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14
314
적멸주와 마령음을 적절히 사용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응용하여 상대를 주화입마 직전까지 빠트리는 경지에 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 제이성은 단지 안락을 주었을 뿐이지만 마야에게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시켜 주었다.
여주부의 유계 마인들에게 곽산은 그런 곳이리라.
그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질서를 세우는 거다.
각기 떨어져 있던 마인들이 냉엄한 조직체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시작된다.
부리는 자가 생기고, 부림을 받는 자가 나온다.
그 다음이 아리송하다. 유계 총단의 전갈을 받는 것이 먼저인지, 선급한 일을 해결한 후에 연락을 취하는 것이 먼저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이번과 같은 경우에 선급한 일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마야를 죽이는 것이다.
유계의 주공은 마인들에게 얼마만큼의 자유를, 권한을, 재량권을 주었나?
전자 같으면 상대하기가 쉽다.
호채마와 버금가는 자들이 명령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다면 전력을 절반쯤 삭감시켜도 좋으리라.
이는 주공이 마인들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강력한 무공을 지닌 자들까지도 일일이 통제해야 안심이 된다는 의미이니, 이러한 조직은 조금만 건드려도 균열이 생긴다.
후자의 경우에는 참으로 피곤한 싸움이 될 게다.
자유 재량권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면서 유계가 움직이는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모든 판단을 유계 총단에 맞춰서 스스로 조율한다는 뜻이다.
후자일 경우에는 무공과 더불어 지략, 책임감, 충성심까지 갖췄다고 봐야 하니 정말 힘든 싸움이 될 게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언제쯤 될 것 같아?”
다담선자에게 물었다.
“빠르면 오늘 저녁이에요.”
“늦게는?”
“……”
다담선자는 배시시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늦는 경우는 없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총단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 반격해 온다.
다담선자는 힘든 싸움, 후자를 생각하고 있다.
마야 역시 다담선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뛰어난 무공을 지녔으면서 수십 년의 세월을 잡초처럼 웅크리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특히 특정한 목적이 없는 마인의 경우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유계는 그 일을 해냈다.
표면적으로는 정도 무림의 위세에 눌려 숨어든 것이지만, 안을 살피면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개방은 중원 무림이 발칵 뒤집힐 대전쟁의 화살을 당긴 것인지 모른다.
“오늘 저녁…… 시간이 별로 없군.
서녘 하늘이 붉은 노을로 물들었다.
“오밤중에 오려나.”
수검이 건포를 씹으며 말했다.
유계가 오늘 공격해 오리라는 건 짐작일 뿐이다.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가능성이 더 높다.
호채마는 막연한 짐작만 믿고 저녁식사조차 건포로 때웠다.
밥을 짓는 일조차 쓸데없는 체력낭비다.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고, 마음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혀놔야 한다.
“자식들! 어떤 식으로 올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붉은 노을을 새까만 색으로 가리며 한 무리의 파리가 날았다.
쒜에에에엑!
허공을 갈기갈기 찢어내는 파공음은 한 발 늦게 들렸다.
“공격이닷!”
수검은 황급히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타탁! 타타타타탁!
싸리나무로 바위를 쓸어 칠 때처럼, 콩을 볶을 때처럼 요란한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뭐야?”
마도가 바위에 몸을 숨긴채 물었다.
화살로 생각했다. 파공음으로 미루어 보건데 화살이 틀림없다. 헌데 부딪치는 소리가 다르다. 바위에 맞은 화살은 꽂히거나 튕겨 나가야 하고, 땅이나 나무에 맞은 화살은 벌집을 새겨놓아야 옳다. 그러나 바위를 휩쓴 소리는 무엇이 강타하는 소리가 아니라 우직끈 부서지는 소리에 가깝다.
“망전(網箭)이라는 거요.”
사망혈인이 고개를 삐죽이 내밀어 사방을 훑어보며 말했다.
“망전? 망전이 뭐야?”
“화살대로 세죽(細竹)을 썼기 때문에 바위처럼 강한 놈과 부딪치면 산산조각나는 화살이오. 문제는 안에 뭘 넣었느냐인데, 놈들이 우릴 불구이로 만들 요량인지 기름을 잔뜩 넣었소.”
기름이 흐르고 있다는 건 진작 알았다.
굳이 바위가, 땅이, 나무가, 풀이 축축하게 적셔져 있다는 사실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사방에서 끈적이면서도 매캐한 기름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땅속으로 도망갈 생각은 버려야겠군.”
언장은마가 혀를 찼다.
쒜에에에엑! 타타타타탁……!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중에도 화살은 연신 날아왔고, 세상천지를 온통 기름천지로 만들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세죽에 기름을 담아봤자 얼마나 담겠냐 싶었다. 헌데 수십 대가 부서지면서 기름을 쏟아내고, 그 뒤를 이어 또 수십 대가 날아오고…… 쉼 없이 날아온 화살은 기름독을 쏟아 부은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땅이 질퍽거린다. 폭우가 쏟아졌을 때처럼 기름이 내를 이루어 흘러간다.
옷이며, 검이며, 피부며…… 몸 곳곳에도 기름이 튀었다.
“하! 이거……”
시마가 할 말을 잃었다.
살인 작업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다. 호채마가 머물던 곳은 온통 기름천지가 되었다. 이제 불만 당기면 빠져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한다. 순식간에 방원 오십여 장이 불바다가 될 터인데, 어찌 빠져나갈 수 있겠나. 하물며 옷까지 기름에 절여진 상태다.
“어떻게? 뭘 해보려면 지금 해야 할 것 같은데?”
시마가 연신 날아오는 화살 무더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당연한 생각이다. 기회가 있다면 지금뿐이다. 기름에 불길이 당겨지면 삶을 포기해야 한다.
허나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화살은 한 군데서 날아오는 게 아니다. 동그랗게 포위된 상태에서 집중적으로 화살 세례를 받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굳이 불길이 당겨지지 않아도 화살에 맞아 죽을 판이다.
포위되었다.
놈들은 차근차근 계획한 대로 공격해온다.
“혈인.”
마야가 사망혈인을 불렀다.
“안 돼요. 역공을 취하거나 불길을 역류 시킬 방도가 없냐고 묻는 거면 안 된다고 할 수밖에 없네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독인!”
“크크! 이제 앞뒤 다 빼고 그냥 독인인가? 크크크! 좋아, 좋아. 마음대로 불러. 크크!”
“독인!”
“안 돼. 이놈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야. 암기라고 해봐야 거리가 미치지 않고, 독은 크크! 불 앞에서는 맥을 못 추지.”
“난 부르지도 마. 기름 먹인 땅은 파봤자 도루묵이야. 여기는 물 있는 땅이라서 파고들어가봤자 기름이 바로 따라와. 불길에 죽는 건 마찬가지야.”
언장은마가 사천제일룡의 말을 바로 받았다.
화약과 독 그리고 지둔술이 힘을 전혀 못 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공격해올 것이라는 사실까지 예측했지만 다짜고짜 기름부터 퍼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름으로 땅을 막고, 다가섬을 막고, 유유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유계 마인들에게는 최상의 공격 방식이다.
“뭐야, 그럼 아무도 손쓰지 못한다는 거야? 빌어먹을! 그럼 나가자고. 이판사판 검이라도 한 번 휘둘러 봐야지.”
“후후! 이번에는 당했어. 이렇게 공격하는 방법도 있었군. 무공으로 겨루리란 생각을 한 게 잘못이야. 이번 실수, 잊어버리면 안 돼. 다담, 내가 잊더라도 다담은 잊지 마. 다담은 내 머리니까. 그건 그렇고…… 그럼 이제 빠져나가야지?”
마야는 유유자적했다.
“빠져나가? 뭔 방법이……?”
시마가 다급히 묻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
마야가 입을 열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두 마디만 한 것이 아니라 계속 말하고 있다.
중얼중얼중얼……
무슨 소리인지는 들리지 않으니 알 수 없다.
그렇다. 마령음, 아니면 적멸주다. 전에는 소리를 내어 말했는데, 이제는 아예 소리를 죽이고 입만 벙긋거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가 귀를 기울여 봐도 전혀 들을 수 없다.
“크크! 크크크!”
사천제일룡이 제일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우우우우웅……!
이제는 호채마 모두가 확실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우렁찬 날갯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익숙한 소리다. 한때는 무섭기도 했지만 이제는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한 왕벌들의 소리다.
“벌들이 깨어났네!”
일령이 반색했다.
왕벌이 어디서 추운 겨울을 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만에서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이동만 한 탓에 모아놓은 꿀이 전혀 없었다.
무엇을 먹고 버틴 것일까?
왕벌에게 지둔(地遁)을 명한 사람도 마야고, 다시 깨운 사람도 마야이니 그는 알 것이다.
“왕벌이! 그래, 봄이야. 왕벌이 나올 때가 되었어!”
금연화도 밝은 표정으로 왕벌을 반겼다.
그때, 환청(幻聽)이 귀를 간질였다.
― 역지사지(易地思之). 유계가 왕벌을 만나면? 일단은 뒤로 빠져야겠지만 차려놓은 밥상을 내버려둘 수는 없겠지. 불화살 한 대 날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러니 빨리 빠져나가야지? 왕벌이 동쪽에서 오니 동으로 가는 게 좋겠군.
입을 벌려 소리로 말하면 숨 몇 번 들이쉬어야 들을 수 있을 만큼 긴 말이다. 허나 환청은 실로 찰라간 머릿속을 울렸을 뿐이다.
쒜에엑!
금연화가 먼저 신형을 쏘아냈다. 그녀만 움직인 게 아니다. 움직임은 사방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쒜에엑! 쒜엑!
일령, 마도, 수검…… 너나 할 것 없이 거의 동시에 신형을 띄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을 망전으로 뒤덮여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 틈이 없었다. 망전에 고슴도치가 되는 한이 있어도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다.
유계 마인들도 바보가 아니다. 망전 자체만으로는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다.
그들은 호채마가 움직이기 무섭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화살을 쏘아냈다.
화아악!
불화살이 언제 날아들었나!
방원 오십여 장에서 일제히 불길이 솟구쳤다. 무쇠도 녹일 만큼 강렬한 열기가 회오리치며 사방을 휩쓸었다.
제6장 육룡권(陸龍卷) ― 회오리 바람
1
기름과 불, 넓은 지역을 일시에 초토화시키는 데는 이보다 좋은 조합도 없다.
살아있는 생물은 개미 한 마리조차 살아날 수 없다. 땅 속에 있는 지렁이도 불에 타죽는다. 언장은마가 말한 것처럼 불길은 땅 위에만 번지는 것이 아니라 땅속까지 파고든다.
기름은 사흘 밤낮을 타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부어졌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다. 지척에 물웅덩이가 있다 해도 뛰어들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빌어먹을!”
사천제일룡이 인상을 찡그리며 황급히 하얀 가루를 한 움큼 꺼내 흩뿌렸다. 그러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기적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났다.
치이익!
가루는 불에 닿자마자 기이한 소리를 내며 화기(火氣)를 죽였다.
“죽일 놈, 한 수는 가지고 있었군.”
시마가 싫지 않은 소리를 하며 홀짝 뛰어 사천제일룡 곁으로 다가섰다.
누가 시킬 게 없었다. 목숨은 하나다. 또한 삶을 구하는 행동은 본능이다. 사천제일룡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바짝 다가설 수밖에 없다.
치이익! 치익!
사천제일룡의 손은 눈부시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쇠도 녹여버릴 불길이 기적처럼 사그라졌다.
허나 인간의 손길은 유한하다. 사방을 에워싼 불길은 폭풍이 되어 다가오고, 헤어날 곳은 없어 보인다.
“이게 뭔데 불길을 제압하는 거죠?”
일령이 토끼눈이 되어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말에 일일이 대답을 해줄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녀 역시 대답을 듣고자 물은 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희귀한 물건에 호기심을 드러냈을 뿐이다.
“한천석중분(寒川石重粉), 여유 있으면 나눠 갖는 게 어때? 그게 좀 효율적일 것 같지 않아?”
마야가 장난처럼 말했다.
그제야 호채마는 불길을 죽인 가루에 한천석중분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는 걸 알았다.
“한천석중분?”
“한천…… 차가운 성질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천하에 단 한 방울 밖에 없는 절독과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극독을 구분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모두 ‘치명적인 독’이지 더도 덜도 아니다.
한천석중분은 얼음이나 다름없는 음석(陰石)을 갈아서 만든 음한지독(陰寒之毒)이다. 독분을 삼키면 얼음으로 만든 송곳을 삼킨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온다. 극도의 한기에 내장이 파괴되면서 온갖 고통 속에 피를 토하고 죽는다.
그런 상독(上毒)을 한낱 불길을 잡는데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사천제일룡의 눈에서는 불이 솟구쳤다.
“넌…… 넌……!”
“뭐?”
“아니다. 좋아. 후후! 좋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날이 가면 갈수록 놀라움 투성이군.”
사천제일룡은 등을 내밀었다.
“행낭 속에 다섯 봉지 있어. 기껏 해봐야 다섯 장 내지 여섯 장 정도밖에 끄지 못해. 그걸로 알아서 살아 나가봐. 내게 한천석중분이 있는 건 언제 알았지?”
마야는 대답하지 않고 급히 행낭 속에서 독분을 꺼내들었다.
대답할 겨를이 없기는 했다. 불길은 촌각의 여유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