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7
37
소립파는 다담선자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냉막해져 있었다.
“역시 안 되겠어. 길을 뚫어야겠군.”
시마의 녹광이 더욱 짙어졌다. 수검의 살기는 소름 끼치도록 높아져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고루쌍마가 겸도를 꺼내 들며 말했다.
“마야라면 우리도 양보할 수 없으니까. 특히 우릴 이 지경으로 만든 정도라는 놈들에게는 마야를 내줄 수 없지.”
일촉즉발의 긴장이 흘렀다.
고루쌍마, 시마, 수검, 마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행(五行)의 방위를 점했다.
전부가 초강자인 그들이 무공도 수련한 적이 없는 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오 대 일의 합공을 펼치려는 것이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혈유와 다담선자뿐이었다.
금연화, 절혼마녀, 일령은 느닷없는 상황에 일어서기는 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다.
마야와 마인들 간의 거리는 반 장이 채 안 된다. 누구든 손만 뻗으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긴장감이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을 때, 다담선자가 조용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마야, 언젠가 제게 이런 말을 해주셨죠. 마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냐고요. 첫 번째가 올바른 무공을 수련했음에도 마음이 사악해서 못된 길을 걷는 자이며, 두 번째가 지나치게 강하고 독선적이라서 무림과 상존하지 못하는 자이며, 세 번째가 무공 수련 과정이 사악해서 인륜을 저버린 자라고 하셨어요.”
다담선자가 행복한 표정으로 모닥불을 쳐다봤다.
“첫 번째는 존재해서는 안 될 자. 두 번째는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죽어 있을 자. 벗으로 사귈 사람은 세 번째 부류밖에 없다고도 하셨죠. 패륜적인 부분을 제거한다는 조건하에서요.”
긴장이 풀어진다. 마인들의 살기가 급격하게 소멸된다.
다담선자가 말을 잇는 동안 그들의 몸에서는 가는 경련이 일어났다.
“마야, 여기 있는 분들…… 죽으라면 죽어주실 수 있을 거예요. 이분들이 괜히 마야라고 부르는 게 아니잖아요. 도움을 받으면 안 되나요? 무공을 버리지 못하고 평생 숨어 살아야 할 사람들인데, 죽을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좋잖아요.”
“후후!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수검이 여전히 소립파를 노려보며 말했다.
“엠병! 더욱 괘씸한 건 말이야. 마야, 저놈…… 혈귀대를 죽인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진작 알았다면 우릴 부르지도 않았을 거라는 거야. 아주 벼락 맞아 뒈질 놈이라니까. 제놈이 뒈지면 난 어떡하라고. 삼 년마다 온몸이 뒤틀리게 만들어놓고 제놈은 쏙 빠지겠다는 거야, 뭐야.”
시마가 침을 튀겨가며 말했다.
“마야, 그래도 혼자 가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마도가 살기를 거두고 한 발 물러섰다.
“제길!”
고루쌍마도 겸도를 거뒀다.
소립파는 한참 동안 다담선자의 등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다담,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쥐새끼들 치워.”
“알았어요.”
다담선자는 홱 돌아서며 밝게 웃었다.
제5장 중정리(重整理) ― 깊게 정리하여
1
“귀적무 좀 봤어?”
며칠 만에 말을 걸어오는 건지.
천비대에 포위당해 언장은마를 따라갈 때부터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는데.
“약간. 이제 겨우 형태만 잡았어요.”
“나이 많은 여자가 말 올리니까 어색해. 말 놔.”
“다담선자도 많지 않나요?”
“다담은 내 여자니까.”
“이상한 말이군요. 반대 아녜요? 일반적으로는 서로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다가 자기 여자가 되면 내리는 편인데. 남존여비(男尊女卑). 이런 건가요?”
“내 여자는 존중받고 존중해 줘야 하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 편한 대로 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과도 편한 대로 하는 거야. 그게 서로 등을 돌릴 때 편하니까.”
“똑같이 편한 대로 하는데 의미는 다르다는 말이군요. 좋아요. 전 이게 편해요. 절혼마녀가 된 건 기간으로 따지면 모두 합쳐 한 달도 되지 않을 거예요. 그 외의 나날은 동방주였죠. 손님을 받는 입장에서 존대는 입에 붙었으니까요. 그것보다도 마야 여자만이 말을 올리는 거라면 놓고 싶지 않군요.”
절혼마녀는 생긋 웃었다. 웃을 때마다 양 볼에 파이는 보조개가 그녀의 웃음을 한층 매혹적으로 만든다.
“그런 생각이면 낙화향으로 돌아가. 지금 가는 길은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길이니까.”
“다담선자가 마야를 생각하는 마음도 방심 아닌가요?”
“다담은 제 몫을 하는 여자니까 괜찮아.”
“저도 제 몫은 해요.”
“그럼 알아볼까? 귀적무는 귀신의 춤. 삼십 장 정도는 흔적없이 스며들 수 있지. 귀신이 내뿜는 검에는 숨결이 없으니 무영(無影), 무성(無聲). 잠사검귀들은 잠형신법으로 은신해 있고, 무음검을 사용하니 좋은 상대가 될 거야. 정확히 삼십 장 앞에 잠사검귀 여섯 명이 있다. 해볼 텐가?”
절혼마녀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농담이 아니다.
현현보법과 육경검법을 펼친다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아직 수련조차 하지 않은 귀적무로는 어림도 없다.
“철벽구망진인가 하는 것도 펼쳐져 있나요?”
“물론. 여섯 명이 펼치는 진과 서른 명이 펼치는 철벽구망진은 천양지차이지만 웬만한 자는 충분히 요리할 수 있지. 참고로, 다담은 절간에서 여섯 명을 죽이는 데 두 호흡밖에 걸리지 않았어.”
마지막 말이 절혼마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목숨을 건 결전에서는 지극히 냉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행동해 왔지만 소립파를 앞에 두고는 그럴 수 없다.
‘훗! 절혼마녀. 네가 사랑을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다담은 청백지신. 넌 창기. 술 따르는 여자라고 해도 같을 리가 없잖아. 이런 사내가 뭐가 아쉽다고 닳고 닳은 계집을 원하겠어.’
이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어떤 사내든 치마폭에 휘감을 자신이 있었다. 그만한 용모와 매력을 지녔다고 자부했다. 자신을 거둘 만한 사내가 없으니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이지, 한 남자의 여자로 살아갈 생각이 있었다면 창기지만 정실 부인을 꿰찰 자신이 있었다.
남자의 눈을 한눈에 현혹시키는 미모를 지니고도 폐기들이나 하는 넋두리를 하게 될 줄이야.
“마야가 하라면 해야죠.”
절혼마녀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스스슷……!
그녀의 신형이 안개처럼 흐려지는가 싶더니 벌써 오 장 앞을 달려나갔다.
“혈유.”
“히힛! 그럴 줄 알았다니까.”
혈유가 신이 난 듯 절혼마녀의 뒤를 좇았다.
퍼엉!
절혼마녀는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단단한 철벽이 가로막아 선 느낌을 받았다. 마치 벽에 거센 힘으로 부딪친 듯 기혈이 흔들렸다.
‘여기야!’
귀적무를 수련하면 사물의 기에 민감해진다.
본격적으로 수련하지는 않았지만 육경검법과 귀적무는 한 사문에서 출발한 무공. 요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틈이 날 때 몇 번 신형을 놀려본 것만도 이럴진대 정작 십성 성취를 이루고 난 다음에는 어떨 것인가.
스스슷!
일말의 기척도 없이,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갔다.
잠사검귀 여섯 명은 분명히 숨어 있다. 그들이 펼치는 잠형신법이란 무엇인가. 이름이 잠형이니 몸을 숨기는 데는 탁월한 효능이 있는 은신술이리라.
‘눈으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돼. 귀적무를 펼치라고 한 것은 귀신의 눈으로 보라는 뜻.’
스으으으……
모공을 활짝 열고 기감을 최대한 멀리 쏘아냈다.
자신이 기감을 쏘아내면 잠사검귀도 알아차린다. 흘러드는 기감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면 은신술을 펼칠 자격이 없다.
알고 알아차리고. 그 다음은 누가 빠르고 은밀하냐에 달려 있다.
‘잡혔어! 우측 이 장!’
스으윽……!
느낌이 왔다 싶은 순간 절혼마녀의 신형은 바람에 흔들린 운무처럼 흐물거렸다.
사악!
“컥!”
땅속에 숨어 있던 잠사검귀는 손가락조차 꿈지럭거려 보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약한 자들이 아니다. 귀신의 춤을 추어 소리없이 검을 찔러 박는 순간, 절혼마녀 역시 흑무에 휘감겼다. 그리고 흑무 사이로 다가오는 다섯 자루의 검기를 감지했다.
피할 수 없다. 방어하기에도 늦었다.
‘이렇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몸을 뚫고 들어와 빨리 목숨을 거둬주기만 기다렸다. 그때,
퍽퍽퍽퍽퍽……!
검기 사이를 누비는 부드러운 물결이 느껴지고, 붉게 피어나는 혈화(血花)가 상상 속에 그려졌다.
아니다.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짤막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으니 확실한 현실이다.
“여자야. 겨우 한 명 죽인 거야?”
‘혈유!’
“귀적무 그것, 내가 탐내던 무공이었는데. 내 것도 좋지만 살수들이 쓰기에는 귀적무가 이거거든.”
혈유는 엄지손가락을 추켜 보였다.
“고마워.”
“어! 이 여자 봐? 어린 마야에게는 존대를 하고 내게는 계속 반말이네? 좌우지간 제정신인 인간이 한 명도 없다니까.”
절혼마녀는 혈유의 말을 들으며 숲 밖을 쳐다봤다.
소립파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여자야, 독수전의 흐름을 느꼈어?”
“응.”
“느끼라고 일부러 천천히 펼쳤어. 공기에도 물결이 있는데, 이걸 잘 타야 저항을 최소한으로 감소시키거든. 귀적무를 수련할 때 참고로 하면 득이 될 거야.”
“귀적무를 잘 아나 보네?”
“친구 놈이었거든.”
“그…… 래? 작년에 죽었다던데…….”
“섬전잔영(閃電殘影)이란 놈이 있는데.”
들어봤다. 점창파(點蒼派)의 고수로 독문신법인 비천십이표(飛天十二飄)를 극성으로 수련하여 중원에서 제일 빠른 자가 되었다. 쇄락의 길을 걷던 점창파가 그의 등장으로 인해서 단번에 주목받는 대방파로 거듭났으니 무림의 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인들은 혈유가 가장 빠르다고 한다. 하나 중원무림인들은 섬전잔영을 으뜸으로 여긴다.
“그놈한테는 안 된다고 그렇게 말려도 부득불 달려가더니만 뒈지더라고. 언제 섬전잔영이라는 놈을 만나면 검을 박아줘. 단번에 죽이지 말고. 육십사 개 혈을 차근차근 저민 다음에 두 눈을 뽑고, 코를 베어내고, 양 귀를 잘라내고, 두 팔을 잘라. 다리는 맨 마지막이야. 그동안 부지런히 발악을 해야지. 족근을 차례차례 끊고, 정수리에 천천히 검을 박아. 그놈이 그렇게 뒈졌거든.”
‘맙소사!’
절혼마녀는 치를 떨었다.
섬전잔영이 그런 사람이었나. 그토록 잔악한 심성을 지녔나. 아니면 마인이라서 일벌백계를 한답시고 그런 죽음을 내린 건가. 아무래도 너무 심했다.
“귀적무를 이은 이상 놈의 복수는 해줘야지.”
쉬운 일이 아니다. 섬전잔영을 죽이는 것도 문제지만 그런 식으로 죽이면 당장 마도인으로 매도된다.
그래도 절혼마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알았어. 같은 하늘 아래 있으니 언젠간 만나겠지. 똑같은 방법으로 죽일게.”
“여자. 하하하! 여자, 처음부터 마음에 들더라니까.”
혈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소립파가 숲으로 들어와 죽은 자들을 살폈다.
“그래도 한 명은 죽였군.”
“꼭 말을 그렇게 해야 돼요? 어떤 때 보면 정말 정이 없더라.”
다담선자가 절혼마녀에게 다가와 손목을 잡았다.
“언니, 대단해요. 수련하지도 않은 귀적무로 잠사검귀를 죽일 줄은 몰랐거든요. 혈유가 그렇게 달라고 해도 안 주더니, 역시 임자가 따로 있었네요.”
절혼마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하겠어.’
잠사검귀는 자신들이 변을 당할 경우를 대비해서 언제 누구에게 당했다는 흔적을 남긴다. 전서를 날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전서로, 그렇지 않을 때는 독문표기로.
그들만의 독특한 표기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은신했던 곳을 중심으로 방원 십 장을 샅샅이 뒤져야 한다.
모두들 조그만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절혼마녀는 다담선자에게 다가가 옷깃을 살짝 붙잡았다.
“동생, 할 말 있어.”
“그래요?”
다담선자는 천진난만하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지금은 웃지만 말이 끝난 후에는 원수로 대할지도.’
“여기선 할 수 없는 말이죠?”
“그, 그게…….”
“우리 저쪽으로 가요.”
‘무슨 말인지 알고 있나?’
상황이 역전되었다. 말을 꺼낸 것은 절혼마녀였지만 그녀를 이끄는 사람은 다담선자다.
다담선자는 개울가를 찾아 신발을 벗고 맨발을 물에 담그며 말했다.
“언니도 이리 와서 앉아요. 여자들은 편히 쉴 권리가 있다고요.”
“풋!”
절혼마녀는 피식 웃으며 다담선자처럼 신발을 벗고 맨발을 담갔다.
“마야 좋아하죠?”
“그게…….”
“언제부터예요?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니까 딱히 언제부터라고…….”
“호호호! 절혼마녀가 말을 더듬거린다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절혼마녀는 마음이 편해졌다.
다담선자는 많은 취객들을 상대해 본 선루의 루주다. 사람 다룰 줄을 안다. 그러고 보니 그녀 옆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색깔이지만 즐거움과 평화를 느낀다.
“놀리는 취미도 있었어?”
“그래요. 이제야 언니다워요.”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어. 창피하게. 무언의 승낙도 곁들여져 있어. 언니답다는 말, 마야와 편하게 지내도 좋다는 뜻이야.’
“나도…… 괜찮을까?”
“쓰레기 같은 계집이. 돈 받고 몸이나 파는 주제에. 배 위로 몇 놈이나 거쳐 갔어? 하루에 한 명만 쳐도 일 년이면 삼백 명이네? 이거 완전히 정액받이 아냐. 에이, 하수구에 쏟아버리는 셈 치지.”
“…….”
“하루에 한 번씩은 들어본 말이에요. 그렇죠?”
“휴우! 동생은 아니지만 난 정말 그런 여자야.”
“언니를 알아요. 열세 살에 윤간당해 버려진 걸 동방주가 거뒀죠. 취옥이란 기명(妓名)은 그때 얻은 거고. 열세 살…… 사내를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잖아요.”
“그걸 진심으로 즐긴 적도 많아.”
“알아요. 방중술, 섭혼술을 수련하기 위해서요. 그래야 무인들에게서 무공을 빼낼 테니까요. 정한문(情恨門)의 탈백섭심공(奪魄攝心功). 호호! 언니도 마인이에요. 탈백섭심공은 펼치면 펼칠수록 마음이 사악해진다는 거 알죠? 나중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탈백섭심공을 쓰려고 할 거예요.”
“어떻게…… 그런 걸……?”
“마인으로 살아남으려면 유난히 눈과 귀가 밝아야 해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마야에게 손봐달라고 하세요. 시마, 마도, 수검, 혈유…… 전부 마야에게 신세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