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19
319
이 자는 누굴까? 제일무신가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분명한 건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초고수라는 거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여러 차례 기습 기회를 노렸지만 사내는 실낱같은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사내가 단도를 뽑았다.
“시간이 많으면 맛있는 걸 듬뿍 먹여줄 텐데, 아쉽게도 빨리 가야 돼. 그래서 조금만, 맛보기만 보여주지. 장담하건데 그걸로도 충분할 거야.”
쉐에엑!
단도가 허공을 그어왔다.
“웃! 후욱!”
약왕부주는 신법을 펼치려고 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다른 놈들이 그가 이동하려는 곳을 선점했다. 포박만 하지 않았지 결박당한 것과 진배 없다.
단도는 어김없이 육신을 찢고 들어왔다.
“아파?”
“이 정도로? 좀 더 힘을 써봐.”
옆구리에 틀어박힌 단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위로 쳐들렸다.
싸아악!
갈비뼈 한 대가 잘려나갔다.
“아파?”
“후욱! 후욱!”
약왕부주는 이마에서 흘러내린 진땀을 식히느라 잠시 숨을 골랐다.
근골이 강해도, 내력이 심오해도 생뼈를 자르는 데는 장사가 있을 수 없다.
이들 말이 맞다. 맛보기만 보여주고 있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헌데…… 하지만 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하는지 모른다. 아니, 알고서 나타났지만 지금은 잊어먹고 있다.
누구? 약왕부주다.
그는 사내들이 나타나기 전에 단환 한 알을 삼켰다.
전신 신경을 마비시켜 무감각 상태로 만들어 주는 약이다.
이들은 약왕부주 정도 되면 이 정도 약을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는 것을 알았어야 한다.
“보아하니 참을 만 하군.”
“결혼했나?”
“……?”
“못했을 거야. 이렇게 힘이 없어서야 어디 써먹겠…… 큭!”
단도가 다시 쳐들렸다. 그리고 갈비뼈 하나를 또 잘라냈다.
극심한 통증이 밀려온다. 신경이 죽어 무감각해졌지만 생뼈를 자르면 신경을 건드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고통이 치민다.
“많이 참는데…… 좋아. 인정해. 하지만 여기까지. 이젠 목적지가 어딘지 말해. 안 한다고? 이걸 알아야지. 우린 자네 가족사를 줄줄이 꿰고 있어. 노모가 있고, 여편네가 있고, 자식은 뭐 그리 많이 낳았어? 아홉이나 되더만.”
가족을 협박하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다.
단도가 움직였다.
싸악!
“끄윽! 조금…… 조금 더…… 힘을 내!”
“쯧! 답답한 사람하고는.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야. 맛보기만 보여주겠다고 했으니까 이만하지.”
사내가 단도를 뽑아냈다.
‘마지막……’
약왕부주는 마지막 고비에 직면했음을 깨달았다.
사내는 최후의 협박을 가해올 것이다.
“귀주(貴州). 아는 것 있어?”
순간, 약왕부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뇌공산(雷公山). 난 성질머리가 지랄 같아서 내가 얻지 못하는 건 모조리 부셔버리지. 널 위해서 뇌공산에 무덤을 몇 개 만들어 줄까해. 괜찮지?”
“……”
약왕부주의 고개가 툭 떨궈졌다. 그의 육신은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목적지가 어디지?”
“가족…… 가족만은……”
“목적지만 말해. 갖고 싶은 걸 얻으면 난 순한 양이 돼. 믿어야지 어쩌겠어. 안 그래?”
약왕부주가 체념한 듯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운남…… 운남 곤명(昆明).”
“곤명? 하하하! 이거 왜 이러시나. 만사무불통지가 곤명에 갈 일이 뭐 있어?”
“곤명, 곤명에…… 일수…… 일수문(一秀門)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약왕부주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음성이 덜덜 떨려나왔다.
“그런가. 일수문이 곤명에 있었나.”
일수문은 만사무불통지의 무공 기반이다. 그가 일수문 출신인지는 의문이지만 일수문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일수문의 후예가 있다. 만사무불통지와 똑 같은 무공을 지닌 자가 있다. 한두 명도 문젯거리가 되겠지만 일이십 명, 사오십 명이 되면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한다.
남도문주에게 대항할 수 없는 만사무불통지가 대안으로 찾을만한 곳이다.
“믿어줘야겠네. 내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으니.”
“좋아. 믿지. 가족은 걱정 마.”
사내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만사무불통지를 따라잡지 못한다. 산천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는 노인네지만 만일을 대비해 따라붙어야 한다.
사내의 단도가 약왕부주의 목을 반이나 갈라냈다.
‘잘…… 가시게.’
만사무불통지는 휘적휘적 걸었다.
약왕부주는 최후의 순간에 곤명을 말했을 게다. 그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족이 몰살당하는 일이 있어도 자신을 버릴 약왕부주가 아니다.
우강에서 곤명으로 가려면 부주(富州)로 들어서야 한다. 허나 만사무불통지는 덕보(德保)를 향해 걸었다.
덕보를 지나 보록(保綠)을 거친 후, 금강(錦江)의 물줄기를 잡을 셈이다.
대형, 남도문주가 보낸 자들은 떨궈졌다.
자신을 미행하면서 찰나라도 한 눈을 판다는 건 미행하지 않겠다는 것과 진배없다.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직한 가신 넷 중 하나를 잃었다.
남만에서 그에 필적하는 대가를 얻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왕부주의 죽음은 개죽음이 된다.
무인은 한 번 고초를 당한 곳은 다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만사무불통지처럼 세상이 내 것이나 되는 냥 주물럭거린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은 실패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로 여겨 잘 넘기면서도 실패했던 장소는 회기(晦氣)가 끼었다 하여 꺼려한다. 실패를 연거푸 겪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마 마, 남만인들이 어머니의 무덤이라고 부르는 곳.
만사무불통지는 산봉에 올라 높은 산에 둘러싸인 작은 분지를 내려다봤다.
그곳에 그의 실패작이 잠들어 있었다.
순풍을 타고 질주하던 그의 모든 것이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손발이 묶이는 지경에까지 왔다.
이곳이다. 여기서 마야를 만나 멸신구관에 든 다음부터다.
그는 ‘마 마’를 끼고 돌았다.
그가 찾고자 하는 흑살마녀의 거처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마군과 흑살마녀는 어떤 관계일까?
무림에 나도는 소문처럼 연인사이였을까? 아니면 그저 안면만 있는 사이일까?
어떤 관계이든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만사무불통지는 높은 고목(古木)에 자리를 잡고 흑살마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히 살폈다.
멀리서 보면 그녀는 원숭이나 다름없다. 체구가 꼭 원숭이처럼 작고, 행동이 무척 민첩하여 원숭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백발까지 치렁치렁 늘어트리니 영락없이 백원숭이다.
하루가 지났다.
흑살마녀는 혼자 살면서 뭐가 그리 바쁜지 동분서주한다. 밀림 속을 휘젓고 다니며, 이것저것 약초를 뜯어다가 말린다.
이제 곧 죽을 나이인데, 아니 죽을 나이가 훨씬 지났는데…… 아직고 세상에 미련이 남았나? 그 정도 나이면 흘러가는 구름이나 쳐다보며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법인데, 몇 천 년을 살겠다고 저리 바삐 움직이나.
이틀이 지났다.
흑살마녀는 이상함을 보이지 않았다. 밀림에 사는 어느 평범한 노파나 다름없었다.
만사무불통지는 인내심을 가지고 참았다.
흑살마녀 같은 사람에게는 고문이 통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죽어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시간을 쏟아 부으며 실수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얼마나 더 지켜보아야 할까?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일과(日課)과 달라질 것 같지 않은데.
아니다. 만사무불통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목적이 없다면 몰라도 무엇인가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실수를 한다. 이미 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질러 자신도 모르고 있다.
그걸 찾아내야 한다.
만사무불통지는 초옥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발각될 가능성은 높아도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세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닷새째 되는 날, 흑살마녀의 실수를 발견해냈다.
흑살마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초옥 뒤에 있는 백색 절벽을 쳐다보곤 한다. 아주 잠깐, 눈 흘기듯 쳐다보기 때문에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결국은 찾아내고 말았다.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서 살도록 만들어졌다. 흑살마녀처럼 혼자 외롭게 살다가는 정신이상으로 죽기 십상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 해도 무엇인가 보통 사람과 다를 건 분명하다.
하지만 정신을 굳건히 붙잡아 줄 무엇이 있다면 버틸 수 있다.
흑살마녀와 마군이 연인이라면, 절벽에 그들의 추억이 새겨져 있다면, 그것이 아니더라도 흑살마녀를 지탱해 줄 무엇이 틀림없이 있으리라.
만사무불통지의 눈이 빛났다.
‘저기야!’
예전 남만에 왔을 때도 보았던 작은 절벽.
흰 바위가 붉디붉은 남만 흙에 둘러싸여 있어서 유독 하얗게 보이는 절벽.
만사무불통지는 절벽을 꼼꼼히 살폈다.
너무 흰 절벽이라 초옥에서 보면 환히 보일 터이다.
흑살마녀와의 충돌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밀림 속으로 들어간 틈을 타서 조금씩만 살폈다.
그녀가 두려운 것은 아니다. 두려운 건 마군에게 연락을 취하는 거다. 물론 마군이 살아있다는 전제하에서 할 말이지만, 기껏 찾은 마군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건 원치 않는다.
만사무불통지는 끈기있게 뒤졌다.
절벽을 뒤지는 험한 일은 원래 젊은이들이 해야 한다. 허나 정작 그들을 시키면 잘 찾아내지 못한다. 참을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누군가? 마군이다.
마군 같은 자가 숨겨놓은 것을 찾으려면 손바닥만 한 곳도 보고 또 보아야 한다.
흑살마녀를 지켜본 지는 열흘, 절벽을 뒤진 지는 닷새가 지났다.
절벽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맨 위부터 바닥까지 적어도 열 번은 훑어보았지만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포기하고 돌아섰을 게다.
만사무불통지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이곳 어딘가에 분명이 무언가 있다.
흑살마녀를 다그칠 때는 무엇인가를 찾은 후이다. 마군이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으면 조용히 물러설 수도 있다. 아예 남만 땅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것처럼.
‘분명이 있는데……’
남만에 폭우가 쏟아졌다.
중원 같으면 가랑비 정도 오고 말 계절이건만 남만은 벌써부터 사방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폭우가 쏟아진다.
비는 만물을 쓸어내리는 특성이 있다.
더러운 것도 쓸어가고 깨끗한 것도 휩쓴다.
만사무불통지는 동앗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백색절벽 한 가운데 매달렸다.
우르릉…… 꽈앙!
하늘에서 번쩍 섬광이 내리쳤다.
천둥에 번개까지 동반한 장대비가 사정없이 전신을 두들긴다.
한 시진, 두 시진…… 시간만 무심히 흘러갔다.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다. 두 눈은 연신 절벽을 훑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진다는 것은 좋은 변화다.
찾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상황에 변화를 주면 너무도 쉽게 찾아지곤 한다.
어느 순간, 만사무불통지의 눈이 번쩍 뜨였다.
흰 바위의 틈바귀 사이로 무엇인가 검은 것이 어른거렸다.
검은 색인지 푸른 색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흰색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만사무불통지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몸을 이동시켰다.
바위의 틈바귀에 무엇인가가 끼여 있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손댄 무엇인가가 보였다. 백색 돌가루를 아교로 바른 흔적까지 찾아냈다.
더 무엇을 생각하랴. 그는 돌가루를 부셔나갔다. 장장 한 시진에 걸쳐서, 갈색 물체가 형체를 완전히 드러낼 때까지.
이윽고 갈색 물체의 형체가 완전히 드러났을 때, 만사무불통지는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 내가 옳았어. 역시…… 역시…… 마군…… 마군은 살아 있었어.”
제8장 목표안(目標案) ― 중대한 사건
1
하오문이 하오문주를 중심으로 결속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진걸에 동조했던 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진걸의 이상(理想)에 공감을 표시했던 사람도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진걸과 연관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증발했다.
개방과 연을 맺었던 사람들, 정도 무림의 압박에 눌려 기밀자료를 빼돌리던 사람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지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하오문이 원래 그렇다. 도박꾼 한 명 사라졌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창기가 없어지면 사내와 정분이 나서 야반도주했다고 생각한다. 소매치기가 사라져도 신경 쓰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손대지 말아야 할 물건을 손 댄 탓에 절 같이 은밀한 곳에 숨어있겠거니 생각한다.
그 후, 점주(店主)들이 은밀히 어딘가를 다녀왔다.
그때부터다. 정도 무림은 하오문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된 게.
협박을 해도 소용없고, 삶의 기반을 때려 부숴도 살려달라는 말만 하고.
그제야 정도무림은 하오문이 옛 하오문주의 손아귀에 다시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오문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던 옛날로 돌아갔다.
하오문주는 여전히 수배 대상이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하오문도를 때려잡기 시작하면 무엇인가는 나올 것이다. 허나 하오문의 야비한 대응책도 감수해야만 한다.
하오문도는 절대 무인을 상대하지 않는다.
무인이 때리면 맞는다. 죽이면 죽는다. 대신 무인의 뿌리를 뒤져 일가친척을 건드린다. 무인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 있다면 최우선 보복대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