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29
329
일령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쓸게 이것밖에 없는데?”
다담선자가 유엽도를 들어보였다.
“그거야 언니 사정이죠. 그런 것까지 봐줘요? 호호호!”
“에구! 무서워. 좋아! 내기해. 옥가락지 하나 사주기. 어때?”
“좋아요. 호호호!”
여인들은 심각한 상황인데도 평정을 잃지 않았다. 적을 경시하지도 않았지만 경직될 필요도 없었다.
다담선자는 무인이었다. 금연화는 제이무신가의 금궁 강화명을 죽일 무렵에서야 무인이 되었다.
일령은 가장 늦다. 그녀에게 무인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때는 가장 마음의 상처를 깊게 받았을 때, 혈유가 죽을 무렵이었다.
무공만 높다고 무인이 아니다.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무인이 아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있으되 흥분을 느끼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죽음 또한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무인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서도 안 된다.
노한 마음, 공허한 마음, 허무한 마음, 퇴폐적인 마음, 자괴적인 마음은 금물이다.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 무공을 추구해도 좋고, 행복을 추구해도 좋다. 무엇인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인들은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
‘훗!’
마야는 속으로 웃었다.
절정 무인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여인들……
마야로써 말하건대 이 여인들은 일파를 이끌 정도의 무공을 지녔다. 여건이 되어 문파를 일으킨다면 조그만 지역의 패주 정도에 그치지 않고 대문파 반열에 올라설 게다.
이런 사람들과 먼 길을 동행한다는 건 늘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만큼이나 신선하고 재미있다.
마야는 마음속에 깃들어 있던 일말의 불안감을 말끔히 털어냈다.
자신이 여인들을 걱정하는 것이나 여인들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나 무게가 똑같다. 비무를 한다 해도 누가 누구를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모두가 각기 마음속으로는 상대를 대적할 방법이 있을 것이며,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 또한 지녔을 터이다. 굳이 비무를 하면서까지 우열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게 일반 무인들과 다를 뿐이다.
“콘, 수!”
마야는 콘과 수에게 선미(船尾)를 맡겼다.
콘과 수는 이지가 상실된 후에도 이상하리만치 서로에게 집착한다. 두 사람 모두 머릿속이 백지처럼 텅 비어 있을 텐데 서로를 의식하고 찾는다.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또 그것이 정상이다. 단지 조금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안절부절 못하는데, 정녕 이해할 수 없다.
마야는 두 연인을 떼어놓지 않았다. 같이 있기를 간절히 원하니 싸우는 순간에도 같이 싸우게 해준다.
“내가 이쪽?”
사천제일룡이 다시 한 무더기의 흑화를 뿌려내며 뱃머리쪽으로 걸어갔다.
쒜엑! 철컥! 쒜엑! 철컥……!
수검의 사흡검법은 눈부셨다. 그는 눈 깜빡할 사이에 열두 번이나 발검했다. 그리고 시퍼런 검광이 세상을 접할 때마다 새빨간 혈화(血花)가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마도의 혈염도법 역시 섬광이다.
혈광(血光)의 궤적을 쫓다보면 섬뜩한 혈화를 보게 된다. 혈화와 마도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그리고 입가에 핏물이 잔뜩 묻어있는 악귀가 연상된다.
수검은 얼음 같이 차가운 빙귀(氷鬼)고, 마도는 활화산처럼 열화를 토해내는 화귀(火鬼)다.
두 사람은 아주 잘 어울렸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살아온 나날 때문일까? 서로 자신의 적수는 상대밖에 없다고 생각해온 탓일까? 언젠가 한 번은 맞붙을 것이라고 예감해 왔기 때문인가?
초식이나 감각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속도나 파괴력은 우열을 논할 수 없었다.
배 두 척이 유령선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두 사람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만족할 리 없었다. 만족하려면 적진으로 뛰어들지도 않았다.
마도와 수검은 다른 배를 찾아 훌쩍 도약했다. 순간!
촤악! 촤아악! 촤악……!
사방에서 그물이 확 펴지며 두 사람을 휘감아왔다.
사망혈인의 화탄을 되돌려 보냈던 상피망이다.
“하찮은 수작!”
마도가 고함을 터트리며 혈염도를 뻗어냈다.
그때다. 물결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침묵했다. 그리고 뚜렷하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물러섯!
쒜에에엑……!
그물이 허공을 가르며 소리를 흘려낸다. ‘철썩!’하고 강물이 뱃전을 두들긴다.
소리들이 되돌아왔다.
마도는 즉시 위험을 예감했다.
상피망을 자를 계획이었다. 고무처럼 탄력있는 상피망이라도 물조차 베어버리는 빠른 도법 앞에서는 썩은 짚단처럼 잘려나갈 것이다.
그는 바위처럼 단단한 것에서부터 찰떡처럼 물렁물렁한 것까지 모두 베어낼 자신이 있었다.
허나 머릿속을 울린 경고는 다른 결과를 예시한다.
혈염도가 상피망을 두들기면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뭘까? 아교라도 발라놨나? 혈염도가 달라붙기라도 하나? 상피망에 암기라도 숨겨져 있나?
마도에게는 생각할 시간조차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상피망이 눈앞에 다가왔다. 혈염도를 계속 쳐내든, 피하든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쳐나가면 위험하다. 허니 피해야 한다. 헌데 피할 곳이 없다. 그물 범위가 너무 넓고 전력으로 신법을 펼쳤던 탓에 달려 나가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충돌이 불가피하다.
마도는 진기를 더욱 거세게 끌어올렸다. 난폭함이고 정교함이고 따질 겨를도 없이 더욱 빠르게 혈염도를 휘돌렸다.
도가 뻗어나간다. 진기도 딸려간다. 육신도 도를 쫓아간다.
혈염도는 상피망을 치지 않았다. 혈염도에 깃든 원심력은 그의 육신까지 휘돌렸다.
상피망이 스치듯 흘러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가득 채우던 상피망이 사라지고 한바탕 도살을 벌였던 뱃전이 보인다.
완벽하게 돌아섰다. 그리고도 혈염도에 깃든 여력이 그를 계속 이끈다. 뱃전으로.
“순발력 하나 좋군.”
옆 배에서 수검의 음성이 들려왔다.
힐끔 돌아보니 그도 낭패를 당했는지 미간을 찡그리고 있다.
“마야가 알려줬나?”
수검은 상피망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떡였다.
두 사람이 배에 뛰어들고 마인들을 도륙한 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유계 마인들은 그 짧은 순간을 잡아챘다.
열 척의 소선이 두 사람이 탄 배를 에워쌌다. 둥근 원진(圓陣)을 형성하여 빠져나갈 공간을 주지 않았다.
그러면 뭐하나? 마도와 수검이 배를 움직일 것도 아니고 다른 배에 올라타면 그만인 것을.
유계 마인들이 기본 중에 기본을 모르랴.
그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신법으로 도약하여 올라탈 공간을 주지 않는다. 전력을 다해야 올라탈 수 있는 거리까지만 다가온 후 사태를 주시한다.
공격을 유도하는 것이다.
경거망동(輕擧妄動)하여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다가는 마도나 수검 같은 낭패를 당한다.
낭패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쉬이익! 쉬이익! 쉬이이익……!
유계 마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침착하게 허공을 향해 상피망을 던졌다.
열 척에서 던져진 상피망이 허공에서 맞물리는가 싶었다.
척! 척! 척……!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상피망과 상피망은 살짝 닿았다 싶은 순간 자석처럼 빨려들며 맞물렸다.
마도와 수검은 서로를 쳐다봤다.
마인들의 다음 수는 익히 짐작된다.
하늘 가득히 펼쳐진 상피망이 마도와 수검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다.
이는 이미 쏘아진 화살과 같다. 마인들도 어쩔 수 없다. 상피망을 거두고 싶어도 거둘 수 없다. 허공에 던져진 그물을, 그것도 둥글게 원을 그리며 맞물린 그물을 무슨 수로 거둔단 말인가.
다행히 피할 구멍은 있다. 강으로 뛰어들면 된다. 상피망의 포획 범위가 넓다고 하지만 물속까지야 따라오겠나.
그들이 서로를 쳐다본 것은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한낱 졸개들에게 쫓겨 강에까지 뛰어든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나.
수검은 대답을 못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딱히 대응할 방도가 없다. 부딪쳐서는 안 되는 그물로 밀고 들어오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때,
“독룡!”
등 뒤에서 사망혈인의 음성이 울렸다. 굉장히 다급한 음성이다.
사천제일룡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궁금증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발 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한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지만 방도를 강구해 내야 한다. 헌데,
“마도! 수검!”
사천제일룡이 사망혈인의 말을 곧바로 받아 두 사람을 불렀다.
마도와 수검은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상피망에서 눈길을 뗀다는 것도 안 될 말이다. 한편으로는 떨어져 내리는 상피망을 주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곁눈질로 사천제일룡을 쳐다봤다.
사천제일룡은 두 사람을 왜 불렀는지 말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을 취했다.
행동은 사망혈인으로부터 일어났다. 그가 자그마한 철환(鐵丸)을 꺼내 강으로 던졌다.
사천제일룡이 즉시 다음 행동을 취했다.
쒜엑! 쒜에엑!
그가 던진 유엽도 두 자루는 정확히 철환을 가격했다. 철환의 안쪽과 바깥쪽을 각기 때려 방향을 틀었다.
마도와 수검은 두 사람의 의도를 간파했다.
미친 짓이다! 지금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건가!
사망혈인의 뱃속에 기생충이 얼마나 들었는지까지 알 정도로 함께 살아왔다. 그가 만든 화탄은 몇 종류나 되며, 어떤 성질을 지녔는지 거의 짐작한다.
처음, 사망혈인이 시험 삼아 던진 화탄은 밀랍으로 화약을 감싼 탓에 유엽도를 꽂아 넣어도 상관없었다. 유엽도가 화약을 건드린 충격이 폭발로 이어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던진 철환은 종류가 다르다.
이건 미미한 충격에도 즉시 폭발해 버린다. 화약 중에서도 성질 더러운 쪽에 속하는 놈이다.
사천제일룡은 그런 철환을 유엽도로 쳐냈다.
방향을 틀기 위해서라지만 마도와 수검을 재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맨 정신으로는 취할 수 없는 도박적인 행동이다. 하기는 독룡에게 올바른 정신을 요구하는 게 잘못된 건가?
철환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내버려 둘 수 없다. 촌각만 지나면 뱃전에서 폭발하리라. 상피망이 가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 전에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리라.
두 사람은 생각할 틈도 없이 뱃전에 나뒹구는 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눈을 질끔 감고 날아오는 철환을 냅다 후려쳤다.
꽈앙!
환청이 들렸다. 강렬한 열기가 육신을 휘감고, 화약 특유의 매캐한 연기가 후각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어날 의식 마비를 기다렸다.
꽈앙! 꽈아앙!
폭음은 잠시 후에 들려왔다.
열기도 없었고, 화약 냄새도 미미했다.
‘살았어!’
화탄은 즉시 터지지 않았다. 노를 맞고 멀리 날아갔으며, 어딘가에 부딪친 후에 터졌다.
두 사람은 상피망부터 쳐다봤다.
활로가 생겼다. 아교로 붙여놓은 것처럼 찰싹 달라붙은 상피망이 찢어져 있다.
기다릴 필요도 망설일 이유도 없다.
쒜엑! 쒜에엑!
마도와 수검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신형을 쏘아냈다.
몸 하나만 빠져나갈 공간만 있다면 상피망의 위협은 어린아이 헛손질에 지나지 않았다.
치이익……!
상피망은 강력한 열기를 지녔다.
그물에 닿은 나무는 불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지졌을 때처럼 하얀 연기를 피워내며 타들어갔다.
마도와 수검의 머리 위로 빨갛게 달궈진 쇳물을 뿌린 것과 진배없었던 상황이었다.
“지독한 놈들!”
한숨 돌린 수검이 치를 떨며 말했다.
나무도 타고 시신도 탄다. 소선에 남아있던 것은 모두 탄다. 촘촘한 그물망에 갇혀 석쇠 자국을 남기며 탄다.
사망혈인이 상대했던 상피망과 두 사람이 만난 상피망은 종류가 달랐다. 모양은 같았지만 성질은 완전히 달랐다.
이런 종류의 공격은 상대하기가 참 까다롭다.
다음에 만난 그물은 어떤 성질을 지녔을까? 부딪쳐야 하나, 피해야 하나.
온갖 망상은 행동을 위축시킨다.
결론은 하나다. 무조건 피하게 된다. 맞설 수 있는 상황인데도, 단순한 그물을 던졌어도 피하게 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그물만 보면 물러선다.
마도나 수검이라고 다를 리 없다.
사망혈인과 사천제일룡 덕분에 사지를 벗어났다.
허공에 띄워진 상피망이 죽음만 가득한 소선을 두들기는 동안, 두 사람은 배를 세 척씩 박살냈다.
원래의 진형은 깨졌다. 허나 남은 배들이 둥그런 진형을 다시 짜며 다가온다.
열 척 정도가 원을 그리면 상피망을 던져낼 것이다.
방법은 하나다. 진형이 갖춰지기 전에 도선해서 쳐야한다. 허나 그것도 어렵다. 마인들은 진형이 갖춰지기 전에는 신법으로 뛰어들만한 공간을 주지 않는다.
땅 위라면 달려가기라도 하련만, 강 위에서는 건너뛰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다.
노를 젓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소선이라지만 열대여섯 명을 태울 수 있다. 한 사람이 노를 젓기에는 작지 않은 배다.
두 사람이 곤혹스러워 할 때, 또 한 번의 울림이 뇌리를 쳤다.
― 독수전(禿手箭).
‘독수전?’
독수전은 죽은 혈유의 병기다. 손으로 던지는 수전(手箭)이지만 혈유가 던져낼 때는 어떤 암기보다도 강한 위력을 선보였다. 사혈(死穴)만 꿰뚫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사전(死箭)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나무로 만들어서 사용했기 때문에 목전(木箭)이라고도 불렀다.
마야는 독수전을 말했다.
독수전으로 뭘 어쩌라고? 어쩔 수 있어도 그렇지 없는 독수전을 어디서 구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