분노로 시작하여 허탈감으로 끝났다.
말뿐이 아니었다. 마지막 말을 마쳤을 때, 검주는 손에 들고 있던 검까지 놓아버렸다. 검을 들고 있을 힘조차 없다는 듯, 아니 검을 들고 있어서 뭐하냐는 듯.
“검주님! 왜?”
“잘못 쫓아왔다. 이놈은…… 우리가 상대할 놈이 아니었어.”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검주를 둘러싼 검귀는 사십여 명에 이른다. 그들 중 누구 하나 쉬워 보이는 자는 없다. 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헌데도 눈앞에서 일어난 죽음에는 속수무책이다.
검주는 검을 놓았다. 죽음이 다가오면 대항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이하겠다는 뜻이다.
“검주, 그럼 잠시 뒤로 물러났다가……”
“이놈아! 물러날 길이라도 있는 줄 아느냐! 너란 놈은…… 쯧! 헛배웠구나, 헛배웠어. 죽을 때가 되었어도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놈이랑 한평생을 같이 했단 말인가.”
“검주님! 지금 무슨 말씀을…… 그럼?”
검귀는 황급히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던 뱀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동쪽으로 한 마리, 서쪽으로 한 마리……
“저, 저런!”
불길하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좌우측으로 기어가던 뱀들이 기름 솥에 던져진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축 늘어져버렸다.
앞이 막혔다. 양쪽 옆도 막혔다. 그럼?
검귀는 황급히 뒤쪽으로 달려가 뱀을 풀었다. 잠시 후,
“……”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미사(微蛇)는 맹독사다. 독액 한 방울이면 코끼리도 죽일 수 있다.
미사를 길들여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절정고수가 곁에 있는 것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허나 미사의 독이 아무리 강렬하다고 해도 잠사검귀(潛死劍鬼)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기지는 못한다.
흑운무(黑雲霧)를 피워내고, 그 속에서 잠형신법(潛形身法)을 펼치며, 무음검(無音劍)으로 소리 없이 목숨을 거둬가는 죽음의 사신들에게 독사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럼 왜 미사를 가지고 다니는가?
미사가 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독을 지닌 독물(毒物)이라면 큰 놈이건 작은 놈이건 무조건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 기가 막힌 놈이기도 하다.
잠사검귀는 이런 미사의 특성을 이용하여 독을 찾아낸다. 독이 풀린 지역은 물론이고, 독이 담긴 음식도 쉽게 찾아낸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미사가 그토록 좋아하는 독에 몸부림쳐가며 죽어가는 모습은 처음 봤다.
사방에 깔린 독은 천하의 잠사검귀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죽음의 함정이다.
“죽음은 알려야겠지. 비응(飛鷹)을 날려라.”
잠사검주가 말했다.
잠사검귀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한 명씩, 한 명씩…… 외곽에 있던 검귀들부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갔다.
땅에는 적선서, 하늘에는 비응.
북검문 천비대가 자랑하는 눈[目]들이다.
비응 한 마리가 돌아왔다.
어느 때처럼 하늘에 떠서 빙빙 맴돈다.
“잠사검이……”
천수공자(千手公子) 석녕(石寧)은 부릅떠진 눈을 좀처럼 추스르지 못했다.
잠사검이 몰살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손해를 볼 것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쯤 따라 붙었겠거니, 기회까지 잡았으면 목을 쳐냈겠거니 생각했다.
비응은 왼다리에 붉은 천을 매달고 있다. 두 번, 세 번 고쳐봐도 분명히 붉은 천이고, 왼다리다. 잠사검주를 포함하여 잠사검이 전원 몰살할 경우에나 띄우는 표식이다.
잠사검은 전에도 큰 손해를 본 적이 있다.
마야를 쫓을 때, 잠사검이 자랑하는 철벽구망진(鐵壁九網陣)까지 펼치고도 절반에 해당하는 육십여 명이 죽고 말았다.
그 후, 잠사검은 인원 보충을 하지 않았다.
남은 자, 육십여 명이 더욱더 이를 악물고 검을 갈았다. 그러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헌데 정작 마야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생면부지 낯선 놈에게 몰살당했으니 원통해서 지옥인들 제대로 가랴.
“후후! 후후후!”
천수공자는 실소를 터트렸다.
“독인(毒人)은 참 까다로워. 비천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었다가도 이렇게 뒤통수를 때린다니까. 그렇지 않나?”
“듣기로는 사천제일룡이 독공(毒功)을 수련하다가 주화입마, 독마(毒魔)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야 사건으로 석녕에게 왼팔이 잘린 추혼검수가 말했다.
“듣기로는?”
석녕의 입에서 즉각 심상치 않은 어조가 튀어나왔다.
“웃! 죄송합니다.”
추혼검수는 즉시 허리를 조아렸다.
그는 천비대 무인들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정보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라면 ‘듣기로’와 같은 애매모호한 말은 절대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
추혼검수도 안다. 허나 정체를 파악하고자 보낸 잠사검마저 몰살당했으니 추측성 발언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다들 나가.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까.”
석녕은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따라붙으면 죽는다.’
결론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놈의 신분내력은 익히 짐작된다. 사천제일룡이다. 사천 당문에서조차 이단아로 내팽개쳐버린 독마다.
사람을 절대 버리지 않는 사천 당문이 조그만 미련도 없이 내버릴 정도이니 얼마나 위험한 인간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놈은 잠사검을 가차 없이 독살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육십여 명이나 되는 무인들을 모조리 잠재웠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따로 없다.
놈은 북검문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 마치 올 테면 얼마든지 오라는 식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독술 하나 만큼은 당대 제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뛰어나다. 이것 또한 잠사검을 몰살해 버림으로써 당당히 증명해냈다.
독인이란 독 몇 개 가지고 깨작거릴 때는 한 없이 비천해 보인다. 암수(暗手)를 전개해야만 살 수 있는 인간이니 불쌍하다 못해 가엽기까지 하다.
허나 사천제일룡 정도 되면, 북무림에 들어와 마음껏 독을 뿌려대는 정도가 되면 말이 틀려진다.
그와 대면하는 순간 중독되었다고 봐야 한다. 병기를 뽑기도 전에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완벽한 피독주(避毒珠)를 지녔거나, 만독불침의 몸이 아니라면 상대할 수 없다.
이건 무공이 아니다. 독을 견뎌내느냐 견디지 못하느냐 하는 치사한 싸움이다. 하독(下毒)할 틈을 주지 않으면 이기는 것이고, 틈을 주면 진다.
천비대에서는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만독불침과는 거리가 멀다. 독을 피하게 해줄 기물도 없다. 해독약 또한 없다. 현재까지 놈이 사용하는 독의 종류조차 판별해내지 못한 상태이니 해독약을 바란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놈을 어찌해야 하나.
내버려두자니 잠사검의 원한이 구천을 찌르고, 공격하자니 대가가 크다. 단지 큰 정도가 아니라 제압할 자신이 없다. 무공으로 싸우는 것이라면 추호도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치사한 싸움이라 미간이 찌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