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3
33
속도 면에서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자신을 숨긴다는 면에서는 탁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효과적인 것만은 확실하다.
세 여인은 언장은마의 뒤를 부지런히 좇았다.
이유야 어쨌든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서 숨어 살아온 사람이니 숨는 재주만은 단연 압도적이지 않겠나.
언장은마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앞서 달리기만 했다.
‘다 왔어. 이제 단문협이 지척이야.’
금연화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형을 확인했다.
단문협에 와본 적은 없다. 자하부에서 출발하기 전에 지도를 보고 주변 지형을 숙지해 놓은 것이 고작이다.
자신이 머릿속에 그렸던 지형과 스쳐 가는 지형이 흡사하다.
꿈만 같다. 영원히 못 올 줄 알았는데. 평상시 같으면 위험해서 오지 않는 것뿐이지, 누가 길을 가로막아서 못 오는 것은 아니었는데. 더욱이 북무림의 공격을 받게 될 줄이야.
언장은마는 길이 없는 낭떠러지 위에서 신형을 멈췄다.
그가 손을 들어 병풍처럼 둘러쳐진 절곡을 가리킨다.
“저기가 단문협인가요?”
언장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 왔군.”
절혼마녀도 감회 서린 눈길로 단문협을 쳐다봤다.
낭떠러지를 내려가면 코앞이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일다경이면 충분한 곳에 죽음의 사지가 펼쳐져 있다.
언장은마는 손가락 방향을 바꿔 절벽 중간 부분을 가리켰다.
깎아지른 낭떠러지에 사람 코처럼 완만하게 경사진 곳.
그는 자기 가슴을 탕탕 치더니 떨어지면 분골쇄신(粉骨碎身)을 면치 어려운 절벽을 훌쩍 뛰어내렸다.
절벽을 내려가는 모습도 특이하다.
양팔과 두 다리는 큰대 자로 활짝 펼쳐 공기 저항을 최대한으로 많이 받게 했다. 그런다고 떨어지는 속도가 현격하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이 가리켰던 절벽 중간 부분에 다가가자 몸을 둥글게 말더니 완만한 경사를 박차고 위로 솟구쳤다.
터억!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어 보이는 절벽에 육신을 실을 만한 곳이 있었나 보다.
언장은마는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신형을 우측으로 쏘아냈다.
앗! 그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매달려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뛰는 것까지는 봤는데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다.
“옆에 또 뭐가 있는 것 같네. 두더지 창자 속에도 숨을 수 있는 사람이라기에 설마 했는데, 언장은마가 숨기로 작정하면 찾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아녜요.”
“아니라고?”
“마야를 잊었어요? 마야는 언장은마를 찾아냈어요. 그러니까 우리 앞에 나타난 거죠.”
“호호호! 듣고 보니 그러네.”
“가요. 우리보고 따라오란 것 같은데.”
“잠깐만. 내가 먼저 내려갈게. 마야가 준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거든. 현현신법보다 월등한 신법이라 가만히 있질 못하겠네.”
절혼마녀는 금연화를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내려가기 전에 자세히 설명해 주고 가면 오죽 좋아.’
밑을 내려다보니 까마득해서 현기증까지 치민다.
귀적무를 시험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금연화보다 자신이 조금 더 강하니 앞서려는 것이다.
절혼마녀는 언장은마가 했던 것처럼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사지를 활짝 폈다.
‘언장은마가 했던 대로 따라 해야 돼. 안 그러면 뼈도 못 추려.’
그녀는 절벽 곳곳을 볼 수 있는 데까지 봤다. 한 번 도약으로 매달릴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낙하 속도는 몸통만한 바위도 찾기 어려울 만큼 빠르다. 하물며 언장은마가 잡아챈 것은 사과 크기에 불과하다.
‘저것!’
눈썰미로 언장은마가 매달렸을 것 같은 돌부리를 발견해 냈다.
여유를 부릴 틈은 없다. 경사진 절벽이 코앞으로 훅 밀려든다.
이해할 수 없지만 언장은마가 했던 것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타악!
비탈을 두 발로 박찰 때에서야 몸을 둥글게 말아야 했던 이유를 알았다.
단순히 몸만 말아서는 안 된다. 순간적으로 낙하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켜서 탄력을 받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로 솟구치지 못하고 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잘 들어! 여기 아주 조그만 돌부리가 있는데 탄력만 제대로 받으면 잡아챌 수 있어!”
절혼마녀는 낙하하면서 알게 된 일들을 상세히 말해주었다.
‘말이 너무 없는 사람도 문제야. 이게 무슨 생고생이람. 그러나저러나 이제는 옆으로 뛸…….’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사라졌던 언장은마가 보였다.
그는 일 장쯤 떨어진 동혈 입구에서 두 발을 쭉 뻗고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굴러 떨어질 가능성이 십 중 십인 비탈로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발견해 낼 수 없는 동혈이었다.
“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너희가! 너희가…….”
금연화는 부들부들 떨면서 동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하령이 당했을 거라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동혈 안에는 여인들의 시신이 일렬로 나란히 누워 있었다.
촌부(村婦), 의녀(醫女), 광대…… 복장이 각기 달라 한데 모일 일이 없어 보이는 여인들인데 어깨를 나란히 하고 누워 있다.
한 발 앞서서 단문협으로 떠났던 자하령이다.
정말 선유비조신법이 이들을 죽게 만든 것인가. 엄지발가락을 들고 걸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죽은 것인가.
금연화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오열했다.
“복수해 줄게. 꼭 복수해 줄게.”
일령은 같은 말을 반복하며 자하령의 얼굴을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천진난만하여 아이 같던 일령의 얼굴에 한기가 뱄다. 오뉴월에 서리를 맺히게 한다는 여인의 한이 그녀의 얼굴을 하나 가득 덮었다.
“큼!”
언장은마가 잔기침을 터뜨리며 다가오더니 자하령의 앞가슴을 활짝 열어젖혔다.
살아 있으면 수줍음에 파르르 떨었을 앙증맞은 가슴들이 환히 드러났다. 더불어서 신이 만든 아름다움을 철저하게 파괴한 흔적도 모습을 보였다.
‘일직선으로 가슴을 갈라?’
육봉과 육봉 사이를 일 척 길이로 반듯하게 그어 내린 검흔(劍痕).
세 여인은 분노가 가득 담긴 눈 속에 검흔을 뚜렷이 각인시켰다.
얼굴에서 목 부분까지는 검에 스친 자국조차 없다. 가슴에서 시작해 배까지 일직선으로 그어 내렸다. 이는 검초가 머리 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선(斜線)이다.
머리 위에서 시작한 것은 맞지만 목을 베어낼 것처럼 옆에서 흘러들었다. 자하령은 검을 피하기 위해 물러섰을 것이고, 상대는 검초에 변화를 주며 바짝 따라붙었다.
베어내는 검초에서 내리긋는 검초로 변화했으면서도 위력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비정상적인 검초다.
사선으로 흐르는 검의 정점과 내리긋는 검의 시작점은 동일하다. 이럴 경우에 힘의 배분은 교차점에서 다시 주어져야 한다. 최초의 힘으로 내리긋기까지 마무리할 수는 없다. 호선(弧線)으로 둥글게 휘어지는 검초는 하나의 힘으로 마무리가 되지만 각도를 주어 꺾는 검초는 교차점을 통과하는 순간에 위력이 절반 이하로 감소된다.
자하령이 몸으로 보여준 검초는 비정상적인 검초가 정상적으로 운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금연화가 알고 있기에 이런 검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북검문의 무류검법(無留劍法).
천랑대, 천비대, 천검대는 대라구절검(大羅九絶劍)을 사용한다. 표면에 드러난 북검문 무인들은 모두 대라구절검으로 위용을 떨친다.
무류검법은 세상에 선보인 적이 없는 미지의 검법이다.
하나 분명히 존재한다.
“겉으로 보이는 게 북검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돼. 소 꼬리를 보고 소를 봤다고 말하면 안 되지. 혈귀대는 지금보다 배 이상 강해져야 돼. 영검(靈劍). 검에 혼이 담긴 것처럼 막힘이 없이 자유자재로 흐르는 검. 다음 목표는 무류검법이야. 무류검법을 넘어서야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는 거야. 하하하! 간신히 소모품에서 벗어나는 거지. 걱정 마. 자신있으니까.”
혈귀대주의 다음 목표였던 무류검법이 자하령의 몸에 나타났다.
그는 무류검법을 영검이라고까지 말했다.
누가…… 누가 이런 검법을 사용하는가.
‘일이 점점 커지고 있어. 마야 말대로 복수는 요원할지도 몰라. 그래도 해야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금연화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잡았다.
단문협은 비어 있지 않았다.
무복 왼쪽 가슴에 이리 얼굴을 붉은 실로 새겨 넣은 천랑대 무인들이 군데군데 모여 앉아 한담을 즐겼다.
“마야도 틀릴 때가 있네. 단문협이 텅 비어 있을 거라더니.”
절혼마녀가 바위 뒤에 몸을 은신한 채 무인들의 동태를 살피며 말했다.
“아녜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요. 이곳에는 천랑대 삼대가 있어요. 일대, 이대, 사대. 각 대는 십오조로 구성되었죠. 열세 명씩 열다섯 개 조. 거기에 대주가 있고, 대주 직속 무인들이 네 명 있어요. 그래서 각 대는 딱 이백 명이에요. 보세요. 저들은 모두 열두 명. 대주들의 직속 무인이에요.”
“무공은 어느 정도야?”
“몰라요.”
분명히 만만치 않을 게다. 북검문이 내놓은 최정예 무인들이지 않은가. 하나같이 싸움에는 도가 텄다는 싸움꾼들이다.
“빨리 무슨 방법을 찾아야 되는데,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네. 이럴 때 그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마야.’
금연화는 마야를 떠올렸다.
절혼마녀의 말대로 마야가 있었다면 무슨 방도를 강구해 냈을 것 같다. 그가 있었다면 지금쯤 단문협 안으로 들어가서 혈귀대주의 체취를 맡고 있으리라.
‘저기서 그 사람이 죽었어. 저렇게 음침한 곳에서. 하늘이 손바닥만하게 보이는 곳에서 외롭게 죽어갔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들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 마인들이 절망에 가까운 포위망을 뚫었는지 협격당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경우든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천랑대 무인들이 곧 들이닥칠 게고, 그러면 영원히 들어갈 기회는 사라진다.
‘방법을 찾아야 되는데…….’
세 여인은 아무 방법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단문협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는 너무 쉽게 찾아왔다.
쒜에엑! 쒜에에엑!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귀신처럼 나타난 사람들이 무서운 속도로 협곡 안을 휩쓸어갔다.
천랑대의 반격도 신속했다.
마음이란 마음은 모두 풀어놓고 한가하게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어느새 검을 움켜잡고는 허공으로 도약했다.
벼룩 수십 마리가 일제히 튀는 것 같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발이 땅에 닿을 틈도 없이 쾌속하게 움직인다.
제일 먼저 피를 이끌어낸 것은 번쩍! 하고 터진 섬광이었다.
“크윽!”
허공으로 솟구쳤던 천랑대원이 낮은 비명을 토해냈다.
그의 머리는 섬광에 잘려져 하늘 높이 떠올랐다. 머리가 잘린 줄은 모르고 비명을 토해내며. 몸통도 끔찍하다. 머리 없는 몸통이 예정된 수순에 맞춰 검을 쳐내고 있다. 검에 실린 강기(剛氣)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뇌가 감지하지 못할 속도로 죽음을 끌어내는 섬광.
파파파팟!
허공을 가르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보이지 않아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공기를 가르는 것이 있다.
“으윽!”
천랑대원 한 명이 느닷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몸에서는 사방에 구멍이 뚫린 듯 선혈이 치솟았다. 머리, 어깨, 가슴, 배, 팔, 다리…… 몸 안에서 화약이 터져 폭발하는 것 같다.
철컥! 철컥!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소리도 연신 들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천랑대원이 썩은 짚단처럼 무너졌다.
천랑대원은 강하다. 하나 그들이 맞이한 자들은 더욱 강하다. 그들이 상대하는 자 중에 한 명은 정사마를 통틀어 가장 강한 몇 명 속에 포함된 사람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자를 무서워하지 않는 괴물들이다.
천랑대원 열두 명이 시신으로 변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세 여인은 부지런히 단문협을 누볐다.
흔적을 하나라도 찾아야 되는데…… 검 쪼가리도 좋고 핏자국도 좋고 뭐가 되었든 찾아내야 하는데.
단문협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뗐다.
‘아무것도 없다니.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종이 쪼가리 하나 나오지 않는 곳을 백날 뒤져 봐야 무얼 하는가.
금연화는 허탈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았다.
절벽은 왜 이렇게 높을까. 하늘은 왜 이리도 시릴까. 땅은 왜 이렇게 척박할까.
무얼 하러 왔나. 목숨을 걸고 왔는데 삭막한 돌덩이만 보고 돌아서야 하나. 이곳에서…… 이곳에서 그는 어떻게 죽었나. 누가 그를 죽였나. 검에? 창에? 도끼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병기는 무엇인가.
단 한 명이라도, 단 하나의 근거라도 발견해 낸다면 차근차근 되짚어가려고 했건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돌아갈 곳도 없다.
이제는 어디로 가나. 무엇을 하나.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던 금연화는 문득 마야를 떠올렸다.
‘저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야.’
마야는 단문협을 뒤지지 않았다.
벗이 죽은 곳인데, 어떻게 죽었나 알아봐야겠다는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가 한 일이라고는 우두커니 서서 협곡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음미하는 일뿐이었다.
마야라면…… 그가 알아보고자 한다면 조그만 흔적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게다.
빠져나올 구멍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던 포위망을 뚫은 사람이다. 도주하기도 급급하리라는 생각을 비웃듯 역으로 단문협을 쳐 버린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있다.
금연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야에게 다가갔다.
“찾아줘요.”
밑도 끝도 없이 한 말이다.
마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좋아요. 찾아줘요.”
마야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다담, 그놈이 죽은 곳이야. 그놈답게 좋은 곳에서 죽었군.”
“차릴까요?”
다담선자는 사근사근 말했다.
경장이 착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완연히 드러낸 대담한 여인이다. 천랑대 사이를 누빌 때는 표범을 능가하는 민첩함을 보였다. 사람을 죽일 때도 망설임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여인이 마야 앞에서는 세상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는 현숙한 여인이 된다.
마야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정성을 다해.”
다담선자는 널찍한 바위를 골라 준비해 온 것을 풀어놓았다.
사과, 배, 대추, 곶감, 떡, 고기…….
언제 이런 것을 준비했나. 싸우고 도주하기도 바빴을 텐데,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 할 처지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