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35
335
무엇인가 좀 더 깊은 게 있다.
실제로 그 일이 있고부터 마야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농담도 하지 않고 길을 오는 내내 생각에 몰두해있다. 너무 깊이 생각해서 말을 걸기도 저어된다.
“여기가 좋겠어. 여기서 쉬어.”
두 번 입을 여는 것도 허락지 않는 단호한 음성이었다.
허름한 객잔에서 하는 일 없이 한가롭게 오후를 보냈다.
개방이 지척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개방도들이 기웃거린다.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뭘 하는지 염탐한다.
그들은 호채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앞에서는 쉬는 척 하면서 뒤로 어떤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이곳저곳을 쑤석거린다. 객잔 주인을 불러내기도 하고, 점소이를 협박하기도 하면서 호채마의 동태를 낱낱이 캐낸다.
“저놈들도 헷갈릴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겠거든. 하긴 쉬고 있는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데 저놈들이 어떻게 이해하겠어. 도대체 우리가 왜 여기 있는 거야?”
“후후! 개방과 싸우러 간다잖아요.”
수검의 툴툴거리는 말에 사망혈인이 장난삼아 말했다.
싸우면 싸우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개방이 태산처럼 높아보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호채마도 많이 변했다. 무척 강해졌다. 당장 눈앞에서 기웃거리는 개방도를 보라. 전 중원에 도움을 청할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관도를 버젓이 걸어도 시비 거는 작자 한 명 없지 않은가.
개방과 싸우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영문도 모른 체 따라다는 것이 답답하다.
말을 안 해줬다고 해서 섭섭하다거나 화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궁금해서 묻기는 하지만 채근도 하지 않는다.
마야를 안다.
말해줄 것 같았으면 진작 말했다. 아직까지 입을 떼지 못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딱 하나,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만 말을 하지 않는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건 없다. 아무 것도 아닌 일도 비밀로 하라는 말을 들었으면 죽어 백골이 부서지는 순간까지도 비밀로 안고 갈 사람들이다.
유계가 공격해 올 것이라고 예견했을 때처럼 중차대한 변화를 곱씹고 있으리라.
저녁 식사를 하고 술잔도 기울였다.
“시마는 잘 갔겠지?”
“잘 가지 않고. 시마는 저 독룡과 사망혈인을 합쳐 놓은 것 같은 사람이야. 진짜 독한 마음먹으면 혈풍이 몰아칠걸? 시마를 건드릴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쯧! 노인네하고는…… 얼마나 더 살겠다고 물러나, 물러나기는.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베어야지. 기왕 나선 것, 끝장은 봐야 할 것 아냐.”
일행은 독한 화주를 마시며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나갔다.
그때, 저녁도 먹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마야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도 한 잔 줘.”
“하하하! 좋지. 큰 잔으로? 작은 잔으로?”
“후후! 주고 싶은 잔으로 줘봐.”
사망혈인이 냉큼 어른 머리만한 사발에다 화주를 콸콸 따랐다.
“건배!”
“이걸?”
“에이, 마야기 이까짓 것 가지고 뭘 그래요. 자, 건배!”
모두 마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마야가 술잔을 빨리 비우기를 바랬다.
마야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을 떠안은 듯한 표정이 사라졌다.
어떤 일인지 모종의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을 뜻한다.
마야는 방에서 나올 때 행낭 하나를 들고 나왔다. 등에 멜 정도로는 크지 않고 품에 찔러 넣기에는 너무 큰 크기다.
행낭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왜 지금 가지고 나왔을까?
어쨌든 술 한 잔을 마시고 나면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리라.
정말 개방을 칠까? 왜 방향을 바꿔 북상했나? 유계를 쳐야 천멸도주를 구할 텐데, 유계는 언제 치나? 잔접은 왜 찝쩍거렸나?
“크윽! 독하군. 이놈의 화주, 정말 오랜만이군. 하하! 뱃속에서 불이 당겨지는 것 같은데?”
“……”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빤히 얼굴만 쳐다봤다.
“우리…… 참 많이 싸웠지?”
마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궁금증에 대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후후!”
마도가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야 곁에 올 때 실컷 싸우게만 해달라고 했었다.
원을 풀었다. 남만에서는 무신과도 싸워봤으니 한이 남을 리 없다.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린다면 무신 같은 사람과 다시 한 번 손을 섞어보고 싶다는 거다.
“싸울 만큼 싸웠어. 죽음의 공포도 느껴봤고. 우리 중 몇몇 사람은 무신과도 싸워봤으니 원이 없을 거야. 지난날을 돌이켜 봤을 때, 내가 가장 다행스럽게 여긴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깨지지 않았다는 거야. 참 용케들 잘해줬어.”
“개방을 치는 거예요?”
일령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후후!”
마야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린 여기서 흩어질 거야.”
“네?”
마야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던 호채마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놀랐다.
“유계를 친다…… 말은 좋은데 칠 수가 없어. 유계를 친다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어. 하나는 주공을 처치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계를 없애는 거야.”
모두 바싹 긴장했다.
마야는 유계를 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칠 생각이다.
“여기서 난관에 부닥치는데, 첫 번째 것. 주공을 처리한 다는 것. 후후! 여기 누구 주공이란 사람에 대해서 아는 사람 있어? 없어. 아무도 없어. 잔접이 가져온 명부에도 없고, 정보에 능통하다는 개방이나 하오문도 주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 언급이 없어.”
바로 이것이었다.
유계와 싸움을 벌이면서도 유게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 답답했다.
잔접이 안겨준 명부는 유계 마인들의 초기 위치와 은폐된 신분만 기재되어 있다.
개방이 주도한 전무림의 마도 척결이 실패로 끝난 지금, 잔접의 명부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마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치고 싶어도 칠 곳이 없다. 칠 사람이 없다. 지금까지처럼 싸움을 걸어올 때 응대하는 것이 최선이다.
“두 번째 것, 유계를 없애는 것…… 이것도 힘들어.”
힘들지. 그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북검문과 남도문은 장장 삼사십 년이나 마인들을 제거해왔어. 그래도 살아남은 게 마인이야. 시마가 살았고, 마도가 살았고, 수검이 살았고…… 이 땅에 역사가 지속되는 한 정과 마는 서로 견제하며 공존하게 되어 있어. 후후! 만약 마가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지상낙원이 되겠지.”
유계라는 집단을 무너트릴 수는 있다. 허나 살아남은 자들은 곧 다른 곳에 가서 유계란 이름으로 재기할 게다.
유계 마인들을 모두 죽였다고 쳐도 유계는 살아남는다. 마인들 가슴에 전설이 되어 계승된다. 누군가 강력한 세력을 키웠을 때, 쓰고 싶은 문파명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유계이리라.
“먼저 우리 할 일부터 명확히 해야 돼. 유계를 없앤다는 말을 주공 휘하의 한정된 마인들을 제거한다는 뜻으로 고친다. 마인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주공 휘하의 마인들만 상대한다는 뜻이야.”
이것도 어렵다. 지하로 숨어들어간 마인들을 무슨 수로 찾을까?
“길을 오는 동안 내내 생각했어. 우리에게 유계를 쳐달라고 요구한 곳은 잔접. 허면 잔접이 유계를 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하는데……”
마야는 말을 그치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잔접에게서는 아무런 정보도 흘러들지 않는다. 개방은 적이 되었고, 하오문은 문내 정비에 정신없다.
아무도 길을 제시해 주지 않으며, 찾아갈 곳도 없는 상태다. 한 마디로 공중에 붕 떠버린 것이다.
“그래서 잔접의 위치를 확인해 봤어. 다담.”
마야에게서 말을 건네받은 다담선자가 조곤조곤 말했다.
“병법에 상옥추제(上屋抽梯)라는 게 있어요. 지붕 위에 올라가게 해놓고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거죠. 강에서 유계와 싸우기 전에 상공께서 깊이 생각하신 게 이거였어요. 전무림이 유계 마인들을 공격했을 때, 겉으로 보면 마인들이 당한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피했어요. 여기까지는 정보가 샜다고 볼 수 있죠. 문제는 그 다음이에요. 유계 마인들은 당연히 개방을 쳤어야 해요. 헌데 오히려 북검문이 우릴 쳤고, 이어서 유계가 공격해 왔어요.”
모두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길게 늘여놓고 보면 그렇지만 당시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쯤되면 손해타산을 따져봐야죠. 먼저 개방. 개방은 티끌만큼도 손해 본 게 없어요. 오히려 무림을 위해서 무언가는 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았죠. 공격대상자 유계를 볼까요? 유계는 오히려 더 잘 됐어요. 반격을 빌미로 무림에 나왔으니까요.”
무언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북검문도 살펴봐야죠? 북검문은 막대한 타격을 받았어요. 천랑대, 천검대, 천비대가 몰살당했고 거기에 칠공자까지. 천기수사와 만박선생도 죽었고요. 이만하면 봉문에 이르는 큰 타격이죠. 헌데 멀쩡해요. 썩은 살 걷어내듯 완벽하게 탈태환골했어요. 현재 무림은 북검문에 기대를 해요. 우릴 제거해줄 사람은 역시 북검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정도와 마도가 모두 잘 됐다는 소리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남도문은 어떨까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들리는 소문에는 제일무신가를 중심으로 체재가 완전히 개편되었다고 해요. 우리가 건드리기 전보다 더 강력해졌다면 이해가 쉽겠죠.”
마야가 바로 말을 받아 말했다.
“난 거기에 하나 더 생각했는데. 유계가 너무 자연스럽게 무림에 나섰다는 거지. 물론 그렇게 만들어준 사람이 누굴까? 우리야.”
호채마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중원 전무림을 관통하는 커다란 음모가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어쩌면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생각도 든다. 어쩐지…… 어쩐지…… 남무림을 그렇게 휘젓고 다녀도 가만히 내버려두더라니.
“지금 우린 갈 곳이 없어. 할 것도 없고. 다담이 말한 상옥추제. 딱 그꼴이 되었어. 유계가 공격해 오지 않았다면 내 가정이 잘못된 건데, 유계가 공격해 왔어. 가정이 맞았다는 소리야. 북검문주, 남도문주, 유계의 주공. 이 세 사람은 적이 아니다. 서로 긴밀히 협조하고 조율하며 무림을 통치하고 있는 거야.”
“뭐!”
“에이 설마……”
마야를 철썩 같이 믿는 호채마도 이 말만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보면, 주공은 음지에서 마인들을 거둬 마계를 다스렸어. 북검문주와 남도문주는 장강싸움을 빌미로 남북무림을 지배했고. 지금까지는 잘 지내왔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유계가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사정이 된 거야. 헌데 튀어나오기만 하면 정도라는 사람들이 내버려 두지 않거든. 당연히 마이들도 살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테고. 북검문과도 싸워봤고, 유계와도 싸워봤으니 느낌이 있을 거야. 유계는 결코 북검문이나 남도문에 못지않아. 아주 강해. 그런 힘들이 정면에서 부딪치면.”
“양패구상(兩敗俱傷)이군요.”
금연화가 말했다.
“손해는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유계를 내놓으면서 무림 장악력조차 유지하는 방법. 우린 그 일을 해준 거야.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 생각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잔접 회합을 요구했는데, 성사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전혀 성과가 없는 건 아냐. 우리가 물러선 후, 칠신녀가 십일 잔접을 죽였어. 그건 잔접과 북검문은 최소한 벗은 아니라는 소리지.”
“그래요?”
금연화가 불쑥 말했다.
잔접이 적인가 아군인가 하는 문제에 금연화만큼 신경 쓰는 사람도 없으리라.
연유야 어찌되었든, 저간 사정이 어떻든 혈귀대주가 잔접과 모종의 연관을 가진 것만은 틀림없다. 또 그의 죽음조차 각본의 일환이라면 잔접이야말로 마야를 무림에 끌어들여 분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잔접은 분명히 적이다. 혈귀대주도 적이 된다. 친구를 위험에 빠트렸으니 아주 나쁜 인간이 된다.
혈귀대주가 여전히 벗으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잔접이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되어야 한다.
유계, 북검문, 남도문이 하나로 연결되고, 잔접이 그들과 싸운다면 혈귀대주는 의인(義人)으로 남게 된다.
‘다행이야. 다행……’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부터 바싹 긴장해야 돼.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이 맞다면 우린 아주 곤란해졌어. 유계는 물론이고 중원 무림 전부가 우릴 죽이려고 달려들 거야. 북검문이 전면에 나선다는 점도 다를 거고.”
“북검문이 전면에 나선다면……?”
“삼원로가 나선다는 거지. 이용가치가 끝났으니 제거해야지 않겠어? 유계에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격을 해올 거야. 다수로 밀어붙이지 않고 진짜 고수가 나오겠지.”
“후후후! 이거 기분 더러운데……”
마도가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그토록 무림을 핍박해도 무신들은 나서지 않았다. 무신이라면 호채마의 능력을 정확히 꿰뚫어 봤을 텐데, 천랑대처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인 상대를 내보냈다.
마야의 잔인함과 가공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현재 마야 일행은 무신과 버금가는 정도로 대우받는다.
삼원로가 되었든 유계의 고수가 되었든 호채마를 죽이는 자는 다시 한 번 절대무(絶大武)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마야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상대할 자는 아마도 삼원로보다는 유계쪽 고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야 유계 역시 무신 정도의 고수가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되고, 정도 무림인들로 하여금 죽여 없애야 한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 마야가 누리는 효과를 고스란히 가져가는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