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2
32
“이, 이놈의 자식들이 단체로 못 먹을 걸 처먹었나.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우르르 달려드는 거야.”
시마의 눈은 어느새 녹광으로 변해 번들거렸다.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는 거지. 마야라는 존재가 드러났으니까. 쯧! 그렇게 마야라고 부르지 말래도 부르더니만. 자하일봉은 지엽적인 문제가 된 거야. 주목적이 나로 바뀐 거지.”
“이렇게 되면 끝장난 거군. 기분 상쾌한데.”
수검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는 기분 좋게 웃는다고 지은 표정이지만 사람들 눈에는 섬뜩하게 비쳐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해요. 이럴 수는 없어요.”
일령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말만 들어도 숨이 막혀오는데 정작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어떻겠는가.
“후후! 나뿐만이 아니라 마도, 시마, 혈유…… 모두 드러난 게지. 옛날에, 마도가 무림공적이 되어서 쫓길 때 너도나도 죽이겠다고 모여들었지. 그 인원이 물경 천여 명에 이를걸?”
“더 됐으면 더 됐지 못하지는 않아.”
마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빠져나왔으니까.”
“그때와는 달라. 그때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라서 상대하는 자라야 한 번에 십여 명이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외통수에 걸려 포위된 거니 살기를 바랄 순 없지.”
“시마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걸? 대답이 됐군. 그래서 이만큼 모여든 거야.”
소립파는 담담하게 말하며 금연화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오빠가 여동생을 다독거리듯 두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약속은 지킨다. 단문협에 데려다 주고 놈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해준다. 안심하고 먼저 가.”
“머, 먼저 가라니?”
금연화는 소립파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점을 생각하기에는 당면한 상황이 너무 절박하다. 설마 일이 이 정도까지 커질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포위망을 만들어줬으니 어떻게든 해야지. 우리가 여기서 미끼를 물지 않으면 천랑대가 단문협에서 빠져나오지 않아. 그놈들을 빼내려면 미끼를 물었다는 흔적을 보여줘야 해.”
“미끼를 물면…… 어떻게 포위망을 빠져나오려고.”
“그보다…… 자하령이 모두 죽었다.”
“뭣!”
금연화는 봉목을 부릅떴다. 일령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아픈가?”
“…….”
마음이 찢어진다. 하나 찢어지는 아픔을 말할 수 없었다. 소립파의 눈길이 소름 끼치도록 매서웠다.
“자하령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세 여인이 죽었다. 아픔을 느끼지 마라. 몸이 찢어지고 팔다리가 떨어져도 고통을 느끼지 마라.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 죽은 자는 버려두고 가라. 그게 복수의 길이야.”
단문협까지는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정말 헤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하기는 소립파의 말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어찌해 볼 여력도 없지만 말이다.
“많은 말을 하기에는 시간이 없어. 이제 그만 가. 은마(隱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땅이 들썩이더니 머리가 숭숭 빠지고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괴인이 불쑥 나타났다.
키가 작은 혈유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작은 꼽추 노인.
“단문협까지는 십 리. 천랑대가 모두 빠져나왔으니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 것. 언장은마는 미세한 흔적도 놓치지 않으니 큰 도움이 될 거야. 따라가.”
“고마워…… 요.”
금연화는 처음으로 존대를 했다.
혈귀대주의 벗이라고는 하나,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또한 단문협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후후! 곧 죽을 사람을 보는 눈길이군. 걱정 마라. 이 정도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절혼마녀가 바짝 다가서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책이 있는 거죠?”
그녀도 존대를?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그 말뿐인가요? 일을 꾀하는 것은 인간이지만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다. 다른 말은 없어요?”
“사람을 죽일 때는 육칠 할만 승산있으면 시행해야 돼. 한낱 인간의 머리로 십 할 승산을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아직 십 할이 차지 않았어. 일 할이 비어 있다면 살길도 있는 거야. 걱정 말고 먼저 가 있어.”
“다음에 만나면…….”
“다음은 없어. 현재만 있는 거야.”
“풋! 무정한 사람이네요. 평생 딱 한 번 마음이 흔들렸는데.”
소립파는 세 여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말했다.
“자, 시작하자! 혈유! 다담!”
페엑! 쒜에엑!
“까아악! 크윽!”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답답한 비명 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혈유의 독수전은 숨어 있던 천비대원의 이마를 꿰뚫어 버렸다.
다담선자의 손에서 터져 나온 빗살은 너무도 빨라서 육안으로 좇을 수 없었다. 그녀가 손을 떨쳐 낸 것과 거의 동시에 하늘을 선회하던 비응도 두 쪽으로 갈라졌으니.
비응을 갈라 버린 빗살은 쏘아져 갈 때만큼이나 빠르게 돌아와 갈무리되었다.
“뭐, 뭐, 뭐야, 이거. 추, 추 추명반(追命盤) 아냐?”
“마, 맞는 것 같은데. 추명반.”
고루쌍마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들만이 아니다. 마도, 수검…… 다담선자와 같이 손을 쓴 혈유까지도 깜짝 놀라서 다담선자를 쳐다봤다.
“추명반 맞아요.”
다담선자는 생긋 웃었다.
핏물을 뿌린 빗살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손에서 튀어나와 손으로 돌아간 것까지는 알겠는데, 모든 사람의 이목을 속이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무적기병(無敵奇兵) 추명반!’
세 여인의 놀라움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병기, 빗살이 터짐과 동시에 생명을 앗아간다는 죽음의 마병(魔兵)이 나타났다.
마도도, 수검도, 어쩌면 강북무림의 무신이라는 삼원로도 추명반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 모른다.
다담선자, 그녀는 일행 중 가장 무서운 무인이었다.
세 여인은 모두의 얼굴을 훑어본 후 언장은마를 따라 땅굴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하하하! 언장은마가 저렇게 생겼구나. 그러니 사람들 만나길 죽는 것보다 꺼리지. 우하하! 아이고, 배꼽이야.”
혈유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웃음이 나오나? 나온다.
죽음이 확실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몇 번을 고쳐 생각해도 절망적인 상황인데 말을 듣기 전이나 들은 후나 행동에 변함이 없다.
지독하게 꼬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언장은마를 이대로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또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언장은마가 모습을 드러낼 리도 없지만.
“천목을 제거했으니 이미 일은 벌어졌고, 우리가 할 일은 뭔가?”
마도가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서쪽을 쳐야지.”
소립파는 담담하게 말했다.
“서쪽에 뭐가 있는데?”
“철벽구망진.”
“음……! 철벽구망진 한 개라면 무리없이 뚫을 수 있겠지만…… 한 명당 네 명 내지 다섯 명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지체될 거고. 발목을 붙들리지 않을까?”
“엠병! 살길이 있다잖아. 주둥아리 놀릴 시간 있으면 한 놈이라도 눕히는 게 나아.”
시마가 마도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
철벽구망진.
서른 명이 한 조를 이뤄 펼쳐 내는 진법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는 만박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절진이며, 무림에 나타난 적도 없는 미지의 진이다.
잠사검귀 개개인은 팔 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잠사검귀를 이끄는 잠사검주 역시 팔 인 중 누구 하나 당하지 못한다. 그들이 강한 것은 철벽구망진이 있기 때문이다.
만박선생은 이쪽에 마도와 같은 고수가 여덟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덟 명 대 철벽구망진 하나의 대결은 잠사검귀들의 몰살로 귀결될 것도 예측한다.
그런데도 펼쳤다?
당연히 철벽구망진을 보완해야 하는데, 계란 껍데기처럼 얇은 막으로 포위망을 구축했다?
양쪽 옆은 건드리기만 하면 툭 터져 나간다. 반면 전면에는 천랑대가, 뒤에는 철벽구망진 두 개에 제육역 십 개 문파 정예 무인들 오백 명을 포진시켰다.
왜 이런 포위망을 구축했을까?
생각할 것도 없다. 장사진(長蛇陣)의 변형이다.
머리를 치면 꼬리가 달려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공격해 온다. 몸통을 공격하는 것은 최악이다. 머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니까.
소립파는 최악의 경우를 선택했다.
백여 장에 걸쳐 넓게 퍼진 초지(草地), 은신할 나무나 바위가 전혀 없는 들판.
여덟 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멈춰 섰다.
기척이나 살기를 느낀 것은 아니다. 막아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워서 섰다.
“지금쯤 우리 행로가 보고되고 있겠지. 명심해. 시간이 승부야. 일다경(一茶頃) 만에 빠져나가지 못하면 뼈를 묻게 돼. 다급한 마음에 흩어져서도 안 되고.”
펑! 펑! 퍼엉!
말을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폭음이 터졌다.
“흑운무(黑雲霧)! 이놈들 밤에만 활동하는 밤귀신이라더니만 낮도 밤으로 만드네.”
고루쌍마는 즉각 사슬 달린 낫을 꺼내 들었다.
콰콰콱! 스으으읏!
고루음마와 고루양마가 전개하는 겸도술(鎌刀術)은 극과 극의 성격을 띤다. 고루양마가 낮이라면 고루음마는 밤이며, 한쪽이 강(剛)이라면 다른 한쪽은 유(柔)다.
극과 극의 성격이 상생하기도 하고 충돌도 일으키며 세상을 뒤덮으니 이를 고루공이라고 한다.
고루공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쌍둥이가 필요하다. 형제도 무방하고 자매도 상관없으나 오누이가 최상이다.
세상에 쌍둥이는 많다. 하나 영적 감응,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감지할 수 있는 쌍둥이는 흔치 않다.
고루공은 그러잖아도 뛰어난 영적 감응을 극도로 활성화시켜 준다.
합격술(合擊術)로서는 절학 중에 절학이다.
문제는 고도의 영적 감응에서 일어난다. 상대의 생각이나 행동을 자신만큼이나 잘 알게 되면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정이 깊어지고, 종래에는 사랑으로 변질된다.
형제 간의 사랑, 자매 간의 사랑, 오누이 간의 사랑.
세상의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
패륜(悖倫)을 불러오는 공부, 마공이 아니면 무엇인가.
쒜에에엑! 스으으읏……!
고루쌍마는 연신 겸도술을 전개했고, 방원 삼 장에 걸쳐서 물샐틈없는 호신막이 쳐졌다.
파앗! 푸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피보라가 튀었다.
강맹한 양강 겸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틈이 생긴다. 사슬 달린 겸도라서 벌어진 틈이 더욱 크게 보인다. 잠사검귀들에게는 호기로 보였을 테고, 뛰어들고픈 충동을 일으켰으리라.
뛰어든 자들은 암중에 펼쳐진 음겸도에 찍혀 살과 뼈를 내줬다.
번쩍! 파아앗!
다담선자도 부지런히 손속을 떨쳐 냈다.
장님이 허우적거리듯 무작위로 뻗어낸 손길이다.
흑운무가 광명을 빼앗아갔다. 잠사검귀뿐만이 아니라 주위 경물조차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그들은 환히 볼 수 있으며, 구궁(九宮)과 팔괘(八卦)가 혼합된 칠십이방(七十二方)을 자유롭게 옮겨 다닌다.
소리도 없다. 살기도 없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쑥불쑥 검만 튀어나온다.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다. 고루쌍마와 다담선자가 쳐낸 방어막은 잠사검귀들로 하여금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시마, 손(巽)!”
시마가 동남쪽으로 쑥 빠지며 시독(屍毒)을 뿌렸다.
“크윽!”
“컥!”
답답한 신음이 흑무를 뚫고 들려왔다.
“마도, 곤(坤)! 수검, 간(艮)!”
서남쪽에서 붉은 도광(刀光)이 번쩍 빛났다.
혈염도는 무림에서도 이미 인증된 도법이다. 수많은 무인들이 그의 도를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다.
혈염도법은 초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리(武理) 같은 것도 없다. 싸움을 반복하며 스스로 깨달아가야 한다. 따라서 본인이 죽으면 대가 끊기고 마는 단맥도(斷脈刀)이며, 철저한 살인도다.
혈염도가 살과 뼈를 취하고 피를 머금었다.
수검은 마도와 정반대인 동북방으로 움직였다.
그에게는 묘한 버릇이 있다. 한 명과 싸우든 열 명과 싸우든 한 사람을 베고 나면 반드시 검을 검집에 넣는 버릇이다.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만한 여유 때문에 언젠가는 큰 낭패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사흡검법(死吸劍法)이라고 들어봤나?
검을 잡는 집검법(執劍法)이 서른여섯 가지. 인체에 검을 대는 접검법(接劍法)이 백팔 개. 검이 닿은 후 베어내고 관통시키는 운검(運劍)이 사십팔 개. 검을 회수하는 수검법(收劍法)이 열여덟 개.
그의 검은 한줄기 검광만 뿜어내지만, 검을 뽑아 베고 회수하는 검로(劍路)의 수는 삼백만 가지가 넘어간다.
검이 갈 수 있는 길을 총망라한 검법이다.
검이 어디서 어떻게 꺾이고 변화할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번쩍! 하고 검광이 뿌려지는 순간, 상상도 하지 못한 각도에 일격을 당하고 쓰러지는 수밖에 없다.
사흡검법은 굴복시키는 검법이 아니라 죽이는 검법이다. 뿐만이 아니다. 격중된 후에도 계속 나아가 검집에 회수하기까지의 비중이 삼 할이나 차지한다.
베고 난 다음에 검을 검집에 넣는 것은 단순한 버릇이 아니라 그의 검법이 지닌 특성이다.
용서가 없는 검, 살기(殺技)에 치우친 검. 이것이 사흡검법을 마공으로 규정지은 이유이며, 사흡검법을 수련한 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무림공적으로 지목된다.
혈염도가 피를 머금을 때, 사흡검도 죽음을 끌어당겼다.
“혈유, 탄(彈)! 다담, 쌍마, 살(殺)!”
소립파가 또 다른 명을 내렸다.
혈유는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일행의 주위를 돌며 백린탄(白燐彈)을 터뜨렸다.
펑펑펑! 펑펑! 화아아악!
초지에 불이 붙었다. 붉은 불길은 풀뿐만이 아니라 검은 운무까지도 태워 버렸다.
불붙은 초지 사이로 언뜻언뜻 검은 그림자가 비쳤다.
고루쌍마와 다담선자는 찰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파앗! 쒜에엑…… 스스슷……!
다담선자가 번개처럼 손속을 떨쳐 낼 때 고루쌍마도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너무 음유로워 미풍처럼 여겨지는 겸도를 뻗어냈다.
2
언장은마는 참으로 기묘한 신법을 펼쳤다.
나무가 많은 곳에서는 원숭이처럼 나무에서 나무로, 평지에서는 두꺼비처럼 바짝 엎드렸다가 크게 도약한 후에 다시 엎드리는 이해하기 곤란한 신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