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15
315
헌데, 호채마는 마야가 독분 다섯 봉지를 꺼내드는 순간, 마야가 어떻게 한천석중분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한천석중분은 굉장히 차다. 기름종이에 감싸여 있는 데도 한기가 풀풀 풍긴다. 한 겨울에 고드름을 손에 쥐었을 때와 비슷한 정도라고 하면 알맞을 게다.
마야는 한기를 먼저 느꼈을 것이고, 한기의 정체를 찾아가다가 한천석중분에 이르렀을 게다.
마야가 그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창피하게도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다.
적이 급습해 온다는 점을 알고 감각을 단단히 일깨워놓았으면서도 지척에서 일어나는 한기를 감지해내지 못했다.
그 차이는 삶과 죽음을 가른다.
마야가 사천제일룡을 다그치지 않았다면 그는 혼자서 살길을 모색했을 게다. 마야가 일초를 펼쳐내지 못할 만큼 거리를 넉넉히 뒀다면 당장 빠져나갔을 게고.
잊지 말아야 한다. 사천제일룡이 비록 같이 행동한다고 해도 그의 마음속에는 항시 마야를 죽이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또한 무인으로써 창피함을 느껴야 한다. 이토록 특이한 기운이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는데 발견하지 못한 점을.
“이거 한 봉지면 석자 내지 넉 자 정도 불길을 죽일 수 있을 거야. 화마가 다시 덮치기까지는 걸리는 시간은 이걸 던진 곳에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에 달려있겠지. 촌각에 불과할지, 우리가 모두 건너뛸 수 있도록 시간을 줄지…… 허니 그건 도박으로 남겨놓고, 도약한다. 모든 게 단 한 번 밖에 기회가 없지만 이번에는 정말 한 번뿐이야. 명심할 건, 어느 누구라도 지체하면, 아주 잠깐이라도 한 눈을 팔면 뒷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간닷!”
마야는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내뱉은 후, 냅다 신형을 띄웠다.
퍽! 치이익!
첫 번째 봉지가 터졌다.
하얀 가루가 뿌옇게 피어나더니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곳으로 하늘하늘 떨어져 내린다.
불길은 뜨거운 열기를 쏟아내어 독분을 밀어내려 했지만 독분은 자석에 딸려가듯 불길 속으로 스며들었다.
호채마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탁탁! 타타타타탁!
거의 같은 순간에 열세 명의 발자국이 바닥을 찍고 솟구쳤다.
퍽! 치이이익!
두 번째 봉지가 터지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둥그렇게 빙 둘러서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았다.
호채마가 불길과 그들 사이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함을 유지하되, 긴장은 놓지 않았다.
“멸신구관을 빠져나왔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을 이까짓 불 정도로 잡을 수는 없겠지. 한 수 배웠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오는 방법이 있었군.”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하나, 둘, 셋, 넷……”
일령이 그들을 한 명, 한 명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수를 헤아렸다.
일시 시간이 정지했다.
“열다섯. 열여섯……”
수를 세는 일령의 음성이 꿈결처럼 들려왔다.
호채마는 운이 좋다는 뜻 그대로 용케 불길을 빠져나왔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암울함이었다.
“저 놈들…… 뭐하자는 거야?”
시마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스물일곱.”
일령이 헤아림을 마쳤다.
스물일곱 명이다. 밀지에 적힌 숫자와 딱 들어맞는다. 이들은 유계 마인이다.
호채마는 유계 마인과 자신들의 차이점을 행동방식에서 찾아왔다.
정도에서 마공이라고 낙인찍힌 무공을 수련했을망정 하늘을 우러러 떳떳함을 주장할 수 있다면 마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인이 아닌 자는 죽이지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도전하고 싸웠으며, 이겼다. 이기면서 목숨까지 살려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 정도로 무공이 강하지 못해 이기는 쪽만을 신경 썼다.
유계 마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쾌락을 위해 살인을 한다.
이만한 차이가 어디 있겠는가.
굳이 편을 가르자면 유계 마인은 지상에서 없어져야 할 살인마들이지만 호채마는 패도(覇道)를 추구하는 강자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생각해 왔다.
아니다. 더 큰 차이가 있었다. 호채마는 사람이지만 유계 마인들은 감정 없는 목석이다.
콘이나 수처럼 완전히 이지를 상실한 백치인간이면 또 모른다. 그러면 살인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은 애꿎은 목숨을 죽이는 일은 없으리라.
유계 마인은 이지를 상실해서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악마의 유희를 즐기는 탓에 감정이 말살되어 버렸다.
이들에게 타인의 목숨이란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한 장난감에 불과할 뿐이다. 더불어서 자신의 목숨 또한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세상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이 조금도 없는 진정한 살인귀다.
“저놈들 몸에 두른 게……”
“말할 게 뭐있어. 화약이지.”
언장은마와 시마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주위를 둘러싼 스물 일곱 명의 마인들 중에 병기를 쥔 자는 대여섯 명에 불과하다. 다른 자들은 아예 병기조차 소지하지 않았다. 몸통에 둘둘 둘러맨 화약덩이밖에 지닌 게 없다.
그런데 웃는다. 눈에서는 살의(殺意)가 줄줄 쏟아져 나오는데, 입은 뒤틀린 웃음을 토해낸다.
동귀어진(同歸於盡)밖에 떠올릴 수 없는 상황이다.
이들은 진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조차도 쾌락으로, 유희로 즐기는 것 같다.
미친놈들 아닌가!
우우우우웅……!
그들 뒤로는 마야가 부른 왕벌들이 맴돌았다.
수천, 수만 마리나 되는 벌떼가 일단의 무리를 노리며 하늘을 휘젓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다.
유계 마인들에게는 화약을 터트릴 시간조차도 없는 듯했다. 실제로 그들이 최상의 신법을 펼친다 해도 왕벌들의 습격에서 빠져나오기는 불가능할 듯 싶었다.
왕벌이 유계마인들보다 한 수 앞선다.
마야도 이런 점을 생각하고 왕벌을 불렀다. 허나 정작 마인들을 지척에 놓고는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마인들은 곱게 죽지 않는다. 왕벌이 달려드는 순간, 일제히 자폭(自爆)할 게다.
이들이 지닌 화약은 위력이 어느 정도나 될까?
왕벌들이 큰 손해를 당하는 선에서 그칠까? 아니면 지금도 활활 타오르는 있는 불길 속까지 영향을 미칠까?
후자라면 사천제일룡에게서 한천석중분을 얻은 보람이 없어진다. 호채마는 독분을 두 봉지도 채 터트리기 전에 황천길을 먼저 밟았을 게다.
그런 이유가 없었다면 불길을 빠져나오자마자 보게 된 광경은 왕벌의 공격에 무참히 죽어간 시신 스물일곱 구였을 것이다.
“마야, 한 마디만 묻는다.”
“……”
“유계로 가자.”
“……!”
마야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전에 들어봤던 소리다. 한때, 유계 마인들은 그를 유계로 데려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쫓아왔다. 그리고 거절하는 즉시 살수를 펼쳤다.
유계로 가든가, 죽든가.
당시 유계 마인들의 구호였다.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연연하는가. 확실하게 적이 되어버린 마당에 손을 맞잡고 유계로 전향할 리 있는가. 안 될 것을 빤히 알면서 묻는 건 무슨 연유인가.
그가 말을 이었다.
“주공께서 널 꼭 만나고 싶어하신다.”
“……”
이번 말에도 침묵했다.
주공이 마야를 필요로 한다? 왜? 주공이 마야를 절실히 만날 이유가 있나? 이것이 혹여 그가 무림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유와도 연관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는 대로 그의 무공에 어떤 하자가 있는 걸까? 절정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주화입마는 아닐까?
“유계로 가서 주공과 면담만 하면 된다. 가자.”
이 자는 다른 자보다 말이 많다. 다른 자들은 뜻을 거스른 순간 살수를 펼쳐왔는데, 이 자는 조금 여유 있다.
“아쉬우면 찾아오겠지.”
“뭐?”
“세상이치가 그렇지 않나. 목마른 자가 물을 긷는 법이거든. 주공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지.”
“풋!”
그가 웃었다. 마야의 거절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말을 꺼낼 때부터 승낙은 기대하지 않았으니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는 투다.
“그럼…… 시작할까?”
“혈인!”
마야가 급히 사망혈인을 불렀다.
유계 마인들이 화약을 동여매고 있다면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사망혈인뿐이다.
“하나당 방원 십장!”
사망혈인도 급히 말했다.
마야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지만 자신 역시 손을 쓸 수 없다는 뜻이다.
사망혈인이 어찌 화약을 알아보지 못하랴. 그에게 화약이란 귀여운 자식이나 다름없다.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만 맡고도 성깔이 얼마나 있는 놈인지 짐작한다.
유계 마인들은 무서운 화약을 소지했다. 당금 무림에서 하나당 방원 십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화약은 흔치 않다.
허나 사망혈인에게는 그보다 더 무서운 화약이 백 개나 있다.
만멸폭!
백 개 중 한 개만 이 자리에서 터트려도 유계 마인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
유계 마인들을 상대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단지 마야가 왕벌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호채마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기에 쓸 수 없는 것뿐이다.
“써!”
마야가 단 한 자로 행동을 지시했다.
망설일 틈은 없었다. 유계 마인들은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지쳐 들어왔다.
이들처럼 죽음의 불구덩이 속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드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에따 모르겠다!”
사망혈인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만멸폭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치이이익……!
심지가 타들어간다. 유계 마인들이 지닌 것보다 열 배는 화력이 강한 화약이 폭발을 향해 다가간다.
화력 범위가 방원 백 장이다. 백 장 안에 있는 건 개미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한다.
숨는 일은 온전히 개인 몫이다. 백 장 밖으로 물러서든, 땅을 파고 기어들든…… 어떤 행동이든 촌각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우우우우웅……!
벌떼의 반응이 제일 빨랐다. 왕벌들은 힘찬 날갯짓을 펼치며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갔다.
호채마도 숨었다.
숨을 곳이라고 변변할까. 뒤는 불길이, 앞은 유계 마인들이 가로막아 섰다.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나무도 없고, 바위도 없다. 대부분이 땅에 바짝 엎드린 게 고작이다.
‘어림없어.’
자신이 만든 만멸폭이다. 그 위력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안다. 만멸폭이 터지면 땅에 엎드린 정도로는 방호(防護)가 되지 않는다. 모두, 모두 죽는다.
동귀어진은 유계 마인들이 펼치는 것이 아니라 사망혈인이 펼친 셈이다.
‘적게, 가능한 적게……’
사망혈인은 만멸폭을 터트리기에 적합한 곳을 부지런히 찾았다.
가장 이상적인 곳은 허공이다. 그동안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지상에서부터 삼, 사 장 정도 높이의 허공에다 터트렸을 때 만멸폭의 위력이 최대한으로 나왔다.
가장 안 좋은 곳은 구덩이다. 구덩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화력 범위가 줄어들었다.
구덩이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다. 숨 두어 번 몰아쉴 사이에 찾지 않으면 유계 마인들과 육박전을 벌여야 한다.
없다. 아무리 찾아도 움푹 들어간 곳이 없다. 그럼 땅 위에다 터트려야 하는데…… 아무래도 살 길이 없다.
화약의 살상력을 좌우하는 요건으로 장애물이 얼마나 있느냐도 포함된다.
지금과 같이 사방이 확 트인 개활지는 하늘이 화인(火人)에게 선물해준 최적의 땅이다.
다른 때, 다른 상황이었다면 웃음이 실실 흘러나오련만 지금은 입안이 바싹 타들어간다.
툭툭!
그의 어깨가 건드려졌다. 마야다. 그가 사망혈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사망혈인이 쳐다보자 마야는 눈짓으로 화약을 가리켰다.
심지가 거의 다 타들어갔다. 바로 던지지 않으면 손 안에서 터질 판이다.
“더, 던질 곳이……”
그러자 마야가 다시 눈짓을 했다. 유계 마인들이 달려오는 쪽을 향해, 다시 한 번 똑똑히 보라는 듯이.
사망혈인이 고개를 돌리자…… 믿을 수 없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유계 마인이 쓰러지고 있다. 다른 자들은 모두 달려오는데 유독 한 명만 몸부림치며 쓰러진다.
왕벌은 모두 떠나간 게 아니다. 한 마리가 남아서 지금 이 순간, 유계 마인의 정수리에 침을 꽂아 넣고 있다.
“됐어!”
사망혈인은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지르며 손에 든 만멸폭을 힘차게 내던졌다.
목표로 한 곳은 유계 마인이 쓰러질 곳이다.
쓰러지는 유계 마인은 만멸폭의 폭발력을 최대한으로 죽일 것이다. 온 몸으로, 살과 뼈와 피로 터져나가는 힘을 감싸 안으리라.
한 인간의 몸뚱이가 만멸폭의 화력을 얼마나 죽여줄지는 미지수이지만 지금으로써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마야의 생존능력은 하늘이 내렸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는 유계 마인과 대화 몇 마디를 나누는 아주 잠깐 동안 득이 될 것과 실이 될 것을 샅샅이 훑어냈다. 만멸폭의 폭발력은 물론이고, 살상 범위, 주변 지형…… 모든 걸 머릿속으로 계산해 냈다.
일견후즉파라는 능력만큼이나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 또한 빠르고 정확하다.
마야는 모든 가능성을 저울질한 후에야 왕벌을 물러서게 했다. 오직 한 마리만 남기고.
마야의 계산은 정확할까?
꽝! 꽈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열기와 폭풍이 사방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