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11
311
마야가 말했다.
잔접을 떼어놓는 행동은 아주 위험하다. 천멸도주의 목숨을 놓고 불장난을 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등의 대의명분이 없으면 하기 힘든 행동이다.
마야가 그런 행동을 했다고는 더욱 믿기 어렵다.
모르는 사람은 마야의 행동을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마야를 알고, 그와 천멸도주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불가해(不可解)한 일을 본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리리라.
마야는 궁왕을 믿었다.
이건 아주 큰 모험이다.
천멸도주는 궁왕에게 잡혀갔지만, 그녀의 목숨을 놓고 협박을 가해온 쪽은 잔접이다. 결국 잔접과 궁왕은 한패이거나 밀접한 관계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사이일까? 궁왕이 잔접 중에 한 명일까? 그럴 수 있다. 가장 타당성 있는 추측이다. 그럼 천멸도주의 목숨이 잔접에게 넘어간 사실이 쉽게 납득된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잔접과 궁왕의 관계는 죽음이 아니고서는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끈끈한 관계인 것만은 틀림없다.
잔접은 이 시대 최고의 비밀집단이다. 궁왕은 중원이 낳은 최강의 무인이다. 그런 사람들이 인연을 맺은 것이라면 쉽게 웃어넘길 성질이 아니다.
그래도 마야는 궁왕을 믿었다.
그는 무인이다. 몇 번을 죽었다 되살아나도 무인이 될 사람이다. 치졸하게 아녀자의 목숨으로 협박이나 하는 소인배가 아니다. 차라리 칼을 맞고 죽는 한이 있어도 정면 대결을 택할 사람이다.
잔접이 천멸도주를 죽이려 해도 그가 살려줄 게다.
마야는 마음을 홀가분하게 가졌다.
사방이 안개에 쌓여 뭐가 뭔지 분간하기 힘들 때는 판을 뒤집어야 한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은 뒤집어 버리고 내가 차린 밥상에서 저금을 들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혈귀대주의 죽음에서부터 송택에 머물기까지는 남이 짜놓은 판에 휘둘려 왔다.
이제는 다르다. 모든 것을 재정립한다.
마야는 암굴 속으로 사라지는 호채마를 끝까지 지켜봤다.
제일 먼저 언장은마가 길을 열었고, 시마가 뒤를 맡았다.
“혼자서 괜찮겠어?”
시마가 암굴로 들어서기 전에 염려스러운 듯 말했다.
마야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하기는…… 자넨 생각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니까.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라고.”
“그만 가시죠.”
시마는 흘흘 웃으며 암굴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마야는 일다경쯤 기다렸다가 암굴을 메웠다. 그리고 그 위에 큼지막한 바위를 올려놓아 입구를 철저히 가렸다.
당분간은, 한 시진이나 두 시진쯤은 입구가 발각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호채마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없어진 건 알아내도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리라.
마야가 송택을 나와 걸어간 곳은 주루였다.
우물쭈물 할 겨를이 없다. 기껏해야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을 뿐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여주부에 있는 마인들이 물밀듯이 밀어닥치리라.
사방에서 마인들이 죽어간다.
몇 십 년을 양민으로, 정도 무인으로 신분을 감추며 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마인으로 몰려 죽는다.
억울할 건 없다. 신분이 발각된 게 놀라울 뿐이지.
여주부에 있는 마인들은 이 모든 책임을 마야에게 물을 게다. 이 세상에서 반드시, 꼭 죽여야 할 인물로 마야를 꼽을 것이다.
그 전에 콘과 수를 처리해야 한다. 사천제일룡을 죽이든 살리든 해야 한다.
좌우지간 마인들의 공격이 시작될 때는 뒤통수에 칼이 쑤셔 박힐까 염려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콘보다 사천제일룡을 먼저 선택했다.
독공은 세상 사람을 두렵게 하지만 천적을 만나면 바로 무너지고 만다.
자신의 몸이야말로 독에 대해서는 천하무적이 아닌가. 녹광성초와 왕벌침으로 단련된 몸을 차지하고 영매술만 활용해도 독공 정도는 쉽게 해독할 수 있다.
그는 거침없이 주루로 들어섰다. 헌데!
“음!”
마야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흘렸다.
피부에 짜릿한 전율이 흐른다. 혀도 절반은 감각이 없고, 절반은 바늘에 찔린 듯 따갑다.
마야는 황급히 영매술을 운용했다.
모든 고통은 육신에서 일어나지만 정신이 느낀다. 정신이 감각을 통제하면 아픔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모공(毛孔)을 차단하거나 독을 밀어내는 것도 정신력만 강하면 해낼 수 있다.
파아아아……!
독기가 진기와 분리되어 경맥을 휘돌았다.
독기 중에도 인체에 유용한 것이 있다. 원래 독과 약은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법, 유용한 독기는 흡수하여 진기를 북돋고 지나친 독기는 배출한다.
마야는 비로소 숨쉬기가 편해졌다.
“상당한 독이군.”
“크크! 놀랍군. 북무림을 뒤흔든 독공인데도 마야에게는 역시 안 되는 건가?”
사천제일룡이 웃으며 나타났다.
“조금 장난을 해보았는데, 안색이 별로 안 좋네? 전에 혹독하게 당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준비를 좀 많이 했는데, 버틸 수 있겠어?”
“전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준비를 많이 할 게 아니라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어야지. 이렇게까지 거리를 내주고도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이게 가까운 건가?”
사천제일룡은 여유만만했다.
그는 이층 난간에 서 있었다. 마야는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층으로 올라서는 계단까지가 열 보, 계단이 대략 열여섯 개에서 스무 개이며, 이층으로 올라선 후에도 사천제일룡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약 대여섯 보를 움직여야 한다.
두 사람의 신법이 비등하다고 가정하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다.
마야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무척.”
“무척? 하! 그럼 내 목숨은 내게 아니겠구만. 이런 거리에서 내 목숨을 네가 쥐고 있다. 에이, 허풍도 너무 심해. 허풍도 믿을거리를 주면서 쳐야지 믿지.”
“난 이 자리에서 일 초를 펼칠 것이야. 내 생각에는 네게 주어진 기회도 일 초밖에 없어. 잘 생각해서 해.”
마야는 적과 싸우는 게 아니라 사형제와 비무를 하는 듯 가볍게 말하며 손을 깍지 껴 우두둑 소리가 나게 꺾었다.
“일 초? 미련한…… 벌써 저승으로 끌려가 염라대왕 앞에 앉아있는 줄도 모르고.”
“내 앞에 염라대왕이 있다. 실없기는……”
순간이다. 사천제일룡의 눈가에 이채가 번뜩였다. 그것은 놀라움과 곤혹스러움이었다.
마야가 만독불침이라는 건 안다. 어떠한 독에도 중독되지 않는 지겨운 놈이라는 것도 안다.
아니다. 이 말은 틀렸다. 냉정하게 말하면 만독불침이란 없다. 면역력이 강할 뿐이지 이것저것 세상에 있는 독을 모두 쏟아 부으면 어느 것엔가는 걸려들게 되어 있다.
사천제일룡은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어 마야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눈다는 건 독인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상대는 대화에 신경 쓰느라, 또는 독인의 몸짓, 손짓에 주목하느라 정작 독이 풀릴 때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주시하는 눈을 속이고 독을 푸는 것쯤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독과 더불어 십 년 이상을 지낸 사람을 앞에 두고 하독하지 못하게 감시한다는 건 죽으려고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마야가 말했나? 이렇게까지 거리를 주고도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냐고? 되묻고 싶다. 도대체 어느 정도 거리를 떼어놓아야 독인에게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
사천제일룡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지니고 있는 독을 절반 이상이나 풀어냈다.
피부를 썩히는 부독(腐毒), 핏줄을 따라 흐르는 혈독(血毒), 호흡기를 따라 들어가 폐를 망가트리는 기독(氣毒)……
천비대를 몰살시켰으며, 당문십기까지 무너지고 만 절독들이다.
그런데 마야는 꿋꿋이 서있다.
‘이래도?’
피부에 닿는 즉시 살이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굉독(汯毒)을 뿌렸다. 당문에서도 사용이 금지된 금독이다. 굉독을 지닌 자는 신분 여하를 불문하고 무림 공적으로 간주한다는 선포도 있을 만큼 맹독 중에 맹독이다.
마야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굉독이 무서운 점은 독효(毒效)의 지속성에 있다. 맹독이면서도 몇 날 며칠을 흩어지지 않으니, 독을 뿌린 곳은 생명이 살지 못하는 사지(死地)가 된다.
주루가 그랬다. 앞으로 십여 일간은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거부하는 염라대왕의 땅이 되었다.
사천제일룡도 독기를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해독약(解毒藥)을 복용했고, 피독주(避毒珠)를 지녔으며, 웬만한 독쯤은 먹고 마실 수 있을 만큼 면역력이 강한 그였지만 굉독의 독기를 접하자 경련이 일어났다.
마야는 더욱 심해야 한다. 그는 굉독의 중심부에 있다. 그의 발아래에서 굉독이 피어올랐으니 죽어도 열 번은 죽어야 한다.
지독한 놈, 끄떡도 않는다.
사천제일룡은 당문의 문양이 찍힌 파쇄노(破碎弩)를 꺼냈다.
파쇄노는 강력한 암기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세전(細箭) 스무 개를 쏘아낸다. 화살 안에는 비폭잔살독(飛瀑殘殺毒)도 들어 있다.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공식적으로 표명된 마독.
당문십기는 파쇄노와 굉독을 회수하기 위해 사천을 떠나 적지인 북무림으로 뛰어들었다.
한 인간의 목숨을 확실하게 끊을 수 있는 파쇄노가 그의 손에 들려있다.
“망할!”
파쇄노만은 안 써도 될 줄 알았는데……
타악! 쒜에에엑!
용수철 튀기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스무 개의 세전이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쏘아져갔다.
파쇄노는 세전 자체가 뛰어난 병기다. 웬만한 고수는 세전조차도 막아내지 못한다. 세전의 빠르기를 감당해내는 자, 능히 특급고수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타탁! 타타탁! 타탁……!
예상대로 세전은 마야를 맞추지 못했다.
간발의 차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지나갔다. 아니, 그만한 차이로 피해냈다.
피익……! 치이익……!
세전은 땅에, 벽에, 탁자에 꽃혔다. 그리고 꽃히는 순간, 흰 연기를 피워냈다.
마독으로 분류된 비폭잔살독이다.
‘잘 있거라!’;
사천제일룡은 황급히 신형을 띄웠다.
비폭잔살독은 바람이 없어도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특성이 있다. 주루 하나 정도 휘감는 데는 일다경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사천제일룡조차도 비폭잔살독만큼은 감당해 낼 자신이 없다.
주루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때!
“독인이 독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독을 펼쳐냈으면 같이 감당해야지 도주라니. 하하하! 사천제일룡이라는 말도 다 허언이었구나!”
마야가 어느 때처럼 조용조용 말했다.
사천제일룡은 편히 듣지 못했다.
“헉!”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질렀다.
마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송곳이 되어 가슴을 찌른다. 진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사지가 무력해진다. 꼭 중독된 사람처럼!
“적멸주!”
“말했잖아. 이만한 거리를 주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했냐고. 약속대로 일 초만 전개했어. 일초에 널 제압하지 못했으니, 이젠 가도 좋아.”
자신에게 독이 있었다면 마야에게는 소리가 있었다.
자신은 독이 번지는 공간 안에서 제왕노릇을 할 수 있지만 마야에게는 소리가 들리는 모든 공간이 그의 영역이다.
거리 면에서 독보다 소리가 한 수 위였다.
“빌어먹을!”
사천제일룡은 도주하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늦었다. 비폭잔살독이 피부를 촉촉이 적시고 있다. 독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느낌도 없겠지만 사천제일룡은 비폭잔살독이 어디까지 번졌는지 정확히 감지해냈다.
마야도 그렇다. 그렇기에 이제 가도 좋다고 말한 게다. 독기에 휩쓸려 가봤자 소용없을 테니까.
‘후웁!’
숨을 크게 들이쉬어 진기를 다시 수습했다.
독에 중독되었어도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 비록 해약이 없는 마독에 중독되었지만 냉정하게 이상증세를 파악해야 한다.
숨이 막힌다.
‘호흡 차단!’
진기를 휘돌려 폐를 자극했다. 목구멍에서부터 폐까지 연결된 기도(氣道)에도 진기를 집중시켜 호흡을 보완했다.
전신이 난자당하는 듯 극심한 고통에 휘감긴다.
‘혈관손상!’
진기를 전신에 유포시켜야 한다. 경맥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게 해야 한다. 혈관을 보호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 허나 진기운행을 순행시키면 폐와 기도가 침습당한다.
‘졌군.’
당문에서 전해오는 어떤 해독법으로도 비폭잔살독을 막아내기에는 버겹다. 아니, 비폭잔살독은 손 쓸 시간을 주지 않는다. 중독 즉시 전신을 휘젓어 속수무책으로 만든다.
사천제일룡은 마야를 쳐다봤다.
마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단을 밟아 올라왔다.
그에게서는 중독 증상이 보이지 않았다. 혈색도 정상이고, 호흡도 정상이다. 하다못해 살갗에 종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만독불침……’
정말 지겨운 놈이다. 이토록 질긴 인간이 있나.
오면서 숱한 사람을 죽였다. 이 독, 저 독 시험하느라고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죽였다.
시험, 시험, 시험…… 또 시험.
이미 증명된 독이다. 새삼 시험할 필요가 없다. 하독이 염려스럽지도 않다.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