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44
344
공령문은 단순한 도적 집단이 아니다. 공령문이라는 말뜻에는 현묘한 이치가 담겨있다. 공령(空靈), 몸도 마음도 다 버리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경지를 일컫는다.
일령은 무상금강권을 보지 않았다. 눈을 뗄레야 뗄 수 없게 만드는 죽음의 권법이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봤다.
선유비조신법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온갖 병기가 아슬아슬하게 몸을 스쳐가는 위험을 겪어야 한다.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이것만은 정녕 피할 수 없다고 느껴도 자신을 믿고 선유비조신법에 충실하면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허나 자신을 믿지 않고 공격에 관심을 쏟으면 두말할 것도 없이 격중당했다.
공격에 초연하는 건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졌다.
쒜엑! 쒜에엑……!
광풍노도 같은 권력이 아슬아슬하게 빗겨갔다.
“후웁!”
일령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큰 숨을 들이켰다.
여풍(餘風)이 너무 심하다. 권력은 피해내도 뒤따라 흐르는 여풍이 중심을 마구 뒤흔든다. 그놈의 여풍 때문에 진기의 흐름이 수월치 않다. 자칫 신법의 흐름마저 깨질 뻔했다.
계산대로라면 염화옥수로 반격할 기회를 잡았어야 하는데, 반격은 커녕 중심 잡기에 급급했다.
“제이권까지? 크카카캇! 좋구나, 좋아! 좋다! 제삼권이다!”
‘도주!’
승산이 없다. 한두 번의 공격을 더 막아낸들 무슨 의미가 있나. 결국은 권력에 휘말릴 것이고, 선유비조신법이 깨질 것이다.
그녀는 호승심보다도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다.
“흥!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줄 알고! 받앗!”
그녀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선공(先攻)을 취했다.
공격에는 공령문의 절기보다 절혼마녀의 귀적무가 낫다.
일령의 몸은 뿌연 안개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절혼마녀라면 안개가 어린다 싶은 순간 사라졌을 것이다. 수련 정도가 낮아 절혼마녀처럼 능숙하게 펼치지 못한 게다.
완벽하지도 않은 무공을 무신 앞에서 펼쳤단 말인가?
“귀적무! 좋은 무공이기는 하나 아직 멀었네!”
통천서패가 게세게 치달려와 삼 권을 연속으로 후려쳤다.
팡! 팡! 팡!
육신을 가격하는 격타음은 없었다. 빈 허공을 후려치는 바람소리만 요란했다.
일령은 사라지고 없었다.
“허! 여우보다 간사한 아이로고. 완벽한 귀적무를 일부러 어설프게 펼쳤다? 허허! 흠! 이건 천와류의 향기. 선유비조신법에 귀적무, 거기에 천와류까지. 당대 제일의 신법 대가가 탄생했군.”
통천서패는 바람의 흔들림에서 천와류의 내음을 맡았다.
신법이란 쉽게 말해 인간의 움직임이다. 어떤 진기를 사용하고 어떤 혈도를 이용하건 간에 지면을 박차는 움직임과 공기를 가르는 힘은 기류에 변화를 준다.
기류의 흔들림만 잘 감지해도 상대의 빠름이나 변화 정도를 알아챌 수 있고, 조금 더 생각하면 무공 또한 판별해낼 수 있다.
통천서패는 서둘지 않았다.
“그래봤자 고통만 더한 것을……”
‘따돌렸어.’
생각보다 쉽다. 못 빠져나올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나왔다.
갑자기 자신감이 샘솟았다.
신법에 자신이 있긴 했지만 무신에게도 통용될 줄은 몰랐다. 실전에서 직접 시험해 봤으니 이제부터는 무신이라고 무조건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자신의 신법이 이토록 탁월했다면 수검이 싸울 때 숨어서 지켜볼 것이 아니라 나가서 합공하는 건데. 그랬다면 수검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일령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통천서패에게서 벗어나 겨우 십 리를 치달렸을 때, 검은 무명옷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건을 쓴 사람을 봤다.
‘혈일뢰!’
혈일뢰의 미간에는 붉은 홍조가 감돌았다.
독문신공인 혈뢰신공을 끌어올린 상태다.
일령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 혈일뢰 앞에 섰다.
“당신, 나한테 죽어야겠어요.”
혈일뢰는 어처구니없는지 말도 못하고 서 있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뭐? 죽어? 허! 허허허! 허허허허!”
“웃다가 죽기 싫으면 혈뢰신공을 힘껏 써야 될 거예요.”
쒜엑!
일령은 거침없이 쏘아갔다.
귀적무를 믿는다. 선유비조신법을 믿으며, 최후의 순간에는 천와류가 있으니 안심한다.
“이거야 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딱 그 짝이네. 몇 년 더 있으면 도나 개나 다 덤벼들겠어.”
혈일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파앗!
일령의 신형이 혈일뢰의 코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신 시퍼런 검광이 혈일뢰의 뒷머리를 노리고 쪼개갔다.
어느 새 등 뒤로 돌아가 일검을 전개한 것이다.
“죽음을 부르는 빛! 사루의 무학이군!”
혈일뢰는 한 발 앞으로 나가 일검을 피했다.
한 치만 더 깊게 뻗어냈어도 등줄기를 훑을 수 있는, 아니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엇!’
일령은 내심 깜짝 놀랐다.
혈일뢰가 펼친 신법은 약간 변형되기는 했지만 선유비조신법이 아닌가. 아니다. 공령문의 절기는 아니다. 유사하다고 해야 할까? 분명히 아닌데 비슷하다.
“한 수 받았으니 줘야지?”
쒜엑!
혈일뢰는 손을 쭉 뻗어 옷섶을 잡아왔다.
일령은 즉시 뒤로 물러섰다.
헌데…… 아! 따라온다. 일령의 움직임보다 더욱 빠르게 다가온다. 물러서는 속도가 하나라면 하나 반의 빠르기로 덮쳐온다.
“타앗!”
일령은 다시 검을 쳐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혈일뢰의 잡아채오는 손을 물리게 하려는 목적과 한 발 더 나아가 상반신을 두 동강 내려는 의도가 담겼다.
쉬익! 타악!
혈일뢰를 각법을 시전했다. 다리를 올려 일령의 손목을 걷어찼다. 일령이 검초를 뻗어내는 시점에 차올린 각법이라 피할 틈이 없었다.
“으음!”
일령은 짜릿한 통증을 느끼며 검을 놓쳤다. 계속 뻗어오던 손아귀에 멱살까지 잡혔다.
이번에는 너무 쉽게 당하고 말았다.
무신이라는 대어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가상타. 그만 죽어도 할 만큼 한 거야.”
혈일뢰는 좌수를 추켜올렸다. 혈뢰신공이 주입된 장(掌)에 자홍빛 윤기가 흐른다. 그때,
쒜에엑!
검 한 자루가 땅속에서 쑥 올라오며 혈일뢰의 낭심을 노렸다. 빠르기도 섬광,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보였다.
“허허!”
혈일뢰는 여유있게 웃으며 한 발 물러섰다.
검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언제 공격이 있었냐는 듯 정적이 흘렀다.
“아이야, 천멸도의 은신술이 뛰어나긴 하지만 내 눈에는 청개구리가 풀잎 사이에 숨어있는 것과 같아 보이는구나. 그만 나오거라. 계속 은신술을 고집하면 검을 써보지도 못한 채 죽게 될 게야.”
혈일뢰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호호호!”
아름다운 교성이 땅 속에서 새어나왔다. 옥구술 굴러가는 듯 영롱했다. 연후, 땅거죽이 들썩이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흰색 천으로 둘둘 감싼 괴인이 나타났다.
“언니? 언니!”
일령이 한달음에 달려와 괴인의 손을 움켜잡았다.
“넌 여전히 바보구나. 혈일뢰가 어떤 사람인데. 보자마자 도주했어야지 덤벼들어? 어처구니없기는.”
나타난 사람은 궁왕에게 잡힌 것으로 알려진 천멸도주였다.
“언니 괜찮아?”
“누가 누굴 염려하는 거야?”
천멸도주의 음성은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음성만 들어서는 건강도 이상이 없어보였다.
천멸도주가 일령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빨리 도주하지 않고 뭐해!”
“언니, 언니는?”
“빨리!”
일령은 고개만 한 번 끄덕인 후, 재빨리 천와류를 펼쳤다.
쒜에엑!
그녀의 신형은 곧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혈일뢰는 뜻밖에도 쫓지 않았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담담한 눈길로 바라봤다.
“잔접이 장난을 좀 쳤지만, 실은 궁왕이 데리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니 궁왕도 왔겠구나.”
“말해 줄 이유가 없군요.”
“나도 네게 한 말이 아니다. 노우(老友), 나와서 얼굴이나 보지 않으려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바람만 스산하게 불어와 풀잎을 휩쓸었다.
“후후! 후후후후……!”
혈일뢰는 웃었다. 아주 기분 나쁜 웃음이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다.
천멸도주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혈일뢰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주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라는 듯 담담히 지켜봤다.
“선배님!”
“말한 틈이 없다. 빨리!”
천멸도주는 칠 척 거한이 이끄는 대로 뒤따라가기에 급급했다.
들판을 가로지르고 산을 넘었다. 개천도 건너고, 마을 한 가운데로 질주하기도 했다.
“선배님!”
“집중! 말할 틈이 없다니까!”
앞선 사람은 등에 커다란 철궁을 맸다.
그렇다. 남도문 제삼무신가의 가주인 궁왕 강창도다.
두 사람은 곧 이름 모를 큰 강에 도착했다.
“휴우! 됐다. 여기서라면 괜찮아.”
궁왕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강가는 탁 트인 개활지다. 강가 너머에는 드넓은 논이 펼쳐져 있다. 누가 다가온다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지형이다.
“하하! 봤느냐? 혈일뢰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
“네.”
“그래서 우리 무신들은 겁쟁이라고 하는 거야. 나 역시 마찬가지고. 우린 우리끼리 싸우는 걸 겁내지. 이기고 질 가능성이 반반. 정말 한 치도 예측할 수 없어. 하지만 내가 있는 걸 눈치챘으니 곧 삼원로란 작자들, 죄다 몰려올 게다.”
궁왕은 철궁을 꺼내 손에 들었다.
언제라도 은형시를 쏘아낼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삼원로의 텃밭이다. 남무림 제삼무신가주가 북무림 깊숙이에 와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마야를 쫓던 것과는 상대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나마 궁왕이 북무림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남북 무림의 관계가 예전만 못해졌기 때문이다. 마야, 유계, 북검문의 요동 등 무수한 변수가 생긴 탓이다.
“일령을 부를 까요?”
궁왕은 사위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멸도주는 지체하지 않고 폭죽을 쏘아 올렸다.
제8장 타영자(打影子) ― 겁나다
1
마야는 잔접 곡부인을 찾았다.
“오셨군요.”
양리리가 어설픈 미소를 띄며 말했다.
너무 반가워 품에 안기고 싶지만 그럴만한 인연이 아니니 애써 억누를 수밖에 없다는 뜻은 확실히 담겨 있었다.
“도망간다고 쫓아갈 필요는 없다고 하더군. 가만 있으면 올 것이라고. 아직 끝난 인연이 아니니까.”
곡부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마야는 양리완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가에 잔잔한 파랑이 인다.
마야는 수상쩍은 느낌을 받았지만 서둘러 외면했다.
“잔접을 모아주시겠습니까?”
“유계를 친다더니 어찌 되었나?”
곡부인은 대답 대신 물어왔다.
“그 문제도 해결해야겠소. 유계, 북검문, 남도문. 이 중 하나를 치는 조건으로 두 사람의 목숨을 내걸었소. 금소저와 천멸도주. 헌데 금소저는 이미 자유를 얻었고, 천멸도주가 남았는데…… 궁왕 손에 있는 천멸도주를 무슨 수로 빼내주겠다는 건지 확실히 말해주겠소?”
“계약을 다시 하자는 건가요?”
“난…… 내가 남을 속이지도 않지만 누가 날 속이는 것도 용납하지 않소. 그게 사람 목숨이 달렸을 때는 더더욱 그렇지.”
“어째 말 속에 가시가 느껴지네요.”
“가시로 느꼈다니 다행이오. 난 살기를 쏟았는데.”
“보자보자하니……”
“곡부인, 잔접을 부르시오. 모두 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내 생각을 조금 말하면 잔접은 사기를 쳤소.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고 금은보화라도 든 냥 거들먹거렸지. 유계를 쳐라. 북검문을 쳐라. 남도문을 쳐라.”
“……”
곡부인은 침묵했다.
“잔접이 그럴 수 있었던 건 자신들이 절대 발각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때문이었을 거요. 조금이라도 정체가 발각될 우려가 있으면 당장 내쳐질 정도니 비밀 하나는 철저하게 유지되겠지.”
“잔접을 잘 아는 듯이 말하는구나.”
곡부인의 말투가 은연중에 바뀌었다.
그녀는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항상 존대를 했다. 차분차분, 조곤조곤…… 어떤 경우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지금은 서서히 무너져 간다. 무엇이 그녀를 격동시키는 것일까?
“난 잔접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소.”
“뭐라고!”
마야는 입을 살짝 벌리며 말없이 곡부인을 응시했다.
“가아아아아……!”
적멸주가 쏟아져 나갔다. 얼굴에는 환희마소를 띄었다.
칠신녀와 싸우면서 웃음과 공포는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을 배웠다. 잔혹한 웃음과 공포는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혼이 빨려들 듯한 미소에 접목된 공포는 혼을 뒤흔든다.
곡부인이 파르르 떨었다.
“네, 네가 감히 내 머릿속을!”
“그렇군. 잔접의 연락망이란 게…… 후후!”
마야는 곡부인을 쳐다봤고, 곡부인은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며 노려봤다.
“곡부인, 난 이제부터 사기에 대한 응징을 하려고 하오. 잔접을 부르시오. 무조건. 경고라고 들어도 좋소. 내가 잔접을 부르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내 마지막 호의요. 양소저와의 정리가 아니었으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겠지.”
마야는 더 들을 말이 없다는 듯 일어섰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나왔다.
“마야…… 많이 컸군.”
“사실이에요. 모든 걸 알아요. 환희, 기쁨, 살기. 마야는 잔접을 끌어낼 수 있어요.”
양리완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말이 그렇다면 그런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