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38
38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 무공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어. 그런데 왜 자신은 못 고치는 거지? 경맥이 딱딱하게 굳으면 움직이는 것도 괴로울 텐데. 그것보다 이들…… 상상 이상으로 큰 조직이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언니, 마야를 위해서 죽을 수 있어요?”
‘죽는다…… 쉬운 말은 아니네.’
절혼마녀는 즉시 답할 수 없었다. 그를 좋아하는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흔히 장난삼아 말하는 식으로 답해줄 수도 있지만, 다담선자가 말한 죽음이란 진짜 죽음이란 걸 알기 때문에 허투루 말할 수 없었다.
“죽을 수 있을 만큼, 정말 절절이 사모하게 될 때 마야 곁에 서세요. 그런 사람이면 전 얼마든지 환영해요. 그런 사랑이라면 마야도 무시하지 않을 거고요. 요조숙녀, 창기. 이런 건 상관없어요. 이 세상에는요.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람, 흔치 않거든요. 물이 참 시원해요. 그렇죠?”
“그래. 참 시원해.”
절혼마녀의 텅 비었던 마음은 하나 가득 채워졌다.
희망이란 걸 모르고 살았다. 술과 사내를 즐기며 한평생 보낼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퇴폐 속에 파묻혀 곪아갈 줄 알았다.
이제 희망이 생겼다.
이 세상…… 살 만하지 않나.
소립파는 잠사검귀의 은신처를 정확히 찾아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절혼마녀와 혈유가 움직였다.
“실전을 통한 수련처럼 좋은 건 없지. 귀적무가 상당히 좋아졌어.”
수검이 절혼마녀의 움직임을 보며 평가했다.
“마야도 대단하지만 잠사검귀도 대단하네요. 어떻게 우리가 갈 길을 환히 알고 있는 거죠? 사람을 만난 적이 없으니 목서에 들킨 것도 아니고, 매를 본 적이 없으니 천목에 걸린 것도 아닌데.”
금연화의 표정도 밝았다.
왜 아니 그렇겠나. 소립파가 본격적으로 복수행에 뛰어들었는데.
“옥천산에서 장강을 넘는 길은 세 개지. 단문협을 건너는 길이 하나고, 이릉(夷陵)을 통해 넘는 길과 남진구(南津口)로 가서 삼협(三峽)을 건너는 길이 있어. 단문협은 손도 못 댈 곳이고, 이릉으로 가면 편하지만 단문협에서 너무 가까워. 고생되더라도 남진구로 간다. 뻔한 수지.”
소립파 대신 마도가 대답했다.
“그럼 지금 이 길이……?”
“남진구로 가는 길이야.”
그때다. 소립파가 절혼마녀를 불렀다.
“절혼.”
“고마워요. 마녀라는 말을 빼줘서.”
“전방 사십 장. 실전으로 배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는 꼭 두 명을 죽여봐.”
절혼마녀는 깊이 보조개를 새기며 웃었다.
“실망시키면 안 되겠죠?”
절간에서 시작하여 모두 다섯 번에 걸친 싸움. 잠사검귀 서른 명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때부터 바빠졌다.
소립파는 남진구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방향을 꺾어 북으로 치달렸다. 촌각도 쉬지 않고, 끼니도 굶어가며 최상의 신법을 펼쳐 북으로, 북으로 나아갔다.
혈유는 과연 가장 빠른 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꼬마처럼 작은 그는 덩치 큰 소립파를 업고도 누구보다 빨랐다.
하루 낮을 꼬박 달리고, 밤까지 지새우고,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오로지 달리기만 했다.
절혼마녀에게는 귀적무를 수련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였지만 금연화나 일령에게는 처절한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하나같이 고강한 고수들.
그들에게는 그저 약간의 인내를 요구하는 일에 불과했지만 두 여인에게는 체력과 진기를 극한까지 짜내야 하는 고통이었다.
진기가 고갈된다.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고, 숨은 턱 밑까지 차 오른다.
‘천천히 좀 갔으면…… 조금만…… 조금만 쉬었으면…….’
진기가 바닥을 드러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 싶을 무렵, 소립파는 큰 산을 마주하고 섰다.
“헉헉! 헉! 여, 여기는…… 헉!”
숨이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무공 수련을 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많이 겪었지만 이처럼 온몸을 쥐어짜 보기는 처음이다.
다담선자가 등 뒤로 다가와 명문혈(命門穴)을 쳐주며 말했다.
“정자산(亭子山)이에요. 여기서 두어 달 정도 있어야 될 거예요.”
그녀도 거친 숨을 내뱉기는 했지만 음성은 상당히 고른 편이었다.
내력의 우열이 명확히 갈라졌다.
다담선자는 마도나 수검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고, 절혼마녀가 뒤를 잇는다. 어처구니없게도 유일하게 정도무공을 수련한 금연화와 일령이 가장 처진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겸손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천비대의 눈은…… 후웁! 천하에 안 깔린 곳이 없다고 하던데…… 후우! 여기는 안전하겠어?”
절혼마녀가 체한 사람처럼 얼굴이 샛노랗게 변한 일령의 명문혈을 자극해 주며 물었다. 본인도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지만 일령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제가 선몽주가 되었을 때 마야가 찾아와 이런 말을 해줬죠. 적을 무시하지 마라.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는 신과 싸울 것처럼 최선에 최선을 다하라. 하지만 적과 마주 서면 상대 역시 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마라. 완벽하지 않은 인간임을. 전 사람과 만나기 전에는 최선을 다해서 조사했고,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고관대작, 효웅, 거상일지라도 마주하는 순간에는 허점 많은 인간이라는 점을 되새겼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 편히 대할 수 있더라고요.”
‘천비대도 허점이 있다? 여긴 안전하겠어.’
사내들 쪽에서는 다른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엠병! 올 때부터 혹시나 했는데…… 이놈의 팔자는 어떻게 쥐 굴만 들락거리나.”
“후후! 재미있을 텐데, 왜 그래?”
시마의 말을 마도는 웃음으로 받았다.
“엠병, 재밌기는…….”
시마가 말한 뜻은 금방 알게 되었다.
산등성이를 오르고, 계곡을 건너고, 다시 길도 없는 산길을 더듬어 갔다.
경사가 너무 급해서 산짐승도 돌아다니지 않을 산이다.
그렇게 오르길 얼마간, 산하가 한눈에 조망되어 속이 후련해지는 곳에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동혈이 나타났다.
“제길! 동굴은 싫다니까 뻔질나게 찾아다니네. 뱃속에 검댕이가 들었나, 왜 이렇게 동굴을 좋아해!”
“여기 온 게 두어 번 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수검도 인상을 찡그렸다.
금연화는 피식 웃었다. 초강자 운운하는 사람들이 한낱 동굴을 싫어하다니. 풍잔노숙을 밥 먹듯 하는 무인이라면 동굴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곳도 없는데.
‘설마 전처럼 한기가 극심한 곳은 아니겠지.’
마인들은 동굴 내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동굴에 들어서자 소립파의 말도 듣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쉴 곳을 찾아갔다.
소립파는 네 여인을 이끌고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진 갈림길도 나오고, 십여 명이 쉴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미로야. 길을 알지 못하면 갇히기 십상이야.’
소립파는 어떻게 이런 동굴을 많이 아는 것일까.
전에 거쳤던 동굴도 적선서가 없으면 감히 뒤따라올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복잡했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몸에 천리향(千里香)을 묻혀놓거나 적선서 같은 영물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뒤따라올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기서 쉬지. 오늘은 그냥 푹 쉬어.”
말할 기력도 없다. 무인이 그까짓 산 하나 오른 것 가지고 헐떡이냐고?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주둥이를 찢어놓고 싶다. 하루 밤낮 동안 젖 먹던 힘까지 죄다 쏟아낸 후에 산을 타보라고 해라.
금연화, 절혼마녀, 일령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패그르 쓰러져 잠들었다.
2
동혈 생활은 견딜 만했다.
다행히도 천장에 어린아이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있어서 낮과 밤의 구별은 되었다.
음식도 어렵지 않게 구했다. 편복(박쥐)이 득실거려서 손만 뻗으면 먹을거리다. 편복이 질리면 뱀이나 쥐를 잡아먹을 수도 있고.
남은 시간은 오로지 무공 수련에 매진했다.
절혼마녀는 귀적무를 능숙한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어두컴컴하다는 동굴의 효능을 빌린 탓도 있지만, 그녀가 호흡을 멈추고 숨으면 찾을 길이 없다. 그러다 목 뒤가 서늘해서 돌아보면 어느새 검이 닿아 있다.
귀적무를 능숙하게 펼치게 된 후에는 귀적무와 육경검법의 혼합을 시도했다.
귀적무가 귀루의 정화라면 육경검법은 사루의 정화. 한때는 죽음을 부르는 빛이라고도 불렸던 검법이지 않나. 수련이 미숙해서 그렇지, 결코 귀적무에 못지않은 절기다.
금연화와 일령은 본문의 무공을 심도 깊이 수련했다.
자하부의 무공은 마공에 뒤지지 않는다. 수십, 수백 번에 걸쳐서 검증된 결과다. 자하부 무공을 지니고도 마인에게 뒤진 것은 수련의 깊이가 얕은 탓이다.
동굴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갈 무렵, 혐오스러워 욕지기가 생기던 고기들이 구수하게 느껴질 즈음, 소립파가 네 여인을 불러 앉혔다.
그는 밑도 끝도 없이 마공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공이란 녹혈마공처럼 수련 과정이 패륜적인 것도 있지만 끝이 좋지 않은 무공도 있어. 본성을 바꿔 버리는 무공.”
‘날 말하는 건가?’
절혼마녀는 뜨끔했다.
“힘을 얻은 자가 사람을 치고 싶은 것은 본능. 정도 무공은 강함과 자제심을 함께 양성하는데, 마도 무공은 오로지 강함만 추구해. 한쪽 발을 관에 담그고 사니 당연하다는 거지. 거기에 함정이 있어. 끝없이 강함만 추구하고 본능에 충실하다 보니 사람이 사람 같지 않고 벌레처럼 여겨지는 거야.”
다 알고 있는 말이지만 소립파가 말하니 새삼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 자신의 말을 무조건 믿고 따르게 하는 힘이 존재한다.
“그런 예로 가장 대표적인 게 탈백섭심공이야.”
‘역시 내 이야기였어.’
“사람의 눈은 두 개, 이어지는 신경과 혈(穴)도 두 가닥. 양쪽 눈을 통해 기파(氣波)가 양백혈(陽白穴)을 건드리고 임유혈(臨泣穴), 목창혈(目窓穴), 정영혈(正營穴), 승영혈(承靈穴)을 타고 간 다음 뇌호혈(腦戶穴)에서 모이게 되지. 모이는 게 아냐. 충돌을 일으키는 거야. 극심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일순간 이성이 마비되는데, 이게 탈백섭심공의 요체야.”
“탈백섭심공을 아는군요.”
“이론상으로는 간단하지. 하지만 실전에서 응용하려면 부단한 수련이 필요해. 기파가 조금만 강해도 당하는 사람이 미쳐 버려. 약할 경우에는 혼을 빼앗기도 전에 발각당해. 반격은 당연히 예상해야 되고. 결국 강한 쪽에서 서서히 줄여와야 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정신병자가 돼.”
“맞아요?”
금연화가 깜짝 놀라서 절혼마녀에게 물었다.
“그놈들, 죽일 놈들이었어.”
절혼마녀는 그 말로 시인을 대신했다.
“아무리 그래도!”
절혼마녀가 정상적인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마성이 깊은 무공인지는 몰랐다.
“수련 과정도 문제지만 능숙해지면 더 문제가 커. 재미가 붙게 되거든. 무공이 강하다고 잘난 척하던 놈들도 순식간에 꼭두각시가 되니 재미가 없을 수 없지. 시전하고 또 시전하고.”
“재미로 펼친 적은 없어요.”
정말 그렇다. 하지만 어떤 말로 변명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 탈백섭심공을 수련했으니 마인이다. 이게 세상의 눈이다.
‘나도…… 그랬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내가 시마를 증오했다니. 녹혈마공은 안 되고 탈백섭심공은 된다는 생각이었어. 이런…… 호호!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정당했다고, 죽일 놈들한테만 펼쳤다고……. 호호호! 이렇게 해서 마인이 되는 거구나.’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시마는 물론이고 금연화, 마야의 얼굴까지 볼 낯이 없다.
“그런데 기파란 놈이 아주 공정해. 탈백섭심공이 사용하는 기파는 상단전(上丹田)에서 나오는데, 쌓지 않고 쓰기만 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상단전인 인당혈(印堂穴)은 정신(精神)이 존재하는 곳. 상단전에 이상이 생긴 자를 두고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
“그, 그래서!”
정한문 여인들…… 그녀들은 결국 미친 여자가 되었다.
정한문이 선택한 것은 정신에 이상이 생길 즈음, 깨끗한 죽음으로 마무리 지어준다는 것이었다.
“다담에게서 들었어. 탈백섭심공을 손봐달라고. 방법은 있어. 가르쳐 달라면 주지.”
“아뇨. 됐어요. 탈백섭심공…… 버릴게요.”
“됐어. 그런 생각이면. 이미 수련한 것, 버릴 이유가 없지. 세상에 존재하는 무공은 어떤 무공이든 존재 가치가 있는 거야.”
소립파는 귀적무를 건네줄 때처럼 책자를 주었다.
“인당혈을 손상시키지 않고 기파를 사용하는 방법이야. 자신은 버린다고 했지만, 절박한 상황이 되면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르는 게 인간이야. 꼭 수련해 둬.”
“고마워요.”
소립파는 일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령문의 절기를 제대로 이어받았더군. 단점이라면 자하쌍구검에 대한 비중이 너무 크다는 거야. 염화옥수와 선유비조신법은 정말 뛰어난 절기인데, 자하쌍구검이 더 크게 보였나?”
“자하쌍구검은 자하부의…….”
일령은 대답하려다 말문을 급히 닫았다.
무공을 보는 안목에서 마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람의 용모와 신체가 각기 다르듯 몸에 맞는 무공도 따로 있다. 마야는 그 점을 말하고 있다.
“일령의 몸은 아주 뛰어나. 선유비조신법을 펼치면서 염화옥수를 전개한다면 그야말로 멋있는 그림이 될 거야.”
어떻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말을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
“자하쌍구검을 버려. 공령문주도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거야. 자하쌍구검을 먼저 익히고 있어서 차마 말을 못했을 뿐이지. 한마디 해주면, 공령문 절기를 완벽하게 습득하면 여기 있는 사람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아.”
“그, 그 정도까지!”
“정말이에요?”
일령은 물론 금연화, 절혼마녀까지 깜짝 놀랐다.
공령문주는 일령보다도 금연화와 절혼마녀가 잘 알고 있다. 자하령에게 공령문의 절기를 전수해 준 것도 두 사람과의 인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었던가. 일령을 욕심냈기 때문인가.
“싸움을 할 때는 수십, 수백 가지의 절기를 알고 있다고 해서 이기는 게 아냐. 한 가지 절기라도 딱 부러지게 알고 있으면 돼. 공령문주 그 사람, 술과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약자가 아냐. 북검문주와도 일전을 겨룰 수 있는 사람이지.”