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33
333
잔접은 자신들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만 모인다. 그 외에 곳에서는 절대 모이지 않는다. 한꺼번에 몰살당할 위험까지 무릎 쓸 경우는 결코 없으리라.
“십일 잔접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보고는 해주겠네. 하지만 잔접 회합은…… 이해해 줘야 돼. 우릴 지켜보는 눈이 있어. 만약 잔접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 한꺼번에 몰살당해.”
“휴우! 할 수 없죠.”
다담선자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잔접의 운명이 걸려있으니 억지로 추진할 수 없는 노릇이다.
“헌데 잔접 회합에 운명이 걸려있다니? 잔접을 모두 만나서 뭘 하려고?”
곡부인이 진정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말해주지 않아서.”
다담선자는 솔직히 말했다.
진정 그 부분만은 듣지 못했다. 그녀도 묻고, 십일 잔접을 제압하기 위해 떠난 마도는 물었지만 마야는 웃음만 지어보였다.
곡부인이 양리완을 쳐다봤다.
다담선자를 믿긴 하지만 마야가 그녀에게까지 말해주지 않았다는 부분은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양리완이 고개를 끄덕여 사실임을 말했다.
다담선자가 내뿜는 파동은 흔들림이 없었다.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야는 사흘 동안이나 강가에 머물렀다.
곡설연을 만나러 갔던 다담선자가 돌아오고, 십일 잔접을 제압했던 마도와 사망혈인도 돌아왔다.
그는 곡부인과 십일 잔접의 반응을 자세히 들었다.
“그런가. 잔접…… 무림사를 좌지우지하는 자들로 봤는데, 한 자리에 모이지도 못할 만큼 약한 자들이었나.”
잔접은 강하다. 무엇보다 마야의 무공과 연관성이 있다. 허나 그들보다 상위에 포식자가 있으니 진정한 강자라고는 할 수 없다.
잔접은 은밀히 행동한다. 결코 겉으로 나서는 일이 없다. 종적이 발각되면 철저히 꼬리를 자르는 무자비함도 포식자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다.
그들은 무림사를 형성하는 작은 톱니바퀴는 될지언정 큰 축은 되지 못한다.
알고 싶었다. 잔접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
나흘째 되는 날, 마야는 휴식을 깨고 일어섰다.
2
“지금 축시(丑時)쯤 되었을 거야. 시간을 얼마쯤 주면 돼?”
여인의 음성은 낭랑했다. 즐거웠다. 기쁜 일이 있는지 날아갈 듯 상쾌했다.
칠신녀다.
하늘색 경장을 입어 청초함이 더욱 돋보인다. 이제 갓 이팔청춘을 벗어났음직한 동안(童顔)에 해맑은 표정은 세상의 어려움을 전혀 겪어보지 못한 철부지 소녀를 연상시킨다.
“한 시진이면 충분합니다.”
“한 시진?”
여인의 음성이 급변했다. 더러운 벌레를 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죄송합니다. 반 시진 안에 마무리 짓겠습니다.”
“쯧!”
이번에는 혀를 찼다.
“이다경(二茶頃). 이다경이면 됩니다.”
“이다경. 좋아. 차 두 잔이야. 석 잔 째 들어서면 팔 하나를 내놓아야 할 거야. 넉 잔째는……”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그래? 봐. 되잖아. 이다경이면 될 걸 왜 한 시진이나 끌려고 해? 세상에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요령이야? 난 늘 푸른 나무가 좋아. 날이 조금 추워졌다고 낙엽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기는 나무를 보면 콱 베어버리고 싶어.”
“초심(初心)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난 예민해서 변화를 빨리 감지하거든. 그렇다고 싫은 걸 참아내는 성격도 아니고 말이야. 얼마나 같이 있을 지는 모르지만 좋게 좋게 지내자고.”
“일하겠습니다.”
“그래. 이다경이라고 했지. 차를 따라. 첫 잔째야.”
쪼르륵!
옆에서 숨죽이며 서있던 시녀가 쪼르르 달려와 차를 따랐다.
쒜엑! 쒜에엑……!
사내들이 광풍을 일으키며 달려나가고 있었다.
“악!”
“아아악!”
처절한, 하지만 길게 이어지지 않고 짧게 끝나버린 비명소리가 산발적으로 울려나왔다.
“흐음! 좋네.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야. 이런 곳에 터 잡고 살면 근심걱정 없겠어.”
그녀는 비명소리를 벗 삼아 풍광을 즐겼다.
“한 잔 더 마시자.”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녀가 차를 따랐다.
또로록……!
풀잎의 풋풋한 냄새가 푸른 물과 함께 풍겨난다.
“벌써 일다경이 지났고, 이다경째인데…… 넌 어떨 것 같니? 팔 하나 내놓을 것 같니?”
“제, 제가 어찌……”
“너도 사람이잖아. 생각은 있을 것 아냐.”
“전 생각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요. 전 그저 시키신 일이나 부지런히……”
“난 생각 없는 사람은 싫은데.”
“새, 생각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다경 안에 필히 일을 마치실 거라고……”
“못하면?”
“네?”
“너도 팔 하나 내 놓을래?”
“네에?”
“그래. 그게 좋겠다. 백검이 일을 마치지 못하면 너도 팔 하나 내놔. 이러자. 백검은 오른팔을 자르고 넌 왼팔을 자르는 거야. 그리고 둘이 서있으면 보기 좋을 것 같은데.”
“사, 살려주십시오!”
시녀가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아악!”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목청껏 내지른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꽤 멀리서 터진 소리 같다.
“훗! 제법이야. 이당경만에 끝냈네.”
여인이 찻잔에 든 차를 홀짝 마셨다. 그와 동시에 뭇 사내들과 함께 떠났던 백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냈습니다.”
“무슨 보고가 그래?”
여인은 심드렁했다.
“환갑 이상 노인 스물한 명, 아녀자 열두 명, 어린아이 열아홉 명, 사내 열다섯 명. 도합 예슨 일곱 명을 죽였습니다.”
“무공이라고는 손 올리는 것도 못하는 무지렁이들을 죽이면서 숫자가 무슨 자랑이야? 그런 건 예순이 아니라 육백이라도 상관없잖아. 정작 중요한 게 뭔지 몰라?”
“빠져나간 사람은 없습니다. 일 리 안에 살아있는 사람은 우리와 잔접뿐입니다. 죽은 자는 다시 한 번 기도(氣道)를 따내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백검은 잔접을 거론했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좋아.”
여인은 마시던 차를 마저 비운 후 몸을 일으켰다.
칠신녀가 발길을 옮긴 곳은 다 쓰러져가는 폐가였다.
“잔접이라기에 기대가 컸는데 뭐 이래? 커다란 나비는커녕 날갯죽지 부러진 것도 없잖아.”
칠신녀는 폐가 곳곳을 뒤적였다.
폐가에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색 일색의 복면인이다.
그는 뒷짐을 지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들어와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녀도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칠신녀도 같은 행동을 했다. 복면인을 보지 못한 듯 자기 할 말만 했다.
“뭐라고 불러야 돼?”
“……”
“열한 번째 잔접? 십일 잔접? 아님 다른 호칭이 있나?”
“……”
“너흰 상당히 성가셔. 그래서 죽이려고 하는데, 할 말 없어?”
“……”
“살 길이 없는 건 아냐. 세상사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인데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살고 싶다면……”
“하하하! 역시…… 아직 철없는 철부지 계집애에 불과했어.”
“뭐야?”
“아이야, 똑바로 듣거라. 무인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 건 바로 자존심이란다. 죽여야 할 때는 깨끗이 손을 쓰는 게 도리야. 네 사부가 그런 것도 일러주지 않든? 사부가 누구냐? 아주 형편없는 작자인 듯 하구나.”
“뭐? 호호호! 재미있는 사람이네. 입만 매운 거야, 손도 매운 거야?”
“……”
“잔접에 대해서 불어. 누군지 불기만 해. 이미 짐작했겠지만 입을 나불거릴 사람은 너 말고도 또 있어. 그쪽은 계집들이니까 아무래도 너보다는 뼈마디가 말랑말랑하겠지? 이미 끝난 거야. 불어. 불기만 하면 목숨은 살려줄게.”
잔접이 고개를 돌려 칠신녀를 쳐다봤다.
“쯧! 철딱서니 없기는. 그렇게 말해줘도 말귀를 모르니.”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말하면……”
“잔접이 왜 잔접인 줄 아느냐? 세상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잔접인 게야. 여기 오기 전에 일 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더구나. 그 중에 귀축마가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래, 맞아. 평소 같으면 그래. 귀축마는 잔접 주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많이 벗어나야 일 리 정도지. 그렇게 보면 어느 정도 정보는 얻어들은 게로구나.”
“귀축마가…… 없었다는 이야기야?”
“그러게 철없다는 소리를 듣는 게다.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애꿎은 양민만 죽여대는 꼴이라니. 그러면서 일다경이 어떻고, 이다경이 어떻고. 쯧! 한심한 계집애 같으니.”
“너! 진정 네가!”
칠신녀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쯧! 수양이 덜 되도 한참 덜된 계집애군. 북천신검도 죽을 때가 다 됐나? 어찌 이런 계집에게 절기를 넘겼을꼬.”
쒜엑!
검광이 번뜩였다.
빛, 그냥 빛. 더도 덜도 아닌 빛.
파아아앗!
잔접의 가슴에서 혈화가 솟구쳤다.
빛 한 줄기가 가슴을 뚫고 들어와 등 뒤로 빠져나갔다. 아니다. 빠져나갔다 싶은 순간 다시 거슬러 돌아갔다. 그리고 갑자기 전신 혈도가 제압된 사람처럼 사지가 무력해진다.
“천광일섬…… 정말 빠르군.”
진접이 탄성을 토해냈다.
빛줄기를 보았을 때, 피하고 싶었다. 목석처럼 서있다가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천광일섬을 피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대로 다가와 가슴을 뚫었다. 그와 칠신녀 간의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듯 했다.
잔접은 칠신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칠신녀와 대화를 나눴다.
그냥 말을 섞은 게 아니다. 칠신녀를 약만 올릴 게 아니다. 그의 말에는 진기가 가득 스며있었다. 마야까지 당황하게 만들었던, 마야를 휘청거리게 만든 적멸주가 담겨 있었다.
칠신녀는 모두 받아냈다. 기가 막히게도 적멸주 같은 건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번개를 쳐냈다.
자신이 익힌 모든 무공이 빛 한 줄기 앞에서 무력해졌다.
그렇다. 북검문주 북천신검의 안목은 정확했다. 그의 무공을 이어받을 사람은 칠공자 중에서 오직 칠신녀밖에 없었다.
천광일섬은 초식을 안다고, 구결을 안다고 아무나 익일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수련을 했다고 해서 천광일섬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처럼 오직 빛 밖에 보지 못했는데 가슴이 뚫리고 마는, 이런 검공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모르겠다. 이런 무공을 익힌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지만 잔접은 오직 두 명밖에 알지 못한다. 북검문주와 칠신녀.
“지금부터라도 입조심 해. 고통을 즐기겠다면 어쩔 수 없고. 아! 말하지 않은 게 있네. 난 널 쉽게 죽이지 않을 거야. 뭐? 무인의 자존심? 호호호! 고양이가 쥐 잡아 먹는 것 본 적 있어? 있을 거야. 그럼 배부른 고양이가 쥐 잡아 먹는 건? 난 배불러. 네가 아니라도 나불대줄 사람은 많으니까. 그래서 지금부터 가지고 놀려고 해. 그러니 넌 말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마.”
잔접은 피식 웃었다.
칠신녀가 정말 모르는 게 있다.
자신과 곡설연이 왜 축출까지 당했느냐 하는 것이다.
단지 몇 사람이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몇 사람까지도 가지 않는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알고 있어도 축출 당한다.
잔접은 철저한 비밀 때문에 존재한다.
한 꺼풀이라도 비늘이 벗겨지면 잔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사람이라도 가차 없이 내쳐진다.
껍질이 벗겨진 비밀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출되는 부위가 더욱 많아지게 되어 있고, 그러다보면 반드시 지금처럼 검을 들이대는 사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축출되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거다.
귀축마? 그는 애꿎게 죽었다.
칠신녀가 맞다. 귀축마는 방원 일 리 안에 거주하며 잔접을 살핀다. 잔접의 신변에 변고가 생기면 즉각 보고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몸에 검이 꽂히는 순간에도 평범한 농부처럼 비명을 질러댔을 게다. 그것만이 살인자에 대한 최대한의 복수니까. 귀축마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였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게 만드니까.
운이 좋으면…… 정말 운이 좋으면 곡설연을 감시하는 귀축마는 화를 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 됐다. 보고가 정상적으로 이뤄질 테니까.
‘마야……’
잔접은 마지막으로 마야를 떠올렸다.
그의 품에는 사망혈인이 남기고 간 화탄 한 알이 숨겨져 있다.
마도가 그를 건드리려고 온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을 예감한 것 같다. 뭔지 모르지만 상당히 불길했으니까. 그래서 화탄 한 알을 얻어놨는데, 요긴하게 쓰게 생겼다.
“철없는 계집.”
“호호호! 아직도야? 정말 고통을 즐기는구나. 몰랐네.”
쒜엑!
빛줄기가 번뜩였다.
‘이때!’
잔접은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빛이란 정말 빠르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감각으로도 잡지 못한다. 아! 하고 느끼는 순간 왔다가 간다.
느꼈다. 빛이 폭사되는 걸.
칠신녀를 잡을 수 있을까? 천광일섬이 빠를까, 아니면 화탄이 빠를까. 화탄이 몸에 검을 쑤셔 넣는 순간에만 터져주어도 약간의 손상은 입힐 수 있을 것 같은데.
화탄은 살상 반경이 넓다. 천광일섬처럼 빛의 속도로 생명체를 박살낸다.
믿을 수밖에……
그는 진기가 가득 집중된 손으로 화탄을 힘껏 움켜잡았다.
꽈앙!
화탄은 반경 오 장을 휩쓸었다.
예상보다는 살상 범위가 좁지만 대신 파괴력은 상당히 커서 깊은 구덩이가 움푹 파였다.
잔접은 산산조각 나서 사방에 흩뿌려졌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조그만 살점과 핏덩이만이 누군가가 죽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