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27
327
그는 천하제일인이 되기 위해 무공을 수련한 게 아니다. 녹혈마공이라는 무공을 선택한 순간부터 오로지 그 무공만을 최정상에 올려놓기 위해 불철주야 수련해 왔다.
비무, 결전, 싸움…… 무림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겨룸은 녹혈마공을 습득하기 위한 수단방법이었을 뿐, 자신 스스로 최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흑혈마공을 극성으로 이뤘으니 이제 끝이다.
무신에게 뒤지는 무공이면 어떤가. 설혹 삼류무인조차 이기지 못하는 무공인들 어떤가. 자신이 선택한 무공을 극성으로 깨우쳤으면 한 세상 가치 있게 산 것 아닌가.
물론 시마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모두 시마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 정도 마음조차 읽지 못한다면 무공의 궁극을 알고자 한다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하리라.
끝을 본 사람, 이제 쉬고 싶은 게다.
“후후! 언장은마와 시마가 낙화향을 손본다? 후후! 낙화향에서 술 잘못 마시다가는 비명횡사하기 알맞겠군.”
수검이 웃으며 말했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았다.
절혼마녀는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머뭇거렸지만, 그때마다 마야는 손을 흔들어 갈 길을 재촉했다.
시마와 언장은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이승에서 보는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르지만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몇 번 더 본다 해서 달라질 건 없다. 헤어짐은 필연이다. 백여 걸음조차 대딛지 못하는 사이에 흩어질 인연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는 것이 낫다.
그런 의미에서 마야가 밤새도록 무슨 고민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절혼마녀를 보내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을 벌써 짐작하고 있었고, 마음까지 정리해 놓았다.
새삼 그 문제로 번민할 이유가 없다.
무언가 중차대한 문제가 있는데…… 묻지 않았다.
무림에 흥미를 잃은 사람한테는 알고 싶은 것도 없는 법이다.
마야가 잘 알아서 하겠지. 늘 그래왔으니까. 이번에도 장애는 될지언정 걸음을 막지는 못하리라. 잘 하겠지. 잘 해내겠지.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던 마야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공격이 있을 거야. 북검문에서 공격해 오면 다행이지만 유계가 공격해 온다면…… 휴우!”
알 듯 모를 듯 미묘한 말이다.
공격이면 다 같은 공격이지 북검문이라고 쉽고 유계라고 어려울 건 뭔가. 오히려 그 반대 아닌가? 북검문에는 무신들이 있고, 칠공자까지 무너진 지금에는 무신 밖에 나설 사람이 없으니…… 북검문과의 싸움이 더 어렵지 않나?
지난 밤, 마야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고심한 것 같다.
분명한 건 마야가 말끝을 흐린 적이 없었던 점으로 봐서 앞으로 다가올 싸움은 상당히 고되다는 것이다.
2
마야의 직감은 맞았다.
호채마를 감싸고 있던 왕벌들이 천적을 만난 듯 쫙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사천제일룡이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공기 중에 함유되어 있는 냄새를 맡으려고 애썼다.
“킁킁! 이거 이상한데? 아무 냄새도 없어.”
뭐가 이상하다는 것일까?
“이상해. 이상해.”
사천제일룡은 뱃전 여기저기를 오가며 냄새를 맡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은 냄새 맡기가 좋다. 어떤 냄새든 바람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능숙한 사냥꾼이라면 바람에 노출되지 않는다. 허면 바람이 부는 측면에서 냄새를 감지해야 한다.
아무 냄새도 맡아지지 않는다.
“난 포기.”
사천제일룡이 장난스럽게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무엇이 왕벌을 물러서게 만들었을까? 한 가지, 냄새를 풍기는 물체는 아니다. 몸에 벌이 싫어하는 약초를 발랐다거나 독분(毒粉)을 뿌린 건 아니다.
“피독주 같은 거로도 벌을 물리칠 수 있나?”
마도가 왕벌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물었다.
“벌이 독인가?”
사천제일룡이 되물었다.
대답은 명쾌했다. 피독주 같은 것으로는 벌을 물리칠 수 없다.
“내 말은 피충주(避蟲珠) 같은 게 있냐는 거지.”
마도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쫙 갈라진 벌들 사이로 사람이 들어섰다.
한 명, 두 명…… 열 명, 스무 명…… 마흔 명……
너무 많아서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대충 어림짐작으로 이백여 명쯤 되는 것 같다.
신분도 짐작하기 힘들다.
입은 옷이나 병기가 각양각색이다. 승려도 있고, 도인도 있다. 기녀로 보이는 여인도 있으며, 머리에 떡 바구니를 이고 있는 할머니도 있다.
“뭐야, 저 사람들은?”
수검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단순한 사람들은 아니다. 지나가는 길손도 아니다. 무공을 수련한 무인들이다. 내딛는 걸음걸음에 묵직한 무게가 실려 나온다.
호채마는 나타난 사람들이 마인임을 알아냈다.
이들에게서 나는 새도 옭아맬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정도인도 살기는 내뿜는다. 살심(殺心)은 마인만 지니는 것이 아니다. 정도인이라고 누굴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세상 사람이라면 모두 살심을 지닌다.
허나 표출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살심과 이성(理性)의 배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성이 강하게 작용한 살심은 조금 무서워 보일 뿐이다. 그리고 정도인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종류의 살심을 표출한다.
마인은 다르다. 마인은 이성을 가미시킬 필요가 없다. 아니, 가급적이면 더욱 강한 살심을 피워내려고 노력한다. 손을 쓰기 전에 공포로 얼룩진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것이 얼마나 큰 쾌락인지는 남을 억눌러 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오로지 죽이겠다는 마음만 가득한 살심, 이것이 마인이 표출하는 살심이다. 또한 왕벌을 헤치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살심이기도 하다.
북검문이 공격해오면 다행지만 유계가 공격해 오면……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히도 유계가 공격해 온 듯 싶다.
“난 말이야. 몇 년 정도는 정파란 놈들과 놀아야 될 줄 알았는데, 이건 너무 뜻밖인데. 안 그래?”
사천제일룡이 농담을 건넸다.
그에게서는 긴장의 빛을 엿볼 수 없다.
몇 십 명이 되었든, 몇 백 명이 되었든…… 모두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베여 있다.
마도와 수검은 마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천제일룡도 마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리라.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마야는 유계 마인들이 공격해 올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정파 무인들이 뒤로 빠진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지난밤의 고민과 이번 일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독룡(毒龍), 하독(下毒).”
너무 조용하게 흘러나와서 자칫 잘못 듣지 않았나 싶은 명령이 떨어졌다.
“하독? 나?”
사천제일룡이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마야를 쳐다봤다.
― 정말이야? 독을 쓸 거야?
사람들의 눈빛은 한결같은 말을 토해냈다.
그러잖아도 무림인들로부터 흑균을 썼다고 해서 천하제일공적으로 낙인찍혔다. 흑균을 쓰지 않았다고 항변하기는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으리라.
이런 상황에서 독을 또 쓴다면 어떻게 될까?
사천제일룡이 지닌 독은 한결 같이 금독이다. 세상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독들이다.
사천제일룡이 나서면 흑균을 썼다고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독.”
분명한 명령이다.
“좋지. 놈들, 아예 싹 쓸어주지.”
사천제일룡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마야가 명을 번복할까봐 우려되는 듯 즉시 손을 떨쳐냈다.
쏴아아아……!
하얀 가루가 바람을 타고 분분히 휘날렸다.
“크크크! 이놈들, 우선 간단하게 부시독(腐屍毒)부터 쳐먹어라. 육신이 썩어가는 모습을 자기 눈으로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후후후! 우하하하!”
앙천광소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부시독은 시마의 녹혈마공과 비슷한 효능을 나타낸다. 진기로 뿜어내는 녹혈마공보다 위력은 약하지만 피나는 수련을 거치지 않고 쉽게 하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유계의 마인들로 짐작되는 사람들은 강가에 도착한 사람부터 질서 있게 배를 타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의 반응이다.
사천제일룡의 독분은 투명하지 않다. 은연중에 독을 살포한 것이 아니라 앙청광소를 터트리며 공공연히 뿌렸다. 하얀 분가루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바람을 따라 펼쳐진 관계로 날아가는 속도도 별로 빠르지 않았다.
이런데도 독이 뿌려졌다는 걸 모른다면 무인이라고 할 수 없다.
하독한 사람이 누군가? ‘독마(毒魔)’의 경지에 이른 사천제일룡이다. 그가 하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독이라는 것은 예견되는 터였다.
당연히 피했어야 한다. 하얀 가루가 날아오지 않는 곳으로…… 피할 수 없거든 숨이라도 쉬지 말았어야 한다. 천이나 옷으로 코와 입을 막고 숨을 멈췄어야 한다.
마인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태연히, 차분히 한 사람씩 배를 탄다.
그들은 독분은 아예 신경쓰지도 않았다.
이지를 상실한 사람들이 아니면 취할 수 없는 행동이지 않은가.
부시독은 훨훨 날려가 그들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니, 모래 바람이 천지를 뒤덮듯, 새벽안개가 온 몸을 휘감듯 빠져나갈 여지를 전혀 주지 않고 뒤덮어 버렸다. 순간,
“헛!”
사천제일룡이 헛바람을 내질렀다.
부시독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해서 놀랐나? 실제로 그렇다. 피부에 닿는 즉시 피고름을 만든다는 부시독이건만 마인들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런!”
사천제일룡은 헛바람에 이어 낭패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의 눈은 마인들의 가슴에 꽂혀있는 하얀 꽃에 틀어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염수화(閻手花)가 맞는 모양이군.”
마야가 나직이 말했다.
마야의 말에 두 사람이 반응을 보였다.
“쳇! 염수화까지.”
독마 사천제일룡은 그것도 아느냐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염수화!”
마야를 만나기 전만 해도 독문도였던 사망혈인은 깜짝 놀라 경악성을 토해냈다.
두 사람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서일까? 다른 사람들도 호기심어린 눈길로 마야와 사천제일룡은 번갈아 쳐다봤다.
“독중독화(毒中毒花)……”
사망혈인이 자신의 놀람을 설명이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흐릿하게,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사람들은 그제야 사망혈인이 말한 독중독화, 염수화를 생각해 냈다.
염수화는 인세에 나타난 적이 없는 전설상의 꽃이다. 너무 과장된 말일까? 하지만 인적 끊긴 독지(毒地)에서 홀로 피었다가 홀로 지는 꽃이니 크게 과장된 말은 아니다.
염수화는 독을 먹고 산다. 독이 있는 것이라면 식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다. 껍질이나 살 같은 것은 입에도 대지 않고 독기(毒氣)만 쪽 빨아먹는다.
잎과 꽃술이 대기를 훑는 동안 뿌리는 땅을 껴안는다.
독지, 독수(毒水)…… 뿌리에 닿는 독기는 모두 흡수되고 만다.
독기를 마음껏 포식한 염수화는 꽃가루를 분분히 날리며 산산이 부서진다.
염수화의 번식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웬만한 독지 정도는 하루 만에 먹어치우고 만다.
한정된 곳에 있는 독기를 모두 먹어치운 후에는 언제 피었냐 싶게 말끔히 사라진다.
꽃잎도, 씨앗도, 꽃가루도 남기지 않고 모두 소멸된다.
군락이 생기고 소멸하기까지 길어야 하루를 넘기지 않으니 아주 짧은 생명이다. 그렇기에 본 사람도 없고, 기른 사람도 없는 전설상의 꽃이 된 것이다.
염수화의 꽃잎 색은 독기의 흡수 정도를 나타낸다.
흰색일 경우는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천고에 다시 없는 해독제가 된다. 독기가 충만하면 검은 색이 되니, 이때는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독인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귀화(貴花)가 아닐 수 없다.
염수화가 나타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송이씩 들고 있으니 더 놀랍다. 이토록 많은 꽃을, 그것도 이제 막 독기를 흡수하기 시작하는 흰 꽃을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사천제일룡은 독을 쓰지 말아야 한다. 그가 독을 쓰면 쓸수록 염수화는 검은 색으로 변해갈 터이고, 끝내는 회선창(回旋槍)이 되어 사천제일룡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크크! 느닷없이 하독하라기에 얼쑤 좋다 나섰더니만 개망신만 당했네. 후후후!”
사천제일룡이 손을 툭툭 털고 뒤로 물러섰다.
이 싸움에서 사천제일룡이 끼어들 구석은 전혀 없다.
“사망혈인.”
마야가 사천제일룡 다음으로 부른 사람은 언제나 제일 마지막 수로 남겨두었던 사망혈인이다.
“싹 쓸어버릴까요?”
사망혈인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야의 표정은 가볍지 않았다. 이번에도 불안한 구석이 있는지 얼굴색을 굳힌 채 묵직이 말했다.
“아니. 가볍게.”
사망혈인이 지닌 화탄은 가벼운 것이 없다. 가장 약한 것도 배 한 척 정도 분쇄하는 건 일도 아니다.
사망혈인 같은 화인(火人)에게는 ‘놈들을 싹 지워버려라’는 명령이 쉽다. 지금처럼 가볍게 토닥거리기만 하라는 명령은 참으로 받들기 어렵다.
‘가볍게라고 했으니 딱 한 척만……’
사망혈인은 굉렬하게 터져 나올 폭음을 생각하며 불붙은 화탄을 내던졌다.
순간, 마인들 틈에서 검은 물체가 불쑥 솟구치더니 허공에서 쫙 펴졌다.
그물이다.
턱! 터억!
화탄은 그물에 엉키는가 싶더니 용수철처럼 되퉁겨졌다.
“엇! 저, 저거!”
사망혈인은 황망히 고함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